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236
236화. 스며드는 변수
“……결국 불필요한 전쟁을 피하려면 제국이 타이니 경의 등 뒤에 숨어야 하는 꼴이니, 이거 참 민망한 일입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이 때로는 가장 훌륭한 해결책일 수 있지요. 그럼 정리하겠습니다.”
긴 이야기 끝에 나온 결론은 간단했다.
“병력을 동원해 웨어비스트의 국경을 압박하면서, 또 사절을 보내 체베르의 축출을 건의한다. 당연히 통하지 않을 테지만…….”
“문나이트를 추종하는 3장군들이 우리에게 호응하며 병력을 움직이지 않는다면, 웨어비스트 왕국의 분위기가 내전 직전의 상태로 변할 겁니다.”
“문나이트가 반기지 않을 소리지만, 실제로 내전은 일어나지 않게 한다. 우리가 원하는 건 그 긴장 상태일 뿐이니까요.”
“그렇지요. 긴장 상태 탓에 대병력이 움직이기 힘들어지는 그 틈에…….”
“제가 다른 경로로 몰래 숨어들어, 그 만들어진 가짜 놈의 머리를 깬다. 성공하면 좋고, 혹시나 실패해도 제국은 관계성을 부인하면 되고 말이죠.”
타이니의 말에 이번에는 검제와 황제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한데 부인해 봤자 웨어비스트에선 분명 의심할 텐데요? 아까 말씀하셨듯, 제가 아무리 제국 소속이 아니라 한들 지금 이 상황만 해도…….”
타이니가 그리 말하며 어색하게 웃어 보이자, 황제와 검제 역시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제국에서 황제와 독대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있을까. 심지어 그는 맨손으로도 황제를 죽일 수 있는 초인인데 말이다.
그러나 황제와 검제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의심하는 것과 확신하는 것은 다르네, 타이니 경. 특히 외교에서는 말이야. 이제 곧 다른 소문도 퍼질 거네. 내가 이리 아낌에도 자네는 제국에 소속되길 원치 않았다고, 그래서 내가 불쾌해한다고 말이야.”
“에?”
타이니가 인상을 찌푸리자 검제 역시 웃으며 말을 더했다.
“더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도 네 녀석의 수배령을 내렸다가 시간 지나 얘기가 묻힐 때쯤 취소하면 그만이다. 무엇보다 너…… 실패할 생각이냐? 아니면 뭐, 기사로서 암살행은 명예롭지 못해서 싫다거나?”
검제가 의뭉스럽게 떠봤지만, 타이니는 그저 흥 하고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무슨 헛소립니까, 그게? 전생에도 비슷한 일은 종종 해 봤습니다.”
“뭐? 네가?”
좌중의 시선이 타이니에게 몰렸다. 기사의 명예 이전에 저 인간이 암살을 할 성향인가 싶은 것이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부터 어처구니가 없었다.
“더러운 짓을 저지른 귀족가 놈들, 내성 정문부터 부수고 들어가서 싹 다 때려죽인 것만 다섯 번은 넘습니다.”
“……그게 무슨 암살이냐.”
“암살이 뭐 별겁니까? 목격자가 없으면 암살이지.”
그 순간 집무실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
“…….”
이 새끼한테 진짜 이 일을 맡겨도 될까?
황제와 검제가 빠르게 눈빛을 교환하더니.
“……저기, 그 루나 양은 언제 돌아온다더냐?”
이내 검제가 속이 뻔히 보이는 질문을 던졌다.
아무리 빨라도 반년은 걸릴 거라는 말을 어제도 했는데…….
흥.
“라이칸에 있는 늑대의 궁에는 여기 황실이랑 비슷한 고대의 결계가 있다지요? 적어도 오러유저나 그에 준하는 마나 감응력을 가진 사람이 가야 할 텐데, 저를 못 믿겠으면 직접 가 보시든가요. 아니면 제나스 경을 보내시든가. 그러다 걸리면 빼도 박도 못하고 전쟁이 일어나겠지만요.”
“아, 하하. 못 믿겠다는 건 아니고…… 으흠. 폐하, 갑자기 반년 정도는 더 기다려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아, 하, 하하.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던 차입니다, 장인어른. 설마 그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이 인간들이.
‘최대한 빨리 인류 연합을 만들어야 한다고 한 게 5분 전이다!’
고함을 지르고 싶은 마음을 참느라 입꼬리를 씰룩이던 타이니가 그 말 대신 다른 얘기를 꺼냈다.
“사실 전 작전 같은 게 필요 없는데 말입니다.”
“음?”
“타이니 경, 지금 뭐라고……?”
“훨씬 간단한 방법이 있거든요.”
“네가?”
……그런 말은 속으로 하라고, 영감.
“그냥 제가 이대로 일직선으로 라이칸까지 달려가서, 차베르인지 체베르인지 하는 놈의 머리를 깨고 돌아오는 겁니다. 간단하죠?”
그 말을 하자마자 듣고 있던 모든 이가 동시에 한숨을 토해 냈다.
거기에 더해.
“컹!”
개소리하지 말라는 정령의 외침까지.
심지어 월랑을 품에 안고 조용히 대화를 경청하던 클로이마저도 한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끄응.
“당연히 진심은 아닙니다.”
말룸의 끄나풀이 장악했을 웨어비스트에 타이니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그곳 왕국군의 5할이 그를 죽이기 위해 달려들 것이다.
그 병력을 전부 쳐 죽이고 돌파하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설령 가능하대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헛소리를 한 이유는.
“하지만 뭐가 걱정돼서 안 하고, 또 뭐가 걸려서 안 하고……. 안전하게 가자? 그러다가는 이 세상이 안전하게 망할 겁니다. 어차피 제일 위험한 건 저 아닙니까? 그냥 말씀하신 계획대로 가시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타이니는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확실하게 의견을 피력했다.
순간적으로 방 안이 침묵에 잠겼지만.
“안전하게 가면, 안전하게 망한다라…….”
그 말이 인상이 깊었는지, 연신 그렇게 중얼거리던 황제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타이니 경. 그럼 그렇게 진행해 보지.”
그에 검제 역시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도 동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군사를 움직이고 사절을 보내는 데까지 시간이 좀 필요하니, 자네는 그동안 발렌티아 저택에 있는 것으로 하지. 물론 쭉 거기 있는 것처럼 대역을 만들어 놓으면 더 좋고.”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폐하.”
“좋습니다, 장인어른. 일단 소문은 타이니 경의 거절로 인해 저와 장인어른 사이도 다소 불편해진 것으로 가죠. 소문이란 자극적일수록 더 잘 퍼지는 법이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몰래 떠나는 건, 1주일쯤 시간을 두면 될까요?”
“그래야지. 수인족 사회에 다른 인간이 끼어들기는 어려울 테니, 제이를 통해서 상인 신분을 마련해 놓으마.”
“그럼 그동안은 서로의 실력 증진을 위해 각하와 대련이나 해야겠군요.”
대화가 잘 마무리되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그 말에 검제의 얼굴이 슬쩍 굳어졌다.
“……뭐?”
“왜 그렇게 보십니까? 수련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이 새끼가? 하는 표정이 눈에 보였지만, 검제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쓰읍…….’
단순히 기세만 읽어서는 견적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타이니의 경지가 자신에게 거의 근접했음을 의미했다.
거기다.
‘문나이트가 일방적으로 얻어맞았다는 소문도 있고 말이야. 데리고 왔을 때 모습도 그렇고…….’
적어도 확신이 설 때까지는 쪽팔릴 일이 없어야 하지 않을까.
검제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흐음. 아무래도 군대를 움직여야 하고, 네 신분을 마련하는 일도 있고…….”
하지만.
“혹시 쫄……?”
타이니의 그 한마디가 바로 검제의 인내심을 끊어 버렸다.
“덤벼라,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 어제 따귀의 수모를 갚아 주마!”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온 고함.
그러나 이내.
“장인어른, 따귀라니요?”
“아빠?”
자신을 향한 의아한 눈초리에 검제는 상황을 깨닫고 땀을 삐질삐질 흘리기 시작했다.
“……어흠. 그, 그게 말이 헛나왔습니다. 하, 하하.”
“그건 제가 잘 말씀드릴 수 있는데 말입니다.”
“넌 닥쳐!”
“크크크크.”
검제의 몸에서 살벌한 기운이 피어오르고, 여태 논의가 순탄히 진행되던 자리가 난장판으로 변해 가려는데.
“타이니! 그럼 네가 따로 출발하기 전까지는 내가 월을 데리고 있어도 되지?”
갑자기 끼어든 클로이의 말에 타이니의 혀가 꼬였다.
“……에으, 예?”
“된다는 걸로 알게!”
“컹!”
후다닥.
갑자기 월랑을 안고 뛰어서 사라지는 클로이.
그 황후답지 않은 말과 행동에, 금방이라도 난장판이 될 것 같던 분위기가 실소와 함께 정리되었다.
“……현명한 황후가 될 겁니다, 제 딸은.”
“이미 넘치도록 느끼고 있습니다, 장인어른.”
두 팔불출의 미소 사이에서 검제의 속을 긁어 대던 타이니만이 아쉬움에 혀를 찰 뿐이었다.
* * *
악마추종자와 광휘의 기사 일로 떠들썩하던 황도 아세리안에 또다시 새로운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광휘의 기사가 황제 폐하의 작위 수여와 관직 제의를 또 한 번 거절했다!
거기에 일각에서 구체적인 증인까지 나오자, 광휘의 기사와 검제, 그리고 황제의 불화설까지 연이어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굳건하게만 보이던 황제와 발렌티아 가문의 사이가 살짝 벌어진 듯하자, 그 순간을 노리고 있던 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이리스, 내 딸아. 반드시 황제 폐하의 눈에 들어야 한다. 알겠지?”
아르헨 폰 로머 자작은 딸을 향해 몇 번이고 당부했다.
그에 ‘붉은 머리’, 고혹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딸이 자신감 어린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아버지.”
발렌티아의 눈치를 보느라 어느 누구도 감히 황제의 후궁을 추천하거나 내세울 수 없는 시기.
하지만 그 대신 자신의 딸을 궁녀로 집어넣고자 하는 귀족은 흔했고, 그들은 황제가 아직 젊으니 궁녀도 미색만 곱다면 얼마든지 후궁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물론 그조차 눈치가 보이기에 자제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발렌티아와 황제의 불화설이 돌기 시작한 지금은 조금 분위기가 달랐다.
더구나.
‘이미 나는, 아니 우리 가문은 뒤가 없어. 더구나 이 타이밍이면 공작도 직접적으로 터치는 못 할 거야.’
사업 실패로 인해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로머 자작은 뛰어난 미모를 가진 딸에게 남은 모든 희망을 걸기로 작정했다.
다만 그런 그의 푸른 눈동자에 인간이 볼 수 없을 정도로 아주 흐릿한 분홍빛 기운이 맴돌고 있다는 것은 그 자신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번에 새롭게 궁녀로 뽑힌 아이들입니다.”
“으음.”
황실 시녀장, 에일리쉬 자작부인이 새 ‘후보’들을 내세우자, 흰머리가 가득한 노인이 인상을 쓰며 외눈 안경 너머로 그들을 한 명 한 명 살펴보기 시작했다.
“신분에 하자는 없겠지?”
“물론입니다. 모두 귀족가의 여식들입니다.”
“으음…….”
이미 30년 전부터 황실 시종장으로서 황궁의 모든 사용인을 관리해 온 애런 폰 로트만 백작.
그런 그가 어느 붉은 머리 여인을 눈에 담는 순간, 그의 눈동자에 분홍빛 기운이 슬쩍 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으음.”
“각하!”
“아, 괜찮네. 요새 좀 무리를 했더니만. 역시 은퇴해야 할 나이인가…….”
“그래도 아직 정정하신데…….”
황실 시종장과 시녀장이 덕담을 나누고 있는 사이, 붉은 머리 여인 에이리스, 아니 릴리스는 아무도 모르게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마력이 크게 소모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중간한 현혹은 안 통하겠어. 아무 방비도 없는 인간이 이 정도라면……. 호, 인간들 결계가 제법이야.’
마기를 몰아내는 강력한 광범위 결계.
하지만 초월급만 되어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준이었으니, 당연히 그녀에겐 큰 효과가 없었다.
그것은 황실 중심부에 있는 저 기분 나쁜 성물의 힘이 더해진다 해도 마찬가지일 터.
다만, 이 결계는 물리적인 제약보다 흑마법에 대한 교란 및 간섭 효과가 몇 배 이상 강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러면…….’
릴리스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의 지배자를 현혹하면 이미 빨라진 강림의 시간을 훨씬 앞당길 뿐만 아니라 인류의 저력까지 반 토막 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데모닉 웨폰을 만들자마자 이곳으로 왔다.
그런데.
‘……일이 생각보다 더 까다롭겠는데.’
어째 그냥 황제를 죽여 버리는 것이 더 쉬울 것 같았다.
물론 그랬다가는 인간들에게 괜한 경각심만 심어 주겠…….
‘아니, 아니지.’
이 나라의 권력은 황제 말고 다른 쪽에도 쏠려 있으니.
‘황제를 죽이고 그자에게 덮어씌우면……? 흐음, 재밌겠는걸?’
물론 현혹이 잘 먹히지 않는다면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뭐, 방법이 그것 하나뿐인 건 아니니까.
‘이 세상엔 나라도 참 쓸데없이 많으니.’
일단 성공만 한다면 일이 가장 쉽게 풀릴 방법을 찾았기에 이곳에 먼저 왔을 뿐, 혼란을 일으킬 만한 수는 차고 넘쳤다.
그러니.
“일단 간을 좀 보자고.”
운명의 변수가 사라진 후에 말이야.
궁녀 시험에 든 이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시각, 황궁의 깊은 곳에서는.
“꺄아! 저 강아지, 귀여…….”
“쉿, 정령님이야. 그 유명한 기사님의…….”
흐뭇.
꼬리를 풍차처럼 돌리며 쏟아지는 시종들의 시선을 즐기던 월랑이, 문득 느껴지는 이상한 기척에 궁의 저편을 바라보았다.
“킁?”
희미하지만 묘하게 기분 나쁜 느낌.
“월, 왜 그러니?”
월랑의 배를 쓰다듬고 있던 클로이의 시선 또한 녀석을 따라 황궁 외곽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