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33
33화. 미래를 위한
“……끄응.”
온몸에 뻐근한 통증을 느끼며 일어났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시간이 별로 지나지 않았나 보다.’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공작이 쓰러지기 전에 보았던 복장 그대로 옆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쯤 깨어날 것 같더라니. 생각보다 회복이 빠르구나.”
“……얼마나 지났습니까?”
“반나절. 해야 할 이야기가 많다, 따라오거라.”
……반나절?
겨우 그 정도?
‘몸은 거의 회복된 것 같은데……. 고위 사제를 부른 건가? 아니면 클로이?’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공작은 질문할 시간을 주지 않고 곧장 돌아섰다.
그에 황급히 따라나서는데.
“타이니!”
“……공녀님?”
기다렸다는 듯 방을 찾아온 클로이와 마주쳤다.
“아버지! 기껏 회복시켜 놨더니, 방금 일어난 애를 또 어디로 데려가려고요?”
“녀석이 원하는 것을 주려고.”
“네?”
“예?”
그 말에 타이니는 반색했지만, 클로이는 어리둥절해할 수밖에 없었다.
“또 다치게 만들려는 건 아니죠, 아버지?”
“이 녀석아. 아까도 말했지만, 그 부상은 이 녀석이 자초한 것이다. 내가 아무렴 딸의 은인한테 그런 막 나가는 짓을 할까? 그렇지, 꼬마야?”
공작의 말에 타이니는 일순간 멍해지고 말았다.
자신이 자초한 부상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은인? ……클로이의?’
줄곧 클로이를 자신의 은인으로 생각해 왔는데, 오히려 그 반대의 말을 들으니 굉장히 어색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멍한 표정으로 있는 동안, 클로이의 안색은 다시 슬쩍 굳어졌다.
“거봐요! 얘가 대답을 못 하잖아요!”
“아, 아니 정말인데! 꼬마야, 왜……!”
당황하는 공작의 모습을 보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타이니가 슬쩍 끼어들었다.
“아…… 하하, 아뇨. 정말 괜찮습니다, 공녀님.”
“너 반쯤 죽다 살아났어. 알고는 있니?”
“각하 말씀대로 그건 제가 욕심을 부린 탓입니다.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그 말에 클로이는 자신의 아버지와 타이니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좀 더 애다워도 되는데…….”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쓴웃음이 나오는데, 클로이의 시선이 다시 공작을 향했다.
“정말 잘 대해 주셔야 해요, 아버지. 제가 진 빚도 빚이지만, 이 아이의 재능도…….”
“다시 볼 수 없을 정도로 천재적이지. 유념하도록 하마.”
딸의 당부가 귀여웠는지, 공작은 그저 피식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지만 이내 그들을 보며 웃음 짓고 있는 타이니를 보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뭐냐, 그 눈빛은? 어린놈이래도 예쁜 건 알아보는 모양이구나. 경고해 두겠는데, 감히 내 딸을 넘보면…….”
“아빠!!”
당황한 클로이가 고함을 질렀지만, 타이니는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었다.
“……그냥 제가 공녀님 은인이라시길래 당황스러워서 그렇습니다.”
황당한 마음에 튀어나온 진심에 공작의 눈이 매섭게 번뜩였다.
“당연한 것 아니냐? 네 덕분에 고위 흑마법사를 잡았는데.”
“아…… 예, 그렇긴 하죠.”
그 말에 마음이 복잡해진 타이니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만 끄덕이는데, 그 모습을 본 공작의 인상이 굳어졌다.
“……없었던 일인 것이냐?”
“……예.”
그 말에 공작의 표정은 더욱 심각해졌고, 영문을 모르는 클로이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말이에요?”
“아니, 알 필요 없다. 아직은……. 꼬마야, 빨리 따라오거라.”
“아버지!”
“쉬어라, 클로이. 정말 네가 알아야 할 일이라면 내가 말해 주겠지. 그렇지?”
“……예.”
클로이는 납득하지 못한 표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공작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너는 곧 있을 성년식에나 집중하거라. 준비를 철저히 해 놨으니 마음에 쏙 들 것이다.”
“……예.”
성년식.
그 말이 나온 순간 클로이의 안색이 살짝 굳어졌지만, 공작은 그 표정 변화를 알아채지 못한 듯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릴 뿐이었다.
다만 타이니는, 힘없이 돌아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쩐지 그녀의 마음을 알 것 같았으니까.
* * *
“필레스 영주를 처리한 뒤 따라붙은 꼬리입니다. 사실상 제가 도움을 받은 거죠.”
얌전히 뒤를 따르다 불쑥 꺼낸 말에 공작이 슬쩍 돌아섰다.
“……처리라, 제국의 귀족을 죽였다는 말을 쉽게도 하는구나.”
“귀족을 죽인 게 아니라 흑마법사를 죽인 거죠.”
“그 와중에 뒷골목에도 피바람을 일으키고 말이지?”
“쓰레기들을 처리한 것뿐입니다.”
“루센티아에서도 마찬가지겠고?”
“……예.”
내가 기절한 사이에 많은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군.
타이니는 그냥 그리 생각하고 말았지만, 공작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대륙 10대 기사가 아니라 전도유망한 살인마의 어린 시절이라고 해도 믿겠군.”
“비슷한 별명으로 불린 적은 있습니다.”
그냥 던져 본 말을 인정하는 듯한 대답에, 공작이 떡하니 입을 벌렸다.
“허…… 너 정말…….”
“좀 억울하긴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쓰레기를 열심히 치운 것뿐인데.”
그 당당한 말에 공작이 헛웃음을 지었다.
“……인성 교육도 필요하겠구나.”
“그건 포기하시죠. 그 시간에 제국에 스며든 악마추종자가 더 없는지나 찾아보시는 게 나을 겁니다.”
“이미 조치를 취해 놨다. 힘든 조건이 하나 붙었지만 말이다.”
“사람들 속에 숨어든 놈들을 분별하는 일 말입니까?”
“그래, 중급 사제 수준의 클레릭인 클로이가 흑마법사를 눈앞에 두고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건 심각한 일이니까. 차라리 네가 좀 열심히 돌아다니는 게…….”
“농담이시죠? 앞으로 벌어질 재앙들에 대해 말씀드렸잖습니까. 전 적어도 당분간은 제국과 공식적 연관성이 없어야 합니다. 재앙은 제국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당신이나 공작가의 정예들이 직접 나섰다가는 바로 다른 나라에서 태클이 들어올 테니까요. 그러니 오히려 제가 제국과 관계없는 신분으로 외부를 돌아다닐 수 있게 도와주셔야 합니다.”
“쯧.”
틀린 말은 아니라 공작은 가볍게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보며 씩 웃던 타이니가 문득 좋은 수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현자의 마탑에 의뢰를 해 보시죠.”
공작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현자의 마탑이란 곧 마도사들의 성지. 아스란 제국과 대립하는 동부 왕국 연합을 움직이는 핵심 세력이었으니까.
“……그쪽에서 해결책이 나오느냐?”
“정확히는 마탑 출신의 인물입니다. 아르곤이라고…….”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구나.”
“10년 내로 유명해질 이름입니다.”
“음? 혹시…….”
무언가 짐작한 듯 공작의 눈초리가 가늘어지자, 타이니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제 옛 동료 중 한 명입니다.”
“마탑 출신인데 오러유저라고?”
“예, 좀 독특하죠. 뭐, 지금은 오러유저가 아닐 테지만요.”
“허…… 일단 고려는 해 보마.”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정말 현자의 마탑과 연수가 이뤄질지는 미지수였다.
아무래도 제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까.
‘거기다 지금의 아르곤이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아직도 갈 길이 먼 듯했지만 당장은 이 정도가 최선이라는 생각에 타이니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때, 공작이 다시 걸음을 내딛다 말고 아무도 없는 주변을 슥 둘러보더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중요한 충고를 잊을 뻔했군.”
“예?”
“지금 이 순간부터 네가 시간을 거슬러 왔다는 건 가능한 한 최소한의 사람만 아는 비밀이 되어야 한다.”
“그야 당연히 떠들고 다닐 생각은 없습니다만……?”
믿어 줄 사람도 얼마 없을뿐더러 혹시라도 중요 세력에 있는 누가 그 말을 듣고 처신을 달리한다면, 그것은 곧 미래가 바뀌는 문제로 이어질 수도 있다.
타이니가 새삼 당연한 소리를 하는 공작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데, 공작, 에스가르드 폰 발렌티아는 그가 생각한 이상의 것을 보고 있었다.
“특히나 사제들의 귀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너무 위험해질 테니까.”
“그게 무슨…….”
“시공의 흐름은 창조주께서 안배하신 운명의 축, 만물의 관리자로 태어나신 여신께서도 건드리지 못하는 권능이다. 그런데 일개 인간이 시간을 거슬렀다. 이를 사제들이 알게 되면 어찌 될 것 같으냐?”
“어…….”
생전 처음 들어 본 이야기에 타이니는 순간 멍해졌다.
‘창조주? 여신이 창조주 아니었어? 관리자라니? 뭔 소리야?’
한순간에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에 떠오르는데, 그 상태를 예상했던 듯 공작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너는 모르는 게 당연하다. 이제는 신전의 경전에서도 삭제된 문구. 오래된 가문들에서만 전해지는 진짜 성서에 적혀 있는 말이니까.”
……진짜 성서?
“허.”
“그러니 다시 묻겠다. 여신조차 하지 못한 일을 해 버린 너를, 신전이 어찌 취급할 것 같으냐?”
그 말에는 타이니 역시 얼굴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신성 모독.’
가뜩이나 검은 머리와 눈 때문에 마족이니, 뭐니 하는 욕도 심심찮게 듣곤 했다.
이내 머릿속에 마족을 상대하는 가장 큰 일각이 되어야 할 신전의 성법 사용자들이 자신을 공격하는 광경이 떠올랐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신전이…….”
“신전이 타락했다는 말이 성안에 있는 내게도 들리는데, 너는 그들을 믿느냐?”
공작의 그 말이 결정타였다.
“하…… X발…….”
신전을 적으로 돌리는 것은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 상상하는 것만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템퍼스는 인과율의 조각, 창조주가 남긴 파편……. 가문에 내려오는 전설은 분명 그랬다. 그랬기에 역대 가주 중 누구도 그 권능을 믿지 않으면서도, 함부로 관련된 얘기를 퍼트리지 못한 것이야.”
“……그럼 우리끼리만 알고 재앙을 막아 보자는 겁니까? 그건 무립니다. 당신이 아무리 제국의 공작이라도.”
“최소, 최소로 하자는 말이다. 입이 무거운 이들로 예를 들면…… 흠…….”
입술을 질끈 깨문 공작이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금 인상을 구기며 말을 이었다.
“너는 대륙 7대 기사…… 아니, 10대 기사를 모두 동료라 표현했다. 크흠, 솔직히 아직도 믿기지 않는 말이다만……. 그때 우리의 신뢰 관계는 어땠었느냐?”
“각자 서로의 목숨을 최소 한 번씩은 구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동료라 한 것이죠.”
“……동료라 할 만하군. 거참,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가 그리드 그놈하고? 허, 참 정말…….”
웨폰 마스터와 검제의 악연, 거기다 앞으로 더해질 이야기까지 아는 타이니로서는 새삼 실소하게 되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결국 동료가 된다. 왜냐하면…….
“말세였으니까요.”
그 한마디면 더 이상 무슨 이유가 필요할까.
“그래, 그렇다면 되었다. 그럼 그들과 우리만 아는 걸로 하자.”
“예?”
“……정말 너 혼자 칠죄종의 군단장과 마왕까지 다 상대할 작정이었느냐?”
“…….”
소리 내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표정만으로 답이 되었는지 공작이 헛웃음을 흘렸다.
“미련한 것……. 적어도 10대 기사 모두가 전생보다 강해져야 그 과정이 조금이라도 수월해지지 않겠느냐? 그리고 그들 대다수가 각자의 종족이나 나라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들이니, 그것만으로도 재앙을 극복하는 데에 충분한 힘이 되어 줄 것이다. 그러니 그게 최소 조건이다.”
“아…….”
“물론 갓 핸드, 그 양반은 제외해야겠지. 그러니 더더욱 나머지 사람들은 확실하게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겠죠.”
본인조차 본명을 잊어버렸다는 신전의 칼, 인간족 최고령 10대 기사이자 성령 기사로 불리던 옛 동료를 떠올린 타이니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지만 공작의 계획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들을 어떻게 모을지는 둘째 치더라도, 무슨 수로 그들을 전생보다 강하게 만듭니까? 이미 각자 달인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인데, 뭘 가르친다고…….”
그 순간 타이니는 말끝을 흐렸다.
아직 초인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을, 자신과 나이 차이가 크지 않은 또 한 명의 10대 기사를 떠올린 것이다.
‘그래, 아르곤이라면 가능할지도…….’
그 사신 녀석은 지금 아무도 접근조차 못 하는 곳에 있을 테니까.
잠시 생각에 잠기던 그때, 공작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는 타이니가 말끝을 흐린 이유를 전혀 다르게 해석한 것 같았다.
“그래, 그것이다. 우리가 전생에 어찌 싸웠는지, 네가 상세하게 알려 주는 것.”
“……예?”
“세계수의 수호자 같은 오래된 인물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장생족이 아닌 초인들은 그것만으로도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이십 년 뒤에 내가 쓰는 수법들을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말이다.”
“하…….”
생각지도 못한 발상이라 순간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새로운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자신이 쓰는 수법을 알려 준다니?
‘그래, 그거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경지의 차이는 있더라도 결국 본인의 미래……. 그 미래의 검제가 즐겨 쓰던 수법을 지금의 공작이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그 성장을 위한 시간을 크게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타이니가 감탄한 눈으로 바라보자, 공작은 눈을 더욱 빛내며 말을 이었다.
“마법사들도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 물론 주문쟁이들의 세계야 우리가 알 수 없는 거지만……, 혹시 마도사들도 더 강하게 만들 수 있다면…….”
오러유저와는 결이 다르지만 역시나 초인들이라 불리는 7서클의 마법사, 마도사들까지 언급하는 공작의 두뇌는 충분히 뛰어났지만.
안타깝게도…….
“……마도사들은 전면에 나서지 못했습니다.”
“음?”
“그들의 약한 육체가 마족들이 근거리에서 뿜어내는 마기를 견디지 못했습니다. 전설로 전해지는 것보다 더욱 쉽게 무너지더군요. 개전 초반에 지진의 마도사 헤이더가 허무하게 죽은 후부터, 그들은 후방에서 지원하거나 광역 타격으로 보조하는 역할밖에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빌어먹게 허약한 놈들, 운동이라도 시켜 줘야 하나?”
공작은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면서도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내뱉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열의에 찬 표정으로 타이니의 양쪽 어깨를 움켜쥐었다.
“좋다, 그럼 일단 미래의 내가 어떤…….”
그렇게 열변을 토해 내려는데, 어처구니없어하는 타이니의 표정을 본 순간 공작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왜 그러냐? 무슨 문제라도……?”
아니, 계획도 발상도 다 좋긴 좋은데 말입니다.
“근데, 나한테 준다는 건요?”
“……응?”
“준다던 것부터 주고 뭘 해 달라고 하든가 해야지, 이 망할 영감탱이야!”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고함이 공작가 복도에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