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358
358화. 중천
휘이이잉.
낯선 하늘 아래 펼쳐진 새로운 풍광을 내려다보는 진귀한 경험.
가슴이 두근거리고 기분이 들뜰 만한 환경이었지만, 막상 그 당사자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이동하는 와중에도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으니, 그들에게 낯선 대륙의 풍경을 감상할 여유 따윈 없었던 것이다.
특히 긴장감 속에서 잠시 카일룸을 역소환한 채 고작 몇 시간을 쉬었을 뿐인 에스티나는 다시 정령의 유지에 정신을 쏟고 있었고.
일행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타이니는 서진 왕성에서 왕과 대화를 나눈 이후로 내내 눈을 감고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으니.
그의 근처에서 마법 보호막을 유지하고 있는 아르곤과 그림자에 숨어 있는 루나도 굳이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에이씨, 모르겠다!”
“아이씨, 깜짝이야!”
명상에 잠겨 있던 타이니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경직되어 있던 일행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뭐. 뭐?”
괜히 가장 먼저 반응했다가 타이니의 짜증스러운 시선을 받게 된 아르곤이 흠칫하는데, 바로 타이니의 영문 모를 소리가 이어졌다.
“흐르는 물처럼 사는 인생이라는 게 도대체 무슨 개소리냐? 자연을 닮은 삶이라니? 그럼 그냥 숲속에서 동물들과 어울려 살라는 거 아냐?”
아마도 왕한테 들었다는 그 도가의 기본 공부에 관한 말인 듯했지만.
그걸 대체 누구한테 묻고 있는 거냐.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 미친놈아…….”
아르곤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신음 같은 목소리를 흘린 순간.
말한 이는 흠칫했고, 듣는 이는 미간을 확 좁혔다.
“미친놈?”
그 단순한 반문에 아르곤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 아, 하하. 말실수. 하하, 요새 좀 스트레스가 심해서 그래. 그래서 그런 거야. 말이 헛나왔어.”
“요새 훈련할 때 공격 좀 받아 줬다고 날 만만하게 보나 본데…….”
“저, 절대 아냐!! 세상에 어떤 미친놈이 널 만만하게 보냐!!?”
“너.”
“오해다!! 절대!!”
아르곤은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당연한 일이었다. 대인 살상용으로 개발한 8서클 중첩 마법을 정면에서 몸으로 때우고도 핏물 조금 토하고 말 뿐인 괴물을 어찌 만만하게 볼까.
심지어 경지가 오르고 나서는 더욱 무섭게 느껴지니 말이다.
하지만 아르곤의 해명을 들은 친구, 아니 괴물은 그에게 자비 없이 손을 뻗어 왔다.
“오해는 무슨, 내가 귀로 들었는데.”
“야, 야! 우리 말로 하자, 말로…….”
다른 대륙까지 와서 아군한테 맞아 죽는구나.
아르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가던 순간.
“둘 다 시끄러워요!”
카일룸의 비행에 집중하고 있던 에스티나의 목소리가, 솟구치던 타이니의 살기를 단숨에 내리눌렀다.
끙.
“너, 나중에 두고 보자.”
“하, 하씨, 아니라니까. 왜 넌 나만…….”
이 자식은 다른 12대 기사들은 잘 대우해 주면서 이상하게 자신한테만 바짝 쪼는 경향이 있었다.
아르곤은 새삼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타이니의 쏘아보는 눈빛을 마주하고는 황급히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무언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저, 저기 같은데!!”
아르곤이 가리키는 곳.
그곳에는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거대한 도시가 있었다.
서진의 수도이자 동대륙 서부 해상의 가장 큰 섬인 자하보다 훨씬 커 보이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분주히 돌아다니는 도시.
그리고 그 거대한 도시의 외곽에는, 일행의 눈에는 성벽이라고 보기에도 애매한 5~6m 높이의 장벽이 둘러쳐져 있었다.
“……아세리안보다도 몇 배는 크겠어.”
“사람도 많은 것 같아. 몇백만 명이 살고 있대도 이상하지 않겠는데?”
“서두르죠. 곧 해가 질 테니.”
동대륙의 지배 국가인 선 제국의 수도, 중천(中天). 하늘의 한복판이라는 이름을 가진 거대 도시는 그 크기만으로도 일행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다만.
“여긴 마법사도 거의 없다고 하니, 저렇게 큰 도시에 마법적 조치가 없다는 건 이해할 수 있는데…… 이 대륙에는 몬스터가 없는 거야? 성벽은 또 왜 저렇게 낮아?”
아르곤의 말대로, 허술해 보이는 방비 태세가 마음에 좀 걸릴 뿐이었다.
“큰 전쟁이 안 난 지 벌써 3백 년이 넘었다잖아. 평화의 시대라더니…….”
타이니는 한눈에 보기에도 번영해 보이는 대도시 중천을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평화의 시대. 참 입에 붙지 않는 말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평화의 시대에 재앙을 알리러 와서, 이곳의 황제를 설득해야 하고 말이야.”
“정식 절차를 거치면 타국의 사절도 한 달 후에나 알현할 수 있다는 황제를 말이지.”
[재앙, 8일 뒤.]그림자 속에서 침묵하던 루나가 전성으로 대화에 끼어들자, 일행의 입에서 동시에 한숨이 튀어나왔다.
“일단 가 보자고.”
“서진에서 통신을 해 놓았다지만, 믿어 줘야 할 텐데.”
“믿기 싫어도 믿게 해 줘야지. 저기가 황궁 같은데, 공중에서 선회 몇 번 하고 내려앉자.”
“서진에서처럼 공격이 들어오면?”
“……그러지 않길 바라야지.”
불길한 상상에 잠시 일행의 안색이 굳어졌지만.
다행히도 황궁의 상공을 선회하는 카일룸을 본 선 제국 사람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끼에에에!”
– 신조다……!
– 그럼 그 말이 정말로……!
광활하게까지 느껴지는 황궁의 앞마당.
서서히 가까워지는 지상에서는 탄성만이 들려오고 있었으니.
‘제발, 제발 좀 잘 풀렸으면.’
타이니는 그렇게 속으로 빌며, 동대륙을 사실상 실효 지배하고 있는 제국의 앞마당에 내려섰다.
3~4층 높이의 고풍스러운 목재 전각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황궁의 중심지.
서대륙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신기한 건축 양식과 화려한 문양들, 그리고 특이한 옷차림을 한 사람들과 그들이 풍기는 분위기.
하나하나가 서대륙 사람들에겐 감탄을 부르는 풍경이었지만, 일행의 무거운 마음속에는 그 무엇도 파고들지 못했다.
* * *
“서대륙의 사절이 왔습……니다. 벌어질 재앙을 대비하고자!”
서진에서 경험을 바탕으로 발음과 어조에 유의해서 소리를 질렀다.
‘됐어.’
여전히 어색하기는 했지만, 듣는 이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크게 잘못 말한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서진의 통신이 잘 전해진 듯했는데.
그것을 증명하듯, 이내 관리로 보이는 중년인이 일행의 주변을 둘러싼 수백의 무사들을 헤집고 모습을 드러냈다.
“신수의 주인, 서대륙의 사절을 뵙습니다.”
카일룸을 보며 정중히 인사를 하는 관리의 모습에 일행의 얼굴에 안도하는 기색이 어렸지만.
“거처를 마련해 놓았으니, 일단은 좀 쉬시지요. 서방에서 전해 온 소식에 대한 논의는 내일 있을 예정입니다.”
이미 거뭇해져 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태평하게 웃어 보인 관리의 사무적인 말은, 타이니의 얼굴을 굳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지금 밤이라고 해서 쉴 시간은 없슴다만?”
“문무 대신들의 입궐 시각은 진시(辰時)부터입니다. 서두르셔 봤자 당장은 하실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진시가 몇 시를 말하는 거더라?
그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뒤로 돌아갔다.
“아르곤, 진시가 몇 시를 말하는 거였지?”
“아침 7시부터 9시까지.”
관리의 말을 얼추 알아들은 것인지, 타이니의 물음에 답하는 아르곤의 얼굴은 이미 굳어 있었고.
그 대답을 들은 다른 일행의 표정도 무거워졌다.
두 사람의 문답만으로 선 제국의 관리가 무슨 얘기를 한 것인지 추론해 낸 듯했다.
“타이니, 하루의 절반에 가까운 시간을 그냥 날려야 하는 거야?”
피로가 가득 쌓인 창백한 안색의 에스티나를 보며, 타이니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다시 관리를 향해 소리쳤다.
“그럴 시간 없다니까! 재앙이 코앞까지 다가왔단 말임다!!”
– 다아아아아!
쩌렁쩌렁하게 울린 고함이 웅성거리던 주변의 모든 목소리를 압도하며 황궁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우르르르릉.
자연스레 폭발시킨 기세가 지면을 뒤흔들었고, 주변의 무사들에겐 거대한 거인이 눈앞에 서 있는 듯한 착각까지 심어 주었다.
“이런……!”
“창 들어!”
“경계 태세!”
챙!
그에 무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집어 드는데.
일행을 둘러싼 3백 명가량의 무사들 사이에서 무려 세 줄기의 오러가 치솟아 오르는 것을 본 타이니가 눈꼬리를 씰룩였다.
‘복장을 보면 잘해야 경비대 수장 정도 같은데? 오러?’
그는 서진에서 들은 백대 고수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동대륙에서는 오러를 사용하는 초인경의 무사가 흔히들 백대 고수라 불리며, 알려지지 않은 고수들까지 따지면 실제로는 그 수가 백수십은 될 것이라는 말.
솔직히 그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면 진짜겠어…….’
그렇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다.
타이니의 마음속에서 마법도, 정령도, 사제도 없다는 동대륙의 무력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질 때.
“무엄하오!! 아무리 신수의 주인이라도, 이곳은 대선(大鮮)의 황궁이요!”
무력이라고는 일 푼도 느껴지지 않는 예의 그 관리가 그의 코앞까지 다가오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엄포를 놓는 태도가 무색하게 창백한 얼굴과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
“감히 그 누구도, 그리 큰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는 말이오!”
그러면서도 절대 물러서지 않으려 악을 쓰는 관리의 모습에, 타이니는 다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한낱 관리가 이렇게 나올 정도라면.
‘쉽지 않겠어. 젠장.’
당장 주변을 둘러싼 수백의 무사들과 3명의 오러유저를 힘으로 제압하는 거야 문제가 아니었지만.
이곳에서는 서진과는 달리 무력시위가 먹히진 않을 것이라는 직감이 든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을 증명하듯.
– 사절은 기세를 거두라! 여기까지는 그저 가벼운 무례로 여기고 넘어가 주겠다!
좀 전의 고함에 못지않은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멀리서부터 울려 퍼지더니.
‘새하얀 바람’을 휘감은 채 허공을 가르며 쏜살처럼 날아온 장수가, 관리의 눈앞에 소리도 없이 착지했다.
“양 장군님!!”
그에 관리가 반색하면서 소리치는 순간.
갑자기 나타난 장수가 일행을 향해 창을 겨누었고, 그와 동시에 일어난 기세가 사방에 펼쳐져 있던 타이니의 영역과 상쇄되며 사라졌다.
오러익시더. 이곳 말로 혼세경의 고수.
타이니는 서진에서 들은 정보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창을 다루는 중년의 오러익시더, 검은 수염을 목까지 기른 장수……. 더구나 선 제국의 황궁에 있는 강자라면.
‘개천관일창(開天貫日槍) 양일원.’
‘하늘을 열고 해를 꿰뚫는 창’이라는 거창하다 못해 손발이 오그라드는 이명을 가진, 선 제국의 우(右)장군.
선 제국 3대 강자 중 한 사람이었다.
“어찌하겠는가, 신수의 주인이여. 아니면 신수를 믿고 이곳에서 난장을 부려 보겠느냐?”
그가 카일룸을 눈짓하며 타이니에게 창을 겨눴다.
‘확실히 모용원호보다는 강해 보이네.’
하지만 창끝에서 넘실거리는 오러나 저 오만한 표정을 깨트리는 것쯤은 자신에게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 것이다.
굳이 직접 싸울 것도 없이, 공간 지배를 사용해서 압박하기만 해도 분위기가 달라질 터.
그러나.
“타이니.”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에스티나의 말이 아니더라도, 여기서 더 소란을 피워 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 계획에도 없는 휴식을 하게 생겼어. 다른 방법 생각나는 사람?”
혹시나 해서 던진 질문에 하나같이 고개를 젓는 일행을 본 타이니는, 다시 한숨을 내쉬며 제게 창을 겨눈 장수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기다리겠슴다. 그렇다면, 내일 열린다는 그 논의에 저희도 참여할 수 있겠슴까?”
“흥. 그건 그대가 정할 일이 아니다. 위대하신 황…….”
콰직.
그 순간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노을빛 오러 한 조각을 날리자, 그를 향해 겨눈 창끝에 어려 있던 오러가 크게 흔들렸고.
동시에 거만한 태도로 일관하던 장수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나를 위해서가 아님다. 모두를 위해서. 재앙은 전 인류가 제대로 알아야 할 일입니다.”
타이니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진 순간, 양일원이 굳은 표정으로 한발 물러섰다.
“……아뢰어 보겠소이다. 그대, 이름은?”
그 이글거리는 눈빛은 직전과는 달리 카일룸이 아니라 타이니에게 고정되어 있었고.
“타이니. 이곳 말로는, 음. 광휘(光輝)라 불리는 기사요.”
“광휘라……. 기억하겠소이다.”
선 제국의 우장군이자 대륙 10대 고수 중 한 사람, 개천관일창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뒤에서 다가온 일단의 무리가 일행을 거처로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