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326
326화. 황궁의 그림자 (2)
“타이니가…….”
“그래도 믿어 봅시다. 지금…….”
황제와 황후, 전날의 난리가 수습된 후에 다시 제자리를 찾은 제국 최고의 권력자들이 굳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조식입니다, 폐하.”
그들의 앞에 선 시종장이 고개를 숙이며 화려한 쟁반에 담긴 음식을 식탁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황궁이 반파된 다음 날 아침인데도, 지배자의 일상은 이전과 다름없이 이어졌다.
대륙 최강의 국가인 아스란의 저력을 엿볼 수 있는 단면 중 하나였지만, 사실 지금 이 광경에서 가장 결정적인 것 하나가 평소와 달랐다.
그 사실을 눈치채고 있는 이는 없었지만 말이다.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자.’
시종장 에밀리를 잡아먹은 그림자 마족은 눈앞의 탐스러운 먹이를 바라보며 군침을 삼켰다.
인내심, 마계에 있을 때는 자각하지 못했던 감정이 욕망을 억눌렀다.
생각해 보면 이것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마계에 있을 때 그의 ‘식욕’은 언제나 강력한 마족이나 마물들을 대상으로 발동됐었고, 그것은 동족들의 성장과도 직결된 본능의 문제였다.
그런데 지상에 올라와서 오크와 인간을 잡아먹은 뒤 알게 된 중간계의 지배자들은 굉장히 이상한 놈들이었다.
‘특히 인간 지배자들.’
무력한 것들이 강자들의 위에 군림하는 이상한 세상.
처음 그 정보를 알았을 때, 그림자 마족들은 일제히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 그런 것을 먹어야 하나?
솔직히 처음에는 동족들 대다수가 놈들을 잡아먹기도 전에 토할 것 같은 기분을 호소했지만, 막상 찾은 타깃들은 제법 맛있는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당장 눈앞의 두 사람, 특히 그중 수컷에게서 나는 냄새는 더없이 자극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의 정체를 이제는 알고 있었다.
‘권력 또한 힘이니.’
그 또한 격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하지만 당장은 먹잇감을 눈앞에 두고서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위험했으니까.
‘중간계는 생각보다 만만하지 않아.’
실제로 강림한 이후의 전황은 그림자 군단의 기대와 많이 달랐다.
중간계의 나약한 생물들을 압도할 것이라 기대했던 장군들이 오히려 학살당했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1장군 애쉬튼 님은 대번에 1계 실패를 선언하고 2계를 위해 도망쳤다.
이것은 정복 계획을 지시하신 위대한 그림자의 왕, 애버리스 님께서도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다.
심지어 2계를 위해 흩어진 동족들마저 다수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기 전에 참살당했다.
인류의 그 끔찍한 전투력은 둘째 치고, 가장 궁금한 점은 따로 있었다.
‘어떻게 우리를 찾았을까?’
본디 2계는 직접적인 무력으로는 정복이 불가능한 최악의 경우를 상정한, 그림자 마족의 특기를 살려 중간계를 자멸의 길로 몰고 가려는 계획이었다.
– 중간계의 지배자들을 잡아먹고, 서로 상잔하도록 부추긴다.
그림자 군단만으로 이 세상을 정복하기 위한 차선의 수.
완벽하게 대상을 잡아먹은 그림자 마족은 마계의 고위 마족들도 진짜와 구분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 중간계의 괴물들은 곧바로 뒤를 쫓아와서 대다수의 동족을 학살했다.
심지어 지금 이 근처에는 그중 가장 강한 괴물이 와 있었으니.
– 그 괴물이 이곳에 왔다!
– 숨어라!
어제 죽어 가던 동족들이 텔레파시로 남겨 준 메시지.
그 괴물이 떠나기 전까진 참아야 했다.
‘놈만 사라지면…….’
중간계 최강 국가의 지배자. 이놈을 먹고 본격적인 2계를 시작한다.
먹이들을 통해 세상의 정보를 알았을 때, 그와 일부 동족들이 짠 세부 작전은 간단했다.
오크들을 이용해 제국에 대한 반감을 일으키고, 그 이면에서는 지배자를 잡아먹고 본격적인 분쟁을 조장한다.
이미 그 작전이 반파되긴 했지만, 아직은 성공 가능성이 남아 있었다. 다행히도 그 괴물이 자신의 존재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으니까.
단순히 기대 섞인 직감으로 추측한 것은 아니었다.
– 너와, 애쉬튼 님은, 숨겼다. 괴물, 모른다.
이곳의 지하에서 방금 죽은 마지막 동족이 남긴 텔레파시가 그 사실을 확인해 주었으니까.
그리고 놈의 위치는 지금 그도 확인할 수 있다.
‘아직 지하에 있다.’
본래 동족의 학살자를 특정하고 원수를 갚기 위해 남기는 ‘그림자의 원한’이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대상을 피하기 위해 활용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꼴이 우스웠지만, 장군 중 셋을 쳐 죽인 괴물에게 대항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인간의 관습대로라면 괴물 놈은 이 지배자와 만난 후에 이곳을 떠날 것이다.
‘그때가 진짜다.’
에밀리의 형상을 한 마족은 그 생각을 감추며, 깊숙이 허리를 숙여 보인 뒤 황제 앞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놈의 존재감이 급속도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하필 이 타이밍에?
마족은 최대한 태연하게, 하지만 빠른 걸음으로 돌아섰다.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의 가짓수를 세다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어 보인 다음, 다른 시종들에게 손짓하며 소리 없이 물러나려는데.
– 폐하, 광휘의 기사 타이니 모르스 경이 알현을 청하였습니다.
문밖에서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빌어먹을! 이건 인간의 예의에 어긋날 텐데??’
“들라 하…….”
쿵.
황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전의 화려한 문이 그대로 열렸다.
철컥. 철컥.
어깨 갑옷 아래에 다 해진 셔츠와 바지만 대충 걸친 야만적인 복장의 전사가 금속 부츠 특유의 마찰음을 내며 걸어 들어왔다.
황제를 만나는 자리에서, 육중해 보이는 거대한 워해머까지 그대로 매고 있었다.
“타, 타이니 경! 이러시면……!”
만류하는 황실 기사들을 팔뚝에 달고서 거침없이 밀고 들어오는데.
“괜찮다. 타이니 경, 오랜만에 보는구려.”
“오랜만이야, 타이니.”
제국의 지배자 부부는 그 무례를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그러자 그런 그들을 살짝 노려보던 괴물 놈이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바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쿵.
“인사가 늦었습니다, 폐하. 그리고 황후 전하.”
모른다, 몰라.
‘안 걸렸어.’
에밀리를 잡아먹은 마족은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차분히 달래며, 대전 구석 그늘진 곳에 슬쩍 발을 걸쳤다.
“시국이 시국인데 어찌 그것을 탓할까. 그래도…….”
그러나 황제의 말이 이어지려던 순간, 사방을 훑던 괴물의 시선이 그림자 속에 숨으려던 그를 포착했다.
‘설마…….’
심장이 멎는 것 같은 충격에 잠시 아무 생각도 안 나는데.
쾅.
“너!!”
무릎을 꿇고 있던 자세 그대로, 그 괴물이 쏘아지듯 날아왔다.
빌어먹을!
스슥.
그 순간 마족은 에밀리의 형태를 버리고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려 했지만.
콰아아아앙!
“캬아악!!”
순식간에 휘둘러진 망치에 몸의 절반이 사라지며 비명을 토해 낼 수밖에 없었다.
“하, 씨. 진짜 여기 더 있었다고? 하, 마족 새끼들…….”
“타이니!?”
“타이니 경, 지금 이게…….”
순식간에 반파된 대전의 벽과 바닥.
갑자기 벌어진 그 폭력적인 사태에 놀란 시선이 모여드는 순간.
타이니는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려던 마족의 몸을 억지로 끄집어내 들어 보였다.
– 끼에에에.
반은 시종장의 모습, 반은 녹아내린 그림자의 형태.
타이니가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그 시체가 이 사태를 충분히 설명해 주고 있었다.
“어, 어떻게 마족이 이렇게 가까이…….”
강력한 클레릭이기도 한 클로이가 자신의 근처까지 와 있었던 마족의 시체를 보며 입술을 깨물고.
쿵.
“주, 죽여 주시옵소서, 폐하.”
황실의 경비를 책임지는 익실란이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고 죄를 청할 때.
“……일단 타이니 경 말부터 들어 보지. 어제부터 이게 어찌 된 건가? 자네는 대수림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예상외로 담담한 황제의 목소리가 타이니의 귓가를 때렸다.
‘역시…….’
담대하단 말이지.
속으로 중얼거린 타이니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기에 앞서 황제에게 한 가지를 요청했다.
“일단 전부 확인부터 하고 나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음?”
“왕실의 시종들과 기사들을 모두 한 명씩 이곳으로 불러 주시죠. 그리고…… 월랑.”
“크릉?”
“혹시나 숨은 놈 없는지 찾아. 최대한 빨리, 은밀하게.”
스르륵.
“컁!”
파바박.
요구에 따라 몸을 작은 강아지 크기로 줄인 월랑이 귀여운 울음소리를 남기고 사라졌다.
“월…….”
그 쫄랑거리며 뛰어가는 뒤태를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는 클로이를 애써 무시한 채, 타이니는 방금 잡은 마족의 육체를 들어 올렸다.
“이렇게 감지 마법으로도, 신성력으로도 구별이 안 되는 이놈들이 서쪽 대수림에서 나타난 그림자 마족들입니다.”
“끄르르.”
콰직.
타이니가 손아귀에 힘을 가하자, 결국 숨통이 끊어진 놈이 검은 기운 한 자락만 남긴 채 사라졌다.
마족 특유의 독기 어린 피도 흘리지 않고, 그림자로 화해 사라지는 시종장의 모습.
피 대신 퍼져 나가려던 마기는 타이니가 즉시 소멸시켜 버렸지만, 그것만으로도 지켜보던 모든 이들은 다시 한번 충격에 빠졌다.
“허…….”
“지금은 그놈들을 패퇴시키는 과정에서 남은 잔당들을 처리하는 중이고요. 보시다시피 숨어드는 재주가 남다른 놈들이라, 애를 먹고 있습니다.”
타이니는 쓴웃음을 지었지만, 듣고 있던 이들은 오히려 그의 말에 놀란 기색을 보였다.
“벌써 이겼어?!”
“가리온에서는 연일 대치 상황에 증원을 요청하고 있는데…….”
“벌써……?”
황후 클로이를 비롯해 본디 침묵을 지켜야 할 호위 기사들까지 저마다 입을 열며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 타이니를 흠칫하게 만들었다.
‘아!’
그리고 그는 자신이 가장 중요한 말을 빠트렸다는 것을 한발 늦게 자각했다.
“어…… 뭐, 아직 그 칠죄종은 나타나지 않았으니까요. 잔챙이들만 처리한 겁니다. 그것도 보다시피 완벽하지 못했고.”
“허허. 그래도 그게 어디인가? 장인…… 큼, 발렌티아 공작이 자네를 믿고 동부에 병력을 집중시켰다고 하더니, 역시 올바른 선택이었나 보네.”
“과찬이십니다.”
마족의 등장으로 바짝 얼어 있던 분위기가 다시금 훈훈해지는 상황.
‘얼라, 이게 아닌데?’
벌써 긴장이 풀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 타이니는, 그때부터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열변을 토해야 했다.
그림자 마족, 도플갱어의 위험성과 현 상황. 그리고 아직 남은 그들의 왕에 대한 것까지.
“……오크족에 숨어든 놈들은 전부 처리한 것 같은데, 그럼에도 지금 제국 서부 국경에는 제국에 반감을 가진 오크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든 해결해 주셔야 합니다.”
“곤란하게 됐군. 지독한 놈들이야. 숨은 칼이라니…….”
그의 설명을 들은 황제와 다른 이들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가운데.
– 컁!
월랑이 또 하나의 마족을 처리했다는 신호를 보내 왔다.
“하?”
“왜 그러나, 타이니 경?”
“……마족 하나가 더 숨어 있었고, 방금 월이 처리했습니다.”
“그런……!”
“일단 황궁부터 전부 확인해 본 뒤에, 저는 빨리 다른 곳으로 가 봐야겠습니다. 제발 좀 빨리, 빨리 사람들을 모아 주십시오.”
황제에게 하는 말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예의 없는 독촉이었지만, 지금 그것을 지적할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그리고.
“……그러지.”
그렇게 황제의 허락이 떨어진 지 불과 반나절 후.
타이니는 숨어 있던 하나의 마족을 더 찾아내 처리하고는 바로 황궁을 떠났다.
파바바박.
“아우우우우우!”
그래그래, 마음껏 소리 지르고 최대한 빨리 달리자.
‘이걸로 황궁에서만 열을 잡은 거야. 남은 놈들은 몇……이더라?’
계산해 보자니 순간 혼란스러웠지만, 이내 에스티나가 떠나기 전에 남긴 말이 생각났다.
– 그럼 몇 마리가 남은 거지?
– 37마리.
“거기서 열을 빼면 27마리.”
루나가 몇 마리나 더 처치했을까?
제국 서부로 몰려들던 오크족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지?
혹시나 남은 마족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생길지 모를 제국이나 왕국 연합의 분란은 또 어떻게?
‘에이씨, 몰라. 그건 황제가 어떻게 해 주겠지.’
탐욕의 강림까지 남은 예상 시간은 앞으로 25일.
혹시 모를 변수를 고려하면 적어도 20일 안에 대수림의 차원 균열 앞으로 돌아가야 한다.
마족을 고문하여 얻은 정보가 적힌 양피지를 다시 들여다본 타이니는, 고민 속에서 자신이 놈들을 처리하면서 최단기간으로 움직일 수 있는 동선을 끊임없이 체크하고 있었다.
그의 급한 마음만큼,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