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222
222화. 릴리스
“……진정한 신의 강림을 바라옵니다.”
“바라옵니다!”
음울한 목소리를 시작으로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인원들이 동시에 마력을 뿜어내는 순간.
화르륵.
넓고 어두운 동굴 광장 속 간간이 걸린 횃불이 일순간 거세게 타올랐다.
그에 맞춰 반경만 200m는 될 듯한 거대한 마법진이 진득한 검은 마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은 마기와는 정반대의 신성한 기운을 퍼트리는 커다란 수정이었는데, 이윽고 그 수정의 신성한 기운과 마기가 섞이면서 허공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파지지지직.
“오오오오오!”
거대한 수정이 줄어드는 만큼 점점 더 커져 가는 균열.
그러다 마침내 거대한 수정이 전부 녹아내리고 허공에 찬란한 신성을 뿜어내는 핵, 진정한 성물만 남게 되었을 때.
그 거대해진 균열이 마치 살아 있는 짐승의 입처럼 벌어지더니 성물을 꿀꺽 집어삼켰다.
파지지지직.
우우우우웅.
그 순간 급격하게 부풀어 오른 균열이 높고 넓은 동굴 광장을 가득 채우며 강렬한 마기를 뿜어냈다.
“오오오오오!”
“오신다!”
“그분의 사자가 오신다!!”
그에 따라 검은 로브 아래로 광기 어린 눈빛을 빛내며 손을 벌리는 무리.
그들의 가장 앞에서 새하얀 뼈만 남은 손가락을 들어 올리는 ‘리치’ 역시 온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드디어 내 대에서 진정한 신화가 이루어지는가.’
‘강림의 날’을 위해 모아야 할 성물을 하나 소모한 것은 아까웠지만, 그 또한 그분의 지시.
예언이 조금 틀어진다 해도, 그 명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 대가로 ‘예정되지 않은 시기’에 이 지상에서 그분의 사자를 영접할 수 있다면 더욱 열렬히 응해야 마땅했다. 조직이 세계적으로 엄청난 압박을 받고 있는 지금, 조직에 꼭 필요한 구원자를 부르는 일이 될 테니까.
뼈다귀뿐인 손, 그 떨림이 극에 달할 무렵.
탁.
그 거대한 검은 균열이 허망하게 보일 정도로 작고 여리여리한 인영이 균열 밖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그와 동시에 급격하게 사그라드는 균열.
파지지지지직.
그리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일반 사람보다 아담한 몸집을 가진 ‘여자’였다.
짙은 적발이 허리까지 내려오는 창백한 안색의 미녀는 어깨와 허리 라인, 허벅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코르셋 형태의 옷 아래로 재질을 알 수 없는 가죽 부츠를 신고 있었다.
그 천박하다 싶을 정도로 야한 옷차림이 나른한 표정과 어우러져 오히려 묘한 퇴폐미를 자아냈다.
그와 동시에 풍겨 나오는 알 수 없는 아우라는 그녀가 등장한 순간 주위를 침묵에 빠트렸다.
하지만 이내.
“음?”
“저건…….”
“아니…….”
“뭐가 잘못된 건가?”
말룸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퍼져 나갔다. 그들이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가녀린 여인이 아니라 세상을 때려 부술 만한 대악마였으니까.
그들이 망연한 눈으로 여자와 수장을 번갈아 바라보던 그때.
검은 로브 아래 푸른 귀화가 부르르 떨리더니, 이내 유성처럼 날아간 그들의 수장이 여자의 발아래에 엎드렸다.
“말룸의 수장 카니발이 위대한 악마 대공 질투의 사자를 뵙습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지자 여자의 나른한 얼굴 위로 옅은 미소가 떠올랐고, 그 순간 다른 악마추종자들의 눈동자가 몽롱하게 풀렸다.
그리고 이내.
“그분의…… 사자를 뵙습니다.”
“뵙습니다.”
“그분을, 아니, 그분의 사자를…….”
일순간 바보가 된 것처럼 횡설수설하며 제자리에 엎드리는 무리를 뒤에 두고, 여자가 살포시 리치, 카니발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그 순간 검게 타오르는 마력.
‘내 기억을……?’
카니발은 잠시 움찔하다가, 이내 그대로 그녀의 마력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음.”
여자의 입에서 뜻 모를 비음이 흘러나오며 다시금 동굴 안에 묘한 마력을 흩뿌렸다.
“으음, 아(A)가 아니라 에이(A)인가. 그럼…….”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이 이어지더니.
“으음, 그래. 현재 인간들은 이런 언어를 쓰고 있는가.”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고운 목소리, 그 안에 담긴 알 수 없는 마력에 듣는 이들 모두가 움찔하는 순간.
“나는 생전에 몽마의 여왕이라 불렸던 자. 그리고 한 번 죽어 다시 태어난 지금은 위대하신 악마 대공 그린 아이의 사자로서 너희의 앞에 섰다. 내게 이 세상에서 활동할 새로운 이름을 지어 줄 자가 여기 있는가?”
매혹적인 목소리가 재차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가장 앞에 엎드려 있던 탓에 제일 먼저 여자의 시선이 꽂힌 자, 말룸의 수장 카니발의 머릿속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눈앞에 있는 몽마의 여왕이 뿌리는 매혹의 마력은 분명 강렬했지만, 이미 리치로 거듭나면서 생전의 육신을 버린 그였다.
더구나 질투의 마력을 부여잡고 간신히나마 8단계, 대흑마도사의 경지에 오른 지금, 특정한 목표 없이 자연히 흘러나올 뿐인 매혹의 마력은 그에게 어떤 영향도 주지 못했던 것이다.
‘분명히 나보다는 강하다. 자작, 아니 백작급인가? 하지만 무려 성물을 하나 낭비했는데 후작급도 아닌 백작급이라니. 그분이 대업을 하찮게 취급하시는가, 설마……?’
상대방의 경지에 대한 견적이 어느 정도 나오자마자 혼란에 빠져 있는데, 아무래도 상대가 그 속내를 읽은 듯했다.
“감히, 그분의 뜻을 네가 함부로 예단하는가?”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다시 매혹의 마력이 집중되자 그의 푸른 귀화가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눈앞의 대마족이 지금 자신의 기억을 읽고 있다는 것을 잠시 망각했던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사자시여. 사죄드리겠습니다.”
카니발의 목소리, 예의 그 쇠를 긁는 듯한 카랑카랑한 음성이 바로 용서를 구하자, 그 광경을 본 말룸의 추종자들이 동시에 움찔했다.
그러자.
“무지몽매한 이들을 일깨워야 하는 자가 어리석어서는 곤란하지. 아니 그런가?”
“며, 명심하겠습니다.”
“흠, 이름이 카니발이라, 축제라는 뜻인가? 아니, 아니로군. 카니발리즘(Cannibalism)인가? 자신의 이름을 거기서 따 왔다라…… 호호. 재미있는 종이로다.”
“가, 감사합니다.”
대화가 이어질수록 점점 더 커지는 마력이 자신의 전신을 침습하는 것을 느끼면서도 카니발은 더욱 깊숙이 고개를 조아렸다.
“재미있는 종, 카니발. 네가 나의 새로운 이름을 지어 보거라.”
“제가 어찌 감히…….”
그 말에 자연스레 목소리가 떨리는데, 그에 빙긋이 미소를 지은 몽마의 여왕이 먼저 답했다.
“그래, 너희의 신화 속에 비슷한 이름이 있구나. 릴리스. 허구의 존재라고는 하나, 그 이름이 딱 맞겠어.”
그 말과 함께 카니발의 머리에서 떼어지는 손.
그리고 마치 그것이 신호인 양, 주변에 가득 차 있던 마기가 여자에게로 무섭게 빨려들어 가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콰콰콰.
일순간 동굴 광장 전체에 마력의 폭풍이 일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니발은 허공을 떠돌던 균열의 마력을 모조리 흡수한 여자의 붉은 머리칼 사이에서 작은 뿔이 돋아나는 것을 목격했다.
‘후작급, 장군급의 마력……!’
폭증하는 마력을 느낀 카니발의 푸른 귀화가 사정없이 흔들릴 때.
여마족, 릴리스의 몸에서 퍼진 마기가 일순간 그와 말룸의 추종자들을 덮쳤다.
우우우우웅.
“우오오오오!”
“우와아아!”
“크합! 이건……!”
말룸의 추종자들이 일시에 탄성을 지르고.
“크하하하하! 이럴 수가!?”
카니발 역시 한순간 1.5배로 증폭한 마력을 느끼며 전율적인 쾌감에 몸을 떨었다.
“그분이 허락한 마기의 축복이다. 어떠한가? 이 정도면 네 기대에 부합하는가?”
여자, 릴리스가 요사스럽게 느껴지는 미소를 짓는 순간 카니발의 고개는 자신도 모르게 사정없이 끄덕여지고 있었다.
비록 영혼에까지 영향을 미쳐 경지를 끌어 올려 주는 이적은 아니었지만, 50%나 상승한 마력은 그들 모두에게 훨씬 큰 가능성을 선물한 것이니까.
물론 마족, 릴리스의 생각을 읽었다면 조금 다른 기분이었겠지만.
‘어차피 소모품에 불과한 제물들에게 그분의 마력을 주입하는 것은 낭비지만, 어쩔 수 없지. 명은 명이니까.’
그렇게 그들을 보며 요염한 미소를 짓던 릴리스가 갑자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그와 동시에 동굴 광장 전체에 퍼져 있던 마력이 일순간 착 가라앉았다.
대마족의 기분이 나빠졌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은 카니발과 말룸의 추종자들이 숨을 죽일 때.
광장 한구석의 벽을, 아니 그 너머를 보고 있는 듯하던 릴리스가 다소간 짜증 섞인 목소리를 뱉어 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군. 꼬리를 달고 왔는가, 한심한 것들?”
“예!?”
갑작스러운 타박에 카니발의 푸른 귀화가 다시금 요동치는데.
“뭐, 상관없겠지. 퇴로는 만들어 뒀겠지?”
“예? 예. 그, 그렇습니다만?”
“바깥에 적이 있다.”
그 말에 일렁이던 푸른 귀화가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침입자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제가 당장 처리하겠습니다!”
분노를 담은 쇳소리가 카랑카랑 울려 퍼지는데, 릴리스는 오히려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놈들 중엔 내가 무시하지 못할 만한 적도 하나 있다. 쓸데없는 짓 말도록.”
눈앞의 대마족조차 무시하지 못할 적이라면, 카니발의 뇌리에 떠오르는 이는 하나뿐이었다.
‘세계수의 수호자, 그 괴물이……!?’
아크 리치로 거듭난 그조차 멀리서 존재감을 느끼는 것만으로 피할 수 밖에 없었던 중간계의 최강자.
다만, 설령 그 괴물이라 해도 눈앞의 마족이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카니발은 자연스레 반론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나.
“명이다. 버릴 수 있는 병력은 여기서 시간을 벌게 해라. 정예 전력을 낭비하지 마라. 이제 너희는 그분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 움직여야 하니.”
릴리스의 명령은 완강했고, 그럴듯한 명분까지 있었다.
“예?”
“너희는 이곳을 빠져나가서 요람, 아니 대미궁으로 향한다. 그곳에 너희가 처리해야 할 변수가 있다. 지금이라면 놈들이 튀어나올 시기를 맞출 수 있어.”
맥락 없이 이어진 명령이었지만, 익숙한 몇 가지 단어 덕에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대미궁에 들어가 있는 변수라면.
“……광휘의 기사, 타이니 모르스?”
신음처럼 나온 목소리에 릴리스가 새삼 눈을 빛냈다.
“짐작이 가는 것이 있나 보군. 대미궁에서 그분의 계획을 비튼 놈이 있다. 놈이 튀어나올 때, 너희의 모든 전력을 투사해 놈을 잡아라.”
그 명령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카니발은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놈이, 마계에서도 주목할 만한 변수라는 말입니까?”
“네가 말한 그자가 변수인지는 모른다. 대미궁에서 튀어나올 중간계의 잡것. 그놈들을 처리하면 된다.”
릴리스는 확신할 수 없는 듯 두리뭉실하게 말했지만, 그 대답만으로도 카니발은 의문을 해소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시기에 대미궁에 들어간 미친놈은 그놈밖에 없었으니까.
간신히 알아낸 그 흔적을 보고 얼마나 어이없었던가. 스스로 죽을 자리를 택해 들어갔다 생각했거늘, 그놈이 또 그 안에서 위대한 분의 심기를 거스를 짓을 한 것 같았다.
까득.
“안 그래도 놈은 우리 조직의 적이었습니다. 이 기회에 제가 직접 가서 확실하게 놈을 처리하겠습니다.”
“네놈만으로는 안 된다. 모든 전력을 투사하라. 그분의 병사들과 더불어 너희가 만들어 낸 인형과 무기, 그 모든 것을.”
“……예?”
타이니 모르스가 아무리 경지를 초월한 강자라 한들, 그래 봤자 초인급도 되지 않는다.
‘놈 하나뿐이라면, 데스 나이트 두 기로도 충분할 텐데? 거기에 나까지 나서는 것도 충분히 과한 조치이거늘.’
카니발은 다시금 의아해했지만, 릴리스의 말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거기에 그분의 축복을 인형들에게도 더해 주겠다. 너희의 모든 것을 걸고 확실하게 변수를 끝장내라.”
우웅.
가볍게 내밀어진 검은 구슬. 하지만 그 안에 뭉쳐진 마력은 그로서도 쉽게 볼 수준이 아니었다.
심지어 이미 익숙하게까지 느껴지는 그 패턴은…….
“정말로 지금, 이 축복을 인형들에게 써야 합니까?”
“그렇다. 허튼 생각은 하지 말도록.”
릴리스가 자신의 기억을 읽었다면, ‘인형’들의 효력이나 한계도 알고 있을 터.
그럼에도 그런 일회용 소모품들에게까지 이 축복을 더하겠다는 건, 그야말로 모든 것을 쏟아부으라는 말이었다.
그놈 말고 무언가 더 있다. 그렇게 확신한 카니발은 더 이상 부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명을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돌아서려던 순간, 약간 찜찜한 생각, 아니 단어가 그의 뇌리를 스쳤다.
‘너희?’
우리만?
거기다 축복이 담긴 마력까지 자신에게 주었다는 것은, 이 대마족은 함께 가지 않는다는 뜻 아닌가.
그 생각에 발길이 주춤하는데.
“가거라. 내가 너희를 지켜볼 것이니. 침입자들을 지연시키기 위해 내가 뒤에 남겠다.”
그래, 세계수의 수호자를 묶어 두기 위한 거라면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애써 찜찜한 마음을 다독인 카니발은, 말룸의 추종자들을 움직여 동굴의 숨겨진 통로를 개방했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사라진 곳에 홀로 남은 릴리스는.
“모든 것은 그분의 뜻대로…….”
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 검은 마력이 가득한 허공에 녹아들 듯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