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269
269화. 참상
아스란의 제도 아세리안만큼은 아니지만, 연합에서 가장 큰 영토와 식량 생산량을 가진 그리마의 수도답게 아그라는 상주인구만 추정 20만에 달하는 대도시였다.
현자의 마탑에서 비롯된 연합의 마도 문명을 기반으로 수십 년의 평화 속에서 안정적으로 번영을 누려 온 대도시.
그곳에서 최악의 재앙이 벌어졌다.
“죽어!!!!”
“다 죽여!!!!”
“캬아아아아악!”
살기에 찬 고성이 아그라의 시내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한밤중 왕성에서의 소동 때문에 거리를 기웃거리던 시민들이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을 향해 잔혹한 폭력을 휘두르는 광경이었다.
“끄아아악!”
“죽어어어!!!”
길거리에 굴러다니던 짱돌과 부엌일을 하다 들고 나온 식칼이 그대로 사람을 죽이는 흉기가 되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그럴진대.
– 엄마!!!!
– 아들!!!
– 죽어!!!!!!!
과하게 뛰어난 타이니의 감각은, 근처 집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차마 묘사할 수 없는 참혹한 정경까지 그대로 전달해 주고 있었다.
대체 그년이 뭘 어떻게 한 걸까?
‘아무리 악마급 마족이라 해도 이건…….’
복잡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다가도.
“이런 X발!!!!! 그 X년이!”
결국 이미 죽어 버린 마족에 대한 분노만이 머릿속을 잠식할 뿐이었다.
“타이니!!”
대상을 잃은 살기가 들끓어 오르자, 황급히 옆으로 다가온 에스티나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데.
타이니는 이글거리는 눈을 그대로 들어 에스티나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보이는 사람들 다 말려! 아니, 그냥 다 기절시켜!!!!”
그러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바로 거세게 발을 구르며 전력을 끌어모았다.
“으으으압!”
그의 전신에 노을빛 오러가 은은히 피어오르더니 그 모두가 목에 집중되었고.
“모두 정신 차려!!!!!”
이내 인간의 성대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우렁찬 음성이 사방의 모든 공간을 강타했다.
– 정신 차려어어어어어!
우르르르르르르릉.
한밤중의 소란까지 일순간 잠재워 버릴 만한 음파가 일대의 지면마저 뒤흔들며 옅은 노을빛 마나를 퍼트렸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동족 강화’의 권능이 그것에 닿는 모든 사람의 머리로 몰려들며 마기에 오염된 사람들을 깨웠다.
“죽어, 으으으!?”
“끄윽?”
하지만 아무리 효율이란 말로도 표현이 안 되는 수준의 정령 마법이라 해도 한계는 분명했다.
지금 타이니의 전력을 투사한 권능도 주변의 수천 명을 깨우는 것이 고작이었고.
“끄아아악!”
“이, 이게!”
“엄마!??! 이, 이게……?!”
“아, 안 돼! 내 새끼!!!!!”
그나마 정신을 차린 이들마저도 자신이 저지른 참상, 혹은 죽어 가는 주변 사람들을 보며 그대로 다시 패닉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런 시민들 사이로, 녹색 피부의 오크와 작고 빛나는 은빛 갑옷만을 걸친 녹색 머리 엘프가 내달리기 시작했다.
“어찌 이런 일이……. 조상신이시여…….”
“어머니 세계수의 가호가 이 땅에…….”
퍼버버버벅.
애도하는 말이 무색하게도,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서는 사람들이 눈을 까뒤집으며 하나둘씩 기절하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흐른 피와 눈물이 아그라의 바닥을 축축하게 물들여 갔다.
그 광경을 보며, 타이니는 아직도 멍한 눈으로 멈춰 서 있던 그리드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해, 영감!? 안 움직이고!!”
“영, 큽. 젠장, 간다!”
온 도시에 벌어진 참상과 타이니가 보여 준 엄청난 퍼포먼스에 연달아 충격을 받았던 웨폰 마스터가, 그제야 정신을 수습하며 오크의 대전사와 세계수의 수호자 뒤를 따랐다.
그러자.
“……인상적이군.”
타이니의 옆에는 이 상황에서도 차가운 눈으로 차분한 목소리를 뱉어 낸 성기사만이 남아 있었다.
“네놈도 성기사라면 움직이지?”
“……그럴 생각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타이니를 한참 응시하던 성기사가 이내 두 손으로 원호를 그리며 합장했다.
“……하늘에 계신 나의 주, 여신의 이름으로 모든 삿된 것들을 부수라!”
이내 그의 몸에서 흰빛이 하늘로 쏘아 올려지더니, 어둡던 밤하늘이 새하얀 빛으로 물들며 백색의 별빛 같은 빛줄기들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아아아!”
“이, 이런!”
“여보!!!”
저 멀리, 타이니의 동족 강화가 채 닿지 않았던 아그라의 일각에서 소란이 급격하게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좀 전에 타이니가 보여 준 동족 강화의 권능에 결코 뒤지지 않은 수법이었다.
전생에 대사제들이나 갓핸드가 보여 준 성법에 결코 모자라지 않는, 아니 솔직히 말해 수준이 더 높아 보이는 느낌.
“젠장, 예전 같았으면…….”
그때 성기사의 얼굴이 한순간에 창백해지며 왜인지 자신을, 아니 정확하게는 어깨 갑옷 아니무스를 노려보는 것 같았지만, 등장부터 이상했던 자이니 새삼스레 그 행태를 일일이 신경 쓰기도 귀찮았다.
지금은 그저 그가 보여 준 능력이 놀라울 뿐.
‘신성력에, 마법까지 더해진 건가?’
볼수록 놀라운 자였지만, 당장 그 정체를 파고들 시간은 없었다.
“나는 동쪽, 당신은 서쪽.”
“알겠다.”
짧은 대화였지만, 그것만으로 의사는 충분히 전달되었다.
둘은 그 순간부터 서로 정반대 방향으로 찢어져 움직였고, 어느 정도 기력이 회복되자마자 다시금 ‘동족 강화’와 ‘신성 정화’의 권능을 아그라 곳곳에 퍼트리기 시작했다.
두 권능은 터져 나오는 간격과 한 번에 미치는 범위, 그 효과까지도 놀랍도록 비슷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그 점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애를 썼음에도 그 노력은 결국 이미 벌어진 일을 가까스로 수습하는 것에 그쳤을 뿐이었다.
지옥 같던 시간이 지나고 동이 터 올 무렵에는 시내 곳곳이 통곡 소리로 가득했다.
“으아아아아악! 내, 내가 왜……!!!! 아, 아냐. 내가 아냐!! 이건 꿈이야……. 그래, 꿈…….”
사랑하는 가족을 제 손으로 죽이고 만 가장이 비명을 지르다가 스스로 목을 찔렀고.
“어, 엄마!!? 흐에…… 흐에에엥!”
붉게 물든 눈으로도 용케 자식이 아니라 자신의 심장에 칼을 꽂은 엄마를 본 아이는 그치지 않을 눈물을 터트렸다.
그리고 본의 아니게 그 많은 목소리를 듣고 느낄 수밖에 없었던 한 기사는 이를 갈며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그 마족 새끼, 다시 살려서 찢어 죽이고 싶다. 손끝에서 발끝까지 잘근잘근 찢어서! 이런 개 같은…….”
간밤이 아니라 이미 며칠 전에 살해된 듯한 사제들의 시체가 가득한 교회의 첨탑 위에서, 타이니가 풀리지 않는 분노를 토해 내고 있을 때.
부드러운 바람과 함께 다가온 녹색 머리의 엘프가 그를 등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만해, 타이니. 최선을 다했잖아? 그래도 시민의 절반은 구했으니, 우리는 충분히 잘한 거야.”
자신을 위로하는 포근한 체온과 부드러운 목소리에도 타이니의 표정은 펴지질 않았다.
“……아그라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상함을 느꼈었어. 지하에 깔린 마기를 말이야. 마족만 처리하면 될 거라고 무시했는데, 먼저 조치를 취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지도 몰라.”
마른세수를 하면서 한탄하듯 토해 내는 말. 그 자조 어린 목소리에 에스티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타이니.”
어느새 첨탑 아래에서 살포시 뛰어오른 콧수염 신사 역시 타이니의 어깨를 두드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 마법진에 대해선 잘 모르잖나? 무슨 수를 쓸 수 있었겠나.”
“다 부수기라도 했으면…….”
“그랬다가는 바로 마법이 발동했을지도 모르지. 그러면 그거 수습하느라고 마족은 잡지도 못했을걸?”
“그래. 너, 의외로 이런 걸 신경 쓰는 타입이었어? 아닌 것 같았는데?”
에스티나가 보탠 말에 얼굴이 살짝 붉어진 타이니가 물러서듯 몸을 일으켰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는지 되짚어 본 거뿐이야.”
절반의 진심이 담긴 변명을 토해내며 그는 붉어진 얼굴을 하늘로 돌렸다.
모든 친구를 살리고, 모든 것을 좋게 바꾼다.
그 흐름에 집착하다 보니, 지나간 일에 연연하지 않았던 원래의 성격이 자신도 모르는 새에 변했나 싶었다.
쯧.
‘몸이 어려져서 마음도 약해졌나.’
제이나 라프탄 등이 알았다면 어처구니없어할 만한 생각이었지만.
‘그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하면 돼.’
타이니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던 그때.
– 타이니!
멀리서 우렁우렁한 음성이 들려오며 커다란 오크가 빠르게 가까워지더니, 이내 첨탑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쿵.
무겁게 울리는 착지음과 함께 저릭이 팔을 털자, 그 어깨 위에 축 늘어져 있던 청년이 타이니에게로 던져졌다.
“음?”
쿵.
우당탕탕.
타이니가 그 모습을 빤히 보면서도 손을 내밀지 않자, 당황한 저릭이 재빨리 움직여 탑 아래로 굴러떨어지려던 청년의 몸을 도로 집어 들었다.
“왜 안 잡지? 네 친구 아니야?”
“얘, 왜 이래?”
“왕궁에서 왕을 지키던 기사인데, 너한테 데려다 달라고 하길래 데리고 왔다만? 동료 아닌가?”
“어, 맞긴 한데. 어차피 이 높이에서 떨어진다고 다칠 놈도 아닌데, 뭐.”
“…….”
그 말에 주변에서 싸늘한 눈길이 날아들자 타이니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근데 얘 진짜 왜 이런 거야? 이놈이 뻗을 만한 상황이 아니었는데?”
그 말에 저릭이 더 기가 막힌다는 눈으로 타이니를 바라보았다.
“……왕궁에서 기사 수백을 베고 그 시체 더미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 뒤에 왕을 감추고.”
“……그래?”
그제야 자신이 아르곤을 어떤 상황에 두고 왔는지 깨달은 타이니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기절한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도망을 안 쳤다고?’
솔직히 녀석에겐 아무런 기대 없이, 반쯤 귀찮은 일을 떠맡기는 심정으로 왕을 던져 둔 것이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혼자 튈 것이고, 최선이라고 해 봤자 왕을 데리고 같이 몸을 피할 거라 생각했는데.
“제법이네, 아르곤.”
어쩌면 어린 시절의 아르곤은, 십여 년 뒤보다 실력은 모자랄지 몰라도 패기는 조금 더 있었나 보다.
“이 시대에는 좀 믿고 맡겨도 되려나.”
그 중얼거림에 늘어진 아르곤의 몸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면 착각일까.
타이니는 피식 웃으며 소심한 동료의 연극을 눈감아 줬다.
그러던 순간.
“재밌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낯선 목소리와 함께 은빛 갑옷을 입은 성기사가 그들이 있는 첨탑의 반대편에 내려앉는 것이 보였다.
“……네놈.”
다시금 전날의 짜증 나는 상황이 떠올라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간밤의 재앙을 수습하는 데는 저자의 공도 컸던 터라 뭐라 말을 하기도 애매했다.
그리고.
“초인급 성기사…….”
“갓 핸드 경은 아닐 텐데…….”
“나도 처음 보는 친구요.”
이제야 한숨 돌리고 있던 동료들의 시선이 다시금 제게 몰리자, 불쾌감 사이로 잠시 잊고 있던 의문이 떠올랐다.
기억에 없는 초인급 성기사.
“교황 성하의 특명을 받고 당신을 찾아온 성기사, 크롬입니다. 광휘의 기사 타이니 경.”
그 성기사는 태연한 기색으로 여전히 그에게 생소한 이름을 밝혔다.
“크롬……이라.”
어디서 들어 본 것도 같은데?
이질감 속에서 경계심을 담은 검은 눈동자와 차가운 푸른 눈이 교회 첨탑의 빛나는 원 아래에서 교차하던 그날.
인류 역사에 남을 만한 대참사에 관한 소문이 온 세상에 퍼졌다.
그리마의 수도 아그라, 락스턴의 수도 스턴빌, 페이든의 수도 로메인을 비롯한 인접한 6개의 대도시에서 추정 100만 명에 가까운 시민들이 서로를 죽고 죽이는 참사가 벌어졌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소문.
그 재앙의 여파는 너무나도 컸기에 수많은 유언비어가 함께 퍼져 나갔다.
물론 그중에는 진실에 가까운 소문들도 존재했지만.
악마추종자들의 짓이다.
아니다, 마족이 등장한 거다.
수많은 생명이 고통 속에서 사라져 감으로써 이미 예정되어 있던 파멸의 운명이 급속하게 가까워졌다는 것을,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