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312
312화. 내가 가지요
“대체 이 자식은 이 상황에 뭐 하고 있는 거야!”
후다다닥.
미친 듯이 황궁의 복도를 내달리는 갈색 머리 청년.
“헛!”
“마도 기사!”
“충!”
그런 아르곤을 마주친 황궁의 기사들이 차례로 경례를 하는 풍경은, 불과 반년 전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왕국 연합의 별이 아스란의 황궁을 이처럼 활보하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인데, 기사들에게 경의 어린 경례를 받기까지 하는 광경은 정말 낯설기만 했다.
그 모두가 강림 직전 근 백 일에 걸친 초월급 마수 토벌행과 마수병단과의 결전에서 얻은 위명 덕분이었지만, 아르곤은 그런 이례적인 상황에 대한 감상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疾風(질풍)]마나 유동을 금지하는 황궁의 결계를 억지로 무시하며 마법까지 써서 내달리는 그의 목적지는 황궁의 심부였다.
한때는 그저 고대의 유물로 치부되었지만 지금은 더없이 엄중한 경비 속에 있는, 거대한 아티팩트가 있는 곳.
콰아아앙!
“타이니! 지금 뭐…….”
차원 관측기가 자리한 방의 문이 거칠게 열린 순간.
“……흡!?”
아르곤의 턱밑으로, 넘실거리는 검은빛 오러를 담은 단검이 다가왔다.
소리를 지르던 그의 호흡을 끊으며, 미처 반응도 못 할 만큼 짧은 순간에 훅 들어오는 단검.
다행히도, 단검은 아르곤의 눈이 커지는 순간 그의 코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이내.
“쉿.”
그의 눈에, 보랏빛 머리의 하프 엘프가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자신을 노려보는 것이 보였다.
끄덕.
‘X, X발.’
등줄기로 주르륵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느끼면서 아르곤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루나가 소리도 없이 스르륵 사라지더니, 멍하니 차원 관측기를 바라보는 타이니의 옆에 다시 나타났다.
현재 암묵적으로 세계 최강자라 인정받는 타이니를 굳이 호위하려는 듯한 움직임.
자연히 의문이 생겼지만, 이내 아르곤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거대한 오르간 같은 차원 관측기에 시선을 고정한 타이니의 몸으로, 주변의 마나가 미친 듯이 빨려 들어가는 것이 느껴진 것이다.
우우우우웅.
우드드드득.
마나가 진동하자 그에 맞춰 뚜둑 소리를 내 가며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하는 타이니의 몸.
아르곤은 타이니에게 끌려다니며 초월급 마수를 상대하던 때에 저런 변화를 본 적이 있었다.
자신이 오러를 각성한 직후, 타이니가 ‘아, 저렇게도 되는구나……!’를 외치더니 딱 저런 모습을 보였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생각보다 좀 빨리 벽을 넘었네.’라는 어처구니없도록 단출한 감상으로 스스로 오러익시더의 경지에 올랐음을 알렸었다.
죽을 고생 끝에 오러를 성취하던 순간의 기쁨을 한순간에 허망하게 만들어 버리던 기억.
“……설마.”
고대의 문헌, 그중에서도 신화시대의 자료에서나 가끔 언급되던 오러마스터의 탄생을 자신의 눈으로 지켜보게 되는 것인가.
아르곤이 급했던 마음도 잊은 채 멍하니 타이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그 순간 마나의 유입이 급격하게 줄어들며, 곳곳에서 뚜둑 소리를 내던 타이니의 몸도 그 변화를 마쳐 갔다.
그 잠깐 사이 키가 살짝 커진 듯했고, 이제는 기사 중에서도 꽤 넓은 축에 속할 정도로 떡 벌어진 어깨도 눈에 들어왔다.
원래도 괴물 같았던 타이니의 육체 능력이 한층 더 강력해졌음을, 아르곤은 느낌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달라진 게 없는 거 같은데?’
아르곤이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후.”
파아아아앙.
타이니의 입에서 가볍게 한숨이 나오는가 싶더니, 동시에 엄청난 마나의 파장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오러유저이자 7서클의 마법사인 아르곤마저 순간 피부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저릿저릿한 기운.
그리고.
우드드드득.
한순간 타이니의 몸이 2m를 훌쩍 넘기는 백발의 거한으로 변했다.
‘정령 합신.’
그에겐 이미 익숙하기만 한 변신이었지만.
“아우우우우우!”
그 순간 그 옆에서 현신한 거대한 늑대, 월랑의 모습은 다시 아르곤의 눈을 커지게 만들었다.
저게 된다는 건……?
“이게 스피릿액셀……. 제법 쓸 만하네.”
돌아선 타이니가 금세 변신을 풀고 슬쩍 웃으며 그의 짐작을 확인시켜 주었다.
아쉽게도 기대했던 오러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건 아니었지만, 그 대신 정령술의 8단계, 스피릿액셀을 달성했음을 담담히 알리는 모습.
“내 동생! 최고!”
그 뒤에서 루나가 타이니의 등을 팡팡 치며 좋아라 방방 뛰는 것을 보고서야, 아르곤은 자신이 그를 찾아온 용건을 다시 떠올랐다.
“인마! 지금 여유 부릴 때가……!”
“알아. 내가 한 달 내내 여기서 살았다. 그걸 가장 먼저 확인한 게 나야. 그 덕에 영감을 얻어서 벽을 넘은 거고.”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대답하는 타이니의 말에 아르곤은 순간 말문이 막혀 입만 벙긋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개똥 같은 소린가.
‘너 전사잖아.’
그것도 망치로 그 무식함을 증명하는 상남자.
그런데 차원 관측기를 보고 무슨 영감을 얻어?
‘나도 도무지 원리를 모르겠는 아티팩트인데?’
가슴속에서 의문이 솟구쳤지만, 실제로 한 달 동안 이 녀석이 이곳에 상주한 것은 진실.
그리고 직전에 녀석의 경지가 오른 것을 목격하기도 했으니, 영감을 얻었다는 말도 진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결코 인정할 수 없는, 아니 인정하기 싫은 사실이 결론으로 이어진다.
‘내가 설마 박치기할 때만 머리 쓰는 놈보다 멍청하다고? 아니,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암, 절대 그럴 리가 없어.’
무언가 가슴속 소중한 것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정체성의 혼란이 찾아왔다.
“그럴 리가 없잖아!!”
비명 같은 고함이 터져 나오는 게 자연스러울 정도.
그러자 어느새 눈앞에 다가온 무서운 친구(?)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며 후다닥 뒤로 물러서는데.
“……너 뭐 하냐?”
“아, 아니. 난 네가 무식하다는 생각은 결코 안 했…….”
“뭔 개똥 같은 소리야? 통신실 가자니까? 그러려고 온 거 아냐?”
“어……? 어, 맞지. 맞아.”
“실없는 놈. 가자. 가면서 얘기해!”
내가, 실없는…….
허허…….
“이미 연합군의 의견은 나왔을 테니까. 아, 폭뢰는 어떻게 됐어?”
이어진 질문을 받고서야 아르곤의 눈동자에 이성의 빛이 돌아왔다.
“크흠. 아, 그 폭탄? 그거 이번 강림 타이밍에 대량 생산은 무리라고 결론 난 모양이야. 지금 간신히 시제품 테스트에 들어갔어.”
“하…….”
“더구나 티네스 경이 이걸 제국에서만 생산한다면 차후에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
“뭐?”
“생산지도 분산하고 전쟁이 끝난 후엔 폐기하기로 조약도 맺어야 한다던데, 일리가 있는 말 같거든. 그래서 과정이 복잡해졌어.”
“아니, 지금 어린애 손도 빌려야 할 판에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그게…….”
복잡한 심경으로 나누는 복잡한 대화가 이어지는 가운데.
일행의 발걸음은 착실하게 통신실로 향하고 있었다.
* * *
[하나는 마역과 엘븐하임의 경계, 하나는 가리온 왕국. 사실상 인류의 서쪽 끝과 동쪽 끝이니, 모두가 혼란에 빠져 있다.]통신구 너머에서 한탄하는 검제와 그 뒤에 도열한 동료들의 무거운 표정에서, 타이니는 사태의 심각성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벌어진 사태가 심각한 데 비해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권은 많지 않았으니.
“어차피 연합군이 갈 수 있는 곳은 둘 중 하나뿐이지 않습니까? 그마저도 모두 가능한 건 아니겠지만.”
타이니도 대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오렌 평야에서 연합군의 대군이 움직여 제때 도착할 수 있는 방향은 하나뿐이었다.
[그래. 기동력 있는 정예들을 중심으로 이미 가리온 왕국으로 진격 중이다. 연합의 남은 병력들도 랑켄 평야에 집중해 달라고 요청해 놨고.]그나마도 제국과 왕국 연합의 기사단, 그리고 드워프의 엘로랑 기병대와 엘프의 정예 정도는 되어야 오렌 평야에서 가리온 왕국까지 열흘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오렌 평야에 모인 일반 보병들이 아무리 정예들이라 한들 최소한의 휴식을 가정하고 진군하더라도 한 달은 걸릴 터였다.
그러니 사실상 초전은 그들 없이 치러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마 연합군 내부에서 다른 의견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수가 없을 테니까.’
만약 구릉과 산악 지대, 대수림을 가로질러 엘븐하임 쪽으로 진격한다면, 제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는 병력은 그야말로 한 줌에 불과할 터였다.
그나마도 전투가 가능한 상태일지는 장담할 수 없는, 무의미한 진군이 될 뿐.
하지만 그럼에도 가고 싶어 하는 이들은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엘븐나이트들은요? 엘븐하임 쪽이 아닌 가리온을 향해 간다는데 동요가 없었습니까?”
[세계수의 수호자가 비행이 가능한 정령사들과 함께 엘븐하임으로 향했다. 그리고 현지에 남아 있는 엘프들과 오크족의 병력들도 엘븐하임으로 최대한 모이기로 했고.]“아…….”
[이제 남은 문제는 성물들과 오러유저들, 그리고 마도사들을 어디로 어떻게 집중시키냐다. 폐하께서도 그것은 우리의 선택에 맡기셨어. 마음 같아서야 전력이 부족할 엘븐하임 쪽으로 전부 보내고 싶지만…….]“그랬다가는 가리온 쪽에서 악마급 마족들을 막을 전력이 없어지니, 그쪽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테지요.”
[그래. 그게 문제다.]그리 대답하는 검제의 얼굴은 어두웠다.
[칠죄종 하나의 군단이 둘로 나뉘어서 강림해 오는 것이라면 그나마 도박을 해 보겠는데, 만약 각기 다른 두 군단이면…… 어쩌면 대륙의 동서, 양쪽 중 한 방향은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결론이다.]한쪽을 포기한다.
그 말에는 타이니의 얼굴도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륙의 절반이 초토화될 것을 가정하는 말이었으니까.
[이쪽에서 의견이 나온 게 있는데…….]이내 검제가 자신의 뒤쪽에서 통신구를 바라보는 용사, 크롬벨을 돌아보며 말끝을 흐리는데.
“흥, 그럼 방법은 간단하군요.”
[음?]“전부 가리온으로 가십시오. 엘븐하임 쪽은 저와 루나만 가겠습니다. 에스티나도 가 있으니, 셋이면 충분합니다.”
타이니는 충격적인 발언으로 듣고 있던 모두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뭐!?]“엘븐하임의 잔여 병력과 기간 내 도착 가능한 오크 부족의 예비 병력들 정도만 모아도 얼추 군대 역할은 하겠죠.”
[아니, 아무리 그래도…….]“마수병단의 악마급들을 혼자서 모조리 처치한 게 누구인지 잊으셨습니까? 타이밍만 잘 맞춘다면, 다른 동료들을 전부 합친 것보다 더 강력한 타격을 줄 수 있습니다.”
그날, 파멸적인 힘을 담은 그 노을빛을 보았다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말.
[그래, 그 빅뱅. 그럴 수 있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에스티나가 원거리 견제, 루나가 근거리 보조. 더는 필요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제가 없는 가리온 쪽이 더 걱정이군요.”
확고한 자신감을 담은 그 말은 통신구 너머 검제의 말문을 잠시간 막아 버렸다.
“나, 나도? 나도 필요 없어?”
뒤에서 아르곤이 왜인지 서러운 듯 작은 목소리로 항의하는 것이 들렸지만, 그대로 무시하고 있던 그때.
[거참. 성격도 정반대인 사람들의 생각이 이리도 비슷한가…….]검제가 뜻 모를 헛웃음을 지으며 뒤를 돌아보자, 용사 크롬벨이 그를 제치고 수정구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하. 대단한 자신감이군요, 타이니 경. 사실 저도 비슷한 얘기를 했습니다만.]“뭐?”
[제가 엘븐하임으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다른 분들은 가리온으로 가시라고요.]“하…….”
[고대와 순서가 같다면, 이번에 강림할 것은 질투의 언데드 병단. 그 언데드를 상대하는 데는 제가 당신보다 나을 겁니다.]“하나가 아니라면?”
[……만약 두 개의 다른 군단이 동시에 나오는 최악의 상황이라면, 그다음은 탐욕의 군세. 그림자 악마와 도플갱어의 군단이죠. 그 역시 제게는 최고의 상성이군요.]크롬벨이 자신감 넘치는 미소로 답했지만.
“난 상성 따위 없는데? 나한테 제대로 걸리면 다 한 방이야.”
타이니의 자신감 역시 그 못지않았다.
물론 크롬벨 또한 지지 않으려 했다.
[한 방 날리고 아무것도 못 하게 되는 거 말입니까?]“지금은 좀 다를걸? 잡다하게 여러 가지 힘을 쓰는 것보다야 제대로 한 방 먹이는 게 낫지.”
[흠. 저도 이전과는 많이 다를 겁니다.]“호오?”
[폭식을 잡을 때는 당신의 권유에 따라 지켜보기만 했습니다만, 당시 이미 전성기의 무력을 전부 회복했지요. 절대 당신 못지않을 겁니다.]“말이야 누가 못 할까.”
파지지직.
수정구를 사이에 두고 두 상극이 다시금 치열한 눈싸움을 하기 시작하고.
“지금 자존심 싸움이나 할 때냐…….”
그들을 한심한 듯 바라보는 아르곤의 음성이 그 뒤를 때릴 때.
검제가 한숨을 내쉬며 끼어들었다.
[고대의 용사와 현대의 최강자가 엘븐하임으로 같이 간다……. 뭐, 그나마 안심이 되는 말이로군. 그럼 둘이 함께하는 것으로 하세. 그것이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정 같네.]무거운 표정의 검제가 단숨에 상황을 중재했지만.
“글쎄, 그게 과연 최선일까요…….”
타이니의 뒤쪽에서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이는 아르곤의 목소리는, 그 누구도 귀담아듣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