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209
209화. 녹턴
전생에 자신이 산양 머리 놈을 처리하며 치명상을 입었던 것은 방심한 탓도 컸다. 영파로 전달하는 의지가 때로는 어리숙하고 바보같이 보여서, 놈이 전술을 쓰거나 함정을 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건 마물이건, 소통의 어리숙함이 꼭 지능 때문은 아니라는 것을 그때 배웠다.
그런데 대놓고 뻔히 보이게 혼자 돌진하겠는가. 그것도 전력상 역부족인 상황에서.
‘나도 그렇게 바보는 아니라고.’
타이니에게는 48층의 계층주를 혼자 처리하겠다는 생각이 아예 없었다.
그저 도망치고 숨는 일에 경지를 초월한 특기가 있는 동료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시선을 끄는 역할을 자처했을 뿐.
그리고 그 계획은 기가 막히게 들어맞았다.
그의 시선에는 명확하게 보였다.
“키에에에엑!”
웅크리고 있는 거대 벌레의 보호막을 뚫고 그 갑각에 깊숙하게 꽂히는 한 줄기 검은 선.
그리고 그 선이 꽂힌 곳에서부터 퍼지기 시작하는 검은 균열 혹은 문신 같은 흔적이 거대 벌레의 비명을 자아내는 모습이.
‘나이스, 루나.’
타이니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맺혔다.
사신의 낙인.
정확한 기술명은 모르겠지만, 전생에는 그렇게 불렸었다. 너무나 은밀하면서도 강력하게 집중된 오러가 급소를 꿰뚫고, 거기서부터 퍼져 나간 독이 희생자들의 전신을 기괴한 문양으로 물들이는 것이 꼭 낙인처럼 보였으니까.
검은 안개 형태의 퓨마. 그 강적에게 쫓기면서도 루나는 기어코 벌레 괴수에게 한칼 먹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림자 독도 아닌 죽음의 오러라면, 저 일격은 확실한 죽음의 선고나 다름없었다.
– 아니!?
벌레 괴수의 비명 소리에 산양 머리가 눈을 돌리는 순간, 타이니가 놈의 전면으로 뛰어들었다. 그것도 쩌렁쩌렁한 고함을 지르면서.
“날 봐라!!”
바보라서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니다.
가장 먼저 이목을 끌고 적들에게 쫓기던 루나가, 벌레 괴수에게 필살기라고 할 수 있는 기술까지 적중시키는 것은 애초에 너무나도 위험하고 무리인 일이었다.
8단계급 악마급 몬스터들이 경계하거나 방심하여 움직이지 않을 전투의 초기에 승부를 보자던 계획.
– 나, 방법 있어. 맡겨 둬.
– 안 돼. 너무 위험해!!!
– 나밖에, 없잖아. 누나를, 믿어.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과정에서 루나가 어떤 모험을 했을지 쉬이 짐작 가지도 않았다.
반드시 무리를 했을 터.
‘월랑, 루나를 도와! 피신시켜!’
– 컹!
이제는 자신이 놈들의 이목을 끌어야 할 때였다.
그러니.
‘시작부터, 크게.’
소울웨폰 블랙홀이 새하얀 빛으로 바뀌며, 빨아들였던 에너지를 급격히 토해 냈다.
동시에 폭발의 속성이 더해지며 노을빛으로 물들어 가는 워해머.
몸을 내던지듯 돌진한 타이니가 그대로 온몸의 마나, 육체의 힘, 영혼의 힘까지 전부 끌어모아 망치를 휘둘렀다.
타이니식 전투 살법 3식, 유성 떨구기.
타이니의 몸이 워해머와 함께 짧은 순간 가속하더니, 이내 한 줄기 노을빛 유성이 되어 산양 머리의 전면을 강타했다.
아니, 그런 것으로 보였다.
– 이런……!
반사적으로 녹턴을 들어 전면을 막아 낸 산양 머리.
파동과 함께 자욱하게 퍼져 나간 마기가 순식간에 몇 겹의 보호막을 형성했고, 그 와중에 집중된 정신파가 노을빛 유성의 방향을 ‘아주 약간’ 틀었다.
그 결과.
쩌어어어엉—–!!!!
공간이 찢어지는 듯한 이질적인 감각과 함께 둘의 몸이 동시에 튕겨 나가고, 그 충돌의 중심에서부터 강렬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꽈아아아아아아앙!
일순간의 전장의 모든 소음을 압도하는 굉음이 울려 퍼지고, 반 박자 늦게 그 충격파가 사방을 휩쓸며 잠시간 전투를 마비시켰다.
쩌저저저저적.
우르르르르릉.
갈라지는 바닥, 비상하는 돌덩어리들과 자욱하게 피어나는 먼지.
그리고 그 와중에 타이니는, 다시금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는 산양 머리의 붉은 눈을 볼 수 있었다.
“꾸에에에!!”
– 감히!!!
섬뜩하기 그지없는 기세를 받아 내면서 가까스로 자세를 다잡아 보지만.
‘젠장, 사전에 힘을 너무 썼어.’
월랑의 동족 강화를 2,000마리 가까운 돌 늑대들에게 쓴 뒤로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마나가 유성 떨구기의 힘을 반감시켰다.
그리고 그 남은 힘을 퍼부은 일격마저도 놈의 무식한 마력과 녹턴의 힘이 상쇄시켜 버린 것이다.
초월무구 녹턴이 가진 특출난 능력 중 하나. 영원성(Eternity).
즉,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다(不壞).
그 기괴한 초월 특성에 공격을 비껴 낼 수준의 힘이 더해진다면, 녹턴은 단발의 파괴 공격이나 마법에 대한 가장 효율적인 방패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도 몸이 받쳐 준다는 전제하의 얘기지만, 전생의 괴력의 기사나 저 마물은 그 조건을 충족하고도 남았다.
– 굴복하라!!!!!!
찌이이이잉!
놈의 분노를 반영하듯 더욱 거세게 엄습해 오는 영파.
하지만 권능이자 마법과 같은 세뇌 능력은 전생에도 통하지 않았었던 것.
‘아무리 X랄을 해 봐라. 내가 꿈쩍이나 하나.’
하물며 그때보다 영혼의 질이 더욱 높아진 지금의 타이니에게는 당연히 통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랬기에, 자신이 이놈을 상대해야만 했다.
놈이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급격하게 줄어드는 마기 장악력.
‘영역.’
그것을 뚫고 원활하게 마나를 움직이는 것도 지금은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고.
– 으깨서, 씹어 먹어 주마!!!
더 이상 세뇌는 포기한 것인지 무섭게 휘둘러지는 워해머, 녹턴의 능력을 잘 아는 것도 그뿐이었으니까.
‘오랜만이야, 녹턴.’
우우웅.
극한의 위기감 속에서 느껴지는 아련한 그리움.
그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이율배반적인 감정 속에서, 타이니의 의식이 급속도로 고양되기 시작했다.
이내 천천히 흘러가는 주변의 시간을 체감하며, 타이니는 다가오는 적의 무기이자 전생의 애병을 바라보았다.
‘넌 여전하구나.’
망치 머리 위에 툭 튀어나온 뿔과 톱니처럼 조각된 측면에서 일렁이는 붉은빛은 녹턴의 두 번째 능력이 발휘되는 중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충격량 증폭.’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아주 단순한 능력이지만, 그것이 8단계급 강자의 전력을 다한 공격도 5배 가까이 증폭시켜 준다는 것을 생각하면 사기나 다름없는 특성이었다.
그야말로 경지를 뛰어넘는 공격력을 선사하는 특성, 아니 권능.
이터너티와 더불어 불가사의한 그 증폭 능력 덕에 녹턴이 초월무구 중의 초월무구라 불리는 것이었다.
심지어 저 망치 머리에 직접 타격을 당한다면, 그 어떤 신성력이나 마법으로도 치료가 되지 않는다.
그것이 녹턴의 마지막 세 번째 능력.
– 스치기만 해도 죽을 것 같은 흉기에 멸절의 권능까지 붙여 놨어. 누가 만들었는지 진짜 지독하구먼.
현자의 탑의 노인네도 그리 극찬을 했었다.
– 이걸 누가 만들었는지, 대체 어떻게 만들었는지 짐작도 되지 않아.
– 그래도 하나는 확실히 알겠어. 이것은……!
‘신화 속 괴물을 때려잡기 위한 무구, 혹은…….’
– ……신이나 마왕을 때려잡기 위해 만든 무구야. 신, 아니, 설마, 마왕이겠지.
– 구체적으로는, 자신이 어쩌지 못하는 상위의 존재를 도구의 힘을 빌려서라도 패 죽이고 말겠다는 들끓는 악의가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이 무기, 어쩌면 자네가 오러마스터가 되어도 자네의 힘을 그 비율 그대로 증폭시켜 줄지도 몰라.
– 초월무구 그 이상의 초월무구야. 대단하이.
불확실한 제작 의도는 차치하더라도, 그 권능만큼은 확실했다.
한 방의 파괴력을 추구하는 타이니의 전투 미학에 더없이 어울렸던 애병.
단점이라면 그 크기로도 짐작이 되지 않는 막대한 무게였지만.
‘그마저도 지금 내가 쓰면 이점이 된다.’
그랬기에 이미 박살이 난 현생의 애병, 스탬프도 마음에 쏙 들었던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할 정도로 비슷하단 말이지.’
물론 그 격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났지만, 두 무기는 확실히 닮아 있었다.
어쩌면 그란돌이 어떤 자료를 보고 스탬프를 만든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물어볼 걸 그랬나.’
거기까지 생각이 닿고 나서야, 타이니는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상황을 너무 여유롭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의식이 가속된 상태라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딴생각을 하다니.
아니, 애초에 전투 중 극한의 집중 상태에서 잡념을 떠올린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그 순간 집중이 깨어지고 그 대가로 큰 낭패를 봐야 정상일 텐데.
분명 이상한 현상이지만, 타이니는 왜인지 그 이유를 대번에 알 것 같았다.
‘내가 아니야.’
이 가속된 시간을 만들어 낸 건 자신의 집중력이 아니었다.
– 우우우웅.
‘……너냐?’
근거는 없다.
하지만 눈앞까지 다가온 거대한 워해머, 전생의 애병이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현생에선 처음 보는 것임에도 마치 자신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어째서?’
주인을 스스로 선택하는 초월무구 중에서도 녹턴은 특별히 까다로웠다.
거의 10t에 육박하는 말도 안 되는 중량을 들어 올리고 휘두를 수 있는 힘은 너무나도 당연한 조건.
거기다 녹턴의 영원성을 뚫고 그 안에 자신의 마나를 기록하고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이능 감응력과 의지력이 두 번째.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의지력이 아니라 영혼력이겠지만.’
거기까지만 해도 까다롭지만, 그것들은 그저 녹턴이라는 강력한 무구를 사용하기 위한 간단한(?) 기본 조건에 불과했다. 사실 영원성을 뚫는다는 것도 말이 그렇단 거지, 녹턴이 사용자의 재능과 노력이 가상해서 마나를 받아들여 주는 느낌이었으니까.
하지만 세 번째 조건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바로.
– 전 주인보다 강할 것.
녹턴에 기록된 전 주인보다 다음 주인의 의지와 힘이 더 강해야 하는 것이다.
녹턴이 얼마나 오랜 세월을 존재해 왔는지 모르지만, 일단 저 산양 머리보다 더 강해야 한다는 조건이라면 이미 최소 8단계 중에서도 동급의 괴물을 뛰어넘는 힘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 악의가 느껴져, 악의가. 흘흘. 시대를 뛰어넘어 주인을 점차 강한 자로 바꾸면서, 언젠가 드높은 곳에 있는 강대한 존재를 쳐 죽이고 말겠다는 악의가…….
그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녹턴은 권능을 빌려주지 않는다. 그저 엄청나게 무겁고 단단한 망치가 될 뿐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타이니가 주인 각인 과정을 시도한 것도 아니며, 애초에 전 주인인 산양 머리가 건재한 상황.
‘그런데 어째서……?’
우우웅.
다가오는 녹턴의 울림이 그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정확히는 이 시간대에 절대 있을 수 없는, 그가 전생에 녹턴 안에 남겨 놓았던 마나의 흔적이.
‘이게 무슨……!?’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순간,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녹턴의 특성 중 하나인 영원성.
어떤 마법사도 이해하지 못한, 심지어 불가능한 것이라 명명하기도 한 불멸 불괴의 초월 특성.
그것이 시간을 거슬러 와서도 자신의 흔적을 간직하게 만든 게 아닐까?
그저 한순간 떠오른 추측인 데다 구체적인 원리도 모르겠지만, 왜인지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우우우웅.
현 주인과 미래의 주인이 한곳에서 서로 충돌하자 녹턴이 이상 반응을 일으킨 것이 바로 이 상황이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 이게, 무슨……!?
산양 머리의 붉은 눈이 당혹스러운 감정을 담은 정신파와 함께 흔들린다 싶을 때.
‘꺾여라!!’
타이니는 자신의 의지로 녹턴 안에 남아 있는 ‘전생의 흔적’을 움직였다.
우우우웅.
그러자 그의 머리를 으깰 듯 위협적으로 다가오던 녹턴이 아주 약간, 비스듬히 그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그리고 타이니는 다시금 바닥난 마나와 힘을 억지로 끌어모아 자신의 워해머를 휘둘렀다.
한없이 가속된 시간 속에서 교차하는 공격.
동시에 산양 머리의 눈동자가 일그러지는 것이 보인 순간.
——-꽝!
“꾸에에……!”
굉음과 함께 산양 머리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토해지며 놈의 몸이 형편없이 튕겨 나갔다.
그리고.
콰콰콰콰콰콰콰콰.
‘젠장, 얕았어!’
타이니 역시 뒤늦게 터져 나온 충격파 속에서 이를 악물고 비틀거리는데.
“컹!”
월랑이 축 늘어진 루나를 등 뒤에 태운 채 빠르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쿨럭.
– 잡……아…….
핏물을 연신 토해 내면서도 월랑의 털을 꽉 움켜쥔 루나가 다른 손을 자신에게 내미는 것 또한.
도대체 얼마나 자신을 쥐어짠 걸까.
미안함과 안타까움에 입술을 질끈 깨문 타이니가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하며 그 손을 잡는 즉시.
“아우우우!”
월랑이 하울링과 함께 한 번 더 가속하며 빠르게 전장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타이니는 극심한 탈력감 속에서도 월랑의 현신을 유지하는 데 집중하며 다시 마나를 끌어모았다.
쫓아오는 놈들을 모조리 박살 내야 한다.
그 생각에 눈을 부릅뜨며 경계하는데.
“어……?”
이상하게도, 그 어떤 괴물도 그들을 쫓지 않았다.
정말 단 하나도.
심지어 자신에게 한 방 얻어맞고 피를 토하는 산양 머리조차도,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아니, 부들부들 떠는 것으로 보였다.
‘땅을…… 보는 건가?’
그 어리둥절한 상황에 타이니는 멍하니 후방을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전장에 그저 존재할 뿐 단 한 번도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던 눈깔 괴물은 그렇다 쳐도, 루나를 처음 막아섰던 안개 퓨마나 자신과 월랑을 공격하던 외팔 거인 역시 좀 전부터는 아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그 부하들 역시 꼼짝하지 않고 있는 상황.
그렇게 그가 이상함을 자각하는 순간.
– 모, 모여라!
– ‘괴물’이 움직였다!!!!
– 깨어났다!
– 왜 이렇게 빨리!?
– 연습, 의미 없다!!
사방에 울려 퍼지는 이해할 수 없는 정신파들 속에서 몬스터들이 더욱 이상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우르르르르릉.
이내 대미궁 전체가 지진이 난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