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28
28화. 티벤
이리나는 스스로 고위 흑마법사라는 것을 증명하듯 온몸이 재가 되어 사라져 버렸지만, 그 전투의 여파는 생각보다 극심했다.
클로이의 성법으로도 기사들의 상처를 완벽하게 치유하는 것은 무리였고, 결국 클로이는 다음 날 도착한 공작령의 소도시 티벤에서 일행에게 이틀간 휴식을 명했다.
그리고 그 도시의 지배자인 티벤 남작의 비상 통신구를 통해 공작가의 본성에 이번 사건에 대한 보고를 넣었다.
공작가의 답신은 아주 빨리 돌아왔다.
[티벤에서 대기할 것.]값비싼 마법 통신으로 전해진 메세지는 그 한 줄뿐이었지만, 바로 다음 날 아침, 티벤 전체가 뒤집힐 만한 사건이 터졌다.
동이 트기도 전, 도시의 동문에 100여 기 규모의 기사단이 나타난 것이다.
“우와아아아!”
“기사단이다!”
“저게 말로만 듣던…….”
“……블루윙 기사단.”
“푸른 날개……!”
그들의 갑옷과 깃발에 새겨진 독수리 문양과 푸른 날개가 강조된 문양.
그것은 제국에서도 이름 높은 공작가의 정예들을 상징하는 것이었으니, 소도시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대규모 기사단의 행렬을 구경하기 위해 티벤의 시민들은 일제히 거리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정작 그 기사단이 향하는 곳에 있는 소녀는, 그들을 보자마자 얼굴을 감싸 쥔 채 주저앉고 말았다.
곁에 서 있던 플로 폰 티벤 남작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클로이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으으, 아빠, 뭘 이렇게까지…….”
기사단이 다가올수록 안절부절못하는 그녀의 모습을 본 타이니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도 이때는 어린 티가 나네.’
물론 클로이의 반응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공작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블루윙 기사단의 삼분지 일이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동원된 상황이다. 이미 전투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검제가 딸을 극진히 아낀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실감하게 되니 새삼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각하께서 직접 안 오신 게 어딥니까.”
찌릿.
비비안의 위로 같지도 않은 위로에 대한 답변은 강렬한 눈총뿐이었다.
붉은 머리 여기사가 공녀의 시선을 피해 먼 산을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 그들의 앞으로 유난히 커다란 말을 탄 기사가 다가왔다.
다각, 다각.
발굽 근처와 미간에만 새하얀 털이 박혀 있어 유난히 고급스러워 보이는 말이 클로이의 10여 미터 앞에서 멈춰 섰다.
이내 말에서 내린 기사는 투구를 벗어 들고는 그 자리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블루윙 기사단 부단장 가렌 클레멘 이하 103명, 공녀님께 인사드립니다.”
쿵.
“인사드립니다!!!”
부단장의 선창에 맞춰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복창.
어느새 전부 말에서 내린 기사들이 동시에 무릎을 꿇으며 내지른 외침은 주변의 모든 소리를 압도하며 퍼져 나갔다.
그러자 클로이 역시 상기된 얼굴을 드러내며 다시금 꼿꼿한 자세로 그 자리에 섰다.
“……수고 많으셨어요, 가렌 경. 그리고 다른 기사분들도. 이제 그만 일어나세요.”
“명을 따르겠습니다.”
선이 뚜렷한 중년의 금발 미남, 가렌이 먼저 일어서자 그 뒤의 기사들 역시 한 사람처럼 동작을 딱 맞추어 일어섰다.
푸른 날개가 강조된 깃발과 문양, 햇빛을 반사하는 은빛 플레이트 메일이 묘한 박력을 뿜어내며 거리를 조용하게 만드는 가운데.
가렌이 몇 걸음 앞으로 나와 웃으며 말을 건넸다.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공녀님. 각하께서 많이 걱정하셨습니다.”
“난 분명 멀쩡하다고 보고를 드렸는데요? 희생자도 없다고. 그런데 이렇게 나타나시는 건 좀 과해요, 가렌 경. 왜 당신까지…….”
“아하하, 그래도 고위 흑마법사가 습격한 일 아닙니까. 각하께서 걱정이 많으셨습니다. 본성을 거의 뒤집어엎으시며 저희를 집합시키셨지요.”
“아으, 아버지…….”
클로이의 얼굴이 다시금 벌겋게 달아올랐다.
자신과 관련된 일이라고만 하면 평소의 현명함은 전부 잃어버리고 바보처럼 구는 부친을 떠올린 것이다.
“본성에서 벌어진 비상사태만 아니었다면 정말로 직접 오셨을 겁니다.”
“……비상사태요?”
“아, 그건……. 돌아가 보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공녀의 한 발짝 뒤에 서 있는 티벤 남작을 의식한 가렌이 슬쩍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남작은 자신 때문에 분위기가 흐려진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가렌 경이시라면, 그 유명한 신속(神速)의 기사가 아니십니까? 아하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 남작님. 반갑습니다.”
일개 기사가 귀족의 인사를 받으며 존대도 없이 손을 맞잡았지만, 티벤의 지배자인 남작은 불쾌해하기는커녕 오히려 감격한 것처럼 보였다.
“제가 이렇게 블루윙의 기사분들을 뵙게 될 줄이야……. 정말로 반갑습니다. 하하, 미리 연락을 주셨다면 파티 준비라도 했을 터인데…….”
“하하…… 죄송하지만 그것은 정중히 사양해야겠습니다, 남작님. 각하께서 공녀님을 하루라도 빨리 뵙고 싶어하시니까요.”
“아…… 예, 당연히 그러시겠지요. 그럼 티벤에 계시는 동안 필요하신 게 있다면 무엇이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전력을 다해 지원하겠습니다.”
“말씀 감사드립니다. 그럼,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시겠습니까?”
“……예?”
“공녀님께 중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아…… 하하. 아, 그러시다면야 비켜 드려야지요……. 하하.”
당황한 남작의 대머리 위로 땀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공작가의 본성에 연줄이라도 만들어 보려던 얕은 수작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으니까.
가렌의 말은 사실상 면박이나 다름없었고, 언뜻 보면 기사 쪽이 남작의 상관처럼 보이는 이 광경은 분명 뭔가 이상했다.
그러나 사정을 알고 보면 그럴 만도 했다.
블루윙의 부단장이라면 황제의 명으로 준자작의 지위를 보장받는 신분. 비록 단승 귀족도 아닌 지위만 계승하는 신분이라고는 하나, 일개 남작으로서는 감히 어쩔 수 없는 위치인 것이다.
그의 당혹스러운 표정을 본 가렌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제가 나중에 따로 찾아 뵙고 또 감사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남작님.”
가렌 클레멘이 이렇게 웃으며 나와주는 것에 오히려 감격해서 함박웃음이 나올 정도로 말이다.
“하하하. 신속의 기사께서 그래 주신다면야, 저야 영광이죠. 그럼…….”
남작이 연신 식은땀을 닦으며 멀리 사라지자, 가렌의 시선이 클로이의 옆에 있는 검은 머리 소년에게 향했다.
“공녀님, 그 아이는 누굽니까? 평범한 꼬마는 아닌 듯합니다만.”
타이니를 경계하는 듯한 기색을 눈치챈 클로이는 가만히 서 있던 소년의 등을 떠밀었다.
“읏!?”
“이 아이의 이름은 타이니. 이번에 흑마법사 습격 사건에서 큰 공을 세운 아이입니다. 그리고 필레스에서 벌어진 일의 배후에 관해 아버님께 증언하기로 했지요.”
클로이로선 타이니를 외부인 취급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지만.
그 말을 들은 가렌은 오히려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타이니?”
“아, 믿기 힘드시겠지만 이 아이는 이미 기사급의 실력자로…….”
“타이니라…… 흔치 않은 이름인데. 거기다 필레스라면…… 설마?”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의 모습이 의아하기만 한 클로이의 고개가 그를 따라 움직였다.
“……꼬마야, 설마 네가 투서를……? 아니, 아니겠지. 에이, 설마…….”
가렌이 그리 말하면서도 애써 부인하듯 고개를 젓는데, 타이니는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필레스의 노예 매매와 영주의 비리를 고발한 투서라면 제가 한 게 맞습니다, 가렌 경.”
“……정말이더냐!?”
놀란 기색이 역력한 기사, 그리고 당당한 표정의 소년.
그 둘 사이에 선 공녀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의문을 표하자, 가렌이 작은 한숨과 함께 얼마 전 공작가에 도착한 투서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에 벌어진 일까지도.
“……그렇게 된 겁니다. 그 영주란 놈이 흑마법사로 밝혀지고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기 전까지는요.”
“……우와아. 타이니, 그 얘기는 왜 안 했어?”
“어차피 흑마법사 건으로 묻힌 일이니까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또. 애늙은이 같은 말투.”
클로이가 말투를 지적하며 훈계하듯 허리에 손을 올렸지만.
‘어쩌라고.’
타이니로선 그저 속으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를 보는 가렌의 눈은 어쩐지 점점 더 반짝이고 있었다.
“확실히 2단계는 맞는 것 같은데……. 올해 몇 살이지, 타이니?”
“……열세 살입니다.”
“허……? 허허허, 이건 대체…….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군. 이게 천재라는 말만으로 설명이 되나?”
놀라움을 표하면서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경계의 눈빛.
그에 타이니는 또다시 한숨을 삼키며 지어낸 과거사를 줄줄이 읊어 댈 수밖에 없었다.
필레스의 영주에게 했던 말 그대로.
“……그러다 최근에 갑자기 마나에 눈을 뜨면서 거지 신세를 면하게 되었죠.”
그 가짜 사연을 들은 가렌은 다시 한번 눈을 빛낼 수밖에 없었다.
‘몰락한 귀족 가문의 후예?’
그뿐만 아니라…….
“마나를 각성한 지 고작해야 두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사이 2단계까지 진입했다고?”
“……운이 좋았습니다.”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인데 또 뭐 어쩌겠냐.’
그를 살피는 가렌의 갈색 눈동자에 불꽃이 이글거리는 듯했지만, 그 시선을 마주한 타이니의 검은 눈동자는 담담하기만 했다.
“……흐”
이내 묘한 웃음을 지은 가렌이 갑자기 클로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공녀님, 이 아이를 믿을 수 있으시겠습니까?”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죠?”
“이 아이, 말도 안 되는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공작가를 적대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 자리에서 죽이셔야 합니다.”
갑작스레 튀어나온 살벌한 말에 클로이의 눈동자가 확 커졌다.
“……그 정도인가요?”
“빨라야 두 달 전에 마나를 각성했다는 녀석이 벌써 3단계, 익스퍼트의 벽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지금 대륙 7대 기사도…… 아니, 전설 속 영웅 중에서도 이 나이에 이만한 성취를 이룬 사람이 있다는 얘기는 못 들었습니다.”
직전에 꺼낸 살벌한 경고가 무색하게, 이어지는 말들은 그야말로 타이니의 재능에 대한 극찬이었다.
칭찬을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흠……. 그 또한 사실이긴 한데…….’
타이니가 줄줄이 이어지는 칭찬을 마냥 흐뭇하게 듣고 있던 그때.
“제가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이런 성취는 불가능할 겁니다. 그야말로 천재…… 아니, 괴물입니다! 이 아이는 사람의 범주를 넘어선 존재예요! 반드시, 반드시 저희 가문에서 품어야 합니다.”
……응?
말을 하면서 스스로 흥분한 듯 열변을 토하던 가렌의 논리가 엉뚱한 결론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당연히 그렇게 만들어야죠.”
흐뭇하게 웃는 클로이의 대답 역시 그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었다.
‘……내가 왜?’
당사자의 황당한 마음은 전혀 모르는 채로, 가렌과 클로이는 흐뭇한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수수께끼 같은 아이지만, 확실히 믿을 수는 있어요. 이 아이 덕분에 흑마법사의 수작도 미리 알아챌 수 있었지요. 그 전투에서 비비안의 움직임을 따라간 것도 이 아이뿐이었습니다.”
“그 정도였습니까? 그럼 단순히 마나의 재능만이 아니라 전투 감각 역시 타고났다는 건데……. 허허, 이 녀석 정말 탐나는 인재로군요! 녀석, 나랑 좀 친하게 지내자!”
중년 남자가 먹잇감 앞에서 침을 흘리는 짐승의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그 시선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네. 아, 하하…….”
장단을 맞춰 주기 위해 억지로 웃고는 있었지만, 입꼬리에 경련이 일어날 것 같았다.
‘검제, 그 양반이 대단한 것은 인정하지만…….’
존경할 만한 구석이 많은 사람인 것도 알지만, 절대 그 밑으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타이니의 꿈은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그리고 오롯이 세상에 새기는 것이지, 결코 누군가의 이름을 앞에 덧대고 싶은 게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아까 말한 비상사태라는 것은 무슨 일이죠? 아버지께서 못 움직이실 정도라니?”
“아, 그게…….”
가렌이 난처하다는 듯 주변을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괜찮아요, 가렌 경. 여기 있는 사람들은 믿어도 돼요. 이 아이 역시.”
그 말에도 가렌이 망설이는 듯 웃기만 하자, 클로이가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면, 나도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인가요?”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허허.”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쉰 가렌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예, 어차피 알게 되실 일이니까요. 사실…… 한 달 반쯤 전인가, 갑자기 비보(祕寶), 템퍼스(Tempus)가 사라졌습니다.”
그 말에 클로이의 안색이 순식간에 굳어졌고.
‘비보?’
생각지 못한 대화의 흐름에 타이니 역시 눈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