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273
273화. 마지막 준비?
락스턴 대군, 격파.
연합의 군대, 전격 후퇴.
제국에서 성명 발표.
– 더 이상 확전을 원하지 않는다. 이제는 재앙을 대비해야 할 때.
제국에서 마족의 침략을 대비한 연합군 구성을 제안했다!!
아스란 황실에서 극비리에 각 왕국에 전한 소식이었지만, 사인이 사안인 만큼 그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 나가 대륙을 휩쓸기 시작했다.
“무슨 헛소리야, 요즘 세상에?”
“그래도 얼마 전에 연합의 그 재앙도 있었잖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마족의 침략이 말이 돼? 동화책에서나 본 건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저 소문일 뿐이라며 무시하려 했지만, 다른 국가와 종족들의 대응이 심상치가 않았다.
– 엘븐하임, 제국의 제안에 적극 호응.
– 바토르, 오크의 성전 역시 연합군 결성 찬성.
– 웨어비스트, 참전 선언.
– 현자의 마탑, 마계의 문이 열릴 위치 탐색 시작.
– 연합, 그리마를 비롯한 3국의 재앙이 마족 때문이라 선언. 대 마족 전선 합류 결정.
연달아 이어진 폭탄선언들.
그제야 민중들 역시 소문이 결코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물론.
“세상에 그게 무슨 말이야?”
“대체 세상이 어찌 되려고…….”
“마족들이면 마물 같은 건가?”
“그런 게 모여서 전쟁을 한다는 거야?”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이는 드물었지만.
어쨌거나 대륙 전체의 이목은 ‘인류 연합’이라는 전대미문의 연합체를 구성하는 일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같은 시각.
국왕 오트만 2세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왕성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아그라의 영웅들은 이제야 다음 행보를 결정하고 있었다.
“확실히, 이제야 얼추 회복이 됐네.”
몸 상태를 진단하던 녹색 기운을 거두어들인 에스티나의 말에 타이니가 옅은 미소로 답했다.
“그래. 덕분이야. 고마웠어.”
“별말씀을.”
에스티나 역시 미소를 보였지만, 다시 무언가를 떠올린 타이니는 자연히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며칠의 시간도 아까운 마당에 이게……. 하…….”
아그라의 재앙을 수습할 때 가장 무리한 것은 아무래도 성기사 크롬과 타이니 자신이었다.
전력을 다한 권능을 몇십 번이나 반복한 후에 찾아온 오버리바운드.
그렇게 무리한 탓에 생긴 심각한 내상이 고작 사흘 만에 완치된 건 분명 놀라운 일이었다.
다른 이였다면 권능을 뿌리다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으로 무리한 것이니까.
아무리 그리마의 왕이 영약을 챙겨 줬다 해도, 에스티나가 곁에서 ‘세계수의 축복’을 계속해서 전해 주지 않았다면 몇 배의 시간이 걸렸을 터.
그러니 그의 회복은 상당히 빠른 것이었지만, 에스티나도 타이니도 온전하게 기뻐할 수는 없었다.
며칠 전, 검제와의 통신에서 들은 내용만 떠올리면 마음 편히 웃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어쩔 거야?”
“……테르티우스로 가야지. 문 닫아 잠그고 있을 드워프들, 정확히는 하이넨을 설득해야 할 테니.”
타이니가 또다시 한숨을 쉬며 대답하는데.
“그래. 드워프들의 첫 번째 망치. 그런데 그 사람이 정말 그렇게 이상해? 네 기억을 보긴 했지만…….”
이어진 에스티나의 말에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하이넨. 그 드워프 영감을 떠올릴 때면 참 많은 추억이 생각났으니까.
“뭐, 이상하다는 말로 표현하기엔 조금 부족……. 그런데 너, 이 시기에는 만난 적 없어?”
“얼굴이야 몇 번 본 적 있지만, 알다시피 우리가 그다지 사이가 좋질 않아서…….”
대륙에서 가장 사이가 좋지 않은 두 종족을 꼽자면, 흔히 엘프와 오크 혹은 엘프와 드워프 간의 관계를 말하곤 한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 타이니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고집 안 부릴 때는 평범한 드워프 같지.”
“정말 이상하거나, 그냥 드워프 같거나? 엘프한테는 최악의 상대로군.”
“그래. 전생에도 너랑은 사이가 안 좋았어. 그래도 믿을 만한 동료니까 최대한 빨리 만나 봐야지.”
“이번에는 나도 저릭도, 웨폰 마스터도 다 돌아가야 해. 알지?”
“응. 상황이 상황이니까 어쩔 수 없지.”
강림 예정일이 100일, 아니 이제 95일 남았다.
전생에는 존재조차 몰랐던 황실의 보물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진 강림의 시간을 예고했다 들었다.
‘어쩌면 그래서 말룸 놈들이 제국부터 노렸던 걸지도.’
강림의 시간이 십수 년이나 빨라진 것은 무엇보다 끔찍한 변수였지만, 그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그러니 이제라도.
“서둘러야지.”
“그래. 난 여기 군주에게 말만 전하고 떠날 거야. 너희들은?”
“상황이 상황인 만큼 나도 가야지. 여태 네 회복을 위해 남았던 거니까.”
그 말에 타이니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래, 그래야지. 괜히 나 때문에, 미안해.”
세간에서 인류 연합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마당에, 엘븐하임의 대표라고도 할 수 있는 에스티나가 며칠씩이나 이곳에 묶여 있었던 것은 분명한 손실이었다.
그러나 그 사과는 바로 등짝을 ‘짝!’ 소리가 나게 내리치는 매서운 손길로 돌아왔다.
“억!?”
“자꾸 그런 말 하지 말랬지? 네 몸 상태와 컨디션을 최상으로 끌어올리는 건 대의를 위해서라도 필수야.”
“그, 그래. 미안.”
“또!”
“……미안.”
“씁!”
“그래, 안 미안해. 그냥 고마워. 됐어?”
“그래. 그거면 돼. 아, 그런데…….”
만족스럽게 웃던 에스티나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되물었다.
“왜 그 성기사한테 치료를 부탁하지 않은 거야? 아무리 그래도 나보다는 제대로 된 사제가 나을 텐데?”
그렇게 묻는 에스티나의 얼굴에는 묘한 기대감이 어려 있었지만, 타이니는 그 말에 무언가 안 좋은 것을 떠올린 듯 시선을 돌리며 살짝 찡그린 표정을 지었다.
“그게, 좀 불편한 느낌이 들어서.”
그 말에 에스티나가 못마땅한 듯 잠시간 입을 삐쭉 내밀었지만, 이내 타이니가 자신을 바라보자 바로 반문했다.
“불편? 뭐, 나도 좀 이상해서 피하기는 했는데, 원래 성기사들은 다들 조금씩 이상하지 않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종교에 깊게 빠진 이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으니까.
그나마 일반인들을 상대로 포교를 하는 사제들은 화술이라도 배우니 대화가 통하는 편이지만, 성기사는 그런 것도 없었다. 곱게 미친놈을 찾고 싶으면 타락하지 않은 성기사를 찾아가 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
하지만 그자는 그런 느낌도 아니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좀 이상한 말이기는 한데, 그자는 왠지…….”
부상을 회복하는 동안 그 성기사에게서 풍기는 위화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 끝에 내린 결론이 머릿속을 스쳤다.
‘신성력을 풍기는 마물 같단 말이지.’
이상한 말이지만 그자에겐 더없이 어울리는 말이라 생각하는데, 그것이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진 않았다.
‘아우, 영감.’
얼마 전 검제와의 통신이 마음에 걸렸다.
그 말대로라면 자신이 내린 결론은 말이 안 되니까.
“왠지 뭐?”
“아니, 아니야. 나중에 확실해지면 말해 줄게.”
결국 타이니는 그렇게 말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에 또다시 삐죽이 입을 내민 에스티나가 뭐라 말을 하려 할 때, 차가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역시 여기 계셨군요, 타이니 경.”
“또 왔냐…….”
은빛 갑옷과 무표정한 얼굴, 그 익숙한 모습에 타이니의 표정이 굳어지는데.
목소리의 주인인 성기사는 표정 변화도 없이 바로 옆에 있는 에스티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세계수의 수호자님. 뵙기가 참 힘들군요.”
다만 에스티나의 얼굴 역시 편치는 않아 보였는데.
“아그라의 재앙을 함께 극복한 동지 아니었습니까? 반응이 너무 섭섭한데요? 조금 전 타이니 경 말씀도 그렇고.”
“그런 말을 할 거면 좀 웃으면서 하지 그래? 그럼 좀 믿음이 갈 텐데.”
타이니의 차가운 반응에 성기사는 그를 슬쩍 바라보더니, 이내 정말 억지스러워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보시다시피 제가 너무 오래 표정이 굳어 있어서 감정 표현이 쉽지 않습니다. 이해해 주시지요.”
“으…….”
검제와 나눈 대화도 있고 하니, 더욱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저 새끼 나한테만 일부러 저러는 거 같은데?’
타이니가 찜찜함에 인상을 찌푸릴 때, 마찬가지로 떨떠름한 표정을 짓던 에스티나가 끼어들었다.
“나를 찾고 있었다는 건가요? 무슨 뜻이죠, 성기사?”
“크롬……입니다, 수호자님. 다름이 아니라…….”
성기사의 시선이 얼핏 타이니를 향했다.
‘아니, 내가 아니라 내 갑옷, 아니무스를 보는 건가? 왜지?’
그가 그 시선에 닿는 지점을 읽고 다시 인상을 찌푸리는 동안, 크롬은 에스티나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수호자께, 아니 엘븐하임에 신전의 이름으로 청을 드리고 싶습니다.”
“음?”
생각지 못한 정중한 태도에 에스티나가 고개를 갸웃하는 찰나.
“혹시 계약자를 잃은 정령이 있다면, 신전에 하나 정도는 양도해 주실 수 있을는지요. 대가는 섭섭지 않게 치르겠습니다.”
이어진 그 말에 그녀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싸늘해졌다.
“하나? 양도? 하…….”
“……무리한 부탁일까요?”
분노한 듯한 에스티나의 모습에 성기사가 의문을 표하는데.
“……어르신들을 거래하라? 감히 내 면전에서 그따위 소리를 하다니!! 제정신인가요!?”
보기 드문 에스티나의 고함을 듣고 나서야 그의 표정도 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그녀의 반응이 매우 이상하다는 듯한 얼굴.
“아니, 왜……? 그, 불쾌했다면 죄송합니다. 그런데 어르신이라니요? 엘프들이 언제부터 정령을 그렇게 높여…….”
그 변명에 듣고 있던 타이니마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저 인간은 엘프와 정령의 관계도 모르는 건가?
“뭐죠, 당신!?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요? 감히 엘프의 앞에서 정령을 사고판단 소리를 해?”
유형화되어 넘실거리는 살기가 대번에 성기사를 위협하기 시작하고, 그제서야 그의 태도가 확 바뀌었다.
“그게 그렇게 실례가……? 아, 아니, 진심이시군요. 이런……. 변명이 아니라 정말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혼란스러운 심정이 여실히 드러나는 표정.
‘감정 표현이 쉽지 않다더니? 역시 저 새끼…….’
타이니가 그리 생각하며 인상을 찌푸릴 때, 에스티나 역시 비슷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확실히 선을 그었다.
“확실히 말해 두는데, 어르신들은 양도나 거래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군요. 하, 이런 상황일 줄은 몰랐는데. 역시 더 공부가 필요하군요.”
무언가 허탈한 얼굴로 이상한 소리를 하는 성기사.
하지만 이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그가 다시 타이니를 바라보았다.
“본의 아니게 들었습니다만, 오늘 떠나신다고요?”
“……그런데?”
이 새끼가 왜 이럴까 싶은데.
“그럼 바로 중앙신전으로 가 주시는 겁니까, 타이니 경?”
지난 나흘 내내 들었던 말이 다시 그 입에서 튀어나왔다.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고 말했을 텐데?”
“타이니 경이 신전에서 공식적으로 시성(諡聖)되면 연합군을 구성하는 데에도 분명히 도움이 될 텐데요?”
며칠간 지겹도록 반복하던 말.
그에 타이니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검제가 당부한 일이 있으니 굳이 대립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확실하게 말을 해 둬야 할 것 같았다.
“성자의 칭호를 내려 준다라…….”
피식 웃은 타이니는 교양이 부족한 듯한 성기사에게 다시금 바깥세상의 상식을 가르쳐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게 무슨 가치가 있지? 타락한 신전의 시성이면, 타락 성자인가? 차라리 욕을 하지 그래.”
“감히!!!”
그 말에 성기사의 무표정이 구겨지며 막대한 살기가 솟구쳐 올랐다.
하지만.
“그따위 헛짓거리할 시간에 신전이나 연합군에 참여하라고 전해라! 그럼 내 얼굴은 질리게 볼 수 있을 거라고!!”
짜증스러운 얼굴의 타이니가 고함을 지르는 순간 퍼진 기세가 성기사의 살기를 그대로 짓누르기 시작했다.
다시금 마주치는 검고 푸른 두 쌍의 눈동자.
두 사람 중 먼저 시선을 돌린 것은 한숨을 내쉰 성기사였다.
“……아무래도 우리는 견해차가 큰 것 같군요.”
“오. 처음으로 마음이 통하는군.”
“……뭐, 알겠습니다. 설득은 차차 하기로 하지요.”
“차차?”
“그럼 좀 이따 뵙겠습니다.”
“하?”
어처구니없다는 타이니와 에스티나의 표정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다시금 무표정한 얼굴로 변한 성기사가 그들을 지나쳐 사라졌다.
* * *
“어허. 벌써 떠나는 건가? 우리 왕국의 은인들이?”
“상황이 상황인지라 시간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전하.”
그리마의 왕궁 대전에서 오트만 2세의 치하를 뿌리친 일행은 공식적으로 왕국을 벗어나게 되었다.
“카일룸에게 들려서 가는 게 빠르니까 기다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막상 진짜 헤어지려 하니 섭섭하다. 친구, 곧 다시 만나지.”
“당연하지. 그리고 내가 얘기해 준 것 잊지 않았겠지?”
“물론.”
타이니는 가슴을 팡팡 치는 저릭을 그렇게 배웅한 뒤.
“다행히 확전은 피했네. 왕국 연합도 인류 연합군에 합류할 터이니, 후에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다시 보세, 타이니 경.”
“그럽시다, 영감.”
“또 영감? 너, 너 이……. 끙.”
보는 눈이 있는 이상 품위를 신경 쓸 수밖에 없는 하늘색 콧수염 신사와도 정답게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어차피 다시 만날 인연. 이별의 시간은 짧을수록 좋은 법이니.
“당신의 여정에, 어머니 세계수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이제는 익숙하게 느껴지는 에스티나의 이마 뽀뽀, 아니 세계수의 축복 겸 인사를 마지막으로 타이니는 돌아섰다.
물론 필수 옵션 하나를 데리고.
“나, 나는, 왜? 너 따라간다고 안 했는데?”
“아까 다 말한 거 같은데? 헛소리 말고 따라와.”
“아으, 진짜…….”
아르곤의 발악을 무시하며, 양발에 저릭과 그리드를 매달고 솟구쳐 오르는 카일룸의 날개바람 속에서 길을 재촉하려던 순간.
어디서 나타난 건지, 불과 몇 시간 전에 만난 불청객이 또 그를 찾아왔다.
“남쪽으로 가신다고 하셨소이까?”
“넌 또 왜……?”
“시절이 어수선하니, 교황 성하를 뵐 때까지 내가 그대를 호위하겠소.”
타이니는 예상치도 못한 헛소리에 멍하니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쟨 뭐야? 왜 저래?’라는 의미의 눈빛을 보내는 아르곤의 심정에 심히 공감하고 있었지만.
이내.
– 우리가 가릴 처지냐?
‘끄으응. 영감, 나중에는 당신이 알아서 수습해 줘야 한다?’
다시 한번 검제와 통신을 떠올리며 억지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따라와라.”
“야. 너……!?”
아르곤이 의외의 대답에 경악하고, 성기사가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히 고개를 끄덕일 때.
타이니의 시선은 그리마의 남쪽 멀리, 높게 솟아오른 남부 산맥을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