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354
354화. 서진
“모두 동작 그만!!!!”
진중하게 울린 목소리가 장내의 긴장감을 내리누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성밖에서 일단의 무리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 무리의 선두에 선 노장군, 서진의 대장군이자 대륙 10대 고수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모용원호는 눈앞의 황당한 광경을 보며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허,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왕궁의 하늘에 나타난 신조를 보고 황급히 달려왔더니, 그 신조를 타고 온 것으로 보이는 귀인들과 군사들이 충돌한 상황.
더구나 그 중심에는 언제나 자신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제자이자 이 나라의 1왕자, 진사량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를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서방에서 오신 분들이신가?”
왕궁의 마당에 내려선 거대한 독수리를 닮은 신조.
그리고 각기 이색적인 복장을 한 백인들.
특히나 서대륙에 있다는 요정으로 보이는 한 여인은 어찌나 민망한 차림새를 하고 있는지 눈 둘 곳도 마땅치 않을 정도였다.
80년을 살아온 그로서도 본 적 없는 이색적이고 전설적인 광경이었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무거운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정말로, 정말로 왔구나.”
최근 서방에서 전해 온 소식의 진위를 두고 고심하던 차였는데.
서대륙의 사신이 하루 만에 하늘을 날아 이곳에 도착할 것이라는 그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눈앞에 실현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눈앞의 황당한 상황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누가 내게 상황을 설명하라. 대체 어찌 된 일인가?!”
모용원호가 호통을 치자 호궁 무사대의 일부가 황급히 달려 나와 고개를 숙였다.
“왕자 저하께서 서방의 사신이라는 자들에게 공격을 당하셨습니다!”
그 말에 모용원호의 시선이 자연스레 애제자, 아니 애증의 제자 진사량에게 향했다.
흙투성이가 된 채로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었고, 왼쪽 발목은 완전히 뒤틀려서 가만히 서 있기조차 힘들어 보였다.
꽤 큰 상처를 입은 듯했지만, 모용원호는 그것을 눈으로 보면서도 호궁 무사의 보고를 그대로 믿지 않았다.
‘분명히 뭔 짓을 저질렀겠지.’
애초에 서방에서 온 자들이 다짜고짜 왕궁의 한복판에서 왕자를 공격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그것도 그 인품과는 별개로 불혹도 되기 전에 검강을 깨치며 대륙 백대 고수에 이름을 올린 진사량을?
“네놈, 그 말에 책임질 자신이 있느냐? 만약 거짓이라면 목을 내놓아야 할 것이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
오직 기(氣)만으로 별의 힘(罡)을 빚어내 모든 물체를 가를 수 있는 초인경을 넘어, 의지만으로 세상을 움직인다는 혼세경(魂世境)에 도달한 절대고수의 ‘권역’이 발휘된 것이다.
그에 혼이 짓눌린 호궁 무사가 온몸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덜덜 떨기 시작하자, 호궁 무사대의 수장 강인이 황급히 달려와 머리를 숙였다.
“왕자 저하께서 서방의 사신이라는 자들을 먼저 공격하다가 당하셨습니다. 잠시 추문하고자 하였으나, 보시다시피 저들이 응하지 않은 터라…….”
그 말에 모용원호는 그럼 그렇지, 하며 혀를 찼다.
“추문은 무슨. 내가 오지 않았다면 괜히 사신과 갈등이나 빚었겠구나. 내가 사신을 응대하겠다. 사량 저하를 모시고 물러서라.”
그에 대한 대답은 강인이 아닌 서방의 일행과 대치 중이던 왕자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외숙부!! 이 내가 공격을 당했단 말이오!”
“암요, 암요. 당하셨겠지요. 먼저 공격하다가 말입니다.”
“이익……!”
왕자가 이를 악무는 것이 보였지만, 모용원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모두 물러서라 하지 않았느냐!? 왕국의 손님이시다!”
그에 왕자의 눈치를 보던 병사들이 슬금슬금 검을 거두었고.
“젠장!”
쾅.
그 모습을 본 왕자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검을 내동댕이치더니, 쩔뚝이는 걸음으로 궁 안으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모용원호는 그 뒷모습을 냉엄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상황이 얼추 정리된 뒤에야 사신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거기! 손님들도 경계를 거두시오. 혼세경의 고수들이신 듯한데, 기세가 과하오.”
말을 뱉고 나서야 ‘우리말을 할 줄 아나?’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하이고, 정상적인 사람이 있었네예. 괜히 긴장했심더.”
……응?
어딘가 괴상한 사투리가 돌아왔다.
* * *
서진의 왕성에서 갑작스레 난리가 벌어진 건 국왕이 신하들과 정무를 보고 있을 때였다.
“그럼, 서방에서 들어온 그 소식은 무시하는 것이 옳다 생각하는가?”
“예, 전하. 그 내용이 너무 허무맹랑한 것은 둘째 치고, 어차피 이제 8일 남짓 남은 기간으로는 전쟁 준비가 불가능하옵니다. 더욱이 그럴 예산도 없고 말입니다.”
왕의 하문에 대답하는 재상의 말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문화가 다르고 언어가 다른 서방이라 하나, 국가 간의 관계에서 그런 허무맹랑한 농담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카룬은 우리와 오랜 시간 교역을 이어 온 국가다. 그 국왕의 이름으로 헛소리를 전했다?”
왕의 말은 타당했지만, 전해져 온 소식이 너무 비현실적인 이야기였던지라 그리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정보 전달에 오류가 있거나, 그 왕국에 심대한 변란이 일어나 누군가 헛소리를 전한 것이겠지요. 애초에 서대륙에서 이곳까지 하루 만에 하늘을 날아온다는 것부터가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 신조다!!!
– 신조가 강림했다!!!!
재상이 말을 이어 나가려던 순간, 대전 바깥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신조?”
말을 하다 멈춘 재상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다른 신하들과 시선을 교환할 때.
가만히 앉아 있던 왕이 눈을 빛냈다.
“서방의 사신이 어떻게 하늘을 날아온다고 했다지?”
“예, 전하. 그 정령, 새를 타고……. 헙……?”
웃으면서 대답을 하던 재상이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답을 잇지 못하는 무례를 저지를 때.
“……확인해 보거라.”
왕의 명령과 함께 대전 회의가 일시 중단되었다.
그리고 다소간의 시간이 지난 뒤, 외성에 있어야 할 대장군 모용원호가 한바탕 소란 끝에 서방의 사신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오……!”
“어찌…….”
“저게 그, 요정인가?”
서진의 대신들은 거의 모두가 오랜 기간 관료를 역임한 이들이었다.
그러니 재상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 대다수가 60이 넘은 나이였지만, 사신을 맞이하는 그들의 시선은 동대륙 기준으로는 거의 헐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차림을 한 요정에게 쏠려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차림새 때문만은 아니었다. 눈처럼 새하얀 피부와 곱디고운 연녹색 머리카락, 그리고 그 주변으로 은은하게 퍼지는 따뜻한 기운은 등장과 동시에 대전에 활기를 불어넣는 듯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 다소 덩치가 작은 만큼 귀도 작은 보랏빛 머리 요정도, 전신을 휘감은 검은 옷차림이 무색할 정도로 예뻐 보였다.
그에 비하면 무식해 보일 만큼 거대한 망치를 든 사나운 인상의 남자나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떨거지는 신경 쓸 것도 없었다.
“잠시나마 회춘한 듯한 느낌이오.”
“그러게나 말이오. 이거 참, 정말 요정이라는 게 있었구려.”
“어디, 서방에서 요정 노예를 구할 수 있나 알아봐야…….”
음흉한 눈빛의 일부 대신들이 자신들끼리 수군거리는 순간.
사신 무리의 선두에 선 검은 머리 백인이 눈동자에 살기를 띤 채 좌중을 한차례 훑어보았다.
그에 조금 전까지 음흉한 웃음을 짓던 대신들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며 옷매무새를 정돈하는 등 딴청을 부렸다.
“으으음. 곧 여름인데 날씨가…….”
“갑자기 서늘하오.”
“요새 몸이 허하다 보니…….”
좀 전까지 회춘이 어쩌고 하던 이들이 갑자기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사신을 안내하던 모용원호가 묘한 눈빛으로 검은 머리 백인을 주시할 때.
왕의 앞에 다가선 그 남자가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서진의 관료들이라면 얼추 보거나 들은 적 있는, 서방의 기사라는 이들의 예법이었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연 순간.
“서진의 국왕 전하를 뵙슴더. 서대륙에서 온 타이니라 합니더.”
– 엥?
듣고 있던 모든 대신이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인사를 받던 국왕 역시 살짝 움찔하는 듯했으나, 그는 이내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로 왔군. 정말 신조를 타고 하루 만에 대양을 넘어온 것인가?”
“그렇습니더.”
“허허. 그렇다면, 그전에 나온 이야기. 그 마왕군의 강림인지 뭔지 하는 것도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인가?”
그 말이 나온 순간에는 대전의 분위기가 조금 무거워졌다.
조금 전까지 허무맹랑한 소리라 일축하던 이야기가 진실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대신들의 머릿속에 갑자기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지의 말보다는 여기, 카룬 왕국의 국왕께서 전하신 친서로 설명 드리겠심더.”
그리 말한 타이니가 품 안에서 꺼낸 서신을 모용원호에게 건네는데.
“쿡, 대체 우리말을 누구한테 어떻게 배웠길래 말이 저런…….”
대전의 끄트머리에 서 있던 젊은 대신이 자신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다 무릎을 꿇은 채로 뒤를 돌아본 검은 머리 백인의 한쪽 눈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흐헙!’
젊은 대신은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자, 자네 갑자기 왜 이러나?”
“어서 일어나시게, 빨리.”
“어전에서 이게 무슨…….”
“어, 어. 예.”
왜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스스로도 어리둥절한 젊은 대신이 억지로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왜인지 그럼에도 온몸이 떨리고 한기가 드는 느낌이었다.
‘설마…….’
마치 저자가 의지만으로도 세상을 움직인다는 혼세경의 고수라도 되는 것 같지 않은가.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요즘 몸이 너무 허한가 보다.
그가 그렇게 보약이라도 챙겨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는 동안.
그 백인의 품에서 나온 서신을 받아 든 왕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음…….”
실시간으로 굳어지는 왕의 표정에 따라, 어전 내의 긴장감도 점차 높아지기만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실로 믿기 힘든 말이로다.”
탄식과 함께 서신을 내려놓은 왕의 입에서 부정적인 말이 튀어나왔다.
그에 검은 머리 백인이 즉시 대답했다.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대륙이 멸망할 것입니……다.”
그사이 자신의 말투를 고치려고 한 듯 어색함이 넘쳐흘렀지만, 그 내용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왕은 오히려 웃음을 지었다.
“이 말이 사실이라 해도 그리 걱정할 것은 아니니, 사신들은 안심하고 왕궁에서 쉬다가 돌아가라.”
“……예?”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라는 듯, 검은 머리 백인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반문했다.
“이 서신을 보아하니, 사신으로 온 그대들은 이미 괴물의 군세를 3번이나 물리친 역전의 용장이라 하는군. 바로 자네가 주도했다고 하는데, 맞나?”
“그렇, 습니다만?”
“그렇기에 걱정할 것 없다고 한 것이네.”
“그게 무슨……?”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사내가 다시 반문했다.
사절이라기엔 지나치게 무례한 태도였으나, 그의 말이 짧은 것을 배려한 듯 왕은 여유로운 웃음으로 대답해 주었다.
“우리 대륙에는 그대 이상의 용사들이 가득하니, 그 괴물의 군세가 덤빈다 한들 그저 쓸려 나갈 거란 말일세. 뭐, 병사들이 고생하긴 하겠지만, 그 정도뿐일 테지.”
그 말에 사내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지더니, 이내 버벅거리며 말을 이었다.
“……통역, 통역이 필요합니더. 아니, 필요합니다.”
지금 자신이 왕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 건지 확인하고 싶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에 왕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許)하노라.”
모두가 침묵하고 왕이 홀로 웃고 있는 가운데, 서방의 언어를 할 줄 안다는 통역이 불려 왔다.
그리고 이내.
“!@#!@#! 발!?”
쿵.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지만 거친 말임이 분명한 목소리와 함께, 사내에게서 짙은 살기가 뻗어 나와 대전을 뒤덮었다.
“으윽!”
“뭐, 뭐야!?”
“뭐야, 저자!!”
“끄으으…….”
그에 사내 근처에 있던 대신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고, 그렇지 않은 이들도 하나같이 오한이 드는 몸을 추스르며 본능적으로 사내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애썼다.
왕의 안색까지 점점 파랗게 질려 가던 그때.
챙!
“기세를 거두시게, 사절. 자네가 강한 것은 알고 있으나 더는 참지 않겠네.”
왕의 앞을 가로막은 대장군 모용원호가 검을 꺼내 들어 사내를 향해 겨눴다.
그런데.
“하, 상황을 확실히 가르쳐 줘야겠고만요. 당신들 X 됐다고 말임더!”
예의 이상한 사투리로 상스러운 말을 퍼부은 사내가, 사나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모용원호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감히, 대륙 10대 고수 중 하나이자 서진의 대장군인 혼세경의 고수를 상대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