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24
24화. 발렌티아로 가는 길
루퍼스 패밀리가 박살 난 그날, 루센트 백작가에서도 난리가 났다.
단순히 뒷골목 조직 하나가 순식간에 와해된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 조직이 하필이면 제국법으로 엄격히 금지된 인신매매, 노예 판매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 대낮에, 그것도 여러 사람이 지켜보는 앞에서 만천하에 밝혀진 것이다.
게다가 하필 그 뒤를 봐주던 자가 루센트 백작가의 장자, 에드몬 폰 루센트라는 사실이, 백작가가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이미 루센티아 곳곳에 파다하게 퍼져 버렸다.
– 이 똥물에 튀겨 죽여 버릴 놈이……! 가문의 명예에 똥칠을 해!?
대로한 루센트 백작의 고함이 대전을 넘어 내성 전체에 울려 퍼졌고, 에드몬 폰 루센트는 그날로 백작가에서 축출되었다.
그야말로 전격적인 결정이었다.
물론 그것은 그간 망나니 에드몬이 쌓아 온 업보 탓도 컸을 터였다.
몸이나마 성히 쫓겨날 수 있었던 것이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배려였다. 그마저도 백작의 정실인 카릴 부인이 눈물로 호소한 덕분이었지만.
어찌 됐건 사람들의 선망 어린 시선은 결국 루퍼스 패밀리를 정리하며 이 사달을 일으킨 사람, 기사 비비안과 그 주인을 향해 모여들 수밖에 없었다.
“……놈들의 금고에서 몰수한 돈 덕에 저희 백작가가 황실에 낼 벌금은 일부 충당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에 백작 각하께서 ‘감사’의 인사로 공녀님께 예물을 보내셨습니다. 받아 주시겠습니까?”
스스로를 램버트라 소개한 백작가 기사의 말에 클로이는 당혹스러워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히 받아들이겠다, 그리 전해 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다만 백작 각하께서 몸이 편찮으신지라, 아무래도 공녀님의 환송식에는 참여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러시겠지요. 이해합니다.”
몸만 편찮으시겠어요? 아주 속이 뒤집히셨겠지…….
클로이는 목젖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예의상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기사가 방을 나서자마자 원망스러운 눈으로 곁에 있는 비비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비비안은 더욱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방구석에 시립해 있던 검은 머리 소년을 노려보았다.
타이니는 뻘쭘한 표정으로 공녀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그 말에 클로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백작과의 관계가 많이 껄끄러워질 거야.”
“……죄송합니다.”
“정말 잘못했다고 생각해?”
클로이가 묘한 표정으로 되묻자, 타이니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건…… 솔직히 아닙니다.”
“타이니!”
지나치게 솔직한 대답에 곁에 있던 비비안이 오히려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아하하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
클로이가 언제 한숨을 쉬었냐는 듯 환하게 웃자, 비비안이 당황하며 공녀를 돌아보았다.
“그래,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잘했어! 오히려 에드몬 공자의 처벌이 그 정도로 끝난 게 안타까울 뿐이야.”
“공녀님!”
“공과 죄는 신분과 상관없이 항상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아버지가 항상 하시는 말씀이야. 잊었어, 비비안?”
“……그럴 리가요.”
공작의 이름이 나오자 비비안은 깨갱 하며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다만 억울한 점은 있었다.
“그럼 왜 저를 그런 눈으로…….”
“에드몬이 기절했었다면서? 그때 팔다리 하나라도 다시는 못 쓰게 박살 내 놨어야지. 결국 멀쩡히 자기 외가로 도망친 게 됐잖아, 아무 벌도 안 받고!”
“아…… 그런 깊은 뜻이…….”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비비안의 표정에는 억울함이 남아 있었다.
그런 둘을 보며, 타이니는 피식 웃었다.
‘이때부터 이랬구만, 이 두 사람.’
그중에서도 그의 시선은 비비안을 향해 있었다.
검제의 막내딸과 공작가의 천재 여기사.
클로이의 전속 호위 기사로 있던 시간이 너무 길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애초에 그녀의 한계가 거기까지였을까.
비비안은 현재 20대 초반임에도 4단계 블레이더까지 도달했지만, 20년 뒤에도 초인의 경지에는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후일 클로이의 상황이 변한 뒤에는 강력한 6단계 챌린저(Challenger)급 강자로 거듭나 그녀를 철통처럼 호위했다.
‘명성이 자자한 콤비였지.’
때로는 자매처럼, 때로는 모녀처럼 독특한 궁합을 보여 주는 둘은 세간의 화제였다.
언니, 혹은 엄마 역할을 맡는 게 한참 어린 클로이 쪽이라는 것이 더욱 흥미 요소가 되어서 말이다.
‘하여간에 재밌어.’
타이니의 흐뭇한 감상은 그녀들의 시선이 그를 향하는 순간 깨졌다.
“어떻게 생각해, 타이니?”
“……에드몬 그놈에게는 후계권을 박탈당한 것 자체가 큰 징벌일 겁니다. 뭐, 그걸로 놈의 죄가 씻기진 않겠지만 아무런 벌도 안 받았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요.”
“보세요. 얘 열세 살 아니라니까요!”
“……이야, 역시 똑똑해! 네 주인 짱이다, 월. 그치?”
둘의 상반된 반응은 확실히 보는 재미가 있었다.
다만.
“컹!”
……월?
“아, 발음이 힘들어서 말이야. 문울프(Moon Wolf)도 이상하고, 그냥 월이라고 부르기로 했어. 얘도 좋아하던데?”
“끼잉.”
도리도리.
격렬하게 고개를 젓는 월랑의 모습에, 클로이는 ‘꺄!’하는 감탄사와 함께 볼을 비비적거렸다.
확실히 습관적으로 동방어를 쓰는 제 경우가 좀 유별난 것이지, 발음을 어려워하는 게 보통인 것 같기는 했다.
‘……좀만 참아. 미안.’
월랑의 표정이 구겨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지만, 타이니는 슬며시 친구의 고통을 외면했다.
“흠, 그럼 저를 탓하지는 않으시는 겁니까?”
“그럼. 왜 탓해? 잘했어, 타이니!”
“엑!”
단순히 말로 칭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는, 아직은 그보다 한참 키가 큰 소녀를 보는 소년의 표정은 어색하기만 했다.
거기다 한술 더 떠 마치 어린 동생을 가르치듯 새끼손가락을 내밀기까지.
“하지만 앞으로는 무슨 일을 벌이려면 반드시 미리 말하고 해, 알았지? 자, 약속.”
예상치 못한 그녀의 자상한 모습에, 타이니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공녀님.”
“치.”
끝내 손가락을 걸어 주지 않는 타이니에게 서운한 건지, 클로이는 자신의 손과 그를 번갈아 보며 볼을 부풀렸다.
‘확실히 이때는 어리기는 했구나.’
타이니가 새삼 그렇게 생각하며 가만히 그녀를 바라볼 때였다.
비비안이 그의 곁에 바짝 붙어 귓속말로 쏘아붙였다.
“……좀 살갑게 좀, 나이답게 좀! 원하는 걸 얻고 싶으면, 인마.”
“아. 하. 하…….”
타이니는 다시금 어색하게 웃었다.
애답지 않게 무뚝뚝한 태도가 영 못마땅한 모양이었지만, 알맹이가 삼십 대인 마당에 그는 도저히 그렇게까지 어린 척을 할 수는 없었다.
* * *
클로이 일행이 루센티아를 떠난 것은 바로 그다음 날이었다.
타이니가 증언한 흑마법사에 대한 건으로 일정을 앞당긴 것도 있지만.
졸지에 루센트 백작가의 후계 구도에 강력하게 간섭해 버린 입장이 된지라, 오래 머물기 어려운 상황이 된 탓도 있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이유를 모두 제공한 소년은, 불과 며칠 만에 그 일행에서 가장 고귀한 소녀의 곁에 머무는 것이 당연한 모양새가 되었다.
물론 본인은 그 상황이 그리 달갑지 않았지만 말이다.
달그락달그락.
“……저, 제가 굳이 여기에 있어야 하는 겁니까?”
“왜? 불편해?”
‘……예, 무지하게 불편합니다.’
비좁은 마차 안에서 빤히 자신을 응시하는 클로이와 비비안의 시선이 어찌 부담스럽지 않을까.
하지만 섣불리 진심을 꺼낼 수는 없었다.
“밖에 다른 기사님들도 계신데…….”
“그 사람들은 들어오라고 해도 안 들어오는걸.”
아니, 들어오라고 진짜로 말해 봤단 말이야?
아랫사람과 허물없이 어울리는 클로이의 성정은 알고 있었지만, 어릴 때부터 그랬을 줄은…… 아니, 어릴 땐 더 심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땐 적당한 거리는 지켰던 것 같은데……. 그게 오히려 연륜이 쌓인 결과였던 건가.’
어쨌거나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타이니는 다시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저, 제가 이런 마차를 타 본 것이 처음인지라.”
되는대로 내뱉은 말이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전생에는 덩치 때문에 못 탄 거지만…….’
세상에 어떤 평민이 육두마차를 타 보겠는가.
하지만 이 마차의 주인은 그 속을 모르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익숙해지면 말보다는 훨씬 편해. 여기에는 마법적 처리도 되어 있어서 크게 흔들리지도 않고.”
빙긋 웃는 그 예쁜 모습에 타이니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나를 믿어 주는 것이야 좋지만,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저를 경계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왜? 경계해야 돼?”
“아니, 그……런 건 아닙니다만…….”
너무나 태연스러운 대답에 오히려 타이니의 말문이 막혔다.
당황하는 그를 보며 클로이가 다시금 피식 웃었다.
“네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짐작은 할 수 있지. 네 태도나 말투가 그렇게나 어린아이답지 않으려면 많은 고생을 했을 거야.”
“그래도…….”
“정말 네가 날 속일 생각이었다면, 좀 더 또래 같은, 어린애 같은 모습을 보이며 접근하지 않았을까?”
……아.
“그리고 너 때문에 필레스 소식에 귀 기울이다 보니, 웬 검은 머리 꼬마 기사가 암흑가 조직을 박살 내고 착취당하던 피해자들을 모두 해방시켰다는 소식도 들었거든. 루센티아의 그 조직 일 처리도 그렇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참 잘했어, 타이니.”
새삼 칭찬하곤 한쪽 눈을 찡긋하는 클로이를 보며 타이니는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그제야 또 간과했던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클로이는 그가 아는 모든 사람 중에서도 가장 현명한 축에 속했었다는 걸. 결코 생각 없이 행동할 사람은 아니라는 걸 말이다
하지만 그가 클로이의 어른스러운 면모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무엇보다…… 얘, 월.”
“킁.”
그녀에게 안겨 있던 작은 월랑이, 이제는 다 포기한 듯 작게 콧바람을 내뿜었다.
“꺄.”
클로이는 그런 월랑이 또 귀엽다며 볼을 비비적거렸다.
그러다 월랑이 허망한 표정으로 다시 축 늘어진 뒤에야 다시 말을 이었다.
“……정령술사가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라는 것은 보통은 얘기로만 듣고 알지만, 나는 직접 경험해 보기도 했거든. 그러니 믿는 거야.”
글쎄, 난 보통 정령술사와는 좀 다른 것 같은데.
어쨌건 또 생각지도 못하게 월랑의 도움을 받은 것 같았다.
이 상황이 나쁠 것은 없으니.
“낑.”
……미안하다.
피곤한 월랑의 눈빛을 또다시 슬며시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공작을 만날 때까지만 참아 다오.’
그리고 자신도 마차 안에서 탈출하는 것을 일단은 포기해 버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빨리나 갔으면 좋겠군.’
최대한 빨리 공작을 만나서 그가 준비한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재앙에 대한 준비는 빠를수록 좋을 테니까.
하지만 공작가로 향하는 길이 이렇게 평온하기만 하니, 억지로 서두르자고 해 봐야 먹힐 리가 없어 보였다.
타이니는 홀로 답답한 마음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사흘.
타이니가 이제야 비로소 자신을 과거로 돌려보낸 원흉(?)을 만나게 된다는 생각에 조금씩 긴장하기 시작할 무렵, 일행은 야영지에서 뜻밖의 손님을 맞이하게 되었다.
“공녀님. 어떤 엘프분이 잠시간 동행을 청하셨습니다.”
“엘프!?”
기사의 말에 놀라는 것도 잠시, 클로이의 얼굴에 은은한 설렘이 떠올랐다.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세상에서 아름답기로 유명한 요정의 후손, 엘프는 보통 인간에게 있어 언제나 신비롭고 부러운 생명체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게다가 제국에서는 엘프를 볼 일이 드물기도 했다.
서대륙을 기준으로 중앙부에서 동쪽으로 조금 치우친 제국과 서쪽 끝에 있다는 엘프들의 왕국 엘븐하임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으니까.
“세계수의 수행자, 이리나가 일행의 주인께 인사드립니다. 잠시 동행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회색 로브의 후드가 걷히면서 나타난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얼굴에 일행은 순간 실례인 것도 잊고 나직이 탄성을 터트렸다.
연녹색 머리에 뾰족한 귀,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싱긋 웃는 미소까지. 그야말로 나무의 요정이 환생한 듯한 미모였다.
하지만 타이니의 안색은 자신도 모르게 굳을 수밖에 없었다.
– 컹!
월랑의 울음이 머릿속에 번지고, 급격하게 동조된 정령의 감각이 경고를 발했으니까.
‘엘프가…….’
정령술사의 자질을 기본적으로 타고나며, 그래선지 순수하고 선하며 평화를 사랑하는 성향을 보인다는 엘프.
그 사실을 증명하듯 주변으로 청량한 마나의 바람을 연신 뿜어내고 있는 연녹색 머리 엘프의 심장 주변에는…….
우우웅.
칙칙한 마기의 서클이 무려 ‘다섯 개’나 존재하고 있었다.
‘……흑마법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