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196
196화. 40층의 지배자
똑. 똑.
천장의 종유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적막에 잠긴 회색빛 공간.
하지만 그 적막은 어느 순간 난폭한 파공음에 의해 깨어졌다.
꽈아아아아아앙!
우르르르르릉.
굉음과 함께 회색빛 벽이 터져 나가고, 그 안에서 두 인영이 충격에 튕겨 나가듯 광장 안으로 날아들어 왔다.
“안 통해!”
“봤어!”
다급하게 울려 퍼지는 높고 낮은 목소리들.
목소리의 주인인 두 사람 모두 꽤 충격을 받은 듯했지만, 상태가 안 좋은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무너진 벽 너머에서 전해진 충격이 광장 전체로 퍼졌고, 쩌저적 금이 간 천장에서부터 회색 돌덩이가 떨어져 내리며 드넓은 공간이 통째로 박살이 날 듯 진동하고 있었다.
“내가, 먼저!”
두 사람 중 더 작은 그림자는 튕겨 나가는 와중에도 허공에 비산하는 돌조각을 딛고 내달리는 듯한 놀라운 재주를 부리며 다시금 부서진 벽면을 향해 쇄도해 갔고.
“받칠게!”
좀 더 큰 쪽, 검은 머리 남자는 아예 허공을 밟고 전진하면서 거슬리는 돌조각들을 주먹이나 워해머로 부수고 있었다.
제삼자가 들었다면 이해할 수 없을 짧은 고함만으로도 충분한 소통이 되었는지, 그들의 움직임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다시 돌파하고 있는 벽면의 안쪽.
그 넓은 공간 안에서는 작은 동산만 한 크기의 괴물이 난동을 피우고 있었다.
“캬아아아아아아악!”
우르르르르릉.
쾅.
얼핏 눈에 들어오는 ‘등딱지’의 ‘높이’만 거의 20여 미터에 달하는 데다 그 폭은 몇 배 이상으로 넓은, 거대하다기보단 그야말로 광활하다고 표현해야 할 듯한 거북이 형태의 괴물이 사방으로 새까만 기운을 뿜어내며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있었다.
두 개의 날카로운 검은 뿔이 달려 마치 용처럼 보이는 머리에선 유독 검고 진한 기운이 번지고 있었는데, 괴물이 난동을 부릴 때마다 그 색이 점차 옅어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는, 작은 집채만 한 은빛 늑대가 그 괴물이 돌진하려는 방향을 정면으로 막아서고 있었다.
“컹!”
“캬라라라락!”
쾅.
그그그그극.
사방을 새까맣게 물들이며 쏟아지는 ‘암흑 오러’.
은빛 늑대는 전신에 갑옷처럼 두른 ‘반투명한 검은 기운’으로 그것을 흡수해 가며, 자신보다 열 배는 큰 괴물의 전진을 막고 있었다.
꽈아아앙.
그그그극.
갑자기 튀어나온 용 머리의 공격을 앞발로 후려친 늑대.
발밑의 지면에 쩌저적 금이 가기는 했지만, 그 본체는 단 한 걸음도 밀려나지 않았다. 마치 크기는 십 분의 일에 불과해도 무게는 만만치 않다는 듯이.
파괴의 권능과 또 다른 권능이 충돌하는 순간마다, 거대 괴수와 거대 늑대의 육중한 몸이 충돌하는 순간마다 맹렬한 충격파가 사방의 모든 것을 부수고 있었다.
그때, 둘에 비하면 너무도 작은 그림자 하나가 괴수의 눈앞에 휙 하고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놈이 뿜어내는 것과는 조금 다른, 상서로운 빛을 발하는 검은 기운이 놈의 눈동자에 꽂히려는 찰나.
“꾸에에에에엑!”
다급히 눈을 감은 괴수의 눈꺼풀이 죽음의 오러를 튕겨 냈고, 괴성에 담긴 충격파가 다시금 루나의 몸을 멀리 날려 버렸다.
“칫!”
루나가 자신을 노려보는 괴물을 살짝 찡그린 눈으로 내려다보며 허공에서 균형을 잡았다.
‘분명 7단계 같은데…….’
지금 루나는 반년 전처럼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스스로의 확신까지 더해진 죽음의 오러는 동급 이하에겐 그야말로 재앙과도 같은 권능일진대.
‘……잘 안 통해. 8단계의 벽에 걸친 놈인가?’
지금 저 괴물은 고통스러워하고 있긴 해도 충분히 죽음의 오러를 감당해 내고 있었고, 그마저도 처음 놈이 방심했을 때 만들어 낸 상처에 불과했다.
작은 묘목 크기의 검은 가시가 빼곡하게 박힌 등딱지가 아니더라도, 목과 그 주변을 덮은 비늘에 암흑 오러가 주입되는 순간 그녀의 공격이 더 이상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눈을 노린 것인데, 그조차 쉽지 않았다.
같은 7단계라고는 하지만 마물과 인간은 기본적인 신체 능력과 마력의 양이 현저히 다르다는 것을, 저 이름 모를 괴수가 확실히 보여 주고 있던 것이다.
물론 괴수보다 더 괴수 같은 인간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탁.
간신히 착지하며 호흡을 고르던 루나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입을 벌리는 괴물의 머리를, 정확히는 그 머리를 후려치는 타이니를 향했다.
“아가리 닫아!!”
꽈아아아아아아아앙!
“꾸어어어어!”
괴물의 눈동자 크기나 될 법한 인간이 휘두른 워해머에 집채만 한 머리가 하늘로 솟구쳤다.
동산만 한 괴물에 비하면 그야말로 한 뼘도 되지 않아 보이는 인간이 힘으로 만들어 낸 이적.
동시에, 자신에게 고통을 준 작은 인간에게 쏘아지려던 산성 브레스가 괴물의 입가에서 넘쳐흘러 옆으로 쏟아졌다.
타이니는 또다시 허공을 밟으며, 불쾌한 냄새가 나는 녹색 액체와 암흑 오러가 담긴 위험 물질을 절묘하게 피해 공중으로 솟구쳤다.
얼마 전 정령술의 6단계에 올라 체화한 월랑의 권능, 공간 밟기가 완벽하게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사이, 괴수와 대치하던 월랑이 빈틈이 드러난 녀석의 목을 물어뜯었고, 거의 동시에 타이니의 워해머가 노을빛 마나 대신 새하얀 빛을 뿜어내며 다시 놈의 머리 위를 사정없이 강타했다.
꽈아아아아앙!
쿠우우웅.
우르르르르릉.
목덜미에서 피를 뿜어내며 바닥에 머리가 처박힌 괴물.
그사이, 어느새 다시 놈의 눈앞에 나타난 루나의 단검이 반사적으로 감긴 녀석의 눈꺼풀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치명적이진 않아도 분명히 효과가 있는 공격.
하지만 이내.
“캬아아아아악!”
고통스러운 괴성과 함께 놈의 목이 일순간에 움츠러들더니, 정말 거북이처럼 등딱지 안으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씁!’
놈을 쫓아 그 동굴 같아 보이는 괴수의 껍데기 속으로 달려들려고 했는데, 갑자기 놈의 등딱지가 심상치 않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저건 또 뭐……!?”
타이니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파바바박.
등딱지 위에 빼곡하게 돋아나 있던 묘목 크기의 날카로운 가시들이 사방으로 비산하더니, 일시에 방향을 돌려 그들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새까만 기운을 진득하게 두른 가시들이 시야를 가득 메울 듯이 쏟아져 오는 광경.
작은 나무 크기의 날카로운 가시들은 하나하나가 거대한 투창이나 다름없었고, 심지어 거기에 어린 검은 기운은 전부 암흑 오러였다.
‘오러로 광역 공격도 한다고?’
타이니가 기가 막히다 생각하는 순간 루나가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고, 반년 전에 비해 더욱 거대해진 월랑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동시에 녀석의 피부 위로 다시 투명하게 솟아난 검은 기운이 갑옷과 같은 형태로 덧씌워졌다.
정령술이 6단계에 오른 뒤, 월랑이 타이니의 블랙홀의 힘과 철신갑을 혼합하여 만들어 낸 기술, 흑영갑(黑影鉀, Black Shadow Armor).
– 너도 천재구나?!
– 킁!
타이니를 깜짝 놀라게 했던 그 능력이 괴수의 공격을 막아 냈다.
두두두두두둥.
마치 잔잔한 수면에 떨어진 돌이 파문을 일으키며 가라앉듯, 가시들이 흑영갑의 표면에 충격파를 일으키며 흡수되더니.
콰콰콰콰콰콰쾅!
“컹!”
“수고했다!”
월랑이 고통을 견뎌 낸 끝에 강제로 역소환되는 순간이 되어서야 그에게 쏟아지던 거대 가시의 비가 그쳤다.
그리고.
“쿨럭.”
타이니는 역소환의 충격으로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해 내면서도, 어질어질한 정신을 다잡고 괴수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놈이 가시 공격을 쏟아 내던 틈을 급습한 루나가 등딱지 사이로 드러난 괴수의 몸통을 향해 사정없이 공격을 퍼붓고 있는 것이 보였지만, 놈은 미동도 없었다.
아마도 머리를 숨긴 이후 방어력이 더욱 강해진 듯했다.
‘이럴 것 같더라니.’
괴력과 방어력에 특화된 듯한 초월급 괴수.
첫 기습에 끝내지 못했으니, 루나에게는 상성상 아주 불리했다.
물론 그녀가 도망치기로 작정한다면 놈도 어쩌지 못하겠지만, 지금은 괴수를 공격해야 하는 상황.
그러니.
‘내가 끝낸다.’
타이니는 어질어질한 정신을 수습하며 다시금 바닥까지 마나를 박박 긁어모았다.
우우우웅.
그 의지에 따라 미궁에 가득한 마기를 마나로 치환하기 시작하는 염체.
38층의 계층주를 처리하며 정령술의 6단계에 오른 것도 벌써 한 달 전.
이제 그의 영혼과 육체는 가장 두꺼운 벽을 넘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천재라 불리며 승승장구하던 기사들 대다수가 평생토록 넘지 못하는 절망의 벽.
인간이건 영물이건 마물이건, 종의 한계를 벗어나야 넘을 수 있다는 장벽. 7단계, 오러의 경지.
‘그래 봤자.’
그에게는 이미 한 번 지나온 길일 뿐이었다.
물론 지금 그에게는 자신과 격이 같은 영혼의 동반자가 있었지만, 이미 전생과는 다르게 좀 더 넓고 튼튼한 주춧돌을 쌓기 위한 노력을 착실히 해 왔다.
그리고 이제 그 노력이 결실을 맺을 시간이 왔음을, 그는 예감하고 있었다.
‘전생에는 쓸데없이 키운 덩치를 보완하는 쪽으로 성장했었지.’
물론 그로 인해 그 덩치에 걸맞은 거력과 내구력, 폭발력을 얻긴 했었지만, 현생의 육체는 이미 한참 전에 전생의 수준을 뛰어넘었다.
‘지금은 육체의 보완 따위는 필요 없어.’
격의 상승을 앞두고 한없이 집중된 의식 덕에, 놈을 향해 돌진하는 짧은 시간이 극도로 느리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검제가 가르쳐 준 각성 시 자기 개변을 위한 비전.
– 신념을 양분 삼아 신을 부르니…….
‘그 뒤에는 뭐였더라……? 뭐, 상관없지.’
뒤에 이어지는 주문이 기억나지 않았지만, 원리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런 건 몰라도 상관없다.
‘진정 내게 필요한 게 뭔지는 이미 알아.’
그 순간 그의 의식이 집중하는 대상은 일반적인 오러로도 뚫리지 않는 껍데기와 비늘을 가진 괴수였지만, 그 모습 위로 다른 환영이 겹쳐 보이고 있었다.
전생의 모든 동료를 잃게 한 괴물.
7개의 뿔을 가진 거대한 야수, 아니 마수.
마수왕 글러터니.
얼마나 원통했던가. 얼마나 억울했던가.
– 내가 좀 더 강했더라면…….
저 글러터니를 박살 내고 마왕의 골통까지 부술 수 있었을 텐데.
눈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가슴 저미게 느꼈던 한은 여전히 생생하기만 했다.
전생에 자신이 바라던 것, 그리고 현생의 자신이 바라는 것.
‘그 모두가 하나다.’
빈민가에서 자라나 모두에게 공포와 경외의 대상이 될 때까지, 그가 걸어온 길은 오직 하나였다.
죽은 누나의 뜻을 받들어 세상에 이름을 새기겠다는 일념 하나를 기둥 삼아 달려온 삶.
그리고 그 일념을 받쳐 준 것은, 그 무모한 삶을 지탱해 준 것은 오직 자신이 휘두르는 망치뿐이었다.
‘세상에 잊히지 않을 이름을 새기겠다. 지금도 바라는 일이야. 하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사실 자신의 가슴속 깊은 곳에 있는 욕망의 본질은 입버릇처럼 뱉던 ‘하늘에 닿을 명예’와는 조금 달랐다.
부당하게 억압받던 삶에서 가장 소중한 이를 잃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소중한 사람이 자부심을 느끼도록, 천계에서라도 나를 자랑스러워하도록 살아 보겠다는 의지는 결국 보상 심리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내 삶이 아니야.’
물론 그 방향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동력이 틀렸을 뿐이다.
힘이 없어 억울하게 겪어야만 했던 불행에 대한 분노.
이미 잃은 것을 되찾을 수 없다면,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힘을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자신을 잘 알았다.
– 사회의 불합리를 타파할 지혜는 없다.
– 도리를 벗어난 악인을 감화시킬 덕(德)도 없다.
그가 가진 것은 오직.
‘힘뿐이지.’
그러니, 결국 추구해야 할 방향은 명확했다.
‘이게 맞아. 그렇지, 에리나 누나? 응?’
그렇게 마음속으로 속삭이던 그 순간.
지하 몇 미터까지 뻗어 있는지 짐작도 되지 않는 이 대미궁의 심처에서, 천계에 있을 에리나 누나의 미소가 보이는 것 같았다.
– 맞아, 틴. 너는 그렇게 자유롭게 살아.
이것은 환청일까, 아니면 내 마음의 소리일까.
아니면 정말 에리나 누나의 목소리일까.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찌 되었건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부술 수 있는 힘.
두 번의 삶에 걸쳐 스스로의 인생에 깊게 드리워진 소중한 이의 그림자를 걷어 낸 남자는, 비로소 자신만의 신념을 세상에 바로 세웠다.
그리고.
– 나는 오직 내 힘으로 세상을 이겨 낼 것이니, 그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다.
강력한 영혼의 힘으로 자신의 법칙을 세상에 강요했다.
우우우웅.
그렇게 세상이 그 의지를 받아들이는 순간.
괴수를 향해 내달리던 타이니의 전신에 노을빛 서광이 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