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22
22화. 에드몬
– 제국의 영주가 흑마법사였고, 그 뒤에 배후가 있는 것 같다.
타이니의 생생한 증언은 클로이의 일정을 크게 변경시켰다.
필레스의 흑마법사 사건에 대한 소문은 이미 루센티아까지 퍼져 있었는데, 영주의 시체가 사라졌다는 소식 또한 전해진 것이다.
그 와중에 추가된 타이니의 증언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단서였다.
“당장 본가로 돌아가야겠어.”
“예, 그러시는 게 낫겠습니다. 그런데 공녀님…….”
“왜?”
“……그 정령은 언제까지 데리고 계실 겁니까?”
“윽?”
비비안의 말에 클로이가 움찔하자, 그녀의 품속에 안겨 있던 월랑이 낑 하며 힘없는 울음을 내뱉었다.
정령이 피곤해할 수 있다는 것을, 비비안은 지금 월랑을 보며 깨닫고 있었다.
“……그 아이, 타이니가 계속 함께할 거면 안고 있어도 괜찮잖아.”
“혹시라도 그 녀석이 공녀님께 해를 끼칠 생각이라면, 정령은 큰 위험이…….”
“이 작고 귀여운 아이가?”
클로이가 작은 월랑을 손바닥으로 감싸며 들어 올리자, 눈을 가늘게 뜬 은빛 강아지가 비비안을 째려보았다.
“컹!”
내가 그럴 리가 있냐고 말하는 듯한 귀여운 모습에 비비안도 순간적으로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거봐, 이 아이도 화내잖아.”
귀, 귀엽…….
순간적으로 홀릴 뻔한 비비안이 고개를 획획 저어 잡념을 떨쳐 냈다.
‘부, 분명히 엄청 커다란 늑대였는데.’
공녀님과 너무 오래 붙어 있었더니, 나도 ‘귀여움 좋아 병’이 옮았나.
끙.
“흠, 흠. 아니, 제 말은, 그럴 수도 있다는…….”
“얘가?”
다시 눈앞에 내밀어진 강아지, 아니, 정령.
“……아니, 아닙니다. 그냥 제가 더 철저히 감시하겠습니다.”
비비안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설득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데, 타이니는?”
“글쎄요, 아까 에드몬 공자 쪽 사람이 볼일이 있다면서 데려갔습니다만?”
“볼일? 무슨 볼일?”
“그야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흠…….”
에드몬이 타이니를 데려간 이유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지만,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요 며칠간 지켜본 에드몬의 인상과 소문은 그리 좋지 못했으니까.
클로이의 표정이 찡그려지자 비비안이 바로 말을 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아무리 망나니라고 한들, 공녀님이 직접 일행으로 받아들인 사람에게 해를 가하진 못할 겁니다.”
언뜻 맞는 말처럼 들렸지만.
“글쎄…….”
클로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보기에 에드몬은…… 한마디로 개념이 없는 사람이었다.
해도 되는 일과 안 되는 일 사이의 선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
하다못해 그보다 신분이 높은 자신 앞에서도 그런 기미를 몇 번이나 내비쳤는데, 과연 신분이 낮은 이는 어떻게 대할까?
망나니라는 소문이 생긴 이유도 그에 기인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걱정하던 순간.
“킁?”
월랑의 귀가 쫑긋 세워지더니, 거의 동시에 녀석의 몸이 사라졌다.
“어?!”
당황한 것도 잠시, 이내 무언가를 떠올린 클로이는 서둘러 명령을 내렸다.
“타이니를 찾아!”
“예? 굳이……?”
비비안은 여전히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정령이 사라지는 것은 대개 주인과 거리가 멀어졌기 때문일 확률이 높으니까.
하지만.
“그래, 비비안. 네가 직접 가!”
클로이는 다급히 소리를 지르며 비비안을 재촉했다.
그것이 월랑이 사라졌기 때문인지, 그 주인인 소년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감 때문인지는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명령은 명령인지라, 비비안은 탐탁지 않은 걸음으로 주인의 뜻을 따르기 위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 * *
“뭐라?”
“거절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공자님.”
에드몬은 기사 램버트의 대답에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었다.
감히 한낱 기사 놈이 자신의 명을 거부해?
“네 이놈! 지금 제정신이냐?! 감히 내 말을…….”
하지만 그 분노는 제대로 표출되지도 못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또 사고를 치면 가문에서 축출하겠다 하신 각하의 말씀은, 이번만큼은 결코 엄포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지금 도련님께서 제게 하신 말씀, 그대로 보고드릴까요?”
“……이, 이익. 네, 네놈이 감히.”
“공자, 부디 자중하십시오.”
루센트 기사단의 수위 기사 중 한 명, 램버트는 차가운 미소와 함께 고개만 까딱해 보이고는 그를 지나쳐 걸었다.
가문의 기사, 그것도 평민 출신 기사가 감히 가문의 장자인 자신에게 저따위 태도를 보인다.
“이, 이……!”
그가 이렇게 나오는 이유를 알기에, 더욱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에드몬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열등감을 또 한 번 건드리는 일이었으니까.
램버트가 복도를 돌아 사라지자마자 그 분노는 바로 주변으로 쏟아졌다.
“감히! 저 하찮은 새끼가!!!”
와장창!
분노에 취해 냅다 지른 발차기가 복도에 진열되어 있던 커다란 도자기를 박살 냈다.
그 요란한 소리에 한옆에 시립해 있던 시녀가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하? 오늘따라 시종 년까지 짜증 나게 만드네. 야, 너 이리 와.”
“죄, 죄송합니다. 공자님.”
사색이 된 시녀가 급히 고개를 조아렸지만.
“죄송할 짓을 왜 해!!”
짜아아악.
이미 눈이 뒤집힌 에드몬은 그대로 그녀의 따귀를 올려붙였다.
그러고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진 시녀를 향해 발길질을 퍼부었다.
뻐억!
빠아악!
“네년도 내가 후계자가 안 될 거라고 생각해서 비웃는 거지!? 엉!? 이 X년아!”
뻐어어억.
“내가 장남이야! 그런데 수도에 있는 그 천한 놈이 이 가문을 이을 수 있을 것 같아!? 웃기지 마! 그럴 일은 절대 없어!!”
퍼억.
퍽.
시녀가 의식을 잃은 후에도 그 무차별적인 폭력은 계속되었다.
“내가, 내가 정당한, 후욱. 루센트의, 후욱. 후계자다. 후우우.”
그렇게 내면에 담긴 분노를 한껏 쏟아 낸 후에야 에드몬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냈다.
그리고 공포에 질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다른 시종들을 향해 고갯짓으로 명령했다.
“……이거 치워, 빨리!”
“예, 예. 공자님.”
다급히 움직이는 시종들을 보며 에드몬은 차분히 다시 머리를 굴렸다.
감히 자신을 무시한 그 버르장머리 없는 평민을 혹독하게 교육해야 하는데, 기사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
평민 기사도 저따위 태도라면 다른 놈들은 볼 것도 없다.
‘거기다 그놈은 정령술사란 말이지.’
아쉬운 대로 병사들을 수십 명씩 들이대 본다 한들 교육이 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래, 그놈들을 이럴 때 써먹어야지. 흐흐…….”
몇 년 전부터 자신에게 꾸준히 줄을 대 온 ‘놈들’을 떠올린 에드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다만 약간 걸리는 것이 있긴 했다.
물론 양심 같은 것이 아니라…….
– 어떻게든 클로이 공녀의 마음에 들도록 해라. 공작은 막내딸을 지극히 아끼는 것으로 소문이 났으니, 네가 공녀의 마음을 뺏어 연분이 맺어진다면, 이 가문을 잇지 못할 것도 없다.
어머니가 그에게 건넨 조언.
하지만 자신을 경멸하듯 쳐다보던 클로이의 눈빛을 떠올리는 순간, 그 생각은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그에게도 최소한의 눈치라는 것이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자신이 평민 무지렁이들을 바라볼 때의 그것과 비슷했다. 연분이 생길 리가 없다는 것은, 지난 삼 일간의 경험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공녀를 겁박 할 수도 없고, 다 끝이야.’
이미 모든 게 어긋난 마당에 그 재수 없는 검은 머리 평민 놈 하나 망가트리는 게 뭐 대수랴.
“……몰라, X발.”
지금 그의 뇌리에는 당장의 분을 풀 생각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결정을 내린 순간.
“고, 공자님. 말씀하신 평민을 데려왔습니다.”
자신의 명을 충실히 따른 시종이 그 건방진 놈을 데려왔다.
“……오호라.”
너무나도 절묘한 타이밍에 끌려온 희생양을, 에드몬은 아래위로 천천히 훑어보았다.
“드디어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겠군. 정령술사, 네 이름이 뭐랬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묻는데, 건방진 평민 놈은 실려 가는 시녀와 그 자리에 있던 핏자국만 바라보고 있었다.
무서워서 눈도 못 마주치는 건가? 그래, 그래야지.
“어이,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피식 웃으며 자신의 위엄을 보여 주는데.
“아…… 타이니.”
돌아오는 평민 놈의 대답이 너무 짧았다.
“……‘아, 타이니’?”
지금 나한테 반말을 지껄인 건가?
간신히 감정을 가라앉힌 게 무색하게, 가슴속에서 다시금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
“후, 역시 못 배워 먹은 평민이라 그런지 귀족 앞에서 갖춰야 할 예의를 모르는 모양이구나.”
“알지.”
“알지? 그냥 알지? 흐, 흐하하하! 이 미친 새끼가, 어디서 눈깔을 부릅뜨고…….”
귀족의 당연한 권리를 보여 주기 위해 뺨을 후려치려는데.
턱.
“허? 막아? 너 지금…….”
달아오른 얼굴로 토해 내려던 분노는, 이글거리는 검은 눈동자를 맞닥뜨리는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거울에서 익숙하게 보았던 눈빛.
이건…… 분노?
‘감히, 지금 누가 누구한테?’
다시금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건방진 평민 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잘 알지. 네놈이 한 번만 더 사고를 치면 가문에서 쫓겨난다는 것도 알고.”
흠칫.
“어쩔래? 여기서 거하게 한판 붙어 볼 거야? 발렌티아 공녀님의 일행인 나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이 새끼…….’
보통 놈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깨달은 동시에, 이 건방진 새끼를 반드시 죽여 버려야겠다는 분노 역시 한층 거세졌다.
다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불리하니…….
“허, 험. 내, 내가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좀 흥분했군. 네놈이 범한 무례는 못 본 걸로 하지.”
억지로 흥분을 가라앉히며 놈에게 잡힌 손을 뺐다. 아니, 빼려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힘을 줘도 빼낼 수가 없었다.
마치 강철 집게로 고정해 놓은 것처럼 단단히 붙들려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이익. 지, 지금 뭐 하자는 거지!?”
“뭐긴, 대단하신 귀족님이랑 쌈박질 좀 해 보겠다는 거지. 멀쩡히 본 걸 왜 못 본 거로 친대? 혹시 배짱도 눈깔도 어디 팔아먹으셨나? 곧 쫓겨나실 몸이라?”
“가, 감히……!”
“그래, 더 화를 내. ‘감히’……. 대사 괜찮네. 그다음은?”
마음 같아서는 분노를 폭발시켜 고귀한 귀족의 권위로 놈을 걸레짝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 지엄한 권위를 대행해 줄 수족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 지고한 신분에 평민과 드잡이질을 할 수도 없으니.
부들부들.
“……이 무, 무례는 못 본 걸로 하겠다.”
“눈 똑바로 뜨고 있으면서 왜 자꾸 못 봤대?”
까드득.
이, 이 돼먹지 못한 평민 놈이…….
“더, 더 이상의 무례는 발렌티아 공녀님께 따져 묻겠다!”
“그래, 따지든 묻든 하고 싶은 거 다 해. 그런데 그 전에 주먹질부터 해 보자고. 덤비라니까? 아, 팔이 잡혀서 그래?”
탁.
순식간에 자유로워지는 팔.
하지만 그와 동시에 걸음을 좁혀 바짝 다가온 꼬마.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새까만 눈동자에, 에드몬은 순간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자, 놔줬다. 한판 하자니까?”
“흐, 흠.”
……어찌 귀족 체면에 평민과 똑같이 몸으로 부딪치겠는가.
이 못 배운 놈에게 제대로 교훈을 주기 위해서라도 잠시 물러날 때였다.
에드몬은 자신의 지극한 인내심에 감탄하며, 그 분노를 참아 내느라 부들부들 떨리는 팔다리를 억지로 움직였다.
“따, 따라와라. 내가 네놈에게 친히 귀, 귀족의 위엄을 보여 주겠다.”
“귀귀족……? 그건 또 무슨 기괴한 신분이래?”
순간 울컥했지만, 에드몬은 다시금 귀족의 위엄을 생각하며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아 냈다.
후우우.
넌 할 수 있다, 에드몬. 숨 길게 내쉬고.
하나, 둘.
……그래, 됐다.
“너 같은 놈들의 성장을 위해 준비해 놓은 교육자들이 있지. 겁이 난다면 따라오지 않아도 좋다.”
“너, 신분 말고는 내세울 거 없지?”
“네 이놈!!!!”
“오우! 그래, 그거야. 귀귀족님, 덤덤벼!”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것이 스스로도 느껴졌지만, 귀족의 인내심으로 간신히 참아냈다.
“……귀한 몸으로 모범을 보이기 위해 다시 한번 무례는 못 본 걸로 해 주마.”
“거참, 눈이라도 감고 말하든가.”
“……네놈이 감히 나를 따라올 배짱이 있느냐?”
“뭐래, X신이.”
“너, 너……!”
속이 뒤집히는 듯한 분노에 머릿속이 온통 새하얘져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손만 움찔거리는데,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한 검은 눈동자가 다시금 시선을 마주쳐 왔다.
순간 엄습하는 불길함이 달아오른 머리를 확 식혀 주었다.
‘으으, 재수 없는 놈.’
후우, 흐으으읍.
참자. 참아야 한다, 에드몬.
다시 한번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린 에드몬은 턱을 한껏 들어 올려 귀족의 위엄을 보여 주며 단호하게 말했다.
“겁이 나는 게 아니라면 나를 따라 오거라, 무도한 평민 놈아.”
“하, 넌 뭐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이, 이……!”
“뭐, 준비한 게 있긴 한가 본데. 좋아, 가 보자고.”
“끄으응.”
극한의 인내심을 발휘한 스스로를 다시금 칭찬해 주며, 에드몬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다행히 이 시건방진 놈은 곧 닥칠 시련을 알지 못한 채 순순히 제 뒤를 따라왔다.
‘두고 보자, 이놈!’
그놈들이라면 어설픈 평민 기사보다는 확실하게 이놈을 ‘교육’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앞장서 빠르게 걸어가는 에드몬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