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368
368화. 경고
콰아아아아앙!
“이제 그만하시죠.”
지친 얼굴의 타이니가 정령 합신을 풀고 본모습으로 돌아와 말을 꺼내는 순간, 낭패한 표정의 서일산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건청궁의 앞마당을 폐허로 만든 ‘대련’은 당사자들의 합의하에 마무리되었다.
“계속했으면 우리가…….”
“체면 사나우니 그만하게, 천일.”
“……예.”
그중 누군가는 불만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반대로 다른 누군가는 대단히 만족스러워 보였다.
“저 장군들, 대단해.”
“그 정도야? 우리도 보긴 했는데……?”
“저 셋을 받쳐 줄 다른 오러익시더나 대마도사 한두 명만 더 있으면 칠죄종을 상대할 만하겠어.”
“헐…….”
“초월무구도 없이 말이야. 희망적이야.”
지칠 대로 지쳤음에도, 타이니는 얼굴에 웃음기를 띠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기대 이상이야.”
“다행.”
“수고했어. 이제 좀 쉬어.”
“이걸로 어제 일은 묻어…….”
“닥쳐, 아르곤.”
그가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일행과 대화를 나눌 때.
– 자리를 대전으로 옮긴다. 서대륙의 사절이 가져온 전보에 대해 토의를 시작할 것이다.
황제의 선언과 함께, 장소가 다시 옮겨졌다.
* * *
대전 회의가 시작되기 직전.
처음 입궁했을 때의 살벌한 분위기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일행을 찍어 누르는 듯한 기세의 분출이 사라지고, 오히려 경외감 어린 눈빛들만이 쏟아지는 가운데.
‘이제는 말을 듣겠지.’
타이니는 희망적인 관측을 하며 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물론.
“알지? 당장 군대를 움직인다 해도 강림 시간에 맞출 순 없을 거야. 잊지 마.”
에스티나의 한마디에는 그 미소마저도 굳어 버리고 말았지만.
순간 다시 무거워지는 일행의 분위기에 에스티나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보탰다.
“……미안. 이렇게 최선을 다해 결과를 이끌어 냈는데 실망할까 봐.”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많이 했던 얘기잖아.”
타이니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 숙인 에스티나를 토닥였다.
그런데 그때, 낯선 목소리의 동대륙어가 들려왔다.
“이방인 무사, 그대의 실력은 잘 보았다.”
고개를 돌리자 황금빛 비단옷 차림에 화려한 관모를 쓴 각진 얼굴의 젊은이가 고개를 치켜든 채 일행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누구……?”
“어허, 이분은 대선 제국의 황태자 전하이시다! 예를 갖추라!!”
타이니가 묻자, 그 젊은이 대신 옆에 있던 늙은 관리가 호통을 쳤고.
그는 그제야 젊은이를 알아보았다.
여타 관리들과는 전혀 다른 복장, 그리고 황제를 약간 닮은 얼굴에 어젯밤에 들었던 목소리까지.
‘아, 그 잡놈.’
상대의 정체를 인식한 순간, 타이니는 그에게 대충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황태자 전하. 타이니입니다.”
한쪽 무릎조차 꿇지 않고 고개만 까닥하는 인사.
그에 황태자의 주변에 있는 인물들이 발끈하려던 순간.
황태자가 손을 들어 올려 그들을 막았다.
그리고 살짝 굳은 얼굴에 억지웃음을 띄우며 다시 타이니에게 말을 건넸다.
“옆의 요정들은 그대의 반려인가? 낯선 대륙까지 아내들을 데리고 오다니, 풍류를 제대로 즐길 줄 아는 자로군.”
이 새끼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일까.
그 헛소리에 대번에 안색이 굳어졌지만.
“……동료입니다.”
“동료? 여자가?”
마치 상대의 반응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타이니의 대답을 듣는 순간 찡그려지는 황태자의 표정.
“그 요정은 궁에서 옷을 주기 전까지 거의 헐벗고 다녔다고 하던데 동료? 푸하하, 농담도 잘하는군.”
‘이 새끼가…….’
그것을 본 타이니의 얼굴 역시 같이 찡그려지는데.
그의 표정을 살핀 황태자가 피식 웃더니, 다시 또 엉뚱한 말을 꺼냈다.
“아…… 그래, 서방은 문화가 좀 다르다고 했지? 뭐, 그렇다 쳐도 신기하군.”
“……?”
“그대의 말대로라면 곧 이 대륙에도 재앙이 터질 텐데, 여자를 전쟁터에 데리고 왔다는 거 아닌가? 혹시 그 재앙이 여자들의 싸움 같은 건가? 머리채 잡고 싸우는? 뭐, 남자 입장에서는 재앙이긴 하군.”
그 어처구니없는 말에 황태자의 주위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제야 타이니는 이 잡놈이 하는 말의 진의를 깨달았다.
‘이 미친 새끼가?’
이 상황에 어젯밤에 들었던 내용을 더해 짐작해 보자면.
“재앙이 벌어지리란 것을 믿지 않으신다는 말씀이시군요.”
“믿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이 평화로운 세상에서 갑자기 다른 차원의 마…… 뭐? 마귀? 마왕? 거기다 여자들까지 데리고 싸운다는데 어찌 믿겠나? 사랑싸움인가?”
“맞습니다, 허허허.”
“아하하, 태자 전하의 비유는 언제나 찰떡같으십니다.”
“푸하하하.”
그 노골적인 비웃음에 타이니의 눈매가 가늘어질 때.
“타이니, 뭐 하는 거야?”
“번역해 줄 필요 없어. 헛소리야.”
에스티나가 그 대화 내용이 궁금한 듯 물었고, 아르곤이 단호한 표정으로 대신 대답했다.
그러자 무언가 심상치 않은 상황을 직감한 루나의 눈초리마저 사나워지는데.
그때 타이니가 황태자를 보며 피식 웃었다.
“이 여자들이 태자 전하 만 명보다 더 잘 싸울 겁니다. 한번 시험해 보시겠습니까?”
“뭐라!?”
“제 ‘여자 동료’ 한 명이 태자 전하를 손쉽게 이길 수 있을 거란 말입니다. 체격을 보아하니 무술을 좀 익히신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아까 저와 장군들처럼 대련이라도 해 보시겠습니까? 제 동료는 손가락만 써서 상대해 드릴 겁니다. 아, 당연히 손가락 ‘하나’를 말하는 겁니다.”
“이익, 지금 나를 뭘로 보고!!! 오랑캐 주제에 나를 모욕해!?”
“차, 참으십시오, 전하. 이방인이 예의를 몰라…….”
황태자와 그 일행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찰나.
“태자, 뭐 하는 게냐!”
황제의 나직한 목소리가 대전을 울리며 황태자의 귀에 박혀 들었다.
그 순간 움찔하는 황태자.
‘호오, 마나?’
병색이 완연해 보임에도 제법 마나를 다룰 줄 아는 황제의 모습에 타이니는 눈에 이채를 띄었다.
그리고.
“타이니 경, 그대들이 말한 재앙에 대해 대신들 앞에서 자세히 설명하라.”
자신의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하는 황제의 그 말도 썩 마음에 들었다.
* * *
서대륙에서 벌어진 재앙.
괜히 일을 복잡하게 만들거나 시빗거리가 될 수 있는 시간 회귀에 관한 이야기는 일부러 뺐음에도 불구하고, 그 전말에 대한 설명은 제법 오래 걸렸다.
긴 시간이 지나 그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대전에는 한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잠시 후.
“사전에 모든 것을 예측하고 대비했음에도 수만이 죽어 넘어졌다? 그리고 그대와 같은 수준의 요술, 아니 대마법사도 사망했다……?”
신음처럼 나온 황제의 말에 타이니는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보탰다.
“저와 동료들 역시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렇게 온전히 극복한 재앙이 두 개, 미처 마무리 짓지 못한 재앙이 하나입니다.”
“그래, 세 개의 재앙. 그런데 이번에 우리 대륙에서 그 세 개의 재앙이 동시에 발생한다고?”
“예, 그렇습니다. 이제 7일…… 아니, 6일 하고도 한나절 정도 남았겠군요.”
타이니의 그 말에 황제와 장군들의 시선이 굳어지려는 찰나.
“아바마마, 설마 저 헛소리를 믿으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잡놈, 아니 황태자가 태클을 걸었다.
“……무슨 뜻이냐.”
“아무런 증좌도 없이 말로만 주장하는 재앙입니다. 그 말을 믿고 군사를 움직였다간 세상 사람들이 우리 제국을 비웃을 것이옵니다. 백여 년 전 서방의 요술쟁이가 이 나라에 혼란을 가져온 사실을 잊으셨습니까?”
요술쟁이가 가져온 혼란?
타이니가 그 말에 고개를 갸웃할 때.
“맞습니다.”
“태자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폐하.”
“적어도 증좌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심이 옳다고 사료되옵니다, 폐하.”
태자의 근처에 있는 관리들의 입에서 놈의 말에 호응하는 목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이것들이…….’
타이니의 인상이 구겨지려는 찰나.
“고작 7일도 남지 않았다는데, 굳이 증좌를 확인하란 뜻이더냐?”
“이방인의 말에 휘둘려 나라를 움직이지 말아 주십사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저 이 나라를 위하는 마음일 뿐이니, 폐하께서는 혜안으로 제 말을 살펴 주시옵소서.”
“살펴 주시옵소서.”
“살펴 주시옵소서…….”
황제를 향해 절을 하는 황태자의 태도와 관리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절실해 보였지만.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다른 대신들, 특히 무관들의 표정은 싸늘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황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만약 이방인의 말대로 재앙이 벌어진다면, 너는 그것을 어찌 책임지겠느냐?”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제 목숨으로라도 책임을 지겠사옵니다.”
그 순간.
“푸하하하!”
엎드린 채 슬쩍 자신을 노려보며 코웃음을 치는 황태자의 모습에, 타이니가 대놓고 폭소를 터트렸다.
자연히 태자와 같이 엎드려 있던 대신들의 고개가 그를 향해 돌아갔고, 이내 규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지금, 태자 전하를 비웃은 건가!?”
“감히 이방인이!”
“어찌 저렇게 무례할까!?”
“폐하! 저리 무례한 이가 진실을 말했겠사옵니까!?”
“맞습니다, 폐하! 감언이설에 속으시면 아니 되옵니다, 폐하!”
황제가 거기에 뭐라 답하기도 전에, 타이니의 싸늘한 목소리가 대전에 울려 퍼졌다.
“수십, 수백만의 생목숨이 사라질 텐데 그것을 고작 한 사람의 목숨으로 책임지겠다?”
“흐읍…….”
그가 의도적으로 일으킨 살기가 태자와 그 무리를 압박하자.
태자의 안색이 대번에 창백해졌고, 늙은 관리들은 그 순간 그 자리에 철퍼덕 자빠졌다.
“어처구니가 없군요. 이 얼마나 거만한 생각이란 말입니까. 태자 전하께선 목숨이 한 천만 개쯤 되나 봅니다?”
냉랭하다 못해 한기마저 느껴지는 시선이 그들을 압박하는 순간.
“무례하다!”
“폐하, 저 이방인을 이대로 두고 보시려는 겁니까!?”
“어디서 감히!”
직전에 타이니가 제국의 3대 고수와 대등하게 싸우는 것을 보았음에도 그에게 대거리를 하는 관리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꼬장꼬장한 얼굴에 욕심이 덕지덕지 붙은 늙은 관료들.
타이니의 눈에는 그들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앞뒤도 못 가리는 하찮은 것들이!!!”
– 이이이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고함에, 그에게 반발하던 이들의 안색이 일순간 파랗게 질렸다.
그리고.
“히이익!”
태자를 따르는 무리 가운데 그와 가장 가까운 곳에 부복하고 있던 늙은 대신들은 그 자리에서 오줌을 지렸다.
“정말로 앞뒤를 못 가리네.”
피식 웃은 아르곤의 한마디가 조용해진 대전에 울려 퍼질 때.
“그만하게, 타이니 경(Sir).”
헛웃음을 지은 황제가 자리에 어울리지 않은 서대륙어 존칭까지 붙여 가며 타이니의 시선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그가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태자 전하의 말을 받겠습니다.”
“음?”
“만약 강림이 거짓이라면, 제 목숨을 걸겠습니다.”
“하찮은 이방인의 목숨 따위……!”
그 말에 오기가 충천한 늙은 관료, 영의정 한재원이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듯 버럭 고함을 질렀지만.
“이 내가!”
다시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그 고함을 막았다.
“서대륙 최강의 기사 광휘의 이름이, 아직 제위도 잇지 못한 황태자의 이름에 모자란다는 말인가?”
타이니가 만들어 낸 침묵 속에서, 영의정을 응시하는 그의 목소리만이 고요하게 퍼져 나갔다.
이글거리는 눈에 담긴 섬뜩한 살기가 늙은 영의정을 압박하는 순간.
복마전이라 할 수 있는 황궁의 정치판에서 수십 년을 굴러먹은 영의정 역시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채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뒤이어 타이니는 시선을 옆으로 돌려 무언가 다시 말을 하려던 태자의 입마저 막아 버렸다.
그리고.
“당장 군대를 움직인다 해도 제때 막아 내기엔 이미 늦었습니다, 폐하. 제국이 즉시 움직이고 동대륙의 모든 나라가 호응한다 해도 막을 수 없습니다. 저의 제안은 그나마 벌어질 재앙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조차 하지 못한다면…….”
싸늘한 시선이 다시 한번 고요해진 대전을 훑었고.
“동대륙은 몇 달 안에 멸망하게 될 겁니다.”
그 선언과도 같은 말이 대전에 더욱 깊은 침묵을 불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