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20
20화. 클로이 (1)
클로이 폰 발렌티아.
이 시점에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는 타이니도 몰랐다.
16세의 성년식을 치르기 전 공작령에 속하는 영지들을 둘러보며 신전에 봉화하는 행렬 중이라는 것, 필레스에 다녀간 그녀의 다음 행선지가 다이엔이라는 것만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을 뿐.
그러니 그녀에게서 금반지를 받은 뒤로 한 달도 더 지나 버린 지금은, 그 위치를 특정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그녀가 이곳에 있다니?
뜻밖의 행운에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우선 확인부터 해 봐야 했다.
“말씀 좀 물읍시다. 발렌티아 공녀님이 지금 이곳에 계신다던데, 사실이오?”
“맞긴 맞는데…….”
꼬마가 지극히 어른스러운 말투로 묻는 것이 이상할 법도 했지만, 어제 타이니가 벌인 소동을 목격한 사내는 조심스레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습니까?”
“……내가 알기로는 한 3일 정도 됐지, 아마? 공작가로 돌아가는 길에 들렀다던데?”
돌아가는 길?
놀란 타이니의 눈이 조금 커지는데, 곁에 있던 다른 일행이 바로 말을 보탰다.
“귀족들이 파티든 뭐든 즐기다가 이제야 밖으로 나오는 거겠지. 뭐, 그 공녀도 일정이 있을 테니 그나마도 오래 있진 않겠지만…….”
“그렇군요, 말씀 감사합니다.”
타이니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서자, 질문에 답해 주던 사내들이 일제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이미 그들은 안중에도 없는 타이니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녀가…… 여기에 있다.’
클로이 폰 발렌티아.
검제가 그렇게나 아낀다는 고명딸.
그리고 자신에게 금반지를 준 사람이자 그의 인생에 가장 큰 전환점을 만들어 준 당사자.
‘그 반지 때문에 슬픈 일도 있었지만…….’
잠시 누나의 얼굴을 떠올린 타이니는 이내 고개를 저어 잡념을 털어 버렸다.
‘그에 관한 원한은 이미 충분히 갚았다.’
그러니 남은 것은.
‘호의에는 호의로.’
전생에는 반지를 잃어버렸었지만, 지금은 당사자에게 돌려줄 수 있다.
그리고 그녀를 만나 반지를 돌려주게 된다면 공작을 만날 구실도 보다 쉽게 만들 수 있다. 혹시나 계획 초장부터 틀어질 염려가 사라지는 것이다.
– 타이니……요? 아하하. 아……! 죄송해요, 이름에 비해 경의 덩치가……. 음, 음. 아니, 정말 죄송합니다.
전생처럼 알아보지 못할까?
‘그 정도는 아니겠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그때.
“근데 그래 봤자, 우리가 공녀 가까이 가지는 못하잖아.”
“멀리서 보기만 하면 되지. 그렇게 예쁘다는데!”
“얼굴이 보이는 거리까지 다가가기도 힘들걸?”
“에이, 그래도 일단 가 보기라도 하자고.”
옆에서 들려온 대화가 현실적인 문제를 일깨워 주었다.
지금 상황에서 그녀에게 다가갈 수나 있을까?
이곳 루센트 백작령의 정예들과 공작가의 정예들이 공녀를 둘러싸고 있을 게 뻔했다.
‘단순히 반지를 보여 준다고 동행을 허락할까?’
혹시나 일이 잘못된다면, 공작가의 정문에서 대뜸 반지를 내미는 것만도 못한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지름길로 가려다가 괜히 더 돌아가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미처 생각지 못한 난관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찌푸려지는데, 문득 누나의 말이 생각났다.
– 하늘을 똑바로 보면서,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게. 할 수 있지. 틴?
그리운 목소리를 떠올리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내가 언제부터 하나하나 계획을 세워 가며 살았다고.”
해코지하려는 것도 아닌데, 뭐.
품속의 반지를 만지작거리던 타이니는 무언가 결심한 듯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간단한 일이었다.
그냥 그녀에게 다가가, 금반지를 보여 주며 공작과의 접견을 요청하면 그만이다.
만약 거부당한다면 어차피 공작가에 찾아간다 해도 거부당할 테니, 다른 방법을 찾아보면 된다.
‘그래, 그러면 된다.’
괜히 복잡하게 생각했다.
다만, 그럴 만도 했다. 그녀는 타이니에게 특별한 의미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하늘에 있을 누나가 자신의 이름을 들었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으니, 현생에서 그 삶의 업적을 확인받고 싶었던 존재.
그에게 있어 클로이 폰 발렌티아의 존재는 삶의 이정표나 다름없었다.
삶을 바꿔 준 금반지의 주인이자 검제의 딸.
그녀가 자신의 삶을 인정해 준다면, 누나가 바라던 대로 똑바로 살아왔음을 인정받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전생에서 그녀가 반지의 인연을 기억하지 못한 것은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아 있었다.
아니, 그땐 애초에 반지가 없었으니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겠지.’
이번엔 그녀와 인연이 닿을지도 모른다는 묘한 기대감이 생겼다.
끼이익.
그렇게 타이니가 옅은 긴장을 품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멀리서 사람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 공녀님이다!
– 발렌티아의 천사!
그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한참 멀리서도 눈에 확 들어오는 거대하고 화려한 행렬이 보였다.
* * *
“저희 루센티아는 보시다시피 중부 지방에서도 손에 꼽히는 대도시지요. 내성에 비해 조금 냄새는 납니다만…….”
“아, 그렇군요.”
“예, 공녀님. 그리고 루센티아의 특산물은…….”
클로이는 옆에서 끝없이 조잘거리는 에드몬 폰 루센트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질린 표정을 지었다.
적당히 하라고 말을 끊었는데도, 그는 어떻게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이어 가고야 말았다.
‘대화를 할 때도 배려라는 게 필요한 것인데.’
자신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이 금발 머리 도련님은 그런 예법에 관해서는 전혀 배우지 못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결국 직접 말을 해야지.
“……상업에 관해서는 제가 별 관심이 없어서요. 공자, 그냥 빈민가에나 들를 수 있을까요?”
“예? 공녀님, 지금 뭐라고……?”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생각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에드몬의 멀끔한 얼굴을 보며, 클로이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감정이 티가 나지 않게 다시금 또박또박 의견을 말했다.
“빈민가의 사람들을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들도 전부 우리가 다스려야 할 백성들이니까요.”
“아, 하하. 예, 백성. 그렇죠. 백성들이죠, 흠.”
“……무언가 걸리시는 거라도 있으신가요?”
대놓고 싫은 표정을 짓는 에드몬이었지만, 클로이는 모른 척 되물었다.
“아, 아닙니다. 가시지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애써 호기롭게 말해 보지만, 아마도 그는 루센티아의 빈민가에 한 번도 가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여태껏 만났던 귀족의 후계자들 대다수가 이런 반응이었으니까.
‘보나 마나 빈민가에 들어서는 즉시 코를 틀어막겠지.’
후계 교육을 받는다면 이들도 분명 제왕학을 배웠을 텐데, 대체 왜 그런 반응인 걸까.
아니면.
– 가장 아래에 있는 이들을 살펴라. 그들의 삶이 나아져야 영지가, 나라가 나아지는 것이다.
배움을 그대로 실천하는 자신의 아버지가 귀족 중에서도 유별난 것일까?
‘인식을 바꿔야 해. 적어도 우리 영지 귀족들이라도.’
그 결심과 함께 불끈 쥔 주먹에 힘을 싣는데, 그 힘은 이내 허망하게 풀리고 말았다.
‘내가 지금 뭘 어떻게…….’
여성도 실력만 있으면 중용하는 아스란 제국이라지만, 그것도 그녀의 신분쯤 되면 얘기가 달라졌다.
그녀에게는 이미 장성한 오라버니들이 있으니,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 해도 그녀가 가문을 이어받을 리는 없다. 아마 이 도시에서의 봉헌 의식이 끝나면 관례에 따라 가문으로 돌아가 성년식을 치르고, 그 즉시 약혼자가 정해질 것이다.
그러면 그녀의 남은 인생은 그 남자가 어떤 사람이냐, 어떤 가문이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삶조차 주도적으로 개척할 수 없는 공작가의 공녀라는 것이, 정말이지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정말 신전에 귀의해 버릴까?’
신전의 러브콜이야 ‘그날’ 이후부터 쭉 있어 왔으니, 그곳에선 충분히 대우를 받으며 삶을 개척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로만 살다가 삶을 마치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 또한 걸리는 게 있었다.
‘……그럼 아버지께서 슬퍼하시겠지.’
그녀를 끔찍이 사랑하는 아버지는 하나밖에 없는 딸이 평생 외롭게 사는 것은 절대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 삶을 그녀가 원하건 원치 않건 간에 말이다.
“하아…….”
성년식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깊어져만 가는 고민에 자연히 한숨도 늘어만 갔다.
그 한숨 소리를 들었는지, 전속 호위 기사 비비안이 말을 몰아 가까이 다가왔다.
“공녀님, 뭔가 불편하신 점이라도……?”
또 혼자 뭔가를 떠들어 대던 에드몬도 그 모습을 보고서야 이상한 점을 깨달았는지, 그제야 아차 싶은 표정으로 황급히 손을 내밀었다.
“공녀님, 괜찮으십니까?”
“아니, 괜찮아요. 공자. 괜찮아, 비비안.”
손을 내저어 보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믿음이 가지 않을 듯한 목소리.
“선두 정지! 공녀님께서 불편해하신다!”
결국 에드몬이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리는 것도 제지하지 못했다.
‘이런 민폐를…….’
뒤늦게나마 다급히 만류해 보려고 하는데.
“워!”
“누구냐!?”
“웬 꼬마!?”
기사들이 지키는 선두 쪽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타이니는 행렬이 잠시 멈춘 순간, 이때다 싶어 앞으로 나섰다.
“누구냐!?”
“웬 꼬마!?”
기사들의 창날이 눈앞까지 다가왔지만, 어차피 내밀 구실은 있었으니.
“공녀님께서 직접 주신 반지입니다. 찾아오라고 말씀해 주신바, 늦게나마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타이니는 대뜸 금반지를 내밀었다.
“이 꼬마가 무슨 헛소리를…….”
다각다각.
인상을 찡그린 채 다가온 기사가 거칠게 반지를 거둬 갔다.
하지만 반지에 새겨진 독수리 문양을 확인하고서는 안색이 확 변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라고?”
선두의 기사들이 일제히 반지를 돌려 보길 잠시, 이내 처음 다가왔던 기사가 경고하듯 손가락질을 하며 급히 행렬의 뒤쪽으로 향했다.
“꼬마 너……. 그 자리에서 얌전히 기다리거라.”
자, 이제 어떻게 나오려나.
타이니가 담담한 기색으로 지켜보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온 기사가 똥 씹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가씨께서…… 본인의 반지가 맞다고 확인해 주셨다. 따라와라.”
“감사합니다.”
다각다각.
말을 타고 빠르게 돌아서는 기사의 태도가 어쩐지 못마땅해, 타이니는 보란 듯이 월랑을 소환했다.
“컹!”
히이이이잉!
“뭐, 뭐야!”
“갑자기 늑대가……!”
주변의 놀란 시선을 즐기듯 감상하며 월랑의 등에 올라타자, 앞서 그를 안내하던 기사가 무거운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정령술사?”
“맞습니다. 너무 빠르게 말을 몰고 가시길래……. 혹시 정령을 타면 안 되는 겁니까?”
“……상관없겠지. 하지만 아가씨 앞에서는 역소환하도록. 개수작을 부리는 순간 목이 떨어질 테니 몸가짐도 똑바로 하고.”
“물론입니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순순히 대답해 줬건만, 기사는 그것으로는 안심이 안 되는 듯 기사 두 명을 손짓으로 불러들여 타이니의 좌우로 붙였다.
‘이거 원.’
가볍게 오기를 부린 결과가 이런 감시라니.
타이니는 혀를 차며 조용히 기사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내 그녀가 보였다.
‘클로이…….’
새하얗게 반짝이는 백금발에 푸른 바다만큼 짙은 빛을 발하는 눈. 곧게 뻗은 콧날과 여름날에 피어난 장미처럼 붉은 입술.
만지면 깨끗한 물이 묻어날 것만 같은 투명한 피부는 별다른 장식도 없는 나들이 드레스를 그 무엇보다 화려한 파티 드레스처럼 보이게 했다.
발렌티아의 천사라는 별명은, 어쩌면 그녀의 선행이 아니라 외모 때문에 붙여진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
‘전생보다…… 더 예쁘군.’
아까 전부터 길거리에서 환호성을 지르던 군중의 심리가 대번에 이해가 될 정도로 빼어난 미모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는.
“……이 반지는 내가 빈민가의 아이에게 준 것입니다. 대체 어떻게 손에 넣은 거죠, 공자?”
전생과는 전혀 다르게, 아주 살벌한 말투로 타이니를 맞이했다.
동시에.
챙!
양옆에 선 기사들의 창과 검이 일제히 그의 목에 겨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