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360
360화. 중천의 황궁
‘이건 너무 불편해.’
루나는 자신의 숙소라는 거창한 전각에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
“!@#!#$”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며 붉어진 얼굴로 바닥에 넙죽 엎드린 시종들.
타이니가 말한 ‘절’이라는 것이 그녀에겐 너무나도 과도한 예로 보였으니까.
그렇게 엎드린 시종들을 바라보던 루나가 자연스레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수염을 기른 중년인이 서대륙 공용어로 답해 주었다.
“앞으로 잘 모시겠다는 뜻입니다.”
이게 아랫사람이 표하는 일반적인 예라는 말이다.
동대륙 문화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왜 이런 인사를 하는지는 얼추 짐작이 갔다.
‘등에 칼을 꽂던 목을 베건, 마음대로 하라는 뜻인가.’
차분한 곡선의 미학을 추구하는 것 같던 건축 양식이나 복식과는 다르게, 그 내면의 문화에는 지극히 과격하거나 잔인한 부분이 있는 듯했다.
그렇게 깨달은 사실을 머릿속에 새겨 두며, 루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 저를 따라오시지요. 침실은 2층에 있습니다.”
중년인, 통역의 말투는 조금 어색했지만 알아듣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창을 쓰던 오러익시더의 무리에 나중에 합류한 이들 중에는 통역사가 넷 있었고, 그들 모두가 서대륙 공용어를 꽤 수준급으로 할 줄 아는 것 같았다.
“이곳이 침실입니다. 이 전각에서 가장 좋은 방이지요. 물론 다른 방을 쓰셔도 됩니다.”
이내 루나가 안내된 곳은 건물 2층의 어느 방.
문이 닫혀 있어 안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엄연한 초인인 만큼 그 내부 공간이 한 사람이 쓰기에 지나치게 넓다는 것쯤은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물론 초인이 아니더라도, 그 정도는 문의 크기만 봐도 짐작할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혹시 목욕을 원하신다면 시종들에게 따로 준비를…….”
“충분해. 고마워.”
“아, 별말씀을요. 오히려 제가 영광이었습니다.”
“영광?”
“요정님을 직접 본 게 처음이라…….”
“요정?”
“아, 엘프님이요.”
그 말에 루나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
후.
‘아직 멀었나 봐.’
엘븐하임에서 보랏빛 꽃을 뿌리는 어린 엘프들을 본 뒤로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열등감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걸 자각한 그녀가 속으로 혀를 차는데.
내밀한 사정은 모르더라도 그 미세한 표정 변화만으로 그녀의기분이 상했다는 것을 짐작한 듯, 통역이 황급히 말을 바꿨다.
“아하하. 농담입니다, 농담. 덕분에 제 서방어 실력을 알릴 기회가 생겼으니까요.”
그 말에 루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당신 실력, 제법.”
“제법? 아, 예. 어렸을 때 카룬에서 유학을 했기 때문이죠. 그동안 쓸 일이 없었는데, 잊지 않아 다행입니다. 정말…….”
통역사는 그 뒤로 황궁에서 실력을 인정받으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등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지만, 그것을 듣는 루나는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역시나 위기의식이 없어. 타이니 말이 맞아.’
서진에서 전한 통신의 구체적 내용이 하급 관리들에게까지 알려지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면…….
복잡해지는 머릿속에 절로 어두워지는 표정을 감춘 채, 루나는 통역의 말을 자르고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다행. 그럼 전 이만.”
“……해서, 예? 아, 예.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이 종을…….”
쾅!
– 아니, 저 요정님…… 하…….
문밖에서 통역이 실망한 음성 하나를 남기고 사라지자, 루나의 시선이 방 안을 훑었다.
황금색과 붉은색 비단이 덮인 커다란 침대, 넓은 공간을 채운 고풍스러운 장식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슬슬 움직여야지.’
그 생각을 하면서도 방 안의 이국적인 전경에 자꾸만 시선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방 한쪽에 자리한 서가에는 도통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적힌 책들이 빼곡했고, 그 옆에 놓인 화병의 무늬는 거기에 꽂힌 꽃보다 더 화려해 보였다.
‘이게 도자기?’
동대륙의 특산품 중 하나를 본 순간, 피로에 절어 있던 루나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맺혔다.
아름다운 것에는 그저 보기만 해도 피로가 풀리는 마법이 깃들어 있는 듯했다.
황궁에서 훈련받을 시절에는 상상도 하지 못하던 감상이었지만, 루나는 스스로의 변화를 체감하지 못했다.
그렇게 꽃과 도자기들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을 때.
그녀의 영역, ‘죽음의 공간’에 익숙한 기척이 감지되었다.
그리고 이내 아르곤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나 왔어.]“호?”
눈으로는 보이지 않고 마나의 흐름조차 느껴지지 않는 그의 존재감은 영역에 집중하지 않으면 알아채기 힘들 만큼 은밀했다.
이게 8서클에 이른 은신 마법이라는 것일까.
‘내 감각권 안에서…….’
오늘은 정말 아르곤을 다시 보게 되는 날 같았다.
[원래 8서클의 마법에 은신 마법 따위는 없어. 뭐, 대마도사가 뭐 하러 몸을 숨기는 마법을 쓰겠냐마는. 하여튼 이 몸은 자유자재로 마법의 조율이 가능하지.]이렇게 주접만 떨지 않았으면 말이다.
[어때? 너도 못 찾겠지?]“하…….”
동료의 조심성을 길러 주는 차원에서.
‘내 앞에서, 은신을.’
그 자리에서 슥 하고 그림자 속으로 사라진 루나.
이내 그녀는.
“윽!?”
아르곤의 목덜미를 잡아챔과 동시에 그의 코앞에 움브라-테그멘의 날을 갖다 대며 다시 방 안에 나타났다.
그러자 마법이 깨어지며 모습이 드러난 아르곤이 낭패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어, 어떻게? 젠장, 분명히 존재감 자체를 지웠는데…….”
“내 영역, 은신과 살기 감지에 특화. 못 숨어.”
루나가 피식 웃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이는데.
그 순간 아르곤의 얼굴이 목덜미부터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 아으. 좀 떨어져!”
손을 놓자마자 후다닥 떨어지는 아르곤.
그 과한 반응에 루나는 자신의 손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냄새나?”
“응, 좋은 냄새……가 아니라! 이럴 시간 없다고!”
괜히 과하게 소리를 지르는 아르곤을 보니 인상이 찌푸려졌다.
‘정말 냄새나나?’
킁킁.
하긴, 생각해 보면 최근에 씻은 기억이라곤 언데드 병단을 정리한 뒤 몸에 물 한 번 끼얹은 게 다였다.
그래도.
“기분 나빠.”
괜히 저 녀석 때문에…….
“뭐? 왜? 아, 소리 질러서? 괜찮아. 차단막 펼쳐 놨어.”
“……됐어.”
냄새가 나면 솔직하게 얘기해 줄 것이지.
황제를 찾은 다음에 수욕이나 해야겠다.
“가자.”
루나는 한숨을 내쉰 뒤 그대로 아르곤의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었다.
그런데.
“야, 내가 뭐 잘못했냐?”
아르곤이 엉뚱한 반응을 보였다.
[……아냐.]“했나 보네. 뭔데?”
얘가 왜 이럴까.
[시끄러워. 시간 없어, 가자.]“……젠장. 그래, 가자. 그 전에.”
우우웅.
아르곤이 검을 휘둘러 허공에 [人形(인형)]이라는 글자를 그려 냈다.
그러자.
스스슥.
루나와 똑 닮은 모습의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더니, 침대 위에 깔린 이불보 속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호?’
실로 놀라운 수법에 절로 감탄이 나오는데.
“더미는 완성. 어때? 끝내주지?”
녀석이 주접을 떠는 바람에 나오던 감탄도 쑥 들어갔다.
[가자.]“……냉정해, 너.”
아르곤이 투덜거렸지만 루나는 대답해 주지 않았고.
이내 아르곤이 허공에 [隱身(은신)]이라는 글자를 그려 놓음과 동시에 그의 모습이 방 안에서 사라졌다.
* * *
‘더럽게 넓네, 젠장.’
아르곤은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드넓은 황궁 내부를 돌아다니면서 전각들을 지나칠 때마다 탐지 마법을 썼다.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는지, 그리고 혹시나 특별한 기운을 가진 사람이 있는지 일일이 확인하는 것이다.
짜증 나도록 귀찮은 일이었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기 황제는 변태 새낀가? 잠자는 곳을 아홉 개나 만들고 매일 자리를 바꿔?’
그 정보도 그나마 말 많은 통역사가 알아서 떠들어 준 덕에 얻은 것이었기에, 그 9개의 침전이 정확히 어느 전각들인지는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바깥에서부터 황궁의 중심부 쪽으로 시계방향으로 나선을 그리듯 움직이며 모든 전각을 탐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확인한 건물이 10번째가 넘어가자, 바로 귓가에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오래 걸리면, 찢어질까?] [너 동대륙어 못 하잖아. 우리 임무엔 황제를 찾는 것뿐만 아니라 여기 놈들이 무슨 속셈인지 파악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어.] [그건 네가. 황제는 내가.] [어떻게 찾으려고? 넌 일일이 움직여서 찾아야 하잖아.] [가장 엄중히 보호받는 게, 황제 아닐까? 사람 많은 쪽 찾는 건, 나도 가능.]그럴듯한 주장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타이니에게 들은 말이 아르곤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 어디까지나 만일을 대비하기 위함이야. 황제 위치만 파악해 두고.
– 더 중요한 건…….
[황제를 찾는 게 문제가 아니야. 안 들키는 게 더 중요해. 혹시 모를 위험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함께 간다.]동대륙의 지배자 선 제국의 황궁.
이곳엔 도착했을 때 보았던 그 장수 말고도 두 명의 오러익시더가 더 있으며, 그중 한 명은 검선이라는 작자와 함께 동대륙 최강을 다투는 이라 했다.
더구나 오러유저 역시 20여 명 가까이 상시 대기 중이라고 하니.
[마법 결계가 없다는 것만 빼면, 아스란 제국 황궁보다 훨씬 위험해. 그러니 딴생각하지 마.]혹시나 깽판을 치더라도, 타이니와 에스티나가 함께 있을 때나 쳐야 했다.
어떤 적도 막아 낼 수 있는 든든한 전위와 언제든 하늘 위로 튈 수 있게 해 주는 기동력의 주인이 있을 때 말이다.
[……응]다행히 천방지축이 그 말에 순순히 수긍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2시간 정도 흘렀을 무렵.
[저기다!] [조심.]그들은 황궁 내에서 호위가 가장 엄중한 건물을 찾아냈고, 이내 그 안으로 소리도 없이 스며들었다.
* * *
“참 재미있는 소식이란 말이지.”
톡. 톡. 톡.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너른 방 전체에 울려 퍼질 정도로 고요한 공간.
나직하게 흘러나온 그 목소리에 호위 무사들과 그림자들은 그 누구도 답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황제가 저 말을 한 것은 이 밤에만 벌써 3번째였으니.
불면증을 달고 사는 황제는 잠이 오지 않을 때면 그날 가장 관심을 가졌던 사안에 대해 계속 반복해서 말하는 습관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그 이방인 중에는 요정도 있다지?”
처음으로 다른 말이 나왔다.
그러자 그 즉시 황제의 앞에 검은 옷을 입은 자가 나타나 넙죽 엎드렸다.
“그렇습니다. 서방의 말로 엘프, 그중에서도 신분이 가장 높은 자가 이방인의 무리에 있다고 합니다.”
“엘프라……. 예쁜가?”
그 뜬금없는 질문에 그림자는 답하지 못했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거세된 그는 미추조차 임의로 판단하지 못하니, 그 말에 제대로 된 답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황제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마왕이니 뭐니 하는 헛소리는 차치하더라도, 요정이 소문대로 아름답기만 하다면 눈요기는 할 수 있겠군.”
농담조로 던진 말에도 그림자는 답이 없었고, 그에 혀를 차던 황제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이방인들은 우리 제국의 협력을 구하러 온 거라지?”
“그렇습니다.”
“그럼 대가를 받아도 될 테고?”
대륙에 일어날 재앙에 대비하라는 소식을 가져온 이방인들.
그런 그들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겠다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이었지만, 지금 이곳에서 황제의 말에 딴지를 걸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황제는 그 반응을 뻔히 예상했으면서도 짜증을 냈다.
“……재미없게. 내가 헛소리를 하면 충언이든 간언이든 하란 말이다. 그러면 안 된다, 혹은 뜻대로 하시옵소서 등등.”
“송구하옵니다, 폐하.”
“이건 뭐, 인형과 대화하는 것도 아니고.”
“송구하옵니다, 폐하.”
“하…… 됐다.”
여전히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은 그림자의 말에 황제는 한숨을 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어차피 그림자들은 그 목적에 충실하게 사용되면 그뿐.
세상에 정체가 알려지지 않은 십대 고수 중 한 명인 암천일성(暗天一星)이 눈앞의 그림자라 해도, 도구인 것은 똑같다.
그리고 마냥 헛소리로 밤을 지새우는 것도 낭비일지니.
“너무나 터무니없는 소식인데, 대해제일검을 꺾었다는 강자와 그 일행이 그저 헛소리를 하려고 대양을 건너오진 않았을 것 같단 말이야.”
“…….”
“만약 그 터무니없는 소식이 사실이라 치면, 그들은 그것을 증명할 증좌를 가지고 있을 것인가?”
“…….”
“설령 그런 게 있다 해도, 과연 그들은 재앙을 알리러 온 것이 맞을까? 아니면 그들이 재앙을 가져온 것일까? 혹은 사악한 요술쟁이가 판을 친다는 서방에서, 양놈들이 진짜 평화를 위해 찾아온 것일까? 그것은 어찌 판단해야 할까?”
이것은 일종의 놀이나 다름없었다.
만성적 불면증에 시달리는 황제의 자문자답.
중요한 안건에 대한 결정을 앞둔 황제가 이런 과정을 거쳐 스스로 결론을 내리고 나면.
내일 대전 회의에서는 주요 대신들의 토의를 거쳐 황제가 의도한 방향대로, 혹은 거기에 조금의 수정이 더해져 제국의 정책이 결정될 것이다.
평소에도 기척이 거의 없는 그림자였지만, 그는 더욱더 숨을 죽이며 황제의 문답을 방해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던 어느 순간.
‘침입자!?’
엎드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림자 수장의 눈이 빛나더니, 그의 손에서 검은 수리검이 소리 없이 던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