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182
182화. 새로운 방식으로
“여기……. 이상해.”
주변을 둘러본 루나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타이니는 그 뜻을 대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좀 더 밝아지고 넓어진 동굴 안 공간은, 그들이 지하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지상으로 올라간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들 정도였으니까.
다만 마기가 조금 더 짙어지고, 딱 그 비율만큼 마나가 더 적게 함유된 공기는 그들이 대미궁의 최심부에 조금이나마 가까워졌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이제, 조금, 힘드네.”
흡. 하. 흡. 하.
루나는 규칙적으로 숨을, 아니 마나를 호흡하며 컨디션을 회복하기 위해 애썼다.
그에 걱정이 된 타이니가 뭐라 말을 하려던 순간, 루나가 빙긋 웃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아. 이제, 익숙해.”
……5초는 지났나?
루나 역시 엄청난 재능의 소유자라는 걸 새삼 깨달은 타이니가 헛웃음을 흘리는데, 그녀는 오히려 감탄한 얼굴로 그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이 마력 호흡법, 없었으면, 적응하기, 힘들었을 거야.”
“……별말씀을.”
“내려갈수록, 마나 효율, 신경 써야, 하겠네?”
“응, 미리 말했잖아.”
마나 샤워로 청결을 유지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는 만큼 그녀의 가죽 갑옷과 장비, 얼굴에 약간 때가 탄 듯했다.
그 모습을 보자 타이니는 새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려갈수록 마나 샤워도 힘들어질 텐데, 에너지를 아껴야 하니.’
그러나 그 걱정 어린 시선을 받은 루나는 오히려 눈을 빛냈다.
“발전, 되겠어.”
그새 대미궁의 환경에 조금이나마 익숙해지면서, 이곳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투지로 변환시킨 듯했다.
“역시…….”
“뭐?”
“아니, 아니야.”
괜한 걱정을 했었다고 말하는 것도 실례일 것이다.
어쨌거나 루나는 훗날 대륙 10대 기사의 위에 이름을 올릴 사람. 그만한 재능과 의지를 가진 뛰어난 인재임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말을 얼버무린 것인데, 아무래도 그 마음을 들킨 듯했다.
“걱정, 하지 마. 누나야.”
“응? 아, 그래.”
민망한 마음에 건성으로 대답하는데, 루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저으며 그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가족 간에는, 연장자가, 어린 사람, 지키는 거야. 그러니…….”
“뭐?”
처음 들어 보는 엉뚱한 논리에 그가 고개를 갸웃할 때.
“……내가 너를 지키는 게 맞아.”
처음으로 끊기지 않고 온전하게 나온 문장.
거기서 느껴지는 각오에 타이니는 잠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언제부터 가족이었다고.’
루나가 가족에게 가지는 그 애틋함과 강박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이제는 대략 알 것도 같았기에 더 안쓰럽게 느껴졌다.
물론 어떤 이유에서건 그 배려는 고마운 것이지만.
‘내가 보호를 받아선 안 되지.’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그는 언제나 지키는 이였지 그 반대의 경우였던 적은 없었다.
“잊었어? 나 회귀…….”
“어쨌건, 내가, 누나.”
타이니가 입을 열기가 무섭게 예의 그 막무가내가 그의 말문을 막았다.
그에 그녀와 시선을 맞추니, 목소리만큼이나 단호한 표정 위로 전혀 다르게 생긴 누군가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듯했다.
‘……에리나 누나.’
한없이 약하고 어리던 그 시절의 자신을 지켜 준 또 다른 ‘누나’.
그 생각이 비극으로 끝난 과거의 사건으로 이어지면서 애써 묻어 둔 감정이 다시 북받쳐 오르려 했다.
그래서 타이니는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우리가 서로 누구를 지키는 게 문제가 아니야.”
“응?”
“우리가 세상을 지켜야 하는 거지.”
“그런 말을, 잘도, 뻔뻔하게…….”
루나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타이니는 전혀 부끄럽지 않다는 듯 오히려 가슴을 쭉 내밀었다.
억지로 돌린 화제지만, 이 말만큼은 진심이었으니까.
“난 세상을 구하고 내 이름을 역사에, 세상에 새길 거야. 절대 지워지지 않도록, 저기 하늘까지 내 이름이 닿도록 말이야.”
그가 손을 뻗어 위쪽을 가리키며 호기롭게 외쳐 보는데.
“여기, 지하인데…….”
기세 좋게 치켜올린 손가락이 절로 움츠러들게 만드는 그녀의 지적에 타이니의 입가에 순간 경련이 일었다.
크흠.
“……아무튼, 그러니 누나도 나를 지키겠다는 얘기는 하지 마. 기사는 약자를 지키는 거지, 가…… 흠, 가족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니까.”
처음으로 입에 담아 본 가족이라는 말이 어색해 자꾸 헛기침이 나오는데.
“나, 기사, 아닌데.”
루나가 또 태클을 걸어 오는 바람에 울컥할 뻔했다.
하지만 약간 상기된 얼굴로 시선을 돌리며 ‘가족’이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보니, 부끄러워서 괜히 퉁명스럽게 말한 듯했다.
‘저러면서 무슨 어른이라고…….’
쯧, 진짜 어른이 참아 준다.
“……그렇게 불리게 될 거야. 누나는 그렇게 불릴 만한 일을 했었고, 또 하게 될 거니까.”
그 확신 어린 대답에 이번에는 루나의 말문이 막혔다.
“그러니 이참에 제대로 수련 좀 하자.”
“응?”
“사실 나만 해 보려고 했는데, 누나가 생각보다 빨리 호흡법에 익숙해졌으니까 같이 해 보자고.”
“수련? 여기서?”
“실전 수련이라는 거지. 전생에 나도 하지 못했던 것에 도전하기 위해서.”
사실 생각만 해 오다가 지금 막 결심이 들어서 욕먹을 각오를 하고 전한 말인데, 반응이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전생에, 네가, 못 했던 거?”
“응.”
“그럼 좋아.”
이건 또 왜 이렇게 빨리 받아들이실까.
타이니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는데, 루나가 의외의 각오를 전해 왔다.
“너보다 빨리, 오러 깨치고, 초월무구, 얻을 거야.”
……오호라 그런 욕심도 있으시다?
‘과연 이 이야기를 듣고도 그렇게 태연할 수 있을까?’
그리 생각하며 타이니는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화르륵.
지하 1층의 초입에서, 그들은 휴식을 위해 다시 자리를 잡았다.
회색빛 세상의 일부가 따스한 불빛으로 물드는 시간.
“지금은 저녁때니까.”
온통 회색빛인 세상에서 시간을 짐작하는 유일한 근거는 오직 비정상적으로 뛰어난 타이니의 감각뿐.
그 불가사의한 감각을 이해할 수 없는 입장에서는 황당할 뿐이었지만, 루나는 더 이상 따져 묻지 않고 그저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다. 전투를 끝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조금 피곤하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타이니는 다시 소환한 월랑을 불침번으로 세워 둔 채 모닥불 앞에서 얘기를 시작했다.
크흠.
“마기는 마나를, 세상을 오염시키지. 그런데 몬스터를 상대하다 보면, 대다수의 마물이 마나를 불쾌하게 여긴단 말이야. 우리가 마기를 접할 때 그렇게 느끼는 것처럼.”
“응…….”
이야기는 루나도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정론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마수병단을 상대하면서 그 사실을 확실히 체감했지. 특히나 마수병단의 지하군 놈들은 꼭 지상의 땅을 마기로 오염시킨 뒤 그곳에 진지를 짓더라고.”
“마역……화?”
“그래. 그게 마수병단이 먼저 강림한 이유일 것이라고, 현자의 마탑에서 결론을 내렸어. 그들은 테라포밍이라는 단어를 쓰더군.”
“테라포밍?”
“나도 잘 몰라. 뭐 어쨌건, 그렇게 보면 하이넨이 가장 큰 공을 세운 거지. 하지만 말이야. 난 그놈들을 보면서 조금 다른 생각을 했었어.”
그 순간 루나의 뾰족한 귀가 파르르 떨렸다. 다른 생각이라는 말에 왠지 불길한 예감을 느낀 것이다.
그런 그녀를 보며 씩 웃던 타이니가 이내 말을 이었다.
“마기가 마나를 오염시키는 거라면, 마나도 마기를 오염시킬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놈들이, 마족들이 이 세상에서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야.”
“……그럴듯하긴, 해.”
“당시 마도사들도 일리가 있다고 말했어. 뭐, 상황이 상황인 만큼 뭘 실험해 볼 시간은 없었지만 말이야. 그래서 나는 특정 조건을 만족하면 마나도 마기를 오염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
그야말로 발상의 전환.
‘사실 녹턴의 마기를 변환시키면서 알게 된 거지만.’
당시 타이니의 말에 황당함을 금치 못하던 마도사들도 발상 자체는 칭찬했었고, 루나는 그 발상에 대해 파리한 안색으로 입가를 경련시키며 극찬을 표했다.
“서, 설마…….”
“몇 번 대충 실험은 해 봤는데, 당시에는 시간이 없어서 말이야. 대략 이론만 정립해 놨어.”
타이니의 입에서 실험, 이론이라니?
그를 아는 사람들이 들었다면,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실험해 본 게 아니라 몸으로 때운 거 아닐까.’
루나가 그렇게 불안한 상상을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타이니가 기어이 미친 소리를 꺼내 들었다.
“그런데 그러려면 먼저, 마기를 몸에 받아들여야 해.”
“너…… 미친 거, 같아.”
헛소리를 일축하는 듯한 루나의 말을, 타이니는 그저 웃으며 무시했다.
“나는 이 방법이 성공해야지만 이 대미궁의 끝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해. 혹시 여기에 누나가 원하는 다른 초월무구도 있다면, 내가 전생에 갔던 곳보다 더 내려가야 할걸?”
그 말을 듣고서야 황당해하던 루나의 눈에 다시금 약간의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만약, 실패하면?”
“실패하면? 뭐, 죽거나 마인이 되겠지.”
담담하게 최악의 경우를 이야기하는 타이니의 얼굴에는 걱정이라곤 없었다.
”하지만 난 지금의 나라면 무조건 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근데 누나는 모르겠어. 재능을 보면 기대는 되지만…… 그래도 해 볼래?”
그야말로 미친 소리가 줄줄이 이어지자 루나의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그, 초월무구, 몇 층에서?”
혹시나 그때까지 자신이 버틸 수 있을까 해서 물어봤는데.
“그게…… 정확히 인식하고 있지 않아서 좀 헷갈리는데, 아마 50층쯤?”
이어진 대답에 루나는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 * *
꽈아아아아아앙.
우르르르릉.
회색빛 벽의 일각이 무너지고, 그 너머로 다시 새로운 길이 보였다.
이제는 익숙해진 광경이었지만, 이번엔 거기에 이질적인 장면이 덧붙여졌다.
“캬아악!”
통로가 무너지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전면에서 마물이 튀어나온 것이다.
사람보다 두 배는 큰 듯한 뿔 달린 도마뱀.
마치 회색빛 동굴 벽이 그대로 마물로 변한 것 같은 이놈은, 의태 능력까지 있어서 험지의 고대 유적을 탐험하는 모험가들에게 악명 높은 몬스터였다.
‘외뿔 동굴 도마뱀.’
심지어 대미궁에 있는 놈은 외부의 동족에 비해 꽤 튼튼해 보이는 갑각까지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칼날 같은 이빨이 촘촘하게 박혀 있는 입을 거대하게 벌리는 재주도.
물론.
쩌어억!
쾅.
“끄, 끄륵!”
그 이빨은 이제 다시는 쓸 일이 없을 것 같지만.
주먹 한 방으로 놈의 주둥이와 머리를 부수고 몸까지 날려 버린 타이니는, 벽에 부딪혀 이빨을 우수수 토해 내는 도마뱀을 보며 오히려 인상을 찡그렸다.
3단계에 준하는 괴물을 마나도 쓰지 않고 한 방에 빈사 상태로 만들어 버린 이답지 않은 표정.
“역시 난 이 정도로는 자극이 안 오네. 그냥 내 몸이 마기를 상쇄해 버려. 그러니 누나가 해.”
“……괴물.”
“싸우면서 마기를 받아들이는 거 알지? 그게 제일 빨라. 마나는 마기를 물들이는 데 집중하고, 가능한 육체의 힘으로만 싸워 봐.”
“난, 마나 없이는, 힘들 것, 같은데.”
“누나도 할 수 있어.”
자신 없어 하는 루나의 태도에 타이니는 강제로 자신감을 주입했다.
물론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난, 괴물, 아닌데…….”
“마나를 아예 쓰지 말라는 게 아니라 최소한으로만 쓰라고. 몸이 위기감 속에서 자극을 받아 주변의 기운을 더 끌어들이도록.”
마치 자살하라는 소리처럼 들리는 말을 연달아 내뱉는 타이니.
“그리고 남은 마나는 그렇게 끌려 들어온 마기를 물들이는 데 사용해. 누나의 마나 색으로. 그래도 누난 다른 사람보단 훨씬 쉬울걸? 그림자 마나니까.”
“그래도…….”
“혹시나 잘못되더라도 내가 있어. 날 믿어.”
그 마지막 말을 듣고서야 루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움직였다.
“……해 볼게.”
그러면서도 그녀의 얼굴엔 미심쩍은 기색이 남아 있었지만.
이내 순식간에 사라진 루나의 몸은 어느새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도마뱀의 뒤를 잡고 있었다.
“취륵!?”
스각.
“키에엑!”
쾅!
그리고 타이니는 루나의 경지에 어울리지 않는 개싸움을 지켜보며 생각에 잠겼다.
사방에서 벽으로 의태해 있다가 덤벼들려는 다른 외뿔 동굴 도마뱀들을 살기로 위협하는 것은 잊지 않으면서.
‘만약 정말 대미궁이 내가 알던 곳과 다르게 변했다면, 방식도 변해야지. 이번에야말로 대미궁을 정복할 수 있게.’
마기를 마나처럼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그리고 루나까지 그게 된다면 대미궁 정복은 결코 꿈이 아닐 테니까.
야심으로 가득 찬 타이니의 눈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