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241
241화. 라이칸으로
“하지만 난 여전히 의문이야.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변장에 바쁜 제이 대신 라프탄이 했다.
“소심한 이들이 혹시나 싶어서 하는 대비라고 생각해. 이것으로 티아 상단과 용병 잰슨에 대한 알리바이는 확실히 생길 테니까.”
스스슥.
그 말과 동시에 주변 환경에 동화되며 다시 반투명한 괴물처럼 변하는 라프탄.
그 능력이야 새삼 놀라울 것도 없었지만, 그렇게 얻어맞고도 꿋꿋하게 자신을 반말로 상대하며 눈을 피하지 않는 강단만큼은 볼 때마다 새로웠다.
‘하긴 큰 악당도 깡이 있어야 하는 거지.’
자연스레 녀석의 전생이 떠오르는데, 깡 좋은 놈이 감각도 민감한 건지 그 순간 녀석이 흠칫하는 게 보였다.
“왜, 왜 그렇게 봐? 나 아무 짓도 안 했어. 네 말대로 열심히 X 빠지게 조사하고 왔다고!”
“그래, 알겠다. 라이칸 상황은?”
“거의 예상대로야. 내외궁의 외부 경비 태세나 병력 상황은 여기 적어 왔어. 사흘 동안 조사한 거니까 확실할 거야. 그리고 여기, 체베르라는 놈이 있을 만한 후보지 세 군데. 결계의 힘이 너무 강한 탓에 나도 들킬 것 같아서 못 들어가 본 곳만 표시한 거야.”
라프탄이 품 안에서 주섬주섬 꺼내 든 양피지를 확인한 타이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사절단은 언제 라이칸에 도착하지?”
“이제 거의 일주일 뒤?”
“시간도 적당하군.”
“그리고 이거. 여기서 라이칸까지 혼자서 몸을 숨기고 이동할 만한 숲길 코스야. 인적이 드문 길이니, 너라면 그 거대한 망치를 들고도 며칠 안 들키는 것 정도야 거뜬하겠지.”
“그래. 연합에서 어찌 나올지 모르니, 서두르자고.”
“그런데 정말 우리 둘이……?”
“그래. 그래서 여기다 알리바이를 만든 거잖아. 여차하면 몸 빼기 편하게.”
혹시나 하는 경우, 다시 잰슨의 신분으로 시치미를 뗄 생각으로 준비한 알리바이.
하지만 그 말에 라프탄은 어색한 얼굴로 웃었다.
“나도 싸워야 하는 거지?”
“여차하면.”
실제로 이 티아 상단 내에서 그를 제외하면 가장 강한 것이 라프탄이다.
무려 6단계 정령술사인 데다 그 특성이 잠입, 변신, 교란에 특화되어 있기까지 하니 어찌 데리고 가지 않을까.
하지만.
“……라이칸 늑대의 궁 살벌하던데. 나는 거기 입구 지키는 백인장급 열 놈도 감당 못 할 것 같단 말이야.”
미리 탐사를 하고 온 라프탄은 잔뜩 위축된 상태였다.
물론 제국의 계급으로 치자면 기사쯤 되는 백인장은 최소 익스퍼트급으로, 수인족의 강력한 육체 능력을 고려하면 정령사가 그 열을 상대할 수 있는 전투력도 객관적으로는 대단한 것이다.
은근히 능력 어필을 하는 것치고는 정말 쫄아 있는 모습.
‘나한테 개기던 깡은 이럴 때는 어디로 간 걸까.’
절로 피식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걱정 마. 계획대로만 된다면 싸우는 건 나만 할 테니까. 넌 시키는 일이나 잘해.”
“……부탁한다.”
“못하면 버리고 튈 거지만.”
“뭐!?”
이 녀석, 놀리는 재미가 있네.
화들짝 놀라는 라프탄의 목소리에 한껏 붓을 놀리고 있던 제이 화백이 뒤돌아 인상을 썼다.
“일단 거기서 나오시죠. 이 친구도 들어갈 수 있게끔 좀…….”
“그거야 쉽지.”
그 말에 타이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정령의 힘을 끌어오려 했다. 혹시라도 마나를 크게 움직이면 감옥의 마나 결계가 외부에 신호를 보낼까 걱정한 것이다.
그런데.
– 컹!
제국에 두고 온 영혼의 반려, 월랑이 거부했다.
‘뭐야, 너. 왜 그래?’
– 컹!
뭔가 불길한 게 가까이 왔다고?
‘그게 뭔데?’
– 컹!
아직 모른다고?
‘……너 지금 뺑끼 쓰는 거지?’
굉장히 합리적인 의심이었지만, 바로 반발이 돌아왔다.
– 컹! 컹!
‘아, 알았어. 미안. 그래, 좀 더 있어라.’
쓰읍.
이내 가볍게 숨을 들이쉰 타이니가 감옥의 창살을 움켜쥐었다.
사실 굳이 월랑의 힘이나 마나가 없어도.
‘이 정도야.’
끼이이이이잉.
힘을 주는 순간, 창살이 그대로 휘어지며 그의 몸이 나갈 만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정련된 제국산 강철보다 몇 배는 튼튼하다는 북부 산맥산 흑강철로 만든 창살이 일순간에 휘어 버리자, 라프탄의 얼굴에 감탄이 어렸다.
“……역시 초인쯤 되니까 이런 지방 도시 감옥의 결계에는 영향도 안 주고 마나를 쓰는구나.”
“마나 안 썼다. 괜히 실수라도 해서 신호가 가면 곤란하니.”
“뭐?”
피식.
그 말에 아까보다 더 놀라는 라프탄을 무시하고 제이를 보니, 그가 완전히 잰슨으로 변한 하인의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다.
“롭, 길어야 몇 주다. 고생해라.”
“예, 각하.”
바로 고개를 숙이며 타이니가 있던 자리로 들어가는 하인.
하지만 그 행동보다 말이 더 신경이 쓰였다.
“각하?”
“아, 우리 요원들이 나를 부르는 호칭입니다. 그래도 명색이 백작이니까요.”
“백작!?”
타이니가 깜짝 놀라며 눈을 부릅떴다.
전생의 경험상 정체를 숨기고 다니는 이들을 본능적으로 꺼렸기에 제이를 처음 봤을 때부터 반말을 썼는데, 설마 그가 귀족일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제이의 반응은 덤덤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우리 조직 수장의 명예직 같은 거니까요. 아무튼, 이제 경 차례입니다.”
“아, 아. 그렇지.”
제이가 손짓하자, 타이니는 그에게 가기 앞서 다시 창살을 잡고 힘을 주었다.
“흡!”
그그그그극.
기합 한 번에 다시 휘어지는 창살.
빠져나올 공간을 만들 때보다, 남들이 보기에 이상하지 않게끔 창살을 원래대로 펴는 데에 훨씬 많은 시간이 들었다.
“아으, 망할 손자국…….”
그리고 그로부터 십여 분 후.
“еткрпледйедвр(수고하십시오).”
제이는 감옥에 들어갔던 모습 그대로 하인과 함께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이번에도 역시나, 그 뒤쪽 벽에 숨어서 꿀렁거리는 반투명한 존재의 기척을 눈치채는 병사는 없었다.
* * *
대륙 북부의 넓고 험악한 산악 지대에 자리 잡은 웨어비스트의 영토는 대부분이 산지.
그중에서도 조금 북쪽으로 치우쳐 있는 도시, 라이칸은 사실 일반적인 국가의 수도로 보기에는 위치가 상당히 좋지 않았다.
신화시대에 융기된 그 거대한 땅덩어리 가운데서도 비교적 완만한 곳에 자리하고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라이칸의 고도는 웬만한 산지 중에서도 높은 축에 속했으니까.
“아세리안에 비교하면 거의 3km는 더 높다고 했던가?”
“어. 마나유저가 아니라면, 제국 사람은 여기서 한 달만 살아도 골골거릴 거야.”
타이니의 말에 퀭한 안색의 라프탄이 바로 응답했다.
실제로 허약한 육신의 인간 중 다수는 그저 며칠 머무는 것만으로도 고산병에 걸릴 정도였다.
더구나 그 높은 고도에 북부의 추운 날씨까지 더해진 곳이니, 평범한 사람이 살기엔 척박한 환경이었다.
수백 년 전 아스란 제국과 웨어비스트의 전력 균형이 극심하게 기울어졌던 때, 여름에 라이칸까지 진군했던 제국의 병사들 다수가 밤중에 얼어 죽는 바람에 아스란이 수도 함락을 코앞에 두고 물러서야 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남아 있기도 했다.
물론 그것은, 지금 라이칸을 앞두고 있는 초인에게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나마 잘 닦여진 관도를 두고 숲과 산을 지그재그로 넘어서 내달리기를 이틀.
그렇게 인적이 없는 길만 골라 다닌 덕에 여기까지 접근하는 동안 별 불편함도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상단으로 위장할 필요도 없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물론 녹턴을 들고 홀로 잠행하다가 한 번이라도 수인족들의 눈에 띄었으면 그대로 아웃이었을 테니, 그건 다 허튼 생각이겠지만 말이다.
물론.
“괴물 새끼……. 발로 뛰는 놈이 라미를 탄 나보다…….”
옆에서 그를 째려보는 라프탄을 보면, 그조차 오직 타이니 개인의 감상일 듯했다.
아무튼 지금부터가 문제였다. 원래 계획대로 하기에는 변수가 너무 커졌으니까.
“쓰읍. 연합이 군사 행동으로 나서면 정말 대전쟁이다. 절대 안 되지. 그 전에 끝내야 해.”
“그 얘긴 제이 님한테도 계속 들었어.”
그러고 보니 이놈은 왜 제이한테는 존대고, 나한테는 반말이지?
“……또 왜?”
“아냐.”
“아씨. 너 진짜 가끔 무섭다고.”
……무서운 거치고는 너, 너무 잘 까불지 않냐?
할 말이 많았지만, 일단 급한 상황에 집중하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처음 계획은 사절단이 도착하고 회담을 위해 늑대의 궁 정예들이 밖으로 나오거나 한곳으로 몰릴 때를 노리자는 것이었다.
제이나 라프탄 혹은 사절단의 요원들이 체베르의 위치를 빠르게 확인 후 타이니에게 전달하면, 그가 회담 중에 놈을 암살한다는 계획.
‘체베르라는 놈에겐 공식적으로는 권력이 없다.’
웨어비스트의 전통, 7대장군 모두의 인정을 받기 위한 왕위 계승행을 문나이트 축출 사건으로 인한 반발 탓에 아예 시작도 못 하고 있는 상황이니, 녀석에겐 회담에 참여할 자격이 없었으니까.
체베르를 처리하면 사절단이 그 배후로 의심받긴 하겠지만, 그 인원에 문나이트도 포함되어 있으니 반발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을 터.
아니, 아예 그 참에 문나이트가 웨어비스트를 장악하는 것이 베스트 시나리오였다.
말룸의 수장이 죽었으니, 그 잔당이 남았다고 한들 크게 힘을 쓰지는 못할 테니까.
– 웨어비스트까지 인류 연합에 대해 한목소리를 내게 되면, 왕국 연합도 더 이상 현실을 외면하지 못할 것이네. 그러니 타이니 경, 부디 힘을 내 주게.
– 그렇게만 되면 그 앞뒤 꽉 막힌 드워프들도 자연스레 호응하게 될 테니까. 마무리 잘하거라.
황제와 검제의 말은 전후 사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빨리 인류 연합을 확정 짓고 수련만 한다. 아르곤도 찾고, 하이넨도 찾아서 수련만 시키면 돼. 제나스 경처럼 전생에는 요절한 인재들도 찾아서 같이.’
강림이 빨라진다 해도, 지금 상황이 전생보다 훨씬 낫다는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다가올 강림을 온전히 막아 낼 수 있겠냐고 묻는다면, 당당하게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은 없었다.
‘마수병단은 어떻게 처리한다 해도, 그건 시작에 불과할 테니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아, 아니다. 일단 눈앞의 문제부터 해결해야지.”
“뭔 소리야?”
그래, 당장은 눈앞의 문제부터.
황실에서 알아본 결과, 7대 장군 중 하나이자 실버 팽의 동생인 회색 바람이 현재 웨어비스트를 움직이고 있다는 것부터 변수였다.
‘실버 팽의 동생이라…….’
전생에는 ‘악마추종자들의 난’ 때 희생되어 죽었다고 알려졌었지만, 지금 일이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그놈도 말룸의 하수인일 확률이 높아.’
친우에게는 안타까운 소식이지만, 그게 눈앞의 현실이었다.
– 내, 내 눈으로 확인하겠소이다. 그럴 리가 없소!!
이 계획을 처음 전했을 때 실버 팽이 보인 반응이 다시금 떠올랐지만.
‘미안하다, 사림. 네가 확인할 때까지 기다려 줄 만한 상황이 아니야.’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 동생이라는 놈이 말룸의 하수인이 아니더라도 죽여야 할 판이다. 그래야만 문나이트가, 자신의 동료가 웨어비스트를 장악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하수인일 확률이 훨씬 높지만 말이다.
‘내가 사림 대신 확인하고, 맞다면…….’
아무리 대의를 위해서라 해도 친우에게 친동생을 죽이라 할 수는 없으니.
“내가 죽여야지.”
“무, 무슨, 갑자기 그런 무서운 말을 하냐? 그냥 무슨 생각 하냐고 물어본 게 단데!??”
응?
그 뜬금없는 대답에 옆을 돌아보자, 라프탄이 파리한 안색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나, 나 죽인다는 거 아냐?”
“……너 나한테 뭐 잘못한 거라도 있냐?”
“아, 아니! 절대! 앞으로도 안 할 거야!”
“그럼 됐다.”
“잘못하면 죽인다는 거냐…….”
이쯤 되면 우리 친해진 거 아니었냐.
라프탄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은 가볍게 씹어 주었다.
“시끄럽고. 이제 들어갈 준비 해야지.”
끙.
라프탄이 혀를 차며 짧게 신음을 토하는 순간.
우드드득.
녀석의 몸이 한순간에 부풀어 오르더니, 덩치가 거의 2m에 가까운 사자 머리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과연, 의태와 거대화 특성을 조합하면 그런 것도 되는구나.”
“улввгыплцд!”
타이니의 감탄에, 근육질의 사자 수인족이 된 라프탄이 빙긋 웃으며 수인어로 대답했다.
“뭐라는 거냐?”
“당연하다고.”
오크족과 엘프의 경계선에서 살아온 라프탄은 수인어, 아니 오크어도 꽤 잘했다. 애초에 녀석을 데려온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그것이었다.
“넌? 빨리 보여 줘야지!”
사자 머리 인간이 그렇게 기대에 찬 시선을 보내자, 타이니 역시 피식 웃으며 영혼의 파트너를 향해 신호를 보냈다.
‘월랑, 이쯤 하지? 그만 놀고 와.’
그가 지금 하려는 것은 반정령화.
그 상태로 밤중에 허공을 날아서, 라프탄이 라이칸 안에 잡아 놓은 숙소 안으로 숨어들 생각이었다.
‘그게 최선이야.’
물론 하늘을 날아서 그대로 내궁으로 떨어져 내리면 침투 자체는 쉽겠지만, 반정령화의 물질 투과 권능은 마나로 가득한 왕궁 결계 안에서는 힘을 못 쓴다. 게다가 반정령화 상태로도 육체적 데미지를 감수해야 하는 그림자 숨기와 같은 은신법 또한 아직은 루나처럼 완전하지 않았다.
그러니 만약 체베르를 만나기 전에 발각되거나 다른 변수가 생긴다면, 그 뒤에는 처절한 혈전만이 남을 것이다.
혹시라도 실패했다가는 다음 기회를 잡기도 어려울 테니, 그 전에 체베르의 위치나 지금 집권 대행인 회색 바람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움직이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 컹!
절대 안 된다.
또다시 월랑에게서 생각지 못한 반발이 전해져 왔다.
‘너 그만큼 놀았으면 됐지…….’
억지로라도 녀석을 끌어오려 했는데.
– 컹! 컹!
“마기가 근처에?!”
“갑자기 무슨 소리야?”
“기다려 봐!”
타이니의 얼굴이 와락 구겨지는 순간, 그의 의식이 공간을 뛰어넘어 아세리안의 황궁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