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373
373화. 검선
그는 본디 선 제국의 귀족 출신이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만 해도 전쟁이 그친 지 얼마 되지 않은 무렵이었기에, 제국 귀족가의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무술에 입문하고 성년이 되자마자 입대하는 것을 당연시 여겼다.
귀족 가문의 차남이었던 그도 자연히 그 길을 걷게 되었고, 어려서부터 일류 무공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다만 남들과 차이가 있었다면, 그가 지독한 둔재였다는 것이다.
뛰어난 형제들이 걸음마를 떼면서 깨쳤던 기공(氣功)을, 그는 성년인 열여섯이 되어서야 간신히 터득했고.
기재라 불리던 큰형님이 스물에 속성이 담긴 검기를 뿜어냈던 것에 반해, 그는 몸에 기를 두르는 수준에 그쳤다.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늘 수련에 열중하던 수련광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의 선천적인 자질은 그야말로 형편없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좋아했으니까.’
그저 검이 좋고 수련이 좋았기에, 다른 모든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형제들이 가문을 잇기 위해 싸우거나, 분가하여 돈을 벌거나, 권력을 잡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에도 그는 검을 한 번 더 휘둘렀다.
권력도, 부귀영화도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부질없는 신외지물들.’
그의 관심은 오직 검, 그 하나뿐.
그는 열여섯에 시작한 군역의 의무를 마친 스물여섯부터, 가문에 돌아가지 않고 바로 세상을 떠돌기 시작했다.
가문과 군대를 벗어나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서, 또 자신만의 검을 닦기 위해서.
그리고 세상은 그런 그의 호기에 잔혹한 현실로 대답했다.
대륙 전체를 휩쓸었던 전화의 불길이 꺼진 지 몇 년 지나지 않은 세상은 여전히 피폐했고, 사람들의 마음은 그 이상으로 악의에 차 있었다.
군대가 제 역할을 못 하니 도처에 도적이 창궐하고 마물이 들끓었다.
한 번은 우연히 강도를 만난 약자를 도왔는데, 그 약자한테 도리어 검을 도둑맞았다.
또 한 번은 길을 막고 통행료를 요구하던 도적을 전부 때려잡았는데, 나중에 그들이 피죽조차 먹기 힘든 가족을 위해 나선 난민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충격이었지.’
귀족 가문에서 귀하게 자라 군대에서도 장교로만 지냈던 그로서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험난한 세상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그는 여태 매달렸던 검에서 눈을 돌려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 이건 뭔가 잘못됐어.
미약한 힘으로나마 노력해서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그때부터 발길이 닿는 대로 곳곳을 떠돌며 남을 돕는 일에 나서고 악인을 징벌했다.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느새 ‘검협(劍俠)’이라는 간지러운 별호가 사람들 입에 종종 오르내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협행에 바빠 열심히 수련하지 않았는데도 무공이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영원히 넘을 수 없는 벽 같았던 속성 개화의 벽을 마흔 즈음에 넘어섰고, 쉰 즈음에는 검기(劍氣)도 뽑아낼 수 있게 되었다.
실력에 비해 과분하게도 인자무적(仁者無敵), 일대검협(一大劍俠)이라는 별호가 붙었던 예순 즈음에는 속성과 검기를 조합한 영혼검기를 터득했고.
칠순에는 감각권 내에서만 힘을 발휘하는 경지를 넘어서 꿈에나 그리던 검강(劍罡)에 입문했다.
그때쯤 그는 세상의 이면에 눈에 보이지 않는 흐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으흐흑. 감사합니다, 어르신.
–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협객님.
–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그저 세상을 조금이나마 바꾸고자 했을 뿐인 자신의 행동이, 알 수 없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성장시키고 있었음을.
그리고 그저 둔재인 줄로만 알았던 자신에게, 그 흐름을 막연하게나마 느끼고 이용할 수 있는 재능이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오직 남을 위해 베푸는 것으로만 생각했던 행위 자체에서 이미 과분한 보상을 얻고 있었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스스로 미련을 버렸다 생각했던 검술이, 그때부터 오히려 빠르게 발전했다.
동년배의 무인을 찾아보기 힘든 나이인 80세 즈음에 그는 100대 고수 중 최고 수준이라 불리기 시작했고.
90세 즈음에는 남부 호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사령교(邪靈敎)를 박살 냄으로써 혼세경에 이른 자신의 무위를 세상에 각인시켰다.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
남들은 이미 저승을 가고도 남았을 나이에 발전을 거듭하는 그의 모습에 온 세상이 놀랐다.
그리고 당시 대륙에 존재하던 혼세경의 무사들, 12대 고수를 모두 꺾은 100세 즈음에는, 과분하게도 천하제일검이라는 이름에 검선(劍仙)이라는 별호까지 더해졌다.
이미 혈육도 지인도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 온 대륙에 각인시킨 이름과 말년에 성취한 경지만으로도 충분히 뿌듯한 삶이었다.
–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는 그런 생각으로 인생의 끝을 준비했다.
그런데…….
그 후로 벌써 백 년이 지났다.
* * *
“하아…….”
흰 수염을 기른 노인이 먼바다를 내다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그 망망대해는 말 그대로 ‘끝없는 바다’라 불리는 마경이었다.
서대륙의 서쪽 끝에는 ‘끝없는 산’이라는 것이 존재해 사람의 발길을 막는다면, 동대륙의 동쪽에는 저 ‘끝없는 바다’가 뱃길을 막는다.
눈앞에 보이는 망망대해는, 그가 무료한 삶 속에서 극복해 보기로 한 최종적인 목표였다.
‘지평선과 수평선이 보이고, 그 아래로 배도 사람도 가려진다. 이 세상은 둥근 게 틀림없어. 그런데…….’
그 가정이 옳다면, 저 바다를 건너고 건너다 보면 결국 서대륙의 서쪽 땅이 나와야 했다.
하지만 섬과 섬을 경유해 가며 한없이 달려 보아도, 결국에는 발 디딜 바위섬 하나 없는 바다뿐이었다.
이는 그가 직접 등평도수의 수법으로 한 달 넘게 바다를 질주해 본 끝에 얻은 결론이었다.
서대륙으로 향하는 배편의 속도와 이동 거리를 추정해 보았을 때, 그 정도면 이미 신이 서대륙에도 닿고도 남아야 했는데 말이다.
– 끝없는 바다는 말 그대로 끝없는 바다입죠.
– 어느 거리 이상 나가면 물속에 고기도 살지 않습니다, 어르신.
이해가 가지 않는 이적으로 가로막힌 공간.
“하…….”
생각할수록 자꾸 한숨만 나오는 장벽이었다.
그는 끝이 안 보이는 기나긴 말년을 보내고 있었다.
그나마 조금씩 늘어나던 주름도 또다시 경지를 반쯤 벗어났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부터는 생기지 않았다.
더 이상 세상에 미련이 없다 싶을 때 신화경에 반 발짝 걸치게 된 탓이었다.
내친김에 전설에나 나오는 신화경에 도전해 보고자 했다.
그리고 스스로의 재능에 자신이 없는 그는 선현들의 흔적을 좇았다.
앞서 신화경에 올랐다고 전해지는 창천검제(蒼天劍帝)나 무적권마(無敵拳魔)의 흔적을.
그답지 않게 고집을 부려서 선 제국 황실과 호 나라의 왕실에서 보관 중인 그들의 유물도 살펴보았지만, 특별히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 후에는 전해져 오는 전설을 따라 선현들의 행적을 좇아 보기도 했지만, 수십 년에 걸쳐 그가 찾은 단서라고는.
–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자, 신화에 도전할 자격이 생긴다.
……라는 창천검제의 글귀 하나.
그것만이 신화경에 오르는 길을 알려 주는 유일한 단서였다.
– 불가능을 극복한다.
그리고 그 글귀를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저 끝없는 바다였다.
이미 반쯤 경지에 닿았는데,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도저히 그 이상으로 넘어가질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새삼스레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 것이다.
‘업(業)이 나를 밀어 올리는 것도 여기까지라는 것인가. 딱 한 발짝, 아니 고작 반 발짝이 부족한데 그 디딜 곳을 모르겠구나.’
대체 옛 선현들은 어떻게 신화경에 올랐는지 궁금하고 또 궁금했지만, 답을 주는 이는 없었다.
예전엔 새로운 10대 고수가 탄생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혹시나 영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찾아가서 겨뤄 보기도 했지만, 그것도 이제는 지칠 뿐이었다.
더구나 조금씩이나마 깊어진 경지는 길었던 삶의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 주었으니.
‘이제는 정말 갈 날이 다가왔다.’
웃기는 것은, 말년을 준비할 때는 몰랐던 회한의 감정이 이제야 엄습한다는 것이었다.
끝내 닿지 못한 신화경의 경지.
‘욕심이야. 욕심.’
하지만 말년에 생긴 욕심은 차마 떨쳐 낼 수 없는 아쉬움으로 남아 그 삶의 끝에서 발목을 잡고 있었다.
문득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니, 이제 자신은 대륙의 동쪽 끝 요 나라의 끄트머리에서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는 노인일 뿐.
‘역시 내 못난 무재(武才)의 문제인가.’
사는 동안 부단히 쌓아 온 업(業)의 힘을 통해 과분한 경지에 오른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가.
허탈한 마음만 가득한 그때.
– 쩌저적.
그의 초월적인 감각이 머나먼 곳에서 갈라진 공간, 차원의 틈을 인식했다.
“……뭐?”
세상을 이루는 굳건한 벽이 갈라지면서 일어난 진동.
평생 생각도 해 본 적 없는 현상에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건,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그 순간 그는 낡아빠진 애검을 들고 그 차원의 균열이 열린 장소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 * *
파바박.
한달음에 백 보의 거리를 단축하고, 몇 번의 도약만으로 산봉우리를 넘는다.
산과 들을 일직선으로 넘으며 한 줄기 바람이 되어 질주하는 그의 움직임은 이미 사람이라 보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하!”
오랜만에 솟구친 호기에 하늘 높이 뛰어오른 뒤, 옆을 지나치는 새들이 화들짝 놀라 흩어지는 것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도 다시 허공을 밟고 질주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니.
그는 단 몇 시간 만에 요 나라 국토 길이의 절반이 넘는 거리를 횡단하는 기적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이내, 그런 그의 감각에 소름 끼치는 마기가 느껴졌다.
“웬 마물들이?!”
먼 곳의 하늘을 새까맣게 메우고 있는 괴물 곤충들의 떼.
그의 안색이 심각하게 굳어지던 순간, 뒤이어 눈에 띈 것은 그 마물들이 모여 있는 공간을 한참 벗어나 괴상한 모습으로 질주하는 새하얀 피부의 인간들이었다.
‘서대륙인들?’
기절한 듯 늘어진 큰 체격의 남자와 거의 헐벗은 여자가 보이지 않는 수레를 탄 듯 지면 위 허공을 미끄러지듯 나아갔고.
갈색 머리 백인 남자와 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곤충들과 정신없이 전투를 이어 가며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남자가 검을 휘두르면 검강과 함께 불길과 냉기가 동시에 뿜어져 나오거나 기이한 공간 굴절 현상이 일어났고.
‘요술쟁이?’
보랏빛 머리 여자가 작은 단검을 휘두르면 길게 뻗어 나간 검은 빛줄기가 곤충들을 직격하여 우수수 떨어트렸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계속해서 추격하는 사람 반만 한 사마귀 하나.
– 크하하하!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가 보기에도 엄청난 속도를 자랑하며 앞발의 낫을 휘두르는 사마귀가 정신파로 의사 표현까지 해 가며 그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마물이 사람처럼 감정과 의지를 표현하다니?
‘대체 이게 무슨?’
눈에 보이는 광경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으니.
적어도 쫓기는 쪽은 인간, 쫓는 쪽이 괴물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저 흉흉한 기세와 말도 안 되는 속도는 대륙 10대 고수와도 비길 만하니.
“그냥 둬서는 안 될 마물이구나.”
마음을 굳힌 순간, 날아가던 그의 손에서 떠난 애검이 찬란한 별의 힘(罡)을 품고 쏘아졌다.
목표는 사람을 쫓고 있는 괴물 사마귀.
번쩍.
콰아아아아아앙!
– 웬 놈이냐!?
그의 공격은 타오르는 암흑 검강을 두른 사마귀의 앞발에 막혔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것.
“흥!”
다시 허공을 날아 자신의 손으로 돌아온 애검을 잡은 검선이, 도망치던 서방인들의 뒤에 착지하며 그대로 검을 내리그었다.
무량검(無量劍), 천지직단(天地直斷).
번쩍.
거대한 갈색의 검강이 일순간 공간을 어그러트리며 그 범위에 걸쳐 있는 모든 것을 세로로 베어 냈다.
그를 경계하며 낫을 세우던 사마귀의 앞발 하나가 그대로 두 동강이 난 순간.
‘고작 앞발 하나?’
생각보다 미미한 성과에 검선의 인상이 살짝 찡그려졌지만.
놀란 것은 적이 훨씬 더했다.
“끼에에엑!”
– 어떻게?!
파아아앙.
파공음이 들릴 정도로 빠르게 물러서는 사마귀.
그 속도는 검선조차 헛웃음을 흘릴 정도였다.
“도망치게 둘 것 같으냐, 마물!”
그가 그대로 놈을 쫓으려는데.
“두셔야 합니다, 어르신. 저놈이 도망치는 곳에는 비슷한 놈이 몇 놈 더 있습니다. 하급 마물은 셀 수도 없고요.”
“하?”
사마귀에게 쫓기던 갈색 머리 백인의 입에서, 유창한 동대륙어가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