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375
375화. 둘이나…….
“마음은 알겠지만, 회복부터 해야 해. 너도 그렇고, 특히 수호자님이.”
아르곤이 당장이라도 남부로 향하려고 하던 타이니를 말렸다.
그 차분한 목소리가 머리끝까지 혈기가 치솟아 있던 타이니를 진정시켰다.
하지만.
“……그동안 대학살이 일어날 거야. 빌어먹을!”
그럼에도 조급함이 완전히 가시진 않은 듯 입술을 질겅질겅 씹던 그는 이내 고개를 홱 돌려서 검선을 바라보았다.
“영감님!”
“여, 영감?”
“바로 남부로 갈 수 있겠습니까? 아무래도 그쪽에서부터 이미 난리가 난 거 같은데, 원군이 필요합니다. 그것도 칠죄종을 감당할 수 있는 원군이!!”
“허허. 성격 참 급해 보이긴 하네만, 당장 눈앞에 보이는 재앙도 정리하지 않고 다른 곳을 보라고 하는 건가?”
동대륙 남부에는 3왕국이 있었다. 각기 대륙 10대 고수 중 일인을 품고 있는 호(護), 강(姜), 연(燕) 나라가.
그리고 일행 역시 이미 그곳의 왕실들을 한 번씩 방문하여 강림에 대한 경고를 한 바 있다.
그런데도 칠죄종이 강림했다.
“최악의 경우에는 세 왕국의 군대가 모이기도 전에 각개 격파당하거나, 모이더라도 한곳에서 몰살당할 위험이 있습니다. 칠죄종이 강림한 이상, 다수의 군대가 아니라 소수의 최정예가 나서서 놈들을 암살하는 것이 희생을 줄일 수 있는 최선의 길입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늦는다면 도움을 줄 수 있는 정예들, 그 자존심만 센 10대 고수 셋도 다 죽고 말 겁니다!”
자존심만 센 10대 고수.
그 말에 검선이 쓴웃음을 지었지만, 더는 고개를 젓지 않았다.
“이 나이에 암살? 하……. 그 대상이 지금 차원을 뒤흔든 괴물만 아니었다면, 자네에게 분노를 표했을 걸세.”
그 말에 일행의 눈동자가 동시에 커졌고, 타이니가 다그치듯 물었다.
“그건 간다는 말이겠죠?”
“정확히 위치가 어디라고 했지?”
“저희가 아는 좌표와 이곳 지도를 합쳐 본 결과, 호 나라의 남부 밀림 지대일 것으로 예상됩니다.”
“……잠도 줄이고 달려야겠군.”
“에스티나가 깨어난다면 날아갈 수 있을 텐데.”
“날아가?”
“정령이 있습니다. 저희가 대양을 건널 때 타고 온 거대한 독수리 정령이.”
그 말에 검선이 놀란 눈으로 다시 일행을 훑었다.
“신조의 소유자라는 말인가? 그것도 그렇게 큰?”
“신조가 아니라 정령…… 하, 됐습니다. 어쨌건 당장 그걸 타고 가긴 어렵습니다.”
“수호자님이 일어난다 해도, 회복이 느리시니까…….”
“내가 도우면 돼. 대략 이틀이면…….”
타이니와 아르곤이 남부로 이동하는 방법에 대해 의논하던 그때.
“차라리 내가 달려가는 게 빠르겠어. 이곳에 창궐한 벌레들의 군세는 군대가 막아 주길 바라야겠군.”
검선은 이틀 뒤에 카일룸을 타고 날아가는 것보다 당장 달려가는 길을 택했다.
타이니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정령술사도 아닌 양반이 그 거리를 달려가겠다니?
“그게 가능합니까? 거리가…….”
“당연하지. 자네도……. 어? 설마 자네, 경공을 모르나?”
놀란 듯한 검선의 표정에 타이니가 바로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저도 가능합니다.”
경공이 뭔지는 몰라도, 월랑의 걸음이라면 하루 안에 이 대륙을 종단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 그렇겠지. 그러니 먼저 가겠다는 말일세.”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검선의 모습을 보니, 이 와중에도 궁금하기는 했다.
‘대체 경공이 뭔데?’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따져 물을 시간이 없었다.
“그럼 저희들도 에스티나가 회복되는 대로 합류하겠습니다.”
“좋아. 그렇다면…….”
그렇게 그들의 뜻이 하나로 수렴되려던 순간.
– 찌이이이이잉!
또 다른 차원의 울림이 다시 한번 타이니의 감각을 자극했다.
“이런 X발!! 이것들이 진짜 작정했어!!”
“서쪽?”
그와 같은 것을 느낀 검선 역시 얼굴이 확 굳어지며 눈을 크게 떴다.
“선 제국 쪽에도 이미 칠죄종이 강림했어. 이런 젠장! 어쩌지? 어찌해야 하지?”
타이니의 중얼거림이 일행을 공황 상태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나도 설명 좀. 상황 급해?”
동대륙어를 못하기에 여태 대화에서 열외되어 있던 루나가 끼어들 정도로.
“그, 그게…….”
그에 타이니가 이 상황을 설명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말끝을 더듬는데.
“우리 X 됐어.”
아르곤이 상황을 명쾌하게 정리해서 루나에게 전해 주었다.
“뭐?!”
“칠죄종 둘이 강림했어. 이곳만 우리가 막았나 봐.”
“그걸, 어떻게 알아?”
“몰라. 타이니가 그렇다니까.”
“그럼 인정.”
그의 간단한 설명이 끝나자 루나 역시 긴장한 표정으로 타이니를 바라보는데.
“어쩌지? 영감님, 어쨌으면 좋겠습니까? 서쪽 아니면 남쪽, 어디부터 가실래요?”
당혹스러운 표정의 타이니는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검선도 마찬가지.
“허어…….”
루나의 입장에서야 차원의 장벽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그 충격이 두 초인을 완전히 혼란에 빠트린 것 같았다.
그래서 나섰다.
“난, 영감 그림자에 숨어 따라갈게. 마법쟁이랑 같이. 넌 올케가 회복되면, 둘이서 다른 곳으로 가.”
그 말에 타이니가 대답하기도 전에 아르곤이 살짝 상기된 얼굴로 스스로를 가리키며 물었다.
“나? 난 왜?!”
화들짝 놀라며 되묻는 그였지만, 그러면서도 조금은 기뻐 보이는 꼴이 조금 이상하기는 했다.
“너 날 수 있잖아. 카일룸만큼은 속도 안 나도, 쫓아오는 것, 가능하잖아?”
“……그, 그야 그런데.”
“우리 훈련한 거, 써먹어야 할 때야. 성공할지는 몰라도.”
“……그래.”
그 말에 금세 시무룩해지는 것도 루나에겐 좀 이상해 보이기만 했다.
한편 타이니는, 아르곤의 반응이야 어쨌건 하나밖에 없는 핏줄의 안위가 더 신경 쓰였다.
“……루나, 괜찮겠어?”
“응. 들어 보니, 동생 아니면 저 영감, 둘 중 하나는 있어야, 칠죄종 막는 거 아냐?”
“그럴 것 같기는 한데…….”
“그럼 이렇게 나누는 게 맞아.”
루나의 말이 모처럼 끊어지지 않은 완벽한 문장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 깔끔한 결론은, 잇따른 차원의 흔들림으로 머릿속이 혼란해졌던 타이니와 검선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다만 루나의 말을 통역해서 전달받은 검선의 얼굴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그림자에 숨어? 그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얘는 됩니다.”
“허어…….”
아무리 그녀가 혼세경의 고수라고 한들, 검선의 상식으로는 그림자에 숨는 괴상한 술수를 쓴다는 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러자 그 말을 전달받은 루나가 그가 보는 앞에서 그 술수를 몸소 보여 주었다.
스슥.
검선의 발밑에 진 그림자 속으로 사라진 루나.
그에 검선의 안색이 일변할 때.
“어때? 영감, 이제 믿어?”
“허어.”
“윽?”
검선의 그림자 속에서 얼굴만 쏙 내민 채 그의 반응을 살피던 루나가, 갑자기 표정을 구기더니 다시 그림자로 숨었다.
“허허, 생각보다 더욱 대단한 처자로군. 엄청나.”
검선이 정신없는 와중에도 루나의 능력에 감탄을 표했고.
결국 일행은 그렇게 두 편으로 나뉘어 이동하기로 했다.
“그럼 몸조심해. 절대 목숨 걸지 말고. 일단은 정찰을 위해 나누는 거야. 알지?”
“그걸 네가 말하냐.”
“아무튼 나처럼 무모한 짓 하지 말라고.”
“알았어.”
“그래, 사실 너야 걱정 안 되는데…….”
그리 말하는 타이니의 시선이 루나에게 향하는데.
“나도, 약속. 목숨 안 걸어. 여긴 우리의 전장, 아니야.”
그 단호한 표정이 그를 조금이나마 안심시켰다.
“자네들, 무슨 얘기를 하는 건가?”
“……있습니다.”
검선에게 조금 미안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럼 가세나.”
파아아아앙.
검선의 몸이 쏘아진 화살처럼 단숨에 허공을 향해 날아가는 것을 보는 순간.
그 뒤에 남겨진 타이니와 아르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저, 저게 뭐……?”
“비행 마법?”
아마도 그림자 속에 있을 루나 역시 식겁했을 것이다.
그리고 타이니의 빛나는 눈동자가 검선 주변의 마나 유동을 복기하는 동안.
“그, 그럼 나도.”
[飛行(비행)] [加速(가속)]허공에 연달아 글자를 그려 낸 아르곤의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점차 가속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좀 전의 검선의 비행(?)이 안겨 준 충격 때문인지 그보다 한참 느려 보이기만 했다.
‘경공이라……. 이것도 배워 두는 게 낫겠는데?’
타이니에게 문화적인 충격을 남겨 놓은 채, 일행은 그렇게 둘로 갈라졌다.
* * *
타닥타닥.
“으음, 이것도 아닌데.”
타오르는 모닥불 옆에서 연신 폴짝거리며 뛰어 대는 타이니.
“영감이 감각을 차단해 놓지만 않았어도 몸 안에 흐르는 마나 패턴으로 뭔가 알아낼 수 있었을 텐데.”
무언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연신 폴짝거리는 그 모습은, 광휘의 기사나 서방제일검 같은 거창한 이명에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그 뒤로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오, 이 정도면 월랑한테도…….”
수많은 시도 끝에, 타이니의 몸은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연기처럼 변해 스르륵 움직이게 되었다.
폭풍 같은 바람을 휘감고 마치 화살처럼 쏘아지던 검선의 움직임을 독자적으로 해석한 괴상한 이동법.
하지만 타이니는 그것으로도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고.
그때.
“으음…….”
타이니만의 마법(?)으로 만들어 놓은 예의 그 움막 안에서 나지막한 신음이 들려왔다.
“어!?”
그 연기 같은 움직임으로 빠르게 에스티나의 옆으로 다가간 타이니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볼 때.
껌뻑껌뻑.
에메랄드 같은 눈동자에 차츰 초점이 돌아오는가 싶더니, 그녀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다.
“헉! 타이니?!”
“괜찮아, 티나. 정리됐어.”
“어? 어, 어…….”
잠시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던 에스티나가 이내 자연스레 타이니가 내민 손을 잡고 부축을 받았다.
그러다.
“……루나 양은? 아르곤 경은?”
“그게, 설명할 일이 많아.”
그 말에 에스티나의 눈동자가 커지며 파르르 떨렸다.
“설마……?”
“아, 아냐! 그런 거 아냐!!”
“죽은 거……?”
자연스레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본 타이니가 황급히 손을 내저어 보는데.
이미 또르르 흘러내리기 시작한 눈물은 막을 수가 없었다.
“아냐! 안 죽었어! 절대!”
“아, 아냐?”
“그래. 들어 봐. 어떻게 된 거냐면…….”
식겁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타이니는 긴 이야기를 이어 갔다.
모든 얘기를 듣고 난 뒤,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에스티나가 파리한 안색으로 뒤늦게나마 미소를 지었다.
“거음선?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이네. 그분한테 신세를 졌구나.”
“그게 이름은 아니…….”
검선에 대해 설명하려던 타이니는, 이내 자신도 그 노인의 별호가 아닌 이름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황급히 말을 돌렸다.
“흠, 흠. 그래, 맞아 큰 빚을 졌지.”
“아무튼 다행이다.”
타이니는 순간 칠죄종 둘이 강림했는데 이게 다행이라 할 수 있는 건가 싶었지만.
“……그래.”
이내 그것이 동료들의 안부를 말하는 것임을 이해하고는 뒤늦게 미소를 보였다.
물론, 그녀에게 전해야 할 말을 잊지는 않았다.
“네가 회복하고 나면 우리가 서쪽으로 가야 해. 그나마 먼 쪽이라, 그들이 남쪽으로 갔으니까.”
“……그래.”
에스티나는 살짝 망설이는 듯 대답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장생족인 엘프의 치명적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늦은 회복력.
그것을 떠올린 탓에 그녀의 안색이 어두워지는데.
“괜찮아. 내가 도우면 이틀 안에 회복할 수 있어.”
“어? 아……!?”
“그래, 전생에도 썼던 방식. 그것의 훨씬 업그레이드된 버전이라고 할 수 있어.”
우우웅.
타이니는 손바닥을 에스티나의 어깨에 올린 채 주변의 마나를 끌어들였다.
동시에 피어오르는 노을빛 오러.
그에 에스티나가 본능적으로 움찔했다.
이질적인 타인의 마나가 자신의 몸에 스며드는 일에 저도 모르게 거부감을 느낀 것이다.
아무리 전생의 기억을 보았다 한들, 그것이 자신을 회복시킨다는 건 여전히 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심지어 현생에서는 그러다가 기억 동화 현상까지 일어나지 않았던가.
게다가 지금 타이니의 손에 피어오른 것은.
“오러?!”
그냥 마나도 아닌 ‘오러’였다. 절대 치료에 쓰일 수 없는 파괴의 권능.
하지만.
“저항하지 마. 이게 훨씬 효율적이야.”
타이니의 말이 그 본능적인 방어를 허물어트렸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전신에 얇게 펼쳐 내서 동화시킨 오러로 그녀의 근육과 신경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우우웅.
몸에 쌓인 피로를 풀어 냄과 동시에 강제로 혈류와 마나를 순환시켜 회복력을 빠르게 만드는 수법.
얼마 전 죽기 직전의 실버 팽을 되살렸던 그 기이한 수법이, 지금 에스티나의 몸을 대상으로 재현된 것이다.
물론 막대한 재생 능력을 가진 수인족에 비해 엘프족에게 적용되는 효과는 미약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대상을 죽음 직전에서 건져 내는 게 아니라 단지 피로를 회복시키는 것뿐이니, 그것 또한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물론 당시의 실버 팽보다 에스티나의 마나 수용력이 훨씬 크다는 것은 다소 불리한 조건이겠지만.
“전부 회복하는 데 아마 이틀이 걸릴 거야. 육체에 타격도 씻어 내야 하니까.”
“……으.”
전생을 생각하면 이조차도 경이적인 발전이나 다름없었기에 타이니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런데.
우웅.
“으, 윽…….”
에스티나의 얼굴이 일순간 붉어지는 것이 심상치가 않았다.
“티나, 왜 그래?”
즉시 오러를 거둔 타이니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부축하는데.
“아, 아냐. 괜찮아. 그냥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어?”
“회복 속도가 빨라진 만큼 심장도……. 그리고 전신에 자극이 되니 조금…….”
“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이 정도 반동을 느끼는 건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몸에 너무 부담될 것 같으면 말할게. 그냥 계속해 줘.”
“응.”
그래, 분명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는데.
“아윽…….”
그 비음 섞인 신음과 눈앞에 보이는 에스티나의 모습이, 이상하게 그의 심장 박동까지 빠르게 만들고 있었다.
‘집중! 집중!!’
스스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낀 타이니는 억지로 신체를 조율해 가며 에스티나의 회복에 집중했다.
오러로 그녀의 몸을 샅샅이 훑…….
‘아냐!! 회복!’
빠악.
“크…….”
헛생각이 드는 순간, 타이니는 주먹으로 제 얼굴을 후려쳤다.
에스티나가 화들짝 놀라 돌아볼 정도로.
“타이니?!”
“씁, 괜찮아. 집중이 안 돼서.”
“어……. 그래.”
당혹스러워하는 에스티나의 얼굴을 보며 타이니는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칠죄종이 둘이나 강림했다. 잡생각 할 때가 아냐.’
막막하게 느껴지는 상황을 다시 한번 상기하는 순간, 심장은 거짓말처럼 평상시의 박동 속도를 되찾았다.
다만, 그렇게 집중하느라 그는 자각하지 못했다.
예전의 그였다면, 이 정도 자극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결코 나쁜 징조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의 환경 탓에 갖게 된 여자에 대한 병적인 거부감과 트라우마.
보이지 않는 그 영혼의 상처가, 어느샌가 아물어 가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