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183
183화. 마기와 마나, 그리고 육체
“괜찮아?”
“……음.”
그녀의 대답은 조금의 시차를 두고 돌아왔다.
실제로 루나의 안색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파리하게 질린 얼굴 위로는 조금씩 검은 기운이 떠올랐으며, 입을 열어 대답하는 짧은 순간에도 마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 광경을 보면서 타이니는 오히려 눈을 빛냈다.
“생각보다 진행이 훨씬 빨라. 그런데도 통제를 잘해 주고 있고. 마기도 살짝 움직일 수 있지?”
입을 열어 말할 여력도 없는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는 루나.
하지만 그 와중에도 보랏빛 눈동자는 빛을 잃지 않았다.
‘아직은 순조로워.’
여차하면 바로 근방에 존재하는 모든 마나를 끌어들여서 루나를 회복시키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미안해, 누나. 내 이론이니까 내가 먼저 실험해 봐야 했는데.”
“네 몸, 괴물, 이해해.”
……기분은 나빴지만 그 말을 완전히 부인할 수는 없었다.
대미궁에 들어오면서부터 본능적으로 해 오던 마력 호흡법을 관뒀는데도 주변의 마기는 그의 몸을 침범하지 못했으니까.
지금도 그랬다.
우우웅.
그의 몸에서 은은한 노을빛이 아주 살짝 비치는 순간, 체내에 침입하려던 마기가 가볍게 소멸되었다.
공기 중에 극소량만 섞여 있는 마나는 잘도 흡수하면서, 그 마나에 딸려온 대량의 마기는 그대로 소멸시켜 버리는 육체였다.
정확히는 전생과 달리 완성된 마나바디와 육체가 동시에 이뤄 낸 성과.
전생에 대미궁에서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 낸 호흡법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에게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이었다.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지…….’
억지로 마기를 끌어들여 봤자 육체가 소멸시켜 버리는 상황.
절로 헛웃음이 나오는데.
“……나도, 곧, 성장할 거야.”
훅 하고 검은 연기를 뱉어 낸 루나는 창백한 안색과 어울리지 않은 강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실제로 루나는 단 일주일 만에 마나를 쓰지 않고도 2단계급의 괴물들과 어느 정도 접전을 이어 갈 정도로 성장했다.
육체의 힘과 기술만으로도 일반 기사급 전투력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녀가 상대해야 할 몬스터가 조금 강하다 싶으면, 타이니가 일격을 가해 놈을 빈사 상태로 만들어 놓고 시작하는 식으로 밸런스를 유지하기는 했다.
바로 지금처럼.
“흥!”
뻐어억.
쾅!
“……끄륵?”
그들이 이야기하는 틈을 타 회색빛 벽을 타고 몰래 등 뒤를 노리던 랫맨이, 박살 난 턱과 앞니를 붙잡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또 한 놈 간다.”
덩치도, 생김새도 인간과 비슷한 몸뚱이에 거대한 쥐의 머리와 꼬리를 가진 괴물.
“랫맨, 이네?”
“찍? 찌익?”
혐오스러운 모습에 걸맞은 불쾌한 냄새와 기운을 방출하는 랫맨은 몸을 일으키면서 타이니의 눈치를 보았다.
자신의 장기인 은밀함과 속도가 통하지 않는 데다가, 가장 강력한 무기였던 앞니를 단숨에 박살 내 버린 자를 경계하는 것이다.
그것부터 여태 봐 온 몬스터들과는 조금 달랐다.
“……안 덤벼?”
타이니와 루나만 보면 눈이 벌게지면서 달려드는 게 일반적인 괴물들의 모습.
타이니에게 한 방 얻어맞고 중상을 입었더라도, 눈앞에 더 약해 보이는 루나가 있으면 물어뜯으려고 덤비는 것이 이제까지의 몬스터였다.
그런데 이놈은 붉은 눈을 번뜩이면서도 ‘판단’을 하고 ‘경계’를 했다. 마치 광기를 통제하는 방법이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때, 타이니와 루나의 주변으로.
“찌익!?”
“찍?”
온통 회색빛인 공간 속에서 붉은 눈을 빛내는 랫맨의 떼가 등장했다.
그들을 포위한 상태로 움직이지 않는 수십의 랫맨들에게서 불쾌한 냄새가 진동했다.
대미궁답게 등장하는 몬스터의 종이 뒤죽박죽인 것은 더 이상 새삼스럽지도 않았고, 괴물들에게 포위되는 일도 하루 이틀 겪은 게 아니다.
하지만 타이니는 놈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살기를 뿌리기도 전에…….
“……알아서 멈춘다?”
슬쩍 시선을 돌리자, 그의 시선이 닿은 쪽에 있던 랫맨들이 ‘찍’ 소리와 함께 자세를 낮추며 뒷걸음질을 쳤다.
명백하게 그를 경계하는 모습. 붉게 변한 눈으로도 본능에 매몰되지 않는 것이 확실해 보였다.
“어떻게, 된 거야?”
“글쎄, 이놈들도 좀 특이하네. 육체 능력보다는 머리 쪽인가 본데.”
입맛이 썼다.
지하 1층의 끝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래로 내려가는 통로는 이놈들이 장악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전생에 여기 계층주는 변종 트롤 한 놈이었는데 말이야.’
랫맨은 한 마리, 한 마리야 트롤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집단으로 뭉칠 경우 훨씬 위험한 괴물이다. 바깥에서도 산속 동굴이나 대도시의 하수도에 랫맨이 창궐하면 토벌대가 꾸려지곤 한다.
‘더 번식하기 전에 멸절시켜야 하니까 말이지.’
그만큼 수가 많아지면 까다로운 놈인데, 마기가 주는 광기마저 뿌리치며 이성을 유지하고 있다니.
‘뭐, 그래 봤자 랫맨이지만……. 이렇게 점점 난도가 올라간다면 심부에 있는 놈들은 과연 어떻게 변해 있을까.’
무거운 눈으로 놈들을 응시하던 타이니는 이내 루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역시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 쥐 고기는, 안 먹어.”
“……그래.”
도마뱀은 잘 먹더니, 쥐는 왜?
아니 그 전에, 넌 왜 생각이 없…….
‘아니, 아니지.’
타이니는 머리를 가볍게 흔들어 루나 때문에 떠오른 잡념을 털어 냈다.
그녀에겐 전생의 경험이 없으니, 자신의 말을 듣는 것만으로 이 상황을 파악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위기감을 강제로라도 주입해 줘야지.
“이제부터는 이놈들 다수와 싸우는 연습을 하자.”
“왜!?”
루나가 억울한 듯 고함을 질렀지만, 진심을 그대로 전할 수는 없으니.
“익숙해진 거 같으니까, 더 굴려야지.”
타이니는 그리 둘러대면서 자신도 모르게 히죽 웃었다.
그리고 스스로 내뱉은 말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어디선가 들어 본 말인데?’
그러자 이내 떠오르는 금발 머리 중년인의 얼굴.
아, 쓰…….
자연히 타이니의 표정이 썩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일단…… 주변 놈들부터 대충 정리하고.”
워해머를 잡아 끄는 손길에 자연스레 살기가 담기고, 이내 사방에 몬스터의 비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 *
콰아아아앙!
우르르르릉.
벽을 무너트리는 소음 속에서도 몬스터들은 습격해 오지 않았다.
아마 이성이 존재하는 랫맨들에게 위험하다는 정보를 전달받은 게 아닐까 짐작하고 있었지만, 마지막 벽이 무너지고 거대한 광장이 드러나는 순간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 츠르르르르.
광장 멀리 구석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나직한 소음.
그리고 이내, 어둠 속에서 동공이 세로로 갈라져 노랗게 빛나는 거대한 눈 두 쌍이 보였다.
반 박자 늦게 드러난 회색빛 거대하고 긴 몸뚱어리에는 다리 하나 없이 촘촘한 비늘이 박혀 있었다.
– 츠릇.
원근감을 일그러트리는 거대한 뱀 두 마리.
그 앞에 멍한 표정으로 줄지어 선 랫맨 백여 마리가 동굴 같은 뱀의 입 안으로 하나둘씩 뛰어드는 충격적인 장면이 뒤늦게 인식되었을 정도로, 그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자이언트, 보아……!?”
“더럽게 크네.”
일행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순간.
– 츠릇!
거대한 뱀이 혀를 날름거리자, 멍하니 죽을 차례를 기다리는 듯했던 랫맨들의 눈에 붉은빛이 돌아왔다.
그리고.
– 찌익!
– 찍!
날카로운 괴성과 함께 일제히 이쪽으로 달려오는 랫맨들.
망설임이라곤 전혀 없는 그 돌진에는, 얼마 전에 만난 놈들에게서 본 이성의 빛이라는 것이 털끝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뱀이 랫맨을 사육했던 건가? 그럼 그 이성은, 공포가 광기를 막았던 거고?”
타이니가 멍하니 중얼거리는데.
“쥐는, 처리해 줘. 뱀은, 내가.”
……쥐는 싫고, 뱀은 괜찮아?
루나의 독특한 기호에 의문을 표할 시간은 없었다. 그 순간 타이니의 뇌가 오랜만에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으니까.
‘자이언트 데빌 보아. 마기에 오염된 거대 뱀, 그 태생과 크기에 따라 위험도가 다르지만 보통은 4~5단계. 저 정도 크기라면 적어도 5단계일 테고, 그 특징이라면…….’
마기를 활용한 강력한 최면 능력. 그리고 마물이 되면서 더욱 강력해진 육체의 힘.
‘최면이야 우리한테 통할 리 없고.’
놈의 무기가 육체의 힘뿐이라면, 압도적인 크기가 인상적일 뿐 지금 그들에게 위협적인 적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거 어쩌면.’
놈들을 보는 타이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쥐는 내가 전부 처리할게. 뱀은 한 마리는 내버려 둬.”
“……뭐?”
그 말에, 순간 흐릿하게 사라지려던 루나의 몸에 덜컥 제동이 걸렸다.
“저놈들도 테스트하려고 쥐들을 보낸 걸 테니까 안 움직일 거야. 그리고…….”
그르릉.
“저 녀석들 정도면, 나와 꽤 좋은 승부가 되지 않을까? 내 몸을 자극할 정도로 말이야.”
워해머를 바닥에 끌며 전면으로 나선 타이니가 싱긋 웃음을 보이머 말을 이었다.
“누나는 지금 마기 제어하느라 제 실력도 발휘 못 하잖아. 무리하지 마.”
“그래도…….”
“마기를 마나로 활용하는 실험은, 성공이든 실패든 이른 시일 내에 결론을 내는 게 좋아. 누나도, 나도. 대미궁은 점점 더 위험해질 테니까.”
“……납득.”
질린 눈을 하던 루나가 이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가 사라지는 순간에 맞춰 타이니는 살기 띤 미소와 함께 쥐새끼들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고, 백여 마리의 랫맨이 피떡이 되어 광장에 늘어지기까진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 츠르르르.
랫맨이 전멸하자 비로소 두 마리의 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캬아아아아아!”
한 마리의 입에서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사람 몸만 한 놈의 눈동자 앞에 나타난 검은 인영이, 그대로 그 눈을 뚫고 머릿속으로 파고든 것이다.
우르르르릉.
쿵. 쾅.
거대한 뱀 한 마리가 경련을 일으키며 마당을 나뒹굴 때.
배우자의 위기에 어쩔 줄 모르던 거대한 뱀의 머리 앞에, 커다란 늑대를 탄 채 망치를 든 남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꽈아아아아앙!
랫맨들을 상대할 때와는 다르게, 별다른 마나의 힘이 실리지 않은 워해머가 그대로 놈의 머리를 강타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짐작조차 되지 않는 육중한 중량에 가격당한 괴수의 머리가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쿠아아아아앙!
“캬아아아아!”
츠르르르르르.
어느새 다시금 허공으로 솟구친 뱀의 머리.
놈은 그 일격에 분노한 듯 샛노란 눈에 붉은빛을 발하며 눈앞의 작은 적을 현혹하려 했지만.
“어딜!”
월랑과 함께 뛰어오른 타이니의 망치가 이능에 기대려던 뱀의 머리를 다시 한번 힘차게 내리쳤다.
뻐어어어어억!
“키에에엑!”
“꼼수 쓰지 말고 힘으로 붙자, 힘으로! 엉!?”
그 말을 알아들었을까, 덩치답지 않게 민첩하게 움직인 뱀이 거대한 입을 벌리며 그대로 타이니를 삼키려 들었다.
하지만 그 직전.
꽈아아아앙.
“키에에엑!”
아래에서부터 올려 친 해머가 뱀의 턱을 강제로 닫아 버리며, 그 큰 머리를 허공으로 쏘아 올렸다.
“내가 네 몸 안에 들어가면, 너 내장부터 찢어진다. 좋은 몸 뒀다 뭐 해? 몸을 써! 머리 말고!”
얄밉게 이죽거리는 작은 놈의 모습.
뱀은 연달아 이어진 고통 속에서도 본능적으로 긴 몸통을 움직여 그대로 놈을 낚아챈 뒤 조이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부담스러운 기운을 뿌리던 은빛 늑대가 사라졌다.
검은 비늘 안에 꼼짝없이 갇혀 버린 작은 놈을 보며, 뱀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지만.
“좋아! 이 압력!”
그그그극.
엉뚱한 소리와 함께 놈을 힘껏 조이고 있던 몸이 강제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이로 거침없이 빨려 들어가는 마기들.
그 소름 끼치는 기운의 흐름을 본질적으로 느낀 뱀은 적을 감싼 몸뚱이에 전력을 끌어모았다.
“좋아! 좋다!!”
좁은 틈으로 드러난 작은 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순간, 거대 괴수와 한 인간의 힘겨루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는.
쿠웅.
“……변태 같아.”
쓰러진 다른 뱀의 머리에서 피 칠갑을 한 채 빠져나온 루나가 질린 표정으로 그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