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243
243화. 황궁 테러
접근은 조용히, 티 나지 않게. 몰아칠 때는 벼락처럼 한순간에, 치명적으로.
맹수의 사냥법은 비단 자연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다.
특히나 힘의 차이에 의한 사회적 폭압까지 허용되는 마계에서는 모든 관계에 확대 적용되는 법칙 같은 격언이다.
그랬기에 릴리스는 아스란의 황궁에서도 같은 방식을 택했다.
‘차근차근 하나씩, 티 나지 않게.’
언제 만들어진 건지는 몰라도 제법 강력한 이 황궁의 결계 안에서는, 후작급을 앞둔 데다 장래 언데드 군단의 7대 장군 자리까지 약속받은 그녀의 마법도 잘 통하지 않았다.
더구나 목표가 있는 중심부에는 여신의 파편이 가진 결계까지 중첩되어 있어서 현혹 마법이 쉽게 흐트러지곤 했다.
물론, 그렇다고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어려울수록 더 재미있는 법이니까.’
릴리스가 붉은 입술을 핥더니 미소를 지으며 눈앞의 시종들을 바라보았다.
– 최대한 나를 도울 것. 그것이면 충분해요. 알겠죠, 여러분?
“물론이지.”
“친구라면 도와야지.”
“물론이네, 리스 양.”
“나만 믿어!”
눈동자에 은밀하게 분홍빛 마력이 깃든 시종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녀를 향해 호의적으로 웃어 보였다.
암시 마법은 대상의 자아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사고방식을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심을 때 가장 효율적이니, 본래 ‘남을 돕는 것’이 직업인 시종들에게는 이런 방식이 적합했다.
이제 이들은 자발적으로 릴리스의 존재를 숨겨 줄 것이며, 자신의 안위에 ‘직접적인’ 위험을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무조건 그녀를 도울 것이다.
그 ‘도움’이 결과적으로 반역으로 이어져 스스로의 목을 조이게 되는 것까지는 차마 생각하지 못하고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 나를 지켜 주세요. 제 일까지 도와주면 더 좋고요.
“레이디를 지키는 것은 기사의 의무. 당연한 말이지요.”
“맡겨 두십시오.”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특히 목표를 곁에서 호위하는 친위대의 경우에는 특별히 공을 들였다.
중첩된 결계 안에서도 마법을 유지하려면 그녀 역시 심혈을 기울여야만 했으니.
“오늘 밤, 제 방에…….”
“예. 영광입니다, 레이디.”
그들에겐 특별히 정혈까지 투자해 가며 공을 들였다. 항상 황제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변태 같은 한 놈은 빼고.
이제 이 황궁 안에 걸림돌……이라기보다 조금 거슬릴 만한 자는 하나뿐이었지만.
“티네스……. 아! 빙염의 마도사님이요? 그분은 황실 마탑 안에서 잘 안 나오세요. 더구나 아직 탑주가 되신 지 얼마 지나지 않으셔서…….”
그 또한 운 좋게 쉽게 해결되는가 싶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있었다.
‘저것들…….’
“컹!”
“월, 진정해. 또 왜 그러니?”
여신의 종이자 여신이 만들어 낸 혐오스러운 기운의 결집체, 정령.
마계에서는 전해지는 얘기만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하필 그 정령이 ‘본질을 보는 눈’까지 가지고 있으니 더욱 짜증이 났다. 왠지 어디선가 본 것만 같은 기시감도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실로 짜증 나는 변수. 마법이 걸릴 때마다 황급히 취소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으니, 저것들에게 접촉하는 순간 자연스레 마법이 사라지는 쪽으로 다시금 현혹을 세팅해야만 했다.
그 때문에 당초 계획보다 더 시간이 걸렸다.
‘저 주변은 적당히 격리해야겠어. 나중에는 쫓아내고.’
그렇게 공을 들여 작업한 지 한 달째.
‘꽤 귀찮았단 말이지, 이 결계 때문에. 그년과 정령도.’
드디어 목표를 홀릴 만한 밑 작업이 끝이 났다.
그런데 이변이 발생했다.
“폐하를 뵈어야겠습니다. 자리를 비켜 주시겠어요?”
“물론입니다, 레이디.”
일개 시종의 말에 집무실 문 앞에서 물러서는 호위 기사.
말도 안 되는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그때.
– 쾅!
– 가, 각하! 대체 왜 이러시는!
– 물러서라!!
– 꽈아아아아앙!
‘이건 또 뭐?’
거사 직전의 순간, 외부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넓은 황궁인 만큼 그 소리는 아직 그녀의 감각에만 포착이 되고 있었지만, 계획이 틀어지고 있다는 신호임은 분명했다.
지금 황도에서 그나마 그녀를 견제할 만한 무력을 가진 두 사람 중 한 명이, 그녀의 하수인들을 제압하며 황궁으로 진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릴리스의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는 둘째 치고, 일단 놈이 무언가 눈치챈 것 같으니 이대로 물러서서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할지가 고민되었다.
‘이대로 강행? 아니면 두 번째 계획?’
결론은 빨랐다.
‘둘 다!’
이대로 황제를 홀려 검제와의 싸움을 유도한다.
검제가 굴복하면 그것으로 끝이고, 굴복하지 않는다면 제국의 내분이 시작되는 것이니 그 또한 나쁘지 않다.
그러니.
“모든 기사들에게 전해라. 목숨을 걸…… 아니, 최대한 침입자를 저지하라.”
“……예.”
대답하는 기사들을 보며 릴리스는 나직하게 혀를 찼다.
정상적인 환경에서라면 이런 하찮은 것들이 목숨까지 바치게 하는 것쯤은 어렵지 않을 테지만, 이 짜증 나는 결계들의 방해 속에서는 괜히 애써 공들인 마법만 깨질 위험이 있다.
‘그래도 시간은 끌어 주겠지.’
릴리스는 싱긋 웃으며 그대로 집무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그그긍.
“뭐지?”
챙.
예고도 없이 열린 집무실의 문에 익실란은 바로 검을 꺼내 들며 반응했다.
그런데 들어오는 것은 과하게 야한 복장의 여시종 한 명뿐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싶었지만, 훈련된 감각은 충실하게 자신의 직무를 수행했다.
“멈춰라! 넌 뭐……!”
그렇게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기사님은 쉬세요.”
우웅.
가벼운 한마디와 함께 눈앞에 분홍빛 기운이 어리는가 싶더니, 일순간 아찔한 감각이 전신을 덮쳐 왔다.
몸이 일순간 통제를 벗어나는 듯한 소름 끼치는 느낌에 휘둘리는 사이, 그 시종이 황제를 향해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안…… 돼!”
까륵.
혀를 깨물어 피를 내니,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쿵.
그대로 무게를 실어 시종에게 달려들려는데.
“이래서 결계가…….”
쾅!
‘아, 안 돼!’
눈에 보이지도 않는 무언가가 전신을 덮쳐 왔고, 형언할 수 없는 충격과 함께 그대로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져 갔다.
그의 뒤에 서 있던 나머지 호위 기사 둘이 시종을 향해 다가가는 광경을 끝으로.
“주인을 뵙습니다.”
“뵙습니다.”
익실란이 쓰러진 것과 거의 동시에, 금방이라도 릴리스를 향해 달려들 것 같던 나머지 호위 기사 둘이 오히려 그녀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제야 반응한 황제.
“뭐냐, 네년은!?”
그 순간 그의 전신에서 막대한 마나가 솟구치며 온몸을 감싸는 강력한 보호막을 만들어 냈다.
“호오…….”
이것이야말로 과거 반역자 루드비히가 경계하고 벗겨 내려 했던, 황제 전용 아티팩트들의 진짜 효과.
황제 개인은 이제야 4서클에 막 오른 마법사 수준에 불과했지만, 지금 그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시전된 마법은 무려 8서클에 준하는 수준이었다.
그래, 준하는.
달리 말하면, 8서클에 ‘완전히 미치지는 못하는’ 수준이라는 것이었다.
우우웅.
“역시 ‘귀족’급의 마법은 초월무구로도 쉽지 않지. 제약도 많이 붙을 테고.”
릴리스의 입에서 여유로운 목소리가 나오는 순간.
“주인께, 이 목숨을.”
“바칩니다.”
콰직.
오늘을 위해 그녀가 심혈을 기울여 정혈을 주입해 놓은 두 기사가 스스로의 심장에 칼을 꽂았다.
우우우웅.
그와 동시에 그들에게서 쏟아진 마나가 금세 분홍빛 마기로 변해 그녀의 손으로 옮겨 갔다.
“결계만 없었어도 굳이 이런 꼼수는 필요 없었을 텐데 말이야.”
“어떻게 결계 안에서 그런……. 설마, 악마급 마족인가?”
“악마와 마족의 차이를 아는가 보군, 인간.”
뭐, 제국의 황제라면 그럴 수도 있지.
릴리스는 자신의 전면에 마법진을 형성하며 씩 웃었다.
그녀가 마력을 끌어 올리자 등 뒤의 작은 날개가 돋아남과 동시에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한 쌍의 뿔이 자라나기 시작하더니, 손에는 어느새 기다란 홀이 달린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데모닉 웨폰, 코룹텔라(Corruptela).
지상에서 탄생한 아크 리치의 영혼으로 만들어진 데모닉 웨폰이 본격적으로 힘을 발하며, 그녀의 강대한 마력을 3배 이상 증폭시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순간.
“컹!!”
쾅!!!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은빛 강아지가 그 작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엄청난 힘으로 그녀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그러나 그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그그그극.
허공에 떠오른 데모닉 웨폰, 코룹텔라가 그대로 그 일격을 막아 낸 것이다.
이내 자신을 습격한 것의 정체를 확인한 릴리스의 눈매가 대번에 일그러졌다.
“……그 정령? 거기다 오러를?”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마법진이 살짝 흔들렸지만, 그녀는 정령에게 반격하기보다 마법진의 완성에 집중했다.
우우우웅.
쾅!
콰아아앙!
혐오스러운 정령의 연속된 공격은 코룹텔라가 알아서 막아 주고 있었으니까.
물론 애써 만든 무구가 놈을 막아 내면서 조금씩 손상되고 있긴 했지만,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했다.
“네 녀석은 조금 기다리거라.”
번쩍.
“내 의지를 받아들여라, 인간의 황제여.”
완성된 마법진의 힘이 황제의 마법 방벽을 넘어 그대로 그의 전신에 스며들었다.
황제의 보호막에는 정신을 보호하는 마법도 있었지만, 7할 이상의 에너지는 물리적 방벽에 투자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티팩트의 형태로 실현된 마법은 주인의 의지에 따라 그 용도를 변경할 수 없으니까.
‘됐다!’
그렇게 릴리스가 성공을 확신하는 순간.
“아우우우우!”
갑자기 흰색 강아지 정령, 월랑의 눈에 노을빛이 스치더니 일순간 녀석의 몸이 흐릿하게 변하며 존재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우우우우웅.
황제의 전신에 노을빛 마나가 스며들며 그의 전신을 잠식해 가던 분홍빛 마력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하!?”
릴리스로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정령이 제법 강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녀의 수준에 비하면 확실히 격이 떨어지는 마나였다.
그런데도 말도 안 되는 효율을 보이며 자신의 마법을 밀어 내고 있으니, 그것은 이미 효율의 문제를 떠나 세상의 법칙을 무시하는 현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제야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정보가 있었다.
‘정령 마법.’
여신이 인간들에게 마족에 대항할 힘을 주기 위해 인과를 거스르며 막대한 대가를 치름으로써 억지로 만들어 내었다던 법칙. 그 결과 오직 중간계에서만 존재하는 ‘정령’.
그리고 중간계의 모든 마나가 적극적으로 호응하게 ‘되어 있는’ 권능, 정령 마법.
그 대가로 제한도 많은 권능이지만, 하필이면 그 힘이 인간에게 적용되는 식으로 작용하는 수법을 저 정령이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모든 것이 전신에 소름이 돋을 만큼 혐오스러웠다.
“마땅히 이뤄져야 할 역사를 비틀어 버린 욕심 많은 창녀의 파편.”
까드득.
절로 이가 갈릴 수밖에 없었다.
그 본질 안에 인간 강화까지 가진 정령이라니 너무나도 짜증이 났지만, 흐릿하게 반영체만 남은 놈을 보니 다시금 자신을 방해할 여력은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다시 시도하면 그만이다.’
릴리스는 치밀어 오르는 짜증과 역겨움을 참아 가며 다시 마법을 준비했다.
그런데.
– 콰아아아앙!
– 이런 정신 나간 것들!
– 아버지! 저 안쪽에 폐하가!
또 한 번 이가 갈리는 소리가 지근거리에서 들려왔다.
‘벌써……!’
다시금 격한 갈등이 몰려왔다.
그녀의 무력이라면 이곳으로 찾아올 오러유저 하나를 짓밟아 버리고 황제를 세뇌하는 것도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닐 터였다.
하지만.
“크르르르.”
흐릿해진 정령을 보는 릴리스의 눈매가 더욱 일그러졌다.
저 빌어먹을 것 때문이라도.
‘쉽지는 않겠지…….’
이곳에는 흑마법을 유독 적대하는 황궁의 결계에 여신의 파편이 만들어 낸 공간 결계까지 중첩되어 있으니, 무투파가 아닌 그녀가 오러유저를 처리하고 황제를 세뇌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아니, 두 가지 모두 신경 쓰다 보면 아예 실패하게 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해야 할 일은 분명했다.
“……혼란을 위한 패가 여기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한 달을 공들인 계획의 철회를 결심하며 내뱉은 말.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한 음성에는 진득한 분노가 어려 있었지만, 이어진 행동은 빨랐다.
다시금 형성되던 대마법이 데모닉 웨폰 코룹텔라를 통해 증폭, 변형되며 그 목적을 바꾸었다.
“내 하수인들이여, 나를 잊어라! 나를 기억하는 이, 나를 본 모두에게서 나를 지워라!”
우우우우우웅!
대상에게 특별한 해를 끼치지 않는 그 마법은 결계의 저항도 받지 않으니, 쉽게도 황궁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모험보다는 적에게 자신의 정체를 노출시키지 않는 길을 택한 것이다.
이내 분홍빛 마력이 공기 중에 옅게 퍼지다가 완전히 흩어져 버린 순간.
그녀의 몸이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깔끔하게 사라졌다.
결국 그곳에 남겨진 것은.
“컹!? 끼이이잉!”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자신에게 스며들어 오는 분홍빛 마력에 저항하는 정령과 기절한 황제뿐이었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쾅!
“폐하!”
문을 부수며 뛰어 들어온 검제와 제나스, 클로이가 쓰러진 황제에게 급히 다가갔다.
“낑!”
그 광경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으며, 분홍빛 마력에 분쇄된 정령은 애처로운 한마디만 남기고는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