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378
378화. 성물이 있다고?
타이니가 제안한 계획의 실현 가능성을 떠나, 지금 그들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선 제국의 장수들이 현 상황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서일산을 비롯해 타이니의 말을 믿기로 한 이들마저 그럴 정도니, 그렇지 않은 이들의 분위기는 더욱 시원찮았다.
하지만 그에겐 아주 간단한 해결책이 있었다.
– 지배자를 영접하라!
“히이이익!”
까마득한 상공에서 마물의 군세를 내려다본 연남현이 그대로 카일룸의 등판 위에 주저앉았다.
구름 위를 나는 그 아찔한 높이도, 마족 군단이 진군하는 비현실적인 광경도.
보는 이들에겐 너무나도 생생한 위기감이 되어 피부에 와닿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 옆에 있던 서일산도 마찬가지였다.
연신 불어나는 마족, 정확히는 적에게 홀려 버린 야수들과 인간들의 모습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잠시간의 침묵 뒤에.
“고, 백.”
입술을 질끈 깨문 서일산이 에스티나를 향해 그리 말하는 순간, 연남현이 횡설수설하며 허튼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대, 대장군? 이 상황에 무슨 고백을 하신다는 겁니까? 아무리 저 요정이, 아니, 요정님이 예…….”
“닥치게. 돌아가자는 서대륙 말이니까.”
“예……?”
타이니 일행의 말에 적극적으로 호응해 온 측의 대표에게나 그에게 반대해 온 측의 대표에게나, 직접 눈으로 본 마족의 군세는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자연히 그들이 즉시 본대로 돌아왔을 때, 곧바로 아무런 잡음 없이 논의가 시작되었다.
“진짜 재앙이다!”
좀 전까지 반신반의하던 이들도, 그들의 대표 격이던 서부 사령관 연남현이 파래진 안색으로 연신 소리치는 걸 보고는 심각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타이니의 계획에는 크나큰 문제가 있었다.
“그러려면 현혹을 버틸 강자가 있어야 하고, 마족들이 속아 줘야 하고, 대단위의 군대에 현혹 방비를 걸어 줄 신성……인가 하는 힘이나 요술이 있어야 하는 건데…….”
서일산의 어두워진 얼굴을 지켜보는 타이니 역시 눈빛에 근심이 어려 있었다.
“진짜 없슴까? 흑마법 방비할 방법?”
끙.
“흑마법, 사술을 쓰는 악당은 방비할 것도 없이 그냥 쳐 죽이는 게 우리 대륙의 도리요.”
그에 타이니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도 자신의 제안이 무리한 계획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잡귀를 쫓는 도사라는 작자들이 있긴 합니다만, 그들이 초인경이나 혼세경의 마물들을 감당한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동대륙이라도 몬스터는 있을 터인데, 흑마법을 방비할 방법이 아예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젠장, 아르곤이 있었다면 달랐으려나? 아니, 아니야. 지금은…….’
그럼에도 타이니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전 결과부터 상정한 뒤 그에 따라 밀어붙이는 데에 익숙함다. 그래서 나온 계획인 건데, 혹시 그 과정에 해결책을 제시해 줄 사람이 있나 해서…….”
언제나 스스로 정해 놓은 목표를 향해 거침없이 돌격하며 살아온 인생.
그 과정에 문제가 생겨도 힘으로 해결해 왔고, 때로는 똑똑한 동료들이 다른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이 없을까 해서 던진 말이었다.
그런데 서일산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그에 타이니는 조심스레 말을 보탰다.
“……그게 안 된다면, 군단장만 따로 떼어 낼 방법 생각난 사람 없슴까? 이대로라면 시간이 지날수록 몽마 군단의 규모는 커질 겁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인간의 군대 역시 그 안에 포함될 수 있슴다. 여러분들도 예외는 아님다.”
“…….”
주변을 둘러보며 계속 이어지는 말에 막사 안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신화경의 괴물을?”
“그것도 군세의 중심에 있는 괴물을? 끄응…….”
마족의 군대를 실제로 보지 못한 참모들조차 연거푸 신음을 흘릴 뿐이었다.
“암살이라도……?”
“헛소리 말게. 그럼…….”
이윽고 참모들이 토의를 시작했지만, 대충 들어 봐도 이렇다 할 방법이 나오지 않는 듯했다.
자연히 타이니의 안색도 굳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역시, 잘 안 되는 거야?”
타이니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자, 뒤에 있던 에스티나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 하, 성물이라도 가져왔어야 했나.”
“아무도 허락 안 해 줬을 거야. 쓸데없는 가정으로 자학하지 마.”
그녀의 위로에도 타이니의 얼굴은 펴질 수가 없었다.
“얘네들 흑마법에 대한 대비책이 아예 없어.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해.”
“그 정도야?”
“이대로라면 색욕을 어떻게 따로 유인한다 해도 군대 자체가 쉽게 와해될 거야. 아예 전투가 성립하지 않을 수도 있어. 일방적으로 홀리거나 학살당하겠지.”
그 말에는 에스티나의 안색도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내가 우리 대륙으로 돌아가서 국왕들을 설득해 볼까? 성물을 빌려 달라고 말이야. 해결책이 없다면 그렇게라도…….”
에스티나가 답답한 마음에 가능성 없는 이야기를 꺼내 보는데.
그때, 엉뚱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성물? 혹시 신의 힘을 가진 물건을 말하는 겁니까?”
타이니의 말을 통역해 줬던 이후로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그의 주변을 얼씬거리던 통역.
그의 말에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통역의 어조에서 무언가 긍정적인 느낌을 받았으니까.
“혹시 동대륙에도 성물이 있습니까?”
“그게 성물인지는 모르지만, 그 비슷한 취급을 받는 유물에 대한 소문은 있습니다.”
“……무슨?”
“저희 대륙의 전설, 고대에 신화경에 올랐다는 두 신인(神人)이 남겨 놓은 유물들이 있지요.”
“아, 사람…….”
그 말에 한순간 기대에 찼던 타이니의 고개가 팍 꺾이는데.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괴물을 쫓는 효력을 가졌다고 들었습니다.”
이어진 그 말에는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빛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그래도 밑져야 본전…….”
그리고 둘의 의견이 일치하는 순간.
“대장군!”
타이니의 높아진 목소리가 급히 서일산을 찾았다.
그런데.
“아, 창천검제와 무적권마의 유물 말입니까? 저도 듣기야 들었습니다만.”
서일산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신화경의 절대자들이 남긴 유물. 그것들 때문에 한 번씩 대륙 전체에 피바람이 불어닥쳤지요.”
“음?”
“이백 년 전의 대전쟁도 그 무적권마의 유물 때문에 시작된 것이었으니까요. 다만 근방의 괴물을 쫓는 것 말고는 별다른 효력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진 지가 백 년이 넘었습니다. 그저 그들이 하늘로 등선할 때 가지고 있던 무기에 서린 미미한 효과라고요. 그런데…….”
“그게! 그 효과가 필요한 겁니다!”
“심지어 검은 부러졌고, 권갑은 한쪽밖에 안 남았다고…….”
“상관없습니다. 그걸 무기로 쓸 게 아니니까요. 그 괴물을 쫓는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가 중요한 겁니다!”
타이니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에 서일산은 고개를 갸웃하는가 싶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반경만 1리가 훌쩍 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괴물을 해치진 못하고 그냥 접근만 막는 것이 전부라 합니다. 그래서 본 제국에서는 선황 폐하들의 사당을 지키는 상징적인 용도로…….”
1리? 그게 얼마나 큰 단위더라?
타이니의 머릿속이 오랜만에 팽팽 돌아갔고, 이내 오래된 기억 속에서 필요한 정보를 기어코 찾아냈다.
만약 그 기억이 맞는다면.
‘일곱 성물과 비슷해!’
여전히 그는 인간이 스스로 신성을 취했다는 동대륙의 전설을 온전히 믿지는 않았지만, 그 생각조차 이 순간만큼은 머릿속 한편에 치워 두었다.
“맞아요! 그것들이 필요함다!”
그것들이 서대륙의 일곱 성물처럼 반경 500m, 직경 1km의 범위만 커버해 준다면, 초월무구가 없는 동대륙의 수많은 오러유저들을 영혼살이나 매혹의 위협에서 보호해 줄 수 있다.
물론 범위나 전투 지역 제한 등의 한계가 존재할 테고, 그 수도 2개뿐이라지만.
그것만으로도 이 상황에서는 구원의 빛과도 같았다.
“아니, 지금 그 검이랑 권갑은 부러지고 부서진 상태…….”
“상관없슴다!”
“괴물을 쫓는 것과 흑마법을 방지하는 것이 같지는…….”
“같아요! 대장군도 흑마법은 상대 안 해 봤을 거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설령 그 둘이 같지 않더라도, 실험은 해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 과격한 기세에 서일산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그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 유물이라는 것들이 동대륙에서 어떤 취급을 받고 있었는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왜 검선이 마계 대전을 얘기할 때 전설을 긍정하면서도 성물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는지도.
‘전생에 성물들이 받던 취급과 비슷해.’
답답하던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것은 지금의 타이니에게는 현 상황을 타개하는 것 이상의 의미도 있었다.
‘정말로 인간이 남긴 유물에 신성이 존재한다고?’
어쩌면 그것을 찾고 분석하는 것만으로도 벽을 넘을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 몰랐다.
자연히.
“당장 가져와야겠습니다. 어딥니까!?”
마치 맡겨 둔 물건을 찾으러 가는 것처럼 그의 눈이 희번덕거렸는데, 그 기세는 서일산이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며 검에 손을 가져다 댈 정도였다.
그러다.
“창천검제의 유물은 저희 황실에 있습니다. 폐하께 말씀드리면 되겠지만, 무적권마의 유물은 남쪽 호 나라 왕실에…….”
“다녀오겠슴다! 황실에 전갈 부탁드립니다!”
“타이니!?”
서일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타이니는 에스티나를 아이처럼 끌어안고 막사 밖으로 뛰쳐나갔다.
“저……!?”
어이가 없어진 서일산의 목소리가 그 뒤를 따라 허망하게 울려 퍼질 때.
– 끼에에에에!
– 신조다!
– 저만한 독수리가……!
이미 막사 바깥은 카일룸의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한순간에 막사에 남은 모두의 이목이 그에게 몰렸다.
“허, 허. 허…….”
황당한 상황에 서일산이 헛웃음만 흘리고 있을 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어쩌시겠습니까?”
조용히 그의 뒤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개천관일창(開天貫日槍) 양일원이 오늘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이었다.
“어쩌긴 어쩌겠느냐? 황궁에 통보하고, 폐하께도 간언을 드려라. 호 나라 왕실에도 알리고.”
“아니, 제 말은 진군하던 군대는 어찌하시겠냐는 거였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면…….”
아.
“……일단 후퇴해서 본진과 합류한다. 당장 그 괴물의 군세와 맞서는 것은 무리야.”
“그 정도입니까?”
“그래.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더구나.”
“하지만 이제 와서 싸워 보지도 않고 후퇴를 하게 된다면 분명히 뒷말이 나올 겁니다. 황궁의 무관들도…….”
“뒷말이 두렵다고 해서 병사들을 죽음으로 몰 수는 없다. 혹 목숨을 부지한대도, 죽느니만 못한 꼭두각시 상태가 될 수도 있고.”
“……네?”
양일원의 반응은 서일산의 가슴을 또 답답하게 만들었다.
‘적어도 더 많은 수뇌부에게 그 광경을 보여 주었으면 더 나았을까.’
자신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극소수의 정찰대를 운용하여 괴…… 큼, ‘적’ 군세의 동향을 살피되, 절대 목소리가 들리는 곳까지 접근하지 말라 일러라.”
“목소리 말입니까?”
양일원의 반문에 서일산은 하늘 위에서 보았던 그 소름 끼치는 광경을 다시 떠올리고 인상을 굳혔다.
“그래. 시야에 군세가 보이는 즉시 돌아와서 거리를 보고하라고 해.”
“하지만…….”
그때.
– 각하! 급보입니다!
막사 바깥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이 상황에 들어올 급한 소식이 뭐가 있을까.
서로 요란한 토의를 이어 가던 참모들의 시선도 막사의 입구로 몰리는데.
다급한 표정으로 뛰어 들어온 전령이 가져온 소식은 충분히 놀라웠다.
“호 나라의 남부에 있는 군대가, 갑자기 나타난 괴물들의 공격에 완전히 초토화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이미 호 나라 왕실은 북부로 후퇴할 것을 명했다고 합니다.”
“뭐!?”
그것만으로도 경악할 만한 소식이었는데.
“호 나라를 공격한 괴물들이 용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대륙 남부에는 말세가 다가왔다는 소문이…….”
이어진 전령의 말은, 듣고 있는 모든 이를 아연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