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283
283화. 전조 증상
“지금 여신의 대리자를 모욕한 것인가, 기사!?”
쿵.
가장 앞장서서 나선 것은, 여태 교황의 바로 아래 자리에서 미동도 없이 앉아 있던 새하얀 전신 갑옷 차림의 성기사였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는 인류의 영웅, 광휘의 기사를 단순히 ‘기사’라는 호칭으로 폄하하며 새하얀 오러가 넘실대는 검을 빼 드는 자.
타이니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이름을 알고 있는 자.
“갓 핸드…….”
이백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신전의 성기사단장을 역임하고 있는 연령 미상의 기사.
여신의 축복을 받아서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는 소문이 있는 괴물이었다.
물론.
‘소문일 뿐이지.’
세간에는 전설의 존재처럼 알려진 데다, 초인들에 대해 논할 때면 항상 최강으로 꼽히는 이들 중 하나가 갓 핸드였다.
하지만 소문의 실체 일부와 그 실력의 한계까지 알고 있는 타이니에겐, 그의 무력시위가 위협이 될 리 만무했다.
다만 안타까울 뿐.
‘성기사 영감…….’
말이 잘 안 통하는 인간이긴 했지만 어쨌건 믿을 수 있는 동료였고, 전생엔 결국 자신을 대신해서 죽기까지 했었다.
현생의 입장이 입장인지라 여태 피해 다니기는 했지만, 정말로 칼을 겨누고 싶지는 않았다.
‘이렇게 대치하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는데…….’
그 안타까운 감정이 한순간에 타이니의 분노를 가라앉힌 것이다.
하지만 그 심정과는 별도로 이미 일은 벌어진 상태였다.
쿵.
“흥. 물러서시지, 노인네. 타이니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구먼.”
잘 마감된 오크 전통의 가죽 예복을 입은 저릭이 어느새 타이니의 왼편에 다가와 기세를 뿜어내고.
“물러서세요, 성기사들. 광휘의 기사를 향한 압박은 곧 엘프들에 대한 적대로 간주하겠습니다.”
풀잎 정복을 입은 에스티나 역시 그의 오른쪽에 서서 녹색의 오러를 뿜어내고 있었으니.
분기탱천하던 성기사들 역시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저자는 감히 신탁을 의심하고 성하를 모욕했다! 성기사단, 검을 들어라!!”
쿵.
오히려 한 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기세를 피워 올리는 갓 핸드의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인류를 위협하는 대재앙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그 대책을 제안한 중심인물을 향해 서슴없이 칼을 빼 드는 모습은 분명 정상이 아니었다.
“지금 상황에…….”
“역시 성기사들은 좀…….”
“이래도 되나?”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목소리를 듣지 못할 리 없을 텐데도, 갓 핸드의 검 끝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여전하네. 뭐, 변하는 게 이상한가.’
그 익숙한 광신의 향기에 타이니의 입에서 절로 헛웃음이 나오는데.
교황의 뒤에서 무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성기사 크롬의 모습이 눈에 걸리는 순간, 그 헛웃음조차 사라졌다.
‘저 새끼…….’
하지만 당장 대치하고 있는 것은 크롬이 아닌 갓 핸드였다.
“꿇어라, 기사. 여신 앞에 죄를 고하라!!”
스아아아아.
신성 오러. 성령 기사의 주특기라 할 수 있는 성스러운 오러가 새하얀 빛을 발하며 정면을 압박하고, 그 뒤를 따르는 성기사들이 일제히 전진을 시작할 때.
무기도 없는 인간과 엘프, 오크의 최강자들은 오히려 살벌한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하, 씨. 일 꼬이게 만드네, 성기사 영감.”
“성기사들이 정말 제정신이 아니라더니. 거의 네 수준이다, 타이니.”
“뭐?”
“신전의 종자들은 항상 그랬지요. 앞뒤 안 가리는 건 타이니가 더하지만.”
“내가?”
친구들의 매도(?)에 타이니는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게 지금…….”
“이 상황이…….”
“누구 때문인 거 같아?”
거의 동시에 좌우에서 쏘아보는 눈빛에는 바로 찌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미안.”
하지만 그것도 잠깐.
“죄를 고할 생각이 없나 보군.”
우우우웅.
방패까지 꺼내 든 갓 핸드의 전신에 새하얀 빛이 솟구치는 것을 본 타이니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일단 광신도들 적당히 때려눕히고 보자고.”
자신 있게 내뱉기는 했지만, 솔직히 여건이 좋지 않았다.
연합 회의의 규정 때문에 녹턴을 숙소에 놓고 온 상황.
그나마 믿을 것이라고는 상성뿐이었다.
신성력에 의해 강화된 방어력과 힘, 그리고 끝없는 회복력과 체력을 바탕으로 한 정면 승부를 선호하는 갓 핸드는, 타이니에겐 딱 패기 좋은 상대일 뿐이었으니까.
물론 여신의 갑옷, 성령의 검, 수호의 방패를 모두 가진 갓 핸드를 녹턴도 없이 상대하는 것은 까다롭겠지만, 못할 것도 아니다.
‘빠르게 간다.’
– 와라, 월…….
기습으로 단숨에 상황을 정리한 다음 어떻게든 무마해 볼 생각을 하던 그 순간.
“멈추세요, 갓 핸드 경.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닙니다.”
대머리, 아니 교황의 낭랑한 목소리가 갓 핸드를 멈춰 서게 만들었다.
그리고.
“타이니 경의 말도 진심은 아니었을 거라 믿습니다.”
도무지 속마음을 알 수 없는 푸근한 미소로 이어진 말까지.
물론 타이니에게는 가증스러운 위선으로 보일 뿐이었다.
‘진심이다, 대머리 새끼야. 너…….’
하지만.
멈칫.
눈에서 불꽃이라도 쏘아 낼 듯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검제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뜻.
– 제발 닥쳐!! 일 더 크게 만들지 말고!
그에 ‘칫’ 하고 혀를 찬 타이니가, 일체화하려던 월랑을 다시 영혼 저편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타이니.”
이내 옆구리를 툭 치는 에스티나의 재촉에 마지못해 슬쩍 고개를 숙였다.
알아. 나도 안다고.
속으로 한숨을 내쉰 뒤.
“죄송합니다. 모두가 ‘힘을 합쳐서’ 이겨 내야 할 대재앙을 앞두고 분란을 일으키려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 잠깐 욱했습니다. 넓은 마음으로 양해해 주십시오.”
‘진심’을 담아 사과를 했는데.
“저, 저런…….”
그 순간 주변의 분위기가 더욱 냉랭해지기 시작했다.
‘왜? 뭐?’
뻔뻔하게 고개를 들려는데.
“내가 봐도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타이니.”
저릭조차 떨떠름한 얼굴로 눈치를 주는 것을 보니 조금 양심에 찔렸다.
아. 안 내키는데.
“아, 그게…….”
어쩔 수 없이 상황을 수습할 말을 덧붙이려던 그때.
“타이니 경도 사과를 했으니, 다시 회의를 이어 나갑시다!”
짝. 짝.
검제가 과장된 박수 소리와 대전을 떨쳐 울리는 목소리로 말을 막았다.
물론 그 직전 자신을 향해 눈을 부라리는 꼴을 보니 나중에 또 잔소리깨나 하겠다 싶었지만.
솔직히 마음에 없는 사과는 하고 싶지 않았던 터라, 타이니는 ‘흥’하고 콧방귀를 뀐 채 그냥 돌아서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그렇게 박살이 난 분위기에서 제대로 된 합의가 이루어질 리 없었다.
* * *
“저 똥 멍청이 새끼를 진짜……!!!”
“가, 각하 진정하십쇼.”
제나스가 발작하려는 검제의 허리를 붙잡고 낑낑대고 있을 때.
타이니는 뻘쭘한 표정을 지으며 딴청을 부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간신히 진정한 검제가 한숨을 내쉬었고, 다른 동료들이 각자의 입장을 밝혔다.
“어차피 신전이 뭐라 하건 우리 엘븐나이트들은 오렌 평야로 집결할 거예요. 설령 내가 타이니를 안 믿더라도, 우리 엘프들은 신전을 별로 안 좋아하니까.”
“우리 오크의 전사들도 은인, 타이니의 뜻을 따른다. 제국과 함께할 것이다.”
“……뭐 강림이 안 일어나면 보상을 받아야 하니, 우리 테르티우스도 뜻을 같이할 것이다.”
하이넨이 못 미더운 목소리로 떨떠름하게 한 발 걸쳤지만, 이제 그의 헛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자연히.
“웨어비스트의 사절도 그리 전해 왔어. 문제라면…….”
검제의 쓴웃음과 함께 모든 시선이 웨폰 마스터 그리드에게 몰렸다.
“그래. 이렇게 되면 우리 왕국 연합은 정말 이너빌로 갈 수밖에 없어. 현자의 마탑이 거들어 준다면 내 주장도 먹히겠지만…….”
그리드의 시선이 아르곤에게 돌아가는 순간, 그 역시 손을 내저으며 난색을 표했다.
“스승님도 아스란 황실 마탑에서 어떻게 강림 위치를 특정했는지 궁금해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변명할 방법이 없어요.”
그러자 내내 딴청을 부리고 있던 타이니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냥 이제는 그 마탑주, 솔레인 님께 회귀 사실을 말하고 협조를 구하면 되지 않나?”
“이제 두 달 남았다. 통신으로 진심을 전할 수 있겠냐? 증거도 없이? 대마도사가 그리 호락호락하게 움직일 거라 생각하지 마라, 타이니.”
“그래도…….”
“이미 오렌 평야를 향하고 있던 연합의 군대가 방향을 트는 것도 문제인데, 그것을 다시 틀어 버리면 오히려 혼란만 부추길 뿐이다. 일단은 왕국 연합을 빼고 생각하자.”
“하, 망할…….”
“나쁘게만 생각하지 마라. 정말 오렌 평야에서 강림이 시작되면 왕국 연합군도 빠르게 움직일 거다. 그리고 애초에 우리 역시 강림의 장소가 틀어질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일단은 정예들만 오렌 평야에 모으자고 한 것이고.”
“그거야 그렇지만…….”
제국 남부의 오렌 평야와 연합의 서쪽 국경 도시 이너빌은 거리가 제법 된다.
아무리 징집병을 제외한 기사단과 정예 병사들만 움직이는 것이라 해도, 엄연히 연합의 총의가 모인 대군.
그 대군이 움직이려면 아무리 빠르더라도 열흘은 걸릴 거리라는 것이 모두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강림의 문이 대륙 동부 쪽에 열릴 가능성을 대비한다 치자. 그렇게 생각하면 편하겠지. 그리고…… 타이니 너는 교황을 좀 만나 봐라.”
“언제는 피하라더니?”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않느냐? 네 말대로라면 교황의 반응은 확실히 이상해.”
“신전이 언제는 제대로였나…….”
타이니가 푸념하듯 꺼낸 말에 다른 동료들 역시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검제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다르다. 타락한 추기경들과 사제들을 신전 혈사로 몰아낸 교황이다. 최근 1, 2년간 사제들에 대한 세간의 평판도 이전에 비해 훨씬 좋아진 상황이다.”
“연합 쪽도 마찬가지지. 신전은 확실히 달라졌네, 타이니 경.”
“흠…….”
그리드가 보탠 말에도 타이니는 못 미더운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전생에 그가 때려죽인 놈 중에 절반이 악덕 귀족이라면, 3분의 1 정도는 타락 사제였다.
말세에 가까워졌을 때 신전에서 개혁인지 뭔지를 했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그때는 이미 마수병단과의 전쟁으로 정신이 없었다.
그 탓에 그의 머릿속에 박힌 신전의 이미지는 여전히 구정물과 같았다.
가끔 보이는 제대로 된 사제는 그 속에 핀 연꽃이고.
하지만 지금의 검제는 그가 알던 것과 정말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 개혁을 이루어 낸 것이 지금의 교황이다. 그런 사람이 거짓 신탁을 말하면서까지 연합군을 갈라놓으려고 하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아.”
“흠…….”
“아무나 교황과 독대할 수는 없겠지만, 너는 교황이 먼저 만나자고 하지 않았느냐. 좀 못 미덥긴 하지만, 일단 네가 말이라도 들어 봐라. 대체 왜 그러는 건지, 진짜 이유를 알아내면 더 좋고.”
“일리가 있어요.”
검제의 말에 에스티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런데 타이니가 할 수 있을까?”
“솔직히 못 미덥지.”
“지금 여기 있는 분들이 다 같이 만나자고 하면 어때요? 교황 성하도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저릭과 그리드, 아르곤이 바로 우려의 목소리를 보탰다.
“아까 회의장에서 죄다 교황 말 씹어 놓고, 잘도 만나 주겠습니다그려.”
그에 약간 울컥한 타이니가 삐죽이는 순간.
“그게 누구 때문이더라?”
“허, 참. 양심 어디……?”
“타이니…….”
“악! 아파, 아프다고! 티나! 꼬집는데 오러를 왜……!”
쏟아지는 비난 속에서 옆구리에 구멍이 뚫릴 뻔했다.
여전히 겉도는 하이넨만이 어색하게 웃고 있을 뿐, 방 안의 분위기는 금세 다시 떠들썩해졌다.
모두가 긴장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장난을 치고 있지만, 사실 이 또한 나름의 스트레스 해소 방안인 것.
다가올 재앙에 맞서며 종족과 나라를 이끌어야 하는 이들의 부담은, 그저 긴장하며 준비하는 것만으로는 해소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도 전생이랑 비슷해.’
일이 좀 꼬인 상황이긴 했지만, 이 또한 추억이라.
타이니의 얼굴에도 슬쩍 미소가 맺힐 때, 검제가 다시 상황을 정리했다.
“다들 오렌으로 안 갈 겁니까? 전부 병력 지휘해야 할 양반들이 헛소리는 그만하고 타이니에게 맡기시죠. 좀 못 미더워도.”
“왜 자꾸 못 미덥다고…….”
타이니 혼자 납득 못 하는 대화가 그렇게 끝이 났지만.
그렇게 합의된 방안은 실행되지 못했다.
그 직후에 전해진 외부의 소식 때문에.
– 대륙 각지에 마물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초월급 마물을 목격했다는 사람도…….
이 또한 이미 예상되었던 강림의 전조 증상 중 하나였지만, 그 빈도와 규모가 생각보다 아주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