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264
264화. 추적
“뭐야? 저 망치…….”
“거기 둘! 잠깐!”
락스턴 왕국 서부 국경 인근의 대도시, 가스턴의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로브를 쓴 사내들에게 다가갔다.
당연한 일이었다. 전쟁을 앞둔 시기에 수상하게 얼굴을 가린 자들이 나타났는데, 그중 한 명은 등 뒤에 지나치게 거대한 워해머까지 달고 있었으니까.
“후드 젖혀 봐, 어서!”
한껏 예민해진 병사들이 창을 들이대자, 한숨을 푹 내쉰 두 사내가 바로 로브의 후드를 젖히며 얼굴을 드러냈다.
그 순간 병사들의 시선은 그들 중 망치를 멘 남자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귀찮게…….”
신경질적인 얼굴로 지나치게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낸 ‘백발’의 사내가 그야말로 야수 같은 기세를 뿜어내자 병사들이 주춤 물러섰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다소 평범한 인상의 ‘금발’ 사내가 백발 사내를 진정시켰다.
“참전하러 온 거잖아. 괜히 ‘아군’한테 신경질 내지 마, 라곤.”
“쯧.”
라곤이라 불린 사내가 혀를 차며 반 발짝 물러서자, 금발 사내가 오히려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병사들 중 대장으로 보이는 이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 친구는 라곤, 저는 테논이라 합니다. 용병이고, 곧 이곳에서 전쟁이 있을 거라 듣고 참전하러 왔습니다. 여기 용병패…….”
“아…….”
그 말에 긴장하고 있던 병사들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그 와중에도 용병패를 꼼꼼히 살피던 경비 대장도 신분 확인을 마친 후에는 슬쩍 미소를 보였다.
“가스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가면 이너빌인데, 왜 이곳에 오신 겁니까?”
“정비하러 들렀습니다. 여기저기 손볼 곳이 많은데, 이너빌은 이미 사람이 넘친다고 해서 말입니다.”
“아, 잘 오셨습니다. 하지만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성내에서 소란은 삼가 주십시오. 특히 만에 하나라도 무기를 쓰시면, 큰일이 날 수 있습니다.”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용병 길드가 어디 있는지도 좀 들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말하며 테논이 은화 몇 푼을 슬쩍 쥐여 주자, 경비 대장이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시국이 시국인 만큼 신분패 확인 전에 돈을 찔러 줬다면 오히려 의심했을 터지만, 상대의 신원이 확실해진 마당에는 그저 보너스일 뿐이었으니까.
“그야…….”
테논과 경비 대장의 대화는 생각보다 부드럽게 이어졌고, 이내 두 사내는 별문제 없이 ‘경비 대장의 소개장’까지 받아 가스턴의 시내로 들어설 수 있었다.
다만 테논과는 달리 내내 불퉁한 표정이었던 라곤에 대한 병사들의 평은 그리 좋지 않았다.
“쯧. 요새 그 광휘의 기사인가 뭔가 하는 사람 때문에 젊은 용병 중에 저딴 거 쓰는 놈들이 많아졌어.”
“개념이 없는 거지. 아무리 장사라도 한 번 휘두르고 팔 빠지면 죽는 건데.”
“내버려 둬. 성격도 더러워 보이는데. 다 제 팔자지…….”
더러운 성격에 비합리적인 무기까지, 아무래도 눈총을 안 받을 수가 없는 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병사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후에야, 다시 로브를 눌러쓴 용병들이 작은 소리로 대화를 이어 가기 시작했다.
“넌 가짜 용병패를 몇 개나 가지고 다니는 거냐? 현자의 마탑 기대주가 뭐 하러? 그리고, 뇌물 주는 것도 꽤 자연스럽다?”
“흥, 책에는 모든 진리가 적혀 있지. 아니, 그러는 너야말로 사실상 적진에 잠입하면서 위장용 신분패 하나 안 들고 다니는 건 무슨 깡이냐? 망치만 해도 시선을 끄는데. 생각이 있는 거냐, 없는……!”
“목소리 좀 낮추지? 강제로 닥치게 해 줄까?”
테논, 아니 아르곤의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지자, 넘실거리는 노을빛을 담은 주먹이 그의 눈앞으로 슬쩍 다가왔다.
“아, 아니, 내가 심장이 두근거려 가지고……. 지금도 엄청 두근거리네. 하. 하. 하하.”
그렇게 어색하게 웃다가 고개를 돌리며 입 모양만으로 욕설을 내뱉던 아르곤이 뜨거운 시선을 느끼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네가 오러유저니까 하급 변신 마법은 안 통하잖아. 그래서 내가 긴장했다는 말이지. 특히 후드 젖힐 때는…… 조마조마했다.”
아르곤이 간단한 환영 마법으로 변색시킨 자신의 머리를 긁적이며 그리 말하자 타이니가 피식 웃었다.
“대책이 있으니까 들어가자고 했다고는 생각 안 하냐?”
수틀리면 다 때려눕히려는 걸까, 하고 생각했지.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진심을 떠올린 아르곤이 황급히 말을 돌렸다.
“그, 그렇지. 그런데 그 머리는 뭐야? 어떻게 한 거야?”
“정령 합신을 살짝 발동해서 응용한 거다. 경지가 깊어지다 보니 이런 것도 가능하네. 몸에 부담은 좀 있지만.”
그리 말하며 타이니는 턱짓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락스턴의 대도시에 입성하는데 성벽을 타 넘거나 몰래 숨어들지 않고 굳이 성문을 통과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발길이 닿은 곳에는 현자의 마탑과 연계된 왕국 연합의 대도시에만 존재하는 특이한 명소, ‘통신소’가 있었다.
* * *
“용병이신데 통신을요……?”
통신소를 관리하던 마법사는 좀처럼 드문 스타일의 ‘손님’을 마주하며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의뢰 보고 때문입니다. 여기, 요금.”
이미 확인된 신분패와 경비 대장의 소개장, 그리고 그들이 꺼내 놓은 황금빛 동전들은 그런 의구심을 한순간에 날려 버렸다.
“그럼 제가 마나를…….”
“다룰 줄 압니다. 볼일 보셔도 좋습니다. 내용이 극비라서.”
그조차 원칙대로라면 안 될 일이지만, 손안에 슬며시 쥐어지는 금빛 동전은 마법사에게 원칙을 잊게 만드는 마법을 시전했다.
사실 귀족들이 연관된 일에 이 정도의 부정은 비일비재한 것이었으니.
“그, 그럼 좋은 시간 되십시오!”
마법사는 한마디를 남겨 놓고 재빨리 물러났다.
‘좋은 시간?’
그 어처구니없는 단어 선택에 타이니는 절로 실소를 흘렸지만, 지금은 이 통신소를 제대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누가 탈영만 안 했어도 이런 쓸데없는 짓 없이 쉽게 이용할 수 있었을 텐데.”
“탈영할 거라 예상해서 날 찾을 수 있었다고 하지 않았냐…….”
“아무튼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정신 바짝 차려라.”
“……하, 내가 어쩌다가 이런 놈한테 엮여서. 젠장.”
투덜거리는 아르곤의 말은 사뿐히 무시해 주었다.
“영감이 빨리 통신을 받아야 할 텐데.”
“제국의 귀족, 그것도 공작이 바로 연결되겠냐? 며칠 기다릴 생각은 해야지.”
기분이 상한 아르곤이 소심한 태클을 걸었지만, 그 저주는 통하지 않았다.
[타이니 경!?]아세리안에 있는 발렌티아 저택으로 통신을 연결하자 수정구 너머에서 대기하던 마법사가 후다닥 밖으로 튀어 나갔고, 그로부터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금발 벽안의 중년인이 얼굴을 비추었다.
“오, 영감님! 바쁘실 텐데 바로 뛰어와 주시다니…….”
[시끄럽고, 어찌 됐냐? 옆에 그놈은 뭐고?]“뭔 귀족 말투가……. 깡팬가…….”
아르곤이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지만, 검제의 날카로운 눈은 입 모양만으로 그 단어를 읽어냈다.
[혹시 저 싸가지없는 놈이 그 아르곤이냐?]아르곤이 흠칫하는 순간, 타이니가 빙그레 웃으며 미소를 지었다.
“정답. 내가 금방 찾아낼 거라고 했죠?”
[그래, 잘했다. 잘했는데……. 지금 상황이 좋지 않아! 통신할 시간에 그 마족이나 찾을 것이지, 뭐 하는 거냐 지금!?]아니, 씨. 기껏 찾아서 보고하는데 왜 이래?
검제의 호통에 순간 울컥했지만, 이내 다른 말이 마음에 걸렸다.
“상황이 좋지 않다고요? 뭐 잘못됐어요?”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 웨폰 마스터 그리드 영감과 현자의 마탑을 통해 극단적인 상황을 막아 보겠단 얘기를 들은 게 불과 얼마 전이다.
그런데.
[조금 전 그리마와 락스턴, 페이든 왕국에서 연합의 군대를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진격하겠다고 선언했다. 앞으로 일주일 안에 라힐에서 초전이 벌어질 거야! 당장 그 마족을 찾아내서 작살내도 뒷수습이 될까 말까다! 그러니까 서두르라고!]“아니! 무슨 미친 소리를……!?”
“하…….”
얌전히 듣고 있던 아르곤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올 만도 했다. 연합의 전력을 모두 모아도 불리할 게 뻔한 전쟁에서 반쪽짜리 군대로 선공을 가하겠다는 말이었으니까.
3국의 목표가 연합을 멸망으로 이끄는 게 아닌 이상 납득하기 힘든 바보짓이었다.
[일단 연합의 선공이 시작되면, 황제 폐하도 더는 전쟁을 미룰 수 없게 된다. 여론이란 게 있어. 최대한 빨리 그 마족을 찾아 처리해야 해.]“씁,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양해를 구할 게 있어서 겸사겸사 통신을 건 건데 말입니다. 더 서둘러야겠군요.”
혀를 차는 타이니의 모습에 수정구 속 검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양해?]떨떠름하게 되묻는 그의 눈이 살짝 흔들리는 것이 보였지만, 타이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려던 말을 꺼냈다.
“아르곤이 그 마족을 찾을 아티팩트의 제작법을 개발해 냈습니다.”
[그래!? 그럼 당장…….]“근데 찾아내더라도, 혹시나 놓치면 일이 꼬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놈을 확실히 잡기 위한 원군을 요청하고자 연락드렸습니다. 그게 ‘첫 번째’ 부탁입니다.”
[원군? 지금 상황에?]“한 명이면 됩니다. 목표만 확실해지면 순식간에 ‘날아올 수 있는’ 사람이 있잖습니까. 아세리안에서라면 엘븐하임까지 통신이 가능하지요?”
[……충분하지. 무슨 말인지 알겠다. 그런데 네가 어디 있을 줄 알고 그녀가 움직일까?]“3왕국의 왕궁 중 하나 아니겠습니까? 붙어있는 작은 나라들이니, 에스티나한테는 그리 넓은 범위가 아닙니다.”
뭐, 굳이 다 뒤지지 않고 바로 날 찾아올 거 같긴 하지만.
무슨 조치를 해 놓은 건지는 몰라도, 에스티나가 자신을 이상하리만치 잘 찾아낸다는 말은 굳이 보태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자신의 짐작일 뿐이니까.
[그렇긴 하지. 어쨌거나 그렇다면 그나마 최악의 상황은 아니구나. 이렇게 되면 나는 나대로 다른 조치를 취할 테니, 최대한 빨리 그 마족을 찾아내야 한다.]“물론이죠. 그래서 말인데…… 한 가지 더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야, 진짜 할 거야?”
옆에서 타이니를 쿡 찌르는 아르곤의 모습에 검제의 눈이 더욱 찌푸려졌다.
[……무슨 부탁?]“그 아티팩트 제작에 통신용 수정구가 필요한데, 지금 ‘이 통신구’를 재료로 쓸까 합니다. 어디서 새롭게 제작할 만한 시간은 없으니까요.”
통신소의 수정구를 강탈하겠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문제라면.
[……응? 야, 너 지금 이쪽이랑 통신한 게 기록에 남을 텐데?]“그러니까요. 뭐, 어차피 전쟁이 시작되면 발렌티아 가문과 계약한 용병이 통신소를 습격했다는 뉴스 정도는 사소한 거겠죠. 그것 좀 무마해 달라고 부탁드리려 했는데, 차라리 잘됐…….”
[이 미친놈아!!!!]“……흠, 흠. 상황이 급한 것 같으니, 통신 끊습니다. 그럼 전 이만.”
[이런 씨……!]파지지직. 팟.
내부에 서린 마나가 사라지고 다시금 투명하게 변한 수정구.
그리고.
“자, 이제 튀어야 한다. 자신 있지?”
“……진짜 하네.”
모든 걸 포기한 표정의 아르곤 앞에서 타이니는 태연하게 수정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직후.
– 콰아아아아아앙!
가스턴 통신소 건물의 일각이 터져 나가며, 온 도시에 요란한 비상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