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244
244화. 라이칸
쿨럭.
“뭐, 뭐야!?”
타이니가 갑자기 피를 토하자 그를 지켜보던 라프탄은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기다려 보라고 하더니 갑자기 마나가 확 줄어들었고, 직후에 바로 피를 토했다.
너무나 황당한 일이었지만, 같은 정령술사로서 그 이유는 금세 짐작할 수 있었다.
“역소환이라니, 너 정령 황궁에 두고 온 거 아니었어!?”
그에 다시 한번 피를 토해 낸 타이니가 입가의 피를 닦아 내며 라프탄을 째려보았다.
“으, 머리 울린다. 소리 그만 질러. 사람이라도 불러 모을 생각이냐?”
“아, 아니. 나야 걱정이 돼서 그러지! 갑자기 무슨 일인데?”
“……나도 확실히는 모르겠다. 일단 막아 내긴 했는데.”
“뭘 막아?”
“시끄럽다니까. 잠깐 생각 좀 하자.”
골이 울리고 속이 뒤집히는 충격에 인상을 찡그린 타이니는 월랑의 시야로 본 그 가슴 덜컥한 광경을 다시 떠올렸다.
느닷없이 황궁 내에 나타난 흑마법사.
황궁과 성물의 이중 결계뿐만 아니라 황제의 아티팩트까지 뚫어 가며 무언가 저지르려 했던 괴물.
월랑의 신호에 따라 황급히 원격으로 황제에게 동족 강화를 쓰기는 했지만, 그 효율이 떨어지는 탓에 전신의 모든 힘을 쏟고도 월랑을 유지하던 여력까지 쥐어 짜내야만 했다.
적어도 8서클급의 적.
‘대체 뭐야 그건? 갑자기 그런 게 어디서 나타난 거지?’
분명히 8서클급의 뼈다귀를 박살 내 놨는데, 어디서 저런 괴물이 또 튀어나왔을까?
그가 없는 동안 에스티나나 검제가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마역에서 박살 냈던 그놈이 말룸의 수장임은 분명했다.
그런데 그놈과 수준이 비슷하거나 더 뛰어나 보이는 흑마법사가 또 등장하다니.
‘그 여자도 회귀로 인한 변수일까?’
머릿속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 여자가 마지막에 퍼트린 저주(?)는 정령인 월랑이나 그 계약자인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늑대의 시야는 인간의 눈처럼 상대의 얼굴을 완벽히 인식하지 못하기에 그 흑마법사가 붉은 머리의 여자라는 것밖에 알 수 없었지만, 대신 월랑에겐 훨씬 유용한 다른 방법이 있었으니.
‘월랑, 그 여자의 영혼 냄새 기억하고 있지?’
– ……컹!
왜인지 대답이 한 박자 늦었지만, 그 뜻은 확실했다.
‘그 여자, 반드시 찾아내야 해. 나중에라도 반드시!’
– 컹! 컹!
그러나 월랑의 자신감 넘치는 대답에도 타이니의 얼굴은 좀처럼 펴지질 않았다.
작정하고 사라진 8서클 흑마법사를 찾아내려면 얼마나 많은 곳을 뒤져야 할까. 아마도 자신이나 월랑의 근방에 다시 나타나기 전에는 찾을 방법이 없을 터였다.
대체 또 무엇이 바뀌었길래 그런 커다란 변수가 튀어나왔을까?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또다시 두통이 생기는 거 같았지만.
“……그래도 단서는 있으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쯤 검제와 클로이, 제나스 등이 후속 대처를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혼자 고민해 봤자 답이 없는 문제는 똑똑한 사람들에게 맡겨 두고, 자신은 당장 눈앞의 일부터 해결하는 것이 맞았다.
스스로 그렇게 위안하고 있자니, 그제야 옆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왜?”
“아니, 너도 피 토하는 걸 보니 인간이긴 하구나 싶어서…….”
피식.
“왜? 약해진 거 같으니 한번 싸워 보고 싶냐?”
그 말에 라프탄이 말 그대로 펄쩍 뛰었다.
“아, 아니, 절대! 무슨 그런 무서운 소리를 하냐.”
“괜히 들어가서 중요한 순간에 어깃장 놓지 말고, 감정 남은 거 있으면 여기서 풀지 그래.”
너무 펄쩍 뛰길래 수상해서 한 번 더 찔러 봤다. 실제로 몇 대 정도는 기꺼이 맞아 줄 생각도 있었다.
‘이 녀석, 여태까지는 정말 잘해 왔으니까.’
그런데.
“……그런 거 없어.”
녀석의 대답은 또 다른 의미에서 의외였다.
“음?”
“아, 물론 맞은 거야 분하지. 그런데 어차피 네가 아니었으면 난, 음……. 계속 사기나 치거나 더 나쁜 짓을 하면서 살았을 거야. 그건 좀…… 지금 생각해도 최악이다.”
“…….”
“분명히 말하는데, 난 네게 감사하고 있어.”
거대한 사자 수인이 맹수의 눈으로 노려보는 모습이었지만, 그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는 지금 라프탄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덕분에 다시 웃음이 나왔다. 회귀로 인한 변한 것 중에는 이처럼 좋은 일도 많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으니까.
“흠. 몇 대 맞아 줄 생각이었는데 의외네. 뭐,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다.”
“……뭐?”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라프탄. 일단 오늘은 너 먼저 들어가라. 난 월랑이 회복되면 밤중에 들어갈 테니, 머물 숙소나 확실히 정해 놔. 신호 잊지 말고.”
“아니, 잠깐만. 타이니, 야…….”
“반정령화는 그때 가서 보면 될 거야. 그 상태로 숨어들 테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뭐 해? 빨리 안 가고. 시간 없어.”
“아니!!”
“왜 인마?! 왜 또 소리를 질러.”
“그, 거시기…….”
“아, 할 말 있으면 빨리해. 괜히 시간 끌지 말고.”
“……한 대만 때려 보면 안 되냐? 진짜 딱 한 대만.”
“…….”
“…….”
그 어이없는 말에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흥 하고 콧방귀를 뀐 타이니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늦었어.”
“왜!!?”
“낙장불입.”
“……그건 또 뭔 소리야?”
“늦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왜!?”
숲속에서 일어난 그 사소한 다툼은 그 후로도 한참을 이어졌고.
결국.
– 아, 거참. 이 새……!
쩍.
마치 도끼로 나무를 찍는 듯한 소리가 나고 얼마 후, 볼이 살짝 부어오른 사자 수인이 억울한 눈빛으로 라이칸을 향해 터벅터벅 힘없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은은한 달빛 아래 드러난 대도시의 정경.
웨어비스트 왕국의 수도인 라이칸은 그 종족적 특성 탓에 늦은 시간에도 활기를 띠는 경우가 많았고, 그 덕분에 밤중에도 곳곳이 횃불들로 환히 밝혀져 있었다.
도시의 중심부에 자리한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는 늑대의 궁 주변으로 수인족 전통의 동굴 주택과 인간족 양식의 건물들이 섞여 있는 기묘한 산상 도시.
그런 라이칸의 야경은 멀리서 보면 산 위에 커다란 불빛의 꽃이 핀 듯한 모습이라 그 나름의 운치가 물씬 풍겼다.
그만큼 야심한 시각에 비해 어두운 곳이 적다는 말이지만.
‘그래도 이 상태로 숨어들기에는 밤이 낫지.’
반투명한 상태의 타이니는 그런 라이칸의 풍경을 허공에서 내려다보며, 목표를 찾기 위해 시야에 감각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 크르…….
자신과 동화되어 힘을 빌려주고 있던 월랑이 밤하늘에 떠오른 달을 보며 묘한 감흥을 표하는 것이 느껴졌다.
녀석이 달을 보고 좋아하는 것이야 흔한 일이었지만, 왜인지 지금은 여느 때와는 조금 달랐다.
뭔가 아련한 느낌이랄까.
‘왜 그래?’
– ……킁.
아무것도 아니란다.
녀석의 실없는 반응에 실소한 타이니는 다시 라이칸의 야경 속에서 목표를 찾는 데에 몰두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았다.’
이내 지붕 위에 올라가 있는 작은 사자, 라미를 발견한 그의 몸이 유령처럼 밤하늘에서 흘러내리더니, 횃불의 빛을 피해 라이칸의 외곽 쪽 허름한 숙소로 숨어들었다.
“오래 기다렸냐?”
“으악! 깜짝이야!”
방 안을 정처 없이 서성이던 라프탄이 천장에서 불쑥 튀어나온 사람 얼굴에 기겁을 하며 몇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 여전히 반투명한 상태를 유지한 타이니에게 멍한 눈으로 다가오더니, 그의 몸 여기저기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려 보았다.
“……이게 반정령화? 어, 영체와 실체를 오가는 느낌이구나. 일정 농도 이상의 마나 간섭이 생기면 바로 깨지겠어. 그런데 장비는 어떻게 같이 상태가 변하는 거지? 어떻게 바닥은 투과하지 않고 서 있고? 흠…….”
대번에 반정령화 상태의 요점을 파악하는 라프탄. 솔직히 재능만 봐서는 이 녀석도 정령술 천재라는 사실이 새삼스레 체감되어 웃음이 나왔다.
“의식하기 나름이야. 뭐, 그것도 한계는 있지만.”
“……목소리는 변함이 없네.”
“그럼 서비스는 여기까지.”
그 말과 함께 다시 몸을 실체화하자 라프탄이 실망한 표정을 짓는 게 보였지만, 지금은 녀석의 탐구심이나 채워 줄 때가 아니었다.
“자, 다시 자세히 얘기해 보자. 외궁까지 어떻게 들어갔다고?”
“칫…….”
“대답.”
씁.
“결계로 정령술까지는 감지 못 하잖아. 의태로 잠입하는 것 자체는 쉬웠어.”
그 말에 타이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의 성립이나 그 특성으로 인해 발현되는 수법들은 웬만한 마법도 따라오기 힘든 수준의 효율성을 자랑하니, 마법사 중에는 특정 분야에서만큼은 정령술이 마법의 상위 호환이라는 자조 섞인 말을 하는 자도 있을 정도였다.
아직은 자신의 초월 감각으로도 왜 그런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신비의 영역.
흔한 탐지 마법 정도의 마나 응집력이라면 그 타깃으로 지정된다 해도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정령술이니, 상시 작동하는 결계로 그것을 감지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법했다.
월랑이 아스란 제국 황궁의 결계 안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유였으니 말이다.
‘뭐, 정령사는 드문 데다가 착하다는 이미지도 있으니, 굳이 막으려 애를 쓰지도 않았을 테고.’
게다가 엘프와의 전쟁이 잦았던 오크들만 해도 굳이 정령을 막기 위해 결계를 칠 생각은 하지 않았으니, 다른 종족들이 정령술을 방비한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인 것이다.
물론 눈앞의 라프탄이 깽판을 쳤던 전생의 미래에서는 결국 각국이 정령술에 대한 방비도 강화해야 했지만.
“……아직은 그 전이니까.”
“뭐?”
“아니, 됐다. 그렇다면 네가 못 들어갔다는 내궁은 뭐야? 은신 감지에 특화된 결계 같은 게 있었나?”
“그런 건 아니고, 마나를 통째로 동결시키는 결계라서 허가받은 자가 아니라면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있더라고. 손이라도 댔다간 바로 의태가 풀릴 것 같아서 잠입할 수 없었어.”
……아주 익숙한 방식의 결계.
타이니는 역시나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런 결계야 나한테는 아무 장애도 안 되고.”
“너야 초인이니까 그렇지, 나는…….”
“요령을 가르쳐 줄게. 너 정도면 조금만 배우면 금방 될 거야.”
“그게 잠깐 배워서 될 게 아닐 텐데? 무려 고대의 결계라고.”
“나한테 배우면 돼. 마나를 잠그는 방식에도 특정한 패턴이 있거든, 그걸 구별할 수준이면 초인이 아니더라도 풀 수 있어. 결계는 유동적으로 변동 적용이 안 되니까.”
“……그거 너만 되는 거 아니냐?”
“웬만큼 마나 감응력이 좋으면 다 돼.”
“그게 무슨 헛소리야? 웬만한 사람이 다 되면 결계에 무슨 의미가……!”
“20대나 30대 초반에 초인이 될 만한 재능 정도면 말이야.”
“……뭐?”
그게 어디 사는 괴물이냐?
‘인간은 맞는 거냐?’
어이가 없어서 그저 입만 벙긋거리던 라프탄은, 이내 그 발언의 당사자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 그래. 더한 놈이 내 눈앞에 있지.”
아직도 믿기지 않지만, 17살에 오러유저이자 스피릿유저가 된 놈이 지금 눈앞에 있는데 무슨 말을 더하랴.
“넌 살짝 미달 같긴 하지만, 내가 속성 요령을 가르쳐 주면 충분히 가능할 거 같아.”
이건 칭찬인가, 욕인가.
라프탄은 연신 한숨을 내쉬면서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건 그런 걸로 하고, 아무튼 그 결계가 펼쳐진 곳 중 한 군데는 왕국 제사장이라는 정령술사가 짐승 신을 모시는 곳이라니까 제외해도 될 것 같아. 내가 잠입하기에는 거기가 제일 위험하기도 하고.”
“아, 그……?”
“어. 7단계 정령술사이자 왕국 대제사장, 우란 누드(йтаквьы ыты). 공용어로 하면 붉은 눈이라는 이름. 노인이라던데 얼굴은 못 봤어. 듣기로는…….”
“코끼리 수인.”
“응? 코끼리가 뭐야?”
“아. 있어, 그런 게. 솔직히 나도 모르기는 하는데.”
“갑자기 무슨 실없는 소리야? 아무튼 뭐, 그자는 소문만 무성해. 이름이 붉은 눈인 걸로 봐서 상시 광폭화 상태라는 소문도 있고. 그래도 짐승 신의 신전 밖으로 거의 안 나온다니까, 굳이 신경 안 써도 될 거야.”
그 말에 타이니는 오히려 흥미로운 미소를 지었다. 전생에 실버 팽과 나눴던 대화가 그제야 떠올랐으니까.
– 우란 누드 님이 살아 계셨다면, 큰 힘이 되었을 텐데…….
– 우란…… 뭐? 그 사람도 오러유저야?
– 아니야, 스피릿유저지. 무술은 배운 적도 없으실걸? 다만 마나랑 육체의 힘만으로도 챌린저급 장군을 두들겨 패던 분이셨어.
– 그건 또 무슨 괴물이냐…….
– 왕국에서 유일한 코끼리 수인족이셨거든. 코끼리 모르지? 동대륙에서 볼 수 있는 동물인데, 아무튼 커. 그분도 엄청 크셨지. 낯을 많이 가리셔서 밖에 잘 나서지 않으셨을 뿐, 아는 사람들한테는 왕국 역대 최강의 제사장이라고 불리셨지.
– 역대 최강의 제사……. 대장군이 아니고?
– 대장군은 나고. 뭐, 아무튼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해 봤자 결국 넋두리지. 이미 돌아가셨으니.
그런 괴물이 왜 죽었는지, 사고였는지 수명이 다한 거였는지는 굳이 묻지도 않았다.
그에 대해 더 들은 건 우란 누드, 붉은 눈이라는 그 이름이 웨어비스트의 왕실 제사장에게 대대로 이어지는 것이라는 사실 정도뿐.
“……언젠가는 들러 봐야지.”
“뭘 들러 봐? 접근하지 말자고 방금 말했는데!?”
“이 일이 다 끝난 다음에 말이다. 그렇게만 되면 아군으로 만나게 되겠지. 궁금하잖아.”
“……궁금할 것도 많다. 혹시라도 잘못 엮였다간 그 궁금한 초인이 적으로 나올 테니까 지금은 신경 꺼. 우리 같은 정령술사가 접근하기만 해도 알아챌걸?”
“알았다고.”
“아무튼, 생체 인식이 아니라 마나 패턴 인식이면 돌파 가능하다는 거지?”
“그래. 그리고 만약 아니라면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지. ‘적극적’ 정보 수집이라도 하던가.”
적극적 정보 수집이라니, 괜히 강조한 한 단어가 유난히 위험하게 들려서 라프탄은 슬며시 타이니의 눈치를 보았다.
“……그건 내가 하는 거고?”
“그럼 누가 해? 시간도 별로 없어. 왕국 연합에서 직접적인 간섭이 들어오기 전에 끝내야 해.”
“정보 수집을 해서, 알아내면?”
“바로 쳐들어가서 그놈 목을 따야지.”
“……네가?”
“너와 내가.”
“……그러냐.”
라프탄이 암울한 눈으로 한숨을 푹 내쉬는데, 피식 웃은 타이니는 그런 동료의 심정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덧붙였다.
“자, 그럼 일단 내일 당장 회색 바람과 체베르의 소재 파악부터 해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