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2
2화. 과거?
친누나는 아니었다.
공통점이라면 그저 이 대륙에서 찾기 힘든 검은 머리와 같은 색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뿐.
오직 그 이유만으로 누나는 자신을 성심성의껏 돌봐 주었다.
잃어버린 자신의 동생이 생각난다면서.
그러나 그 헌신의 결과가 이것이었다.
“누나!! 눈 떠! 일어나라고!”
자신을 감싸다가 두목의 폭력을 대신 감당한 것도 모자라, 의식을 잃은 자신을 밤낮으로 돌보다가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미련한 사람.
그리운 사람.
그리고 너무나도 아픈 기억으로 남은 사람이었다.
이렇게 꿈에 나타나기라도 할 때면, 악몽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처절한 마음으로 소리를 지르게 될 정도로.
“사람 살려!”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역시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짜릿한 통증만이 몸을 지배할 뿐.
……통증?
‘어라, 이건 분명 꿈인데……?’
다시금 묘한 괴리감이 느껴지던 그때.
쾅!
“뭐야!”
“무슨 일이야!”
방문이 거칠게 열리며 험상궂게 생긴 거한 둘이 들이닥쳤다.
생생한 꿈에 대한 의구심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쓰러진 누나를 향한 간절한 마음이 다시 솟아나기 시작했다.
“누나, 누나가……!”
최대한 애타게 소리쳐 보지만, 늘 그랬듯이 그 목소리는 두 덩치의 마음에 조금도 닿지 않은 듯했다.
“뭐야? 얘 왜 이래?”
두 거한 중 대머리 놈이 한 발로 누나의 몸을 툭 건드렸다.
그러자 스르륵 미끄러져 쿵 소리와 함께 침상 아래에 나뒹구는 누나.
그 창백한, 생기 없는 얼굴을 본 붉은 머리 놈이 인상을 구겼다.
“……하, 씨바. X 된 거 같은데, 이거.”
한 사람의 죽음. 그 비극에 대한 두 놈의 감상은 고작 그 정도였다.
하지만 타이니는 이 상황에서 결코 초연하지 못했다.
당시 패닉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못 했던 게 깊은 후회로 남은 만큼, 그는 더욱 크게 소리를 질러 댔다.
“사, 살리라고! 누나를 살려!”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유난히 생생한 현실감 탓에 당시의 처절한 감정에 완전히 빠져든 것이었다.
울음 섞인 간절한 목소리. 그러나 듣는 이들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건 또 뭐…….”
“살릴 수 있어! 사제에게 데려가면 살릴 수……, 읍! 읍!!”
“닥쳐라, 꼬마.”
얼굴이 다 가려질 듯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대머리가 눈을 부라리며 위협적인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때의 자신이라면 모를까,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기사가 이 정도 위협에 굴복할 리 없었다.
다만, 지금의 힘이 없는 어린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놈을 노려보는 것뿐이었다.
“읍! 으읍읍읍!(살리라고! 할 수 있어!)”
“하, 새끼. 눈깔 봐라? 확 뽑아…….”
“게릭, 일 크게 만들지 마. 안 그래도 죽다 살아난 놈이다.”
“……쯧.”
동료를 보며 짧게 혀를 찬 대머리가 다시금 자신을 보며 눈을 부라렸다.
“시끄럽게 굴지 마라. 네 누나 뒤를 따라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하지만 놈이 손을 떼는 순간, 다시금 높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살릴 수 있다고! 사제, 사제한테 데려가라고!”
“하, 이 씨X 새끼가…….”
“게릭!”
“끄응…….”
금방이라도 후려칠 듯 주먹을 치켜들었던 대머리는 붉은 머리의 호통에 인상을 구기며 물러섰다.
“살려야 해. 사제, 사제한테 가야…….”
이 새끼들이 부탁을 들어줄 리 없다. 그것은 자신 역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가슴속 깊이 새겨진, 도저히 떨칠 수 없는 필생의 한(恨)이었으니까.
‘이게 꿈이라면, 적어도 한 번은 바꿔 볼 수 있지 않을까.’
그 부질없는 미련을 놓을 수가 없었다.
“사제, 사제에게 돈을 주면…….”
두 거한은 그런 자신을 내려다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인 붉은 머리가 상체를 숙이더니 자신과 눈을 맞췄다.
“꼬마야.”
“신전에 가면 살릴 수 있…….”
“사제가 창녀 따위를 치료해 줄 것 같으냐?”
그 비수 같은 한마디에 절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래, 그건 내가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사제 놈들은 돈을 밝히니까, 돈을 주면…….
“그리고 네 누나, 이미 죽었다.”
그래, 나도 알고 있…….
‘……아니, 아니야.’
아직 살릴 수 있어. 이건 꿈이니까.
“가, 가서 돈을 주면…….”
“하, 씨……. 꼴통 새끼네, 이거.”
뻐억.
갑자기 명치에 틀어박히는 주먹.
한순간에 숨통이 콱 막히더니, 짜릿한 고통이 전해졌다.
‘고통……?’
혹시, 이게 진짜…….
작은 몸이 살짝 떠오르는 느낌과 함께 의식이 흐릿해지고.
– 야! 나한테는 하지 말라더니…….
– 두목한테는…….
희미하게 들리던 목소리마저 점차 사라지더니, 이내 세상이 깜깜하게 물들었다.
* * *
다시 꿈을 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대륙 10대 기사, 괴력의 기사라 불리던 몸이 가장 비루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꿈을.
‘죽은 자도 꿈을 꾸는 건가.’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이내 온몸에 쩌릿쩌릿한 통증이 번졌다.
‘……통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팔다리의 감각이 살아나는 게 느껴지고.
“으, 으음.”
깜빡이는 눈동자 사이로 흐릿하게 상이 맺혀 갔다.
그리고 이내.
“……깼니?”
붉은 머리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혼란스러웠다.
여전히 고통이 느껴지고, 감각도 살아 있다.
……왜?
“그러게 왜 까불어, 열흘 만에 깨어난 주제에. 왜, 아예 그냥 스스로 무덤을 파고 드러눕지?”
“누구……?”
갈라져 나오는 목소리가 스스로의 귀에도 무척 앳되게 들렸다.
온몸의 감각이 어색하고 혼란스러워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 와중에 상대방은 그런 자신의 반응을 오해하는 것 같았다.
“얘가 지금 모른 척……이 아닌 거 같네? 하…… X발. 그래, 충격이 크겠지. 얼른 이거나 먹고 정신 차려.”
누리끼리한 수프가 작은 스푼에 담겨 입가에 다가왔다.
어린이용 식기 같았는데, 막상 입가에 다가오니 제법 크다.
그러고 보니 눈앞의 여자도 어쩐지 크게 보였다.
아니…….
‘내가 작아진 건가?’
이게 대체……?
껌벅이던 눈을 깔아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묘하게 익숙한 자그마한 몸뚱이가 보였다.
또래에 비해 한참 작았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는…….
순간 밀려드는 기시감에 짧은 팔다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상대방은 기다려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타이니! 얼른 먹어. 그래야 기운을 차리지.”
“여기가, 어디……? 윽.”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려는데 또다시 전신에서 뻐근한 통증이 일었다.
진짜 통증이 느껴진다. 그 사실이 혼란을 더욱 키웠다.
……이게 현실이라고?
“어디긴 어디야, 인베어 뒤쪽 숙소지. 잘못하면 시체 두 구 치울 뻔…… 아차차, 빨리 먹어라. 자, 쭈욱. 옳지, 잘한다.”
꿀꺽.
강제로 입에 들어온 수프.
투박한 감자 맛만이 진하게 날 뿐, 향신료도 뭣도 들어가지 않은 수프가 목으로 넘어갔다.
초라하지만 사무치게 그리운 맛.
그 맛이 옛 기억을 되살렸다.
눈앞에 있는 여자에 대한 기억도.
“엠마……?”
누나의 옛 친구.
이 시기, 필레스 영지의 환락가 인베어에서 누나와 같은 일을 하던 동……료.
당시 자신은 누나 외에 다른 여자들과 길게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없었다. 워낙 낯을 가리기도 했었지만, 누나가 말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 이곳 사람들과 깊게 엮여서 좋을 건 없어.
– 넌 언젠가 이곳을 벗어나서 떳떳하게 살 거니까.
– 하늘 똑바로 보면서, 부끄럼 없이 당당하게. 그렇지, 틴?
그럼에도 유독 친근하게 다가왔던 이.
그리고 누나가 죽은 후에 자칫 따라 죽을 뻔한 자신을 돌봐 주었던 사람.
“누나라고 부르라고 했지? 너는 왜 에리나한테만……. 흠, 흠. 아니, 아니다. 아픈 애한테 지금 무슨……. 자, 입 벌려. 아아…….”
꿀꺽.
너무나도 생생한 맛과 느낌. 그렇기에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이 상황이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꿈이……, 아니……야?”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뱉은 순간, 엠마의 얼굴이 흐려졌다.
“에리나의 일은…… 아니, 아니다. 일단 좀 더 먹어. 얘기는 나중에 하자. 자, 입 벌려.”
“아, 아니. 지금 이게…….”
텁, 하고 입에 들어온 스푼은 더 이상 말을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혀에 느껴지는 스프의 맛이 확실한 현실감을 더할수록 타이니의 눈빛은 혼란스러워졌다.
그대로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갔다.
창가로 비쳐 든 고즈넉한 달빛이 방 안 가득 들어찬 퀘퀘한 냄새를 조금이나마 씻어 내 주는 것 같은 밤이었다.
그 야심한 시간이 되어서야, 흔들리던 타이니의 눈빛이 제자리를 찾았다.
“……현실이다.”
스스로 내뱉은 말.
그 짧은 한마디를 온전히 발음한 순간, 비로소 꿈에서 깨어난 느낌이 들었다.
‘되돌아왔다. 과거로.’
엠마를 비롯한 누나의 동료들이 누워있는 내내 찾아오고 나니,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그중에는 당시의 자신이 이름조차 모르던 사람도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아직도 온몸에 저릿저릿하게 느껴지는 통증은 죽은 사람의 감각이라기에는 너무 생생했다.
이 모든 상황의 시작점으로 예상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하나밖에 없었다.
– 명심하게. 가능한 한 빨리 나를 찾아오게. 자네가 어디 있는지는 몰라도, 아스란 제국의 발렌티아 공작가로…….
최후의 순간, 노망이 났다고 생각하고 흘려들은 검제의 말.
그가 무슨 수를 쓴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유명한 대마법에 관한 전설은 많이 알고 있었고, 그중 몇 개는 직접 겪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황당한 일을 일으키는 마법 따위는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이게 대체…….’
사실 자신은 마법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으니, 혼자 고민해 봐야 헛일이었다.
다만, 어쩐지 괜히 억울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부르르.
“이 빌어먹을 영감탱이가!”
보내려면 며칠 더 전으로 보냈어야지.
“왜 하필……!”
쿨럭!
소리를 지르던 중 사레가 들렸다.
콜록, 콜록.
“……흐, 흐흐. 빌어먹을.”
콜록.
스스로 지르는 소리조차 감당 못 하는, 약한 몸뚱이가 분노조차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쿨럭. 콜록.
한참 동안 더 기침을 토해 내고 몸을 추스른 뒤에야, 다시금 이성이 돌아왔다.
그래, 사실은 알고 있다.
엉뚱한 사람을 원망하고 있음을.
하지만 그만큼 그리웠던 사람을 또다시 눈앞에서 놓쳐 버렸다는 충격은 쉽게 가시질 않았다.
“누나…….”
마왕이건 검제건, 당장은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떠오르는 것은 오직 안타까움뿐.
그리운 이에 대한 그 안타까움은 이내 그 비극의 원흉에 대한 분노로 옮겨 갔다.
“……찢어 죽여 주마.”
부르르.
본명은 아무도 모르는, 그저 늑대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놈.
이 필레스 영지의 환락가 인베어를 주무르는 포주이자 거지 패의 두목으로, 뒷골목의 주인이나 다름없는 놈이었다.
그리고 ‘그녀’.
괜한 금반지를 줘서 재앙을 불러일으킨 사람에 대한 원망도 연이어 떠올랐다.
하지만 후자에 대한 원망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어려진 몸을 따라 생각도 유치해진 건가. 철없는 생각을…….’
사실 전생에는 한동안 그녀를 원망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머리가 굵어진 이후로는 그것이 옳지 않음을 깨닫고 털어 버렸다.
베푼 호의가 재앙으로 돌아왔다고 한들, 순수한 호의를 베푼 이를 원망해서야 쓰겠는가.
그것은 진짜 사내가 할 짓이 아니었다.
– 하늘 똑바로 보면서, 부끄럼 없이 당당하게. 그렇지, 틴?
누나 역시 자신이 그녀를 원망하는 건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번에도 훌훌 털어 낸다.
그러면 이제 남는 것은…….
‘울프.’
분노는 지금쯤 이 근방의 저택에 있을 회색 머리의 늑대 같은 사내에게 온전히 집중되었다.
전생에서 자신이 놈을 잡을 힘을 갖춘 건 무려 3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후였다.
그나마도 악전고투 끝에 간신히 놈을 죽이는 데에 성공했을 뿐, 성에 차지 않는 복수였다.
이번 생에서는 그런 긴 기다림을 감수할 생각이 없었다.
아쉬움을 남길 생각 또한 추호도 없으니.
‘기다려라.’
우우웅.
의지가 일어나는 순간 반응하는 마나(Mana)가 전신을 따스하게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스푼조차 들기 힘들었던 몸의 상태가 조금씩 개선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몰랐던 전생과는 다르다. 이번엔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우고 시작하는 셈이니, 조만간 원하는 수준의 힘은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아직은 작기만 한 이 몸으로도 말이다.
‘복수는 반드시…….’
지극한 분노를 연료 삼아 마나의 불꽃을 피우려던 찰나.
“아!”
그 끓어오르는 분노 속에서 잊고 있던 중요한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전생에서 자신은, 유일한 버팀목이던 누나가 죽었다는 충격에 미친 듯이 날뛰다 의식을 잃고 쓰러졌었다.
쓰러져 있던 건 고작 며칠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 짧은 시간이 또 하나의 깊은 한을 만들고 말았다.
그러니 지금 움직여야 했다. 자칫하다간 이번에도 늦을 수 있었다.
‘아니, 아직은 늦지 않았을 거야…….’
우우웅.
“끄으으응.”
끌어들인 소량의 마나로 간신히 몸을 움직이자, 조금씩 회복되고 있던 몸이 다시금 비명을 질렀다.
전신을 자극하는 고통.
하지만 이글거리는 검은 눈동자는 점차 그 빛을 더해 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