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295
295화. 운명의 파편 (2)
– 그런 적이 없다?
“그렇다니까요. 애초에 그 파편이라는 게 뭔지도 모릅니다.”
타이니의 당당한 대답에 펜릴은 잠시간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 그런…….
“그리고 지금은 그런 파편인지 뭔지에 관해 얘기할 때가 아닙니다. 당장 글러터니가 강림하느니 마느니 하는 판국에, 더 할 말 없으시면 저는 마저 회복이나 하겠습니다.”
우걱. 우걱.
우드득.
다시금 입 안에 음식물을 쏟아 넣기 시작한 타이니.
그런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우란 누드와 펜릴의 시선이 교차했다.
그러다 무슨 텔레파시라도 오고 간 것인지, 뭔가를 떠올린 듯 펜릴이 말을 이었다.
– 파, 파편은 보통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당사자에게만 남는다. 그 존재감이 확실하여 모를 수가 없을 텐데?
“그딴 거.”
우걱.
“모른다니…….”
쩝쩝.
“……까요.”
우드득.
그 모습을 보며 우란 누드가 한숨과 함께 펜릴을 향해 되물었다.
“펜릴 님, 파편의 존재를 확인할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수인어가 아닌 공용어.
질문은 펜릴에게 하고 있지만, 사실상 타이니가 들어 주기를 바라는 말이었다.
그에 펜릴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 당사자 외에는 반신급 정도는 되어야 느낄 수 있다고 전해진다.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자 대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펜릴을 쳐다보던 타이니가, 바삐 움직이던 손길을 어느 순간 뚝 멈췄다.
“어……?”
반신급?
펜릴의 말을 듣다 보니 갑자기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던 것이다.
완전한 반신급은 아니지만, 비슷한 수준의 괴물을 만났던 기억이.
– 모를 줄 알았더냐, ‘운명의 파편을 지닌 인간’이여.
세 개의 머리를 가진 용.
영락한 고대의 폭식으로 추정되던 괴물이 자신에게 했던 말들.
– 운명의 파편을 내게 바쳐라!
“대미궁의, 주인이, 그런 말 했었어.”
불쑥 튀어나온 그림자, 루나 역시 그 기억을 보조하듯 말을 꺼냈다.
그 갑작스러운 등장에 우란 누드와 펜릴이 살짝 놀라기는 했지만.
“확실히, 그 비슷한 말은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
이내 바로 타이니의 말에 집중했다.
– 역시……!!
“하지만 그래도 모르겠습니다. 당최 뭔 소리를 하는지.”
쩝쩝.
– 그럴…… 수가…….
환호성을 지르려던 펜릴의 영체가 어색하게 굳어 버리자, 타이니 역시 먹는 것을 중단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당장 힘을 회복해 마수병단의 보호막을 깨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급박한 상황을 모를 리 없는 고대의 정령이 자꾸만 파편인지 뭔지에 관해 언급하는 것을 보니 사소한 일은 아닌 듯했으니까.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겁니까?”
– 당연하지! 그 파편은 신성이 사라져 가는 이 대륙에서 유일하게 그것을 다시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니까!
솔직히 그게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펜릴이 고고한 고대 정령의 모습을 확 날려 버린 채 길길이 날뛰는 걸 보니, 적어도 그가 그 운명의 파편이라는 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신성이니 뭐니 그런 어려운 얘기 말고, 좀 알아들을 수 있게 다시…….”
– 필멸자를 반신의 경지에 오르게 할 수도 있고!
“엑?”
– 상황에 따라서는 죽은 신을 부활시킬 수도 있단 말이다!!!
이어진 펜릴의 말은 타이니의 흡입을 멈추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게 무슨…….”
– 말 그대로다.
“그러니까, 반신이 되고 죽은 신을 살려요? 근데 신이 죽기도 합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타이니는 여신교가 주축인 세상에서 살아 온 자.
시간 회귀를 하며 창조신의 존재를 깨달았다고 한들 신화에 대해서는 무지한 편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짐승 신의 마지막 흔적’이라 말하는 고대의 정령은 달랐다.
– 지금의 여신이 주신이 아니라 대지의 여신이라 불리던 시절에는, 갖가지 개념과 자연 현상을 지배하던 신들이 세상을 종횡하였다.
“대지의…… 여신이요?”
– 왜? 신경 쓰이는가? 현재 여신교의 교리에 반하는 내용이긴 하다만…….
킁, 새삼 무슨.
“전혀요. 그냥 처음 듣는 얘기라……. 일단 짧게 설명해 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솔직히 지금 옛날이야기를 길게 듣고 있을 상황은 아닌지라.”
콧방귀를 뀌는 타이니의 말에 펜릴은 다시 묘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지만, 이내 그 뜻대로 간결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 그 신화시대의 끝에서, 다수의 신은 선택을 해야만 했다. 창조신을 따라 이 세상을 떠나거나, 신화시대의 종말과 함께 불멸을 끝내고 이 세상에서 끝을 맞이하거나.
“호…….”
– 대다수의 신이 이 세상을 떠나는 길을 택했지만, 그렇지 않은 신들도 존재했다. 그리고 그들은 신화시대의 끝에서 지금의 여신께 신성을 넘기고 소멸했지. 아직은 연약한 지상의 생명들을 보호해 주길 바라면서 말이야. 덕분에 여신은 신화시대의 끝에서도 신성을 유지한 채 이 세상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이다.
확실히 타이니로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 운명의 파편, 창조신의 흔적은 그런 소멸한 신을 되살릴 수 있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이 세상을 사랑하여 죽음을 택한 신 중 하나를 말이다.
“살려서 뭐 하게요?”
– 쿨럭, 뭐?
살다 보니 영체가 기침하는 꼴도 보네.
황당해하고 있자니, 우란 누드와 월랑의 영체가 오히려 자신을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는 게 보였다.
이내 살짝 솟구친 그림자가 꾸중하듯 자신의 볼을 잡아당기기까지 하자, 타이니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아니, 뭐? 왜?”
그에 펜릴 대신 한숨을 내쉰 우란 누드가 끼어들었다.
“타이니 경, 지금 상황을 생각하세요. 신이 부활하면 그것만으로도 인류는 이 재앙을 막아 낼 가장 강력한 패를 쥐게 되는 겁니다.”
“아…….”
그제야 타이니도 왜 펜릴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운명의 파편을 찾으려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막연하게 옛날이야기 속 무언가로만 생각하고 있던 신이기에 현실감이 잘 들지 않았는데.
말 그대로 신급 무력을 지닌 병기라면, 정말로 지금 인류가 처한 위난에서 큰 빛이 될 수 있을 테니까.
‘그런 거라면 당연히 적극적으로 찾아야지.’
그런데.
“그래서, 그 운명의 파편을 어찌 찾아야 하는데요?”
– ……그게, 원래 창조신의 파편을 쓴 당사자가 그 존재를 느끼고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예?”
어이가 없어 반문하는데, 펜릴의 붉은 눈도 난감함을 품고 있을 뿐이었다.
– 보통은 창조신의 파편을 사용한 자의 영혼에서 개화한다고 알려져 있다. 개화하기 전이라도 최소한 느끼고 있어야 하고.
“……꽤 난감한 말씀을 하시네요. 그렇게 보셔도 저야 느껴지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러자 그를 쳐다보던 펜릴이 문득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설마…… 운명의 파편을 완전히 소화해 버렸다거나…….
“소화요?”
그에 타이니의 시선이 자신이 흡입한 음식들의 잔해로 향하는데.
– 그런 소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 그래도 그럴 리는 없을 텐데……. 아니, 그런 거라면 말이 되긴 하는데…….
고대 정령이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하자 답답해진 타이니가 다시 남은 음식을 집어 들기 시작했다.
“뭐가 말입니까?”
우걱우걱.
당장 그 운명의 파편을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일단 자신의 힘부터 회복하는 게 먼저였으니까.
– 본디 그대가 개화하지 않았다면, 그 운명의 파편을 넘겨 달라고 할 셈이었다. 그대는 솜누스처럼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것으로 보였으니, 인류를 위해 양보해 줄 거라 생각했으니까.
쩝쩝.
우드드득.
흡입한 음식들이 고스란히 영양분과 마나로 분해되어 육체를 실시간으로 회복시키는 과정이 느껴졌다.
타이니는 그렇게 음식을 손에서 놓지 않은 채로 물었다.
“뭐,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습니다만. 그 뒤엔 어떻게 하시게요?”
– 그 파편을 양도받아, 내게 사용할 생각이었다.
“……예?”
– 나는 짐승 신의 마지막 남은 흔적이자, 그의 첫 번째 발톱이다. 나를 매개로 짐승 신 아슈타르 님께서 부활하시면 그 마왕을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럼 당신은 어찌 되는데요?”
– 나야 그의 일부로 다시 돌아가겠지.
말이야 쉽게 하지만, 자아를 잃고 사라진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즉, 펜릴은 그 운명의 파편인가 뭔가 하는 것으로 신을 되살리고 죽을 셈이었다는 뜻이다.
“왜…… 그렇게까지 하시려는 겁니까?”
싸우다 죽는 거라면 몰라도, 무언가로 대체되기 위해 희생할 생각 따위는 없는 타이니였다.
아니, 자신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그렇지 않을까.
그런데.
– 그것이 이 세상을 구하는 길이자, 짐승 신께서 당신의 발톱을 뽑아내어 자아를 부여하시고 세상에 머물게 하신 이유니까.
이 고대의 정령은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 자체를 그것에서 찾고 있었다.
그리고 타이니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굳이 그딴 거 없이도 마왕 골통을 깰 수 있습니다.”
– 그대가 상상치 못한 힘을 보여 준 것은 안다. 참 놀라웠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마왕을 상대할 수는 없다.
“음?”
– 애초에 그 일격이 빗나가거나 혹시라도 끝내지 못했을 때의 위험성도 너무 크고 말이다.
“아…….”
타이니의 자신감 어린 답변에, 그 스스로도 생각하고 있던 빅뱅의 약점에 대한 통렬한 지적이 돌아왔다.
심지어.
– 그대를 도와 마왕을 묶어 둘 자, 그리고 타격을 입은 마왕에게 결정타를 날릴 자. 적어도 그대 수준의 강자 둘이 더 필요하다.
펜릴은 구체적인 해결책까지 제시했다.
“충분해. 내가, 있어. 올케도.”
그림자 속에서 루나의 음성이 또다시 튀어나왔지만, 타이니는 깔끔하게 무시해 주었다.
펜릴의 말에서 자연히 유추되는 사실이 있었으니까.
“……마왕과 싸워 본 겁니까?”
– 그렇다. 나는 고대 마계 대전에서 크롬벨의 정령이었으니까.
엥?
“크롬벨?”
– 하지만 크롬벨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는 이미 마왕과 싸워 봤고, 마왕은 같은 수에 두 번 당하지 않으니.
“응?”
– 그는 과거처럼 인류의 칼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순리를 어김으로써 여신과의 연결도 끊겼을 테고.
“……잠깐만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죠? 크롬벨이라면, 지금 그 신전의 용사를 말하는 겁니까?”
– 그렇다. 크롬벨 라이언하트. 내 전 계약자.
“아니, 아니. 제 말은, 고대 마계 대전에서 같이 싸웠다면서요!?”
– 그래. 크롬벨과 함께.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그러니까 지금 신전의 그 재수 없는 용사 새끼가…….”
– 고대의 용사, 크롬벨 라이언하트 본인이다.
“…….”
너무나도 갑작스레 튀어나온 그 엄청난 말이 타이니의 사고를 일순간 마비시켰다.
“에, 그러니까. 그 재수 없는 놈이, 스무 살이 아니라 2천 살이 넘었다는……?”
이내 황망한 어조로 돌아온 질문에, 듣고 있던 우란 누드의 입에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
“허, 놀란 포인트가 그건가?”
“너무 황당한 소리를 들어서……. 아니, 어떻게 그게 가능한 겁니까?”
– 검은 머리 성녀. 그녀가 순리를 역행하는 힘을 빌려 그를 봉인했다. 바로 이 시대를 예비하기 위해서.
“검은 머리 성녀?”
그 말을 들은 타이니가 무심결에 자신의 머릿결을 만지작거리고, 그림자 역시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 그녀는 세상을 홀로 거닐었던 자. 그리고 후손을 남기지 않았으니, 그대가 그녀의 핏줄일 리는 없다.
그 반응을 일축한 펜릴의 말이 담담하게 이어졌다.
– 그녀는 미래의 인류를 위해 천상에 오를 영광을 포기했고, 윤회의 저주를 받아들였다.
“윤회의 저주는 또 뭡니까?”
– 순리를 역행한 업(Karma)을 지울 때까지 기억조차 잃은 채 끝없이 환생하며 고난의 삶을 사는 것이지. 그 대가로 크롬벨은 최소한의 손실만을 겪은 채 이 시대에 부활할 수 있었다.
……그런 사람이 있었던가?
타이니도 여신의 화신으로서 그 누구보다 뛰어난 신성력을 사용한다는 그 성녀라는 존재에 대한 구전을 들어 보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 펜릴이 이야기하는 성녀는, 단순히 여신의 화신이 아니라 그야말로 성스러운 위인 그 자체가 아닌가.
게다가 단순히 목숨만 바친 것도 아니고, 끝없이 환생하며 고난의 삶을 산다?
미래의 인류를 위해 자신을 온전히 희생한, 그야말로 온 인류가 기려야 할 성자가 아닌가.
그런데도…….
“왜 아무도 그 이름을 모르는 겁니까?”
– 원래 그녀를 알았던 나도 이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것이 그녀가 치른 대가 중 하나지.
“아니, 그 사람은 왜 그렇게까지…….”
검은 머리 성녀.
그 이름이 왜인지 무겁게 가슴에 남을 때.
펜릴의 말이 이어졌다.
– 정령의 죽음에 들려 하던 나를 만류하고 수호령으로 남긴 것 역시 그녀였다. 본래대로라면 강림의 조짐을 느꼈을 때 나 역시 크롬벨에게 돌아갔어야 했지만…….
펜릴이 굳은 얼굴로 서 있는 우란 누드를 흘끗 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나는 어차피 인류의 칼이 될 수 없는 크롬벨 대신, 다른 변수를 만드는 길을 택했으니…….
“허…….”
갑작스레 들은 놀라운 정보에 타이니의 눈빛이 흔들리는데.
– 이야기가 많이 돌아갔군. 아무튼 정말 운명의 파편을 소화한 것이라면, 그대는 이제 신화가 끝난 이 중간계에서 유일하게 신성을 얻을 가능성을 가진 자가 된 것이다. 그것도 타락이 아닌 온전한 방향으로.
“에?”
– 아니, 어찌 보면 그것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겠군. 짐승 신께서도 마왕을 제압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으니.
그 말에, 타이니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니까 신성을 얻는다는 말이…….”
혹시 9단계, 반신의 경지나 그 이후를 말하는 것이냐.
그렇게 캐물으려던 찰나.
– 타이니 경! 큰일 났습니다!!
천막 바깥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