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249
249화. 최초의 정령
‘최초의 정령?’
영파라고는 하나 정령이 정리된 언어를 구사해 자신의 뜻을 전하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 내용에는 정말 어안이 벙벙했다.
웨어비스트의 왕궁 제사장이 가진 정령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제사장들은 외부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고, 간혹 궁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해도 정령의 모습을 직접 보인 적은 거의 없었으니까.
그나마 알려진 바가 있다면 대대로 이어져 오는 우란 누드(йтаквьы ыты, 붉은 눈)라는 그 이름의 뜻처럼 붉은 눈을 가진 정령이라는 것과, 그것이 웨어비스트에서는 수호령이라고 불린다는 것 정도.
그런데.
‘최초의 정령? 짐승 신의 마지막 흔적?’
펜리르라는 정령이 말해 주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 단어들의 연속이었다.
‘웨어비스트 역사가 언제부터더라? 수인족이 뭉치기 시작한 지 천여 년 정도밖에 안 된 걸로 아는데, 최초의 정령이면 대체…….’
머릿속이 복잡해진 타이니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그의 옆에서 먼저 튀어나온 목소리가 있었다.
“최초의 정령이라니? 아니 뭐든 최초는 있겠지만, 그런 게 왜 엘프도 아니고 수인족 땅에……?”
그 말에 졸지에 ‘그런 게’ 되어 버린 펜리르의 눈이 가늘어지며 라프탄을 향하고.
쿵.
거대한 코끼리 수인이 땅이 울리게 한 발을 내디디며 그 긴 코에서 콧김을 뿜어냈다.
“감히……!!”
“아, 아니, 아니요. 그냥 제가 입이 좀 걸어서……. 죄송합니다.”
늑대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는 라프탄의 모습이 숨 막히던 긴장감을 조금 누그러트릴 때,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던 타이니가 결국 한숨을 푹 쉬며 입을 열었다.
에라, 모르겠다.
“타이니. 타이니…… 모르스라고 합니다, 펜리르.”
– 펜릴이라 불러도 좋다. 이 시대에는 그리 부르는 것이 더 쉬운 것 같으니.
최초의 정령인지 뭔지 하는 건 잘 모르겠지만, 일단 저 늑대는 제 영혼의 반려인 월랑의 조상이다.
거기다 느껴지는 분위기마저 심상치 않으니, 우란 누드가 지켜보고 있는 와중에도 진실을 토해 내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직감이 든 것이다.
“фтеьы? 타이니, 모르스? 어디서 들어, 아! 그, 광휘의 기사! 하지만……?”
코끼리 수인, 우란 누드가 조금 어색한 발음의 공용어를 뱉으며 그를 응시했다.
타이니는 쓴웃음을 지으며 마나를 움직여 ‘잰슨’의 변장을 순식간에 지워 버렸다.
“허…….”
마나를 이용해 스스로 푸른빛을 살짝 덧씌워 놓았던 두 눈이 검은빛을 되찾고 얼굴과 머리 색까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순간, 주변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내 감각에도 인식이 안 되는 마법이라니, 그래서 그런 참담한 짓을…….”
우란 누드가 그렇게 착각하며 노려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화장이야 그렇다 쳐도, 염색된 모발에서 색소만 골라내 한 번에 지워 버리는 세밀한 마나 조절은 보통의 인간에겐 불가능할 테니까.
그리고 그것은, 사정을 아는 이에게는 더욱 기괴하게만 느껴지는 재주였다.
“괴물 새……. 아, 아니야. 난 아무 말 안 했어. 흠. 흠.”
다행이라면 우란 누드는 여전히 분노한 눈으로 타이니를 노려보면서도, 바로 덤벼들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펜릴의 의지를 존중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마치…….
‘정령과 정령사의 관계가 역전된 느낌인데?’
그런 느낌을 받았지만, 타이니는 굳이 그걸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 그렇게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마음을 꿰뚫어 본 듯, 펜릴이 바로 영파를 전했다.
– 우리의 관계는 조금 독특하니, 낮의 시간에는 나 역시 지혜를 잃어 우란의 뜻을 따른다. 하나 지금은 다르지.
– 그러니 묻겠다. 내 후손의 계약자, 타이니 모르스여. 짐승 신의 마지막 흔적에 손상을 입힌 이유가 무엇인가?
그 질문은 조금 이상하게 들렸다.
마치.
‘……체베르와 사를 살힌을 죽인 게 문제가 아니라, 늑대의 궁에 손상을 입힌 게 문제라는 것 같은데?’
– 그 생각이 옳다.
말을 하기도 전에 바로 튀어나온 답변에 타이니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 정령, 아까부터 자신의 정신 방벽을 뚫고 생각을 읽어 내고 있었다.
그것이 어찌 가능한지는 둘째 치고, 머릿속을 읽히는 게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끼잉.”
“……뭐냐?”
옆에서 수그리고 있던 월랑이 평소 하지도 않던 애교를 부리듯 그 큰 머리를 그의 몸에 비비적거렸다.
“답지 않게 왜 이래, 갑자기?”
– 너의 영혼의 반려, 그 아이를 통해 생각을 전달받는 것이니. 너무 기분 나빠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어진 펜릴의 말에야 그 이유를 깨달았다.
머릿속에 첩자가 있었다.
“너 이색……!”
“낑.”
“시끄러워. 귀여운 척하지 마.”
“킁!”
“허…….”
하지 말라니까 바로 콧방귀를 뀌는 녀석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지만, 덕분에 헛웃음이 나와 불쾌한 감정을 씻어 낼 수 있었다.
“그 가짜 놈을 죽인 것은 굳이 따지지 않겠다는 말입니까?”
그 말에 우란 누드의 눈매가 가늘어지는 것이 보였지만, 펜릴의 표정은 오히려 웃고 있는 듯 보였다.
– 고대에 사라진 신혈(神血)의 파편을 일부나마 재현한 것은 분명 놀라운 가능성. 그렇기에 침묵했지만, 그것이 옳다 여겼던 것은 아니다.
“……만들어진 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군요.”
– 신혈은 그 근원이 존재해야 이어지는 법. 짐승 신이 사라진 세상에 그 사자(使者)가 다시 태어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럼 왜 굳이…….”
– 어차피 당대에서 사라질 가짜라 한들, 추억의 향기는 분명하니 내 손으로 지우고 싶지는 않았다.
“음…….”
전해 오는 뜻은 정말로 정령보다는 인간 같았기에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다.
– 그대, 이 정도면 나는 충분한 설명을 해 준 듯한데?
“아…….”
– 왜 늑대의 궁을 손상시킨 것인가?
“……왜 물으시는지 모르겠군요. 이미 알고 계실 듯한데.”
– 인간의 관계에 관심을 두지 않은 지는 오래되었다. 이번 대의 우란 역시 세상에는 관심이 없으니, 나는 오직 네가 저지른 일이 정의에 부합하는지를 물을 뿐이다.
‘정의라…….’
무슨 기준으로 그걸 판단하는지, 거짓을 말하면 어찌 알 것인지.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제치고 가장 먼저 튀어나온 것은 괜한 압박감을 주는 분위기에서 기인한 심술이었다. 그는 태생상 반골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부합하지 않는다면요?”
그 삐뚜름한 말에 펜리르는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 마땅히 처벌해야겠지.
스아아아.
지혜를 담고 있던 눈빛이 다시 새빨갛게 물들고, 어두워지는 하늘보다 짙은 검은빛 털에서 도저히 무시 못 할 기운까지 퍼져 나왔다.
그러자.
“우오오오오!”
거대한 덩치의 코끼리 수인 또한 눈이 벌게지더니, 그의 전신에 검은 털이 조금씩 돋아나기 시작했다.
정령이 힘을 행사하는 와중에도 정령사가 따로 정령 합신의 능력까지 더하고 있는 것.
그 둘의 모습이 정령보다는 마수처럼 보인다는 것은 둘째 치고.
‘이게 그냥 스피릿유저라고? 대정령사는 돼야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 우란 누드 님이 살아 계셨다면…….
전생에 들은 친구의 말이 확실히 마음에 와닿으며 여차하면 힘으로 처리할 수 있을 것 같던 자신감마저 살짝 흔들리는데.
‘그러고 보니…….’
문득 에스티나가 예전에 해 준 말도 머릿속을 스쳤다.
– 나처럼 이미 성장한 정령을 이어받는 이들에게도 나름의 곤란한 점이 있단 말이지.
– 이미 완성된 정령이 자신 때문에 오히려 힘을 제약하게 되면서 자존감이 낮아지는 건 사소한 문제지. 그 대신에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길을 정령이 직접 영혼에 일러 주니까.
– 진짜 문제는…….
‘영혼의 반려인 정령이 악의를 가질 경우, 정령사가 오히려 휘둘릴 수 있다.’
타이니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 경우가 딱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
펜릴이 어떻게 정령사의 역량 이상의 힘을 끌어내는지는 둘째 치고, 그 목적이 고작 위력 시위라는 것을 알기에 더 고깝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취미가 고약하시군요.”
그 말이 나오자마자, 펜리르와 우란 누드의 모습이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옅어진 붉은빛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펜릴의 영파에서는 옅은 웃음기가 느껴졌다.
– 이 정도로는 위협으로 느끼지도 않는가……. 하하, 이 아이가 계약자를 자랑하는 것이 거짓은 아니로구나.
정말이지 고약한 성격을 가진 정령이었다.
‘진짜 월랑의 조상인가.’
아니 그 전에, 자랑이라니?
휙 하고 고개를 돌리자, 갑자기 하늘을 바라보며 딴청을 부리는 월랑이 보였다.
이 녀석이?
– 위협이 통하진 않았지만, 일단 사과하도록 하지. 이 아이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니나, 나는 그대의 진심을 확인하고 싶었다. 어쩌면 내가 오랜 시간 기다려 온 사람이 그대일지도 모르니.
음?
– 내게 허락된 운명의 시간이 다 되어 가는 지금, 마지막 우란의 곁에서 고대의 맹약이 실현되는 것을 볼 수 있을지 확인하고 싶었다.
마지막 우란?
“그게 무슨 말입니까?”
– 그러니 다시 묻겠다, 내 후손의 계약자여. 그대가 짐승 신의 흔적에 손상을 가한 것은 정의에 부합하는가?
기세를 뿜어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담담하게 퍼지는 영파에 좌중이 더욱 숨을 죽였다.
그리고.
“끼힝.”
마치 싫은 것을 억지로 한다는 듯이 그를 돌아본 월랑의 눈동자가 진한 노란빛으로 물든 순간.
타이니는 펜리르의 말을 다 이해할 순 없어도 그가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하려는 것인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솔직히 기분은 좀 나빴지만, 대답하지 못할 것은 없었다.
“물론 그것은 악마추종자의 잔재를 정리하고 인류를 규합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 ……진심이로구나. 그런데 인류의 규합이라니?
월랑과 타이니를 번갈아 바라본 펜릴의 영파에서 갑작스레 조소가 느껴졌다.
– 인류는 역사가 반복된 이래 끊임없이 분쟁하며 싸워 왔다. 모두가 힘을 합쳤던 적은 오직 한 번뿐이지. 그건 알고 하는 말인가?
그 말에 펜릴 때문에 억지로 분노를 참고 있는 듯하던 우란 누드가 눈을 부릅떴다.
그 모습을 보며, 타이니는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같은 경우 때문입니다.”
– 뭐?! 하…… 정말, 정말 진심이로구나!
그 대답에 정말 놀란 듯, 펜릴의 영파가 유독 크게 울려 퍼졌다.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 해충부터 잡아내야 했습니다. 그게 이번에는 체베르, 당신들이 말하는 후계자였죠. 내 친구 문나이트를 축출했던 주역이자 악마추종자들이 만들어 낸 가짜 말입니다.”
그 말에 우란 누드의 눈빛이 대번에 어두워졌지만, 펜릴의 붉은 눈은 오히려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 으음. 이 또한 진심이라……. 너 또한 예언을 아는 인간이었던가.
“예?”
– 아니, 아니다. 진실과 진심은 다르겠지만, 너의 의도가 선함은 인식했다. 후손을 통해 마음을 엿본 실례에 대해 사과하지.
예언이라니?
갑작스레 나온 엉뚱한 단어가 신경 쓰였지만, 저 최초의 정령은 더 이상 말을 해줄 것 같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러니.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불필요한 다툼, 그것도 이런 고대 정령과 스피릿유저를 상대로 사생결단을 내고 싶은 마음은 그에게도 없었으니까.
다만.
“어찌 되었건 분란은 피하고 싶으니, 우란 누드 님께도 확실히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한 일에 관해 눈감아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확실히 해야 할 것은 있었으니 말을 보탰다.
타이니의 곧은 눈빛을 받은 우란 누드의 붉은 눈동자가 몇 차례 요동치는 게 보였지만.
– 그래 주겠느냐, 우란? 매번 미안하구나.
펜릴까지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는 스스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힘겹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влакзЕ……. 아니, 알겠습니다.”
그가 그렇게 수락의 뜻을 보이자마자 타이니는 얼씨구나 하고 다시금 말을 보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절단이 올 겁니다. 거기에 제 친구 문나이트도 있지요. 그가 왕실의 방계이기도 하니, 그를 중심으로 웨어비스트의 질서를 다시 잡으시면 될 겁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끙…….”
우란 누드는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것만으로도 타이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의 바로 옆에서 태클이 들어왔다.
“……문나이트랑 네가 친구?”
“뭐? 왜 인마?”
“아, 아니, 그치는 널 싫어하는 것 같던데……. 저택에서도 계속 피하지 않았어? 거기다 오늘 네가 저지른 일을 알면…….”
“흠……. 전후 사정을 알면 다 이해해 줄 친구다. 쓸데없는 소리 마.”
“그, 옳은 일은 한 거긴 한데…….”
“뭐?”
“……아, 아냐.”
내가 짝사랑은 들어 봤는데, 짝친구는 처음 본다.
라프탄은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을 억지로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