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213
213화. 정령 합신
사실 전생에 만난 산양 머리 녀석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 전투는 저 몬스터 군단의 승리로 끝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맞았다.
녀석이 팔을 잃은 건 그 승리의 대가였을 거라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니까.
하지만 흘러가는 상황은 달랐다. 산양 머리와 눈깔 괴물을 제외한 다른 악마급들이 왜인지 소극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
그러니 영역을 확대 동조화하며 각자의 역량을 극대화한 자칭 ‘폭식의 장군’들에게 몬스터 군단이 덤빈대도, 그 숨통을 끊을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거기에 그 이상의 괴물일 것이 분명한 지저의 ‘왕’까지 합세한다면.
‘절대 못 이겨.’
아무리 생각해도 몬스터 군단의 패배만이 예상되었다.
눈앞의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니, 전생의 기억에 대한 해석도 달라졌다.
‘저 산양 머리 놈, 전생에는 훨씬 신중하고 겁이 많았어. 부하들을 죄다 갈아 넣고 난 뒤에야 나섰을 정도로.’
전쟁의 승자가 겁쟁이가 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분명 진 거야.’
즉, 녀석이 부상만으로 살아남은 데에는 아마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들이 저 전투에 낄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승리한 악마급 마수들이 차후에 세상으로 튀어나올지는 미지수이니까.
아니, 적어도 마수병단의 강림 시기에는 저놈들이 나타나지 않았던 걸 보면, 그 뒤에도 쭉 대미궁에서 안 나올 확률도 있을 테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루나가 참지 못한 듯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좀 전에 도무지 무시할 수 없는 영파를 들었다.
“폭식의 장군…….”
“뭐?!”
정신파로 표현되는 의지는 그 주인의 마음을 고스란히 대변한다.
타이니는 놈들의 정신파에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그 자부심을 도저히 간과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 그렇게 말하는 놈들이야. 놈들은 대미궁의 마수가 아니라 마계의 귀족이라고 봐야 해.”
“뭐? 그게, 뭐 어때서……?”
“진실이건 아니건, 놈들은 진심이야. 폭식이 강림했을 때 왜 안 보였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언젠가는 밖으로 나올 거야. 마계의 귀족, 악마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정화하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고 생각하니까.”
“정화?”
“최악의 경우, 우리 인류의 씨를 말릴 수 있는 타이밍에 저 괴물들이 서로 싸우지 않고 한데 뭉쳐서 대미궁을 나올 수도 있어. 지금 이 땅 밑에서 올라오는 놈까지.”
어쩌면 전생에도 그랬을지 모른다.
‘우리가 글러터니와 공멸한 직후에 튀어나왔으면 인류는 그대로 끝장이야.’
정말 그랬다면 남은 인류는 2차 강림의 시기를 준비하지도 못하고 멸망했을 것이다.
용사와 성녀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은 스무 살 애송이들이 악마급 마수를 일대일로 막아설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가정을 하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상상하고 보니 다시금 확신이 들었다.
“……그러니 놈들이 서로 싸울 때 최대한 손해를 입혀 놔야 해. 특히 저 자칭 폭식의 장군들과 이 밑에서 올라오는 놈에게. 절대 세상에 나오지 못하도록.”
쿵.
우르르릉.
그가 무겁게 구른 발에 반응하듯 지면의 울림이 커졌다.
전장에서 벌어지는 폭음과 소란과는 별도로 확연하게 느껴지는,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존재감.
“하지만, 어떻게……?”
루나의 시선이 자연스레 다시 전장으로 향했다.
“크와아아아아아아!”
쿵. 쾅. 쿵. 쾅.
철갑 고릴라가 가슴을 두드리며 괴성을 지르는 순간 폭풍처럼 뿜어져 나오는 마기.
놈의 신체를 타고 오르던 마수들이 일순간에 가랑잎처럼 날아가고, 그사이 가볍게 휘둘러진 놈의 주먹이 바닥을 후려치는 순간.
꽈아아아아앙!
지면이 몬스터들과 함께 통째로 터져 나가며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그 안에 보이는 것은 검붉은 핏자국과 몬스터들의 잔해뿐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스아아아아.
“취익.”
쩌저저저저적.
쨍그랑.
왕관 뱀의 혀가 새하얗다 못해 푸르게 빛나는 듯한 입김을 뿜어내는 순간, 놈에게 달려들던 몬스터들이 일제히 얼어붙어 그대로 깨져 나갔다.
뿔 사슴을 비롯한 몇몇 마수들이 가까스로 그 범위에서 벗어나 놈을 들이받았지만, 뱀의 몸체가 조금 출렁거렸을 뿐, 그 알록달록한 비늘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움직이는 인간 크기 박쥐와 안개 형태의 거대 새의 주변에는 몬스터들의 붉은 핏줄기만이 난무했으며.
“크와아아앙!
퍼버버버벅.
거대한 검은 사자는 불길처럼 들끓는 암흑 오러를 두른 채 돌진하며 피의 길을 만들어냈고.
“캬아아아아!”
우르르릉.
지면에 거대한 구멍을 뚫은 자이언트 웜은 개미지옥처럼 마수들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회색 도마뱀이 다가오는 몬스터들을 돌로 만드는 장면은 상대적으로 얌전해 보일 지경.
그런 놈들을 향해 검붉은 기운을 두른 채 달려드는 각양각색의 마수 떼들은, 그저 불길에 달려드는 나방처럼 보일 뿐이었다.
“저것들을, 우리가?”
루나의 목소리는 부정적이었지만, 타이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티는 나지 않지만 분명 소모되고 있을 거야.”
아무리 ‘영역’이 격하의 상대로부터 몸을 지키는 데 특화되어 있다고 한들 한계는 있다.
더군다나 그 괴조 같이 영역이 변이된 경우가 아니라면, 이능이 아닌 순수한 육체의 힘을 제약할 수는 없으니.
“그러니까 저 무리의 악마급들이 견제만 하고 있는 거겠지. 아예 소용이 없다면 지금도 같이 덤비고 있을 테니까.”
“아니, 우리가 끼어들면, 전부 우리를, 공격하지 않을까?”
루나의 지적 역시 타당했지만.
“그거야 어느 쪽이든 여유가 있을 때 말이겠지.”
타이니는 이미 마음을 정한 듯 전장을 살피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루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다시 물었다.
“……어쩌려고?”
그 여전히 회의적인 눈빛을 보며 쓴웃음을 지은 타이니는 이내 그녀가 받아들일 만한 절충안을 제시했다.
“자칭 폭식의 장군들을 공격한다. 산양 머리가 가만히 있거나 돕는다면 다행이지만, 우리를 공격하려 한다면 그대로 튀고.”
“……꼭, 해야 하는, 거지?”
“그래.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없을 테니까.”
지금 싸우고 있는 저 몬스터들만 해도 바깥세상으로 나오면 인류가 연합해서 대응해야 할 재앙이다. 기사를 자처하는 마당에 이런 변수를 두고 다짜고짜 도망칠 수는 없다.
가능성이 아예 없다면 모를까, 희박하게나마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서는 더욱.
“혹시나 위험해지면 먼저 도망쳐. 내가 뒤를 맡을 테니.”
타이니는 최악의 경우를 염두에 두며 워해머를 들었고.
“그럴 일, 없어. 내가. 누나야.”
그에 루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마지못해 호응했다.
‘이 상황에서도 저런 말을…….’
답답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 복잡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찌 됐든 지금은 그것으로 전의를 다져 준다면 다행이다.
타이니의 시선이 자연스레 전장으로 돌아갔다.
“그나마 약하고 위험한 놈들부터.”
“그래.”
약하고 위험하다는 모순적인 표현.
그것은 다름이 아닌, 날아다니는 악마급 몬스터 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빠른 만큼 내구력은 상대적으로 약할 테고, 속도는 그 자체로 가장 위협적인 무기이기도 하니까.
그 말을 대번에 알아들은 루나 역시, 형태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박쥐와 새 형태 괴물의 움직임을 파악하려 애썼다.
저놈들을 잡으려면 아무래도 타이니보다는 그녀가 적격일 테니까.
“루나, 또 위험한 일 좀 맡길게. 미안해.”
나름대로 격려 차원에서 한 말이었는데, 바로 찌릿한 시선이 돌아왔다.
“그런 말, 하지 마. 이번에는, 시선 끄는 일이, 더 위험하다는 거. 알아.”
“서로 힘내자는 거지.”
“확실히, 약속하는 거다. 위험하면…….”
“도망치는 거지.”
“그래.”
“최대한 놈들을 처리하려고 노력하되, 여의치 않다면 우리 생존을 우선으로. 좋지?”
“좋아.”
– 컹!
그래. 너도, 월랑.
‘잘 부탁한다.’
생각지도 않았던 재앙.
마물들로 가득한 전장을 바라보는 타이니의 검은 눈이 조금씩 노을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 * *
일단 결론이 나자 이어지는 행동은 빨랐다.
“간다, 월랑.”
– 컹!
타이니의 나직한 말이 녀석에게 전해지자마자 그의 몸 위로 거대한 월랑의 영체가 덧씌워졌고, 이내 스며들 듯 그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치 월랑이 타이니에게 흡수되는 듯한 모습.
하지만 그 직후 이어진 변화는 더욱 놀라웠다.
우우우우우우웅.
콰콰콰콰콰.
주변에 가득한 마기가 일순간 주변으로 몰려들더니, 노을빛 마나로 치환되어 그의 전신으로 폭풍을 일으키듯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우드드드득.
일순간 팔다리에 은빛 털이 돋아나며 부풀어 오르는 타이니의 육체.
초월무구 아니무스만이 제 형태를 유지할 뿐, 마수의 가죽으로 만들었던 갑옷은 당장이라도 터져 나갈 듯 팽팽하게 당겨졌다.
우우우웅.
부풀어 오른 근육과 뼈대는 그 부피 이상으로 밀도가 높아져 더욱 강인해졌고, 이미 한계를 넘어선 줄로만 알았던 타이니의 육체는 또 다른 차원에 올랐다.
“어……!?”
타이니는 놀란 듯 커진 루나의 눈동자를 보며 씩 웃음 지었다.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은빛으로 물들고 송곳니가 진짜 늑대처럼 날카롭게 튀어나온 탓인지 인상이 좀 험악해지긴 했지만, 그는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일시적이나마 전생의 자신과 비슷하게 커진 덩치는 쉽게도 익숙해졌고, 온몸에 들끓는 힘이 주는 자신감이 희박한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확신이 들게 만들었다.
‘이게 바로 정령 합신…….’
정령술사가 초인의 경지에 이르러 얻게 되는 진정한 권능.
오러라는 파괴의 권능을 각성한 마나유저나 하나의 속성을 지배해 낸 끝에 자연의 일부로 인식되는 마법사와는 달리, 두 종의 장점을 모두 받아들이면서 한계를 초월하는 ‘진화.’
물론 그 과정에서 정령술사마다 추구하는 방향성은 다양하겠지만, 타이니가 집중한 것은 당연히 한 가지였다.
우드드득.
‘오직 육체의 강화.’
주먹을 쥐려 하자 자연스레 튀어나오려는 손톱을 제어하면서도, 타이니는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힘에 전율하며 웃었다.
전신에 은빛 털이 조금 돋아나고 인상 좀 더러워지면 어떤가.
‘이 정도는 감내할 만하지.’
가늠조차 안 되는 강력한 힘이 그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으니까.
단숨에 30cm 이상 커진 키 역시 전생의 기억 덕분에 금세 익숙해졌다.
“크륵. 이거면, 된다.”
아직 정령 합신이 익숙하지 않은 탓에 가래가 끓듯이 나오는 목소리는 단점으로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
하지만 그 자신감에 바로 태클을 거는 말, 아니 의지가 그에게 들려왔다.
– 네놈……!
아무리 바위 뒤에 숨어 있다지만, 숨길 수 없는 강렬한 마나의 향기가 사방을 물들이면서 뿜어져 나오다 보니 바로 산양 머리의 주의를 끈 것이다.
‘역시…….’
애초에 오랜 시간 유지할 수 없는 정령 합신을 처음부터 시도한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었으니,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물론 놈의 주의와 함께 적의까지 끌어올 생각은 없었다.
“크륵. 간다, 루나.”
“……응.”
무언가 홀린 듯한 멍한 눈으로 타이니의 팔을 쓰다듬던 루나가 그의 말에 조금 늦게 반응하는데.
– 컹!
영혼의 저편에서 월랑이 호응하는 동시에.
“일단은 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자고.”
쿵.
“아우우우우우우우우!”
크게 한 발을 내디딘 타이니의 하울링이 전장의 폭음을 뚫고 전역에 울려 퍼졌다.
동족 강화, 정령 합신.
그 가늠 안 되는 파동이 주변의 마기를 움직이고, 이내 몬스터 군단에 포함되어 있던 돌 늑대를 비롯한 늑대형 마물들의 몸에 검은 마기가 스며들자 마물들이 움찔하기 시작했다.
– 네놈, 지금 설마 방해를……!
산양 머리의 적의 어린 음성이 그들에게 엄습하던 순간.
타이니는 다시 전장을 떨어 울리는 고함을 내질렀다.
“크륵. 전부 저 지배자들을 잡아라!”
물론 마수들이 인간의 언어를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그에 담긴 의지는 동족 강화의 권능을 통해 늑대류 몬스터들에게 분명하게 전해졌다.
그 결과.
– 컹!
– 아우우우!
산양 머리와 눈깔 괴물의 버프에 타이니의 힘이 더해졌고, 늑대류 몬스터들이 더 빠른 속도로 저층의 지배자, 자칭 폭식의 장군들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거면 당장 나를 공격하지는 않겠지.’
– 너, 지금, 왜……?
혼란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산양 머리의 영파가 퍼지는데.
“좋아!”
몬스터들과는 조금 다르게 노을빛 마나를 온몸에 받아들인 루나가 흥분된 어조로 한마디를 뱉더니, 그 자리에서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며 타이니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늑대와 인간, 양쪽에게 모두 영향을 끼치는 권능.
하지만 그 힘이 투자된 비율은 단 한 명뿐인 인간에게 3할, 수많은 늑대에게 7할이었다. 즉, 루나의 육체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까지 권능을 쑤셔 넣은 것이다.
이로써 루나의 생존 확률, 그리고 작전 성공 확률이 한층 올랐다.
그렇다면 이제 시선을 끌 차례였다.
아니, 이미 시선은 충분히 끌고 있으니 가능하면…….
“크르르. 폭식, 폭식의 장군이라. 너희들이 정녕 그 X 같은 것들을 자처한다면…….”
우우우우웅.
어깨의 아니무스가 다시금 빛을 발하며, 권능 발현 한 번에 바닥을 친 타이니의 마나를 금세 회복시켰다.
“……모조리 패 죽여 주마!!!!”
그래, 그때처럼.
사위를 울리는 고함과 함께 한결 작게 느껴지는 워해머를 움켜쥔 타이니가 전장을 향해 번개 같은 속도로 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