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384
384화. 검선과 휴브리스
“루나?”
– 뭐?
깜짝 놀란 타이니가 소리치자, 하늘 위를 날던 카일룸은 곧 루나의 목소리가 들려온 남쪽을 향해 선회했고.
타이니 역시 그쪽으로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사, 살았다.”
“가, 감사…….”
“어……?”
반파된 도시 곳곳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람들을 순식간에 지나쳐 오고 나니, 곧 멀리서 창백한 안색의 루나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등 뒤에 의식을 잃고 몸을 축 늘어트린 검선을 업고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다급한 표정으로 뒤쪽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법쟁이! 아르곤이……!”
그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옮겨 보니, 남쪽 먼 하늘 위에서 시꺼멓고 거대한 무언가가 상대적으로 아주 작은 그림자와 충돌하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박쥐의 날개를 두 쌍이나 단 도마뱀처럼 생긴 거대한 몬스터.
그리고 그 괴물이 두 개의 머리에서 뿜어 대는 짙은 화염과 검은 광선을 간신히 피해 가며 각양각색의 마법을 쏘고 있는 작은 그림자.
‘아르곤?’
다른 해석은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직전에 정령 합신을 쓴 그에겐 상공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당장 간섭할 여력이 없었다.
다행이라면, 지금 이곳에 있는 또 한 명의 정령술사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것.
– 내가 갈게!
루나를 향해 뛰어내리고 있던 에스티나가 발밑에 다시 카일룸을 소환해 올라타더니 그대로 하늘 위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편에서, 타이니는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을 썼다.
급격히 집중되는 감각에 따라 전개된 그의 영역, 에너지 필드가 오직 주인의 뜻을 전달하기 위한 용도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없이 뻗어 나간 그 영역이 저 멀리서 전투 중인 아르곤에게까지 살짝 닿는 순간.
– 우와아아아압!
정령 합신의 상태에서 펼쳐진 타이니의 기합.
어떤 마법보다 효율적인 중간계 최상의 이능, 정령의 힘에서 비롯된 동족 강화의 권능이 그의 목소리가 아닌 영파를 따라 쏟아져 나왔다.
우우우우웅.
스아아아아아.
타이니가 정령 합신이 풀릴 정도로 쏟아 넣은 그 힘은, 전투 중인 아르곤과 그를 도우러 가는 에스티나, 그리고 부상을 입은 듯한 루나와 검선에게 동등하게 나누어져 전해졌다.
그리고 그것은 아르곤과 에스티나에게는 전반적인 신체 능력을 상승시키는 버프가 되었고, 루나와 검선에게는 회복 효과를 일으키는 권능으로 작용했다.
선 제국 황궁에서 얻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응용해 본 수법이 완벽하게 실현되는 순간, 타이니는 미소를 지었다.
‘이게 되네!?’
영파로 발현한 것도, 그러면서 권능의 용도를 나눈 것도 처음 시도해 본 거였지만, 생각보다 쉽게 성공한 것이다.
물론 그 대가로 힘이 빠지는 바람에 달려나가는 자세 그대로 비틀거리다 고꾸라질 뻔하기는 했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자신이 당장 관여할 수 없는 하늘 위에서의 전투가 금세 유리해지는 것을, 바로 눈으로 볼 수 있었으니까.
콰콰콰콰.
냉기를 담은 돌풍이 거대한 쌍두 와이번의 전신을 휘감고.
슈슈슉.
퍼퍼퍼퍼펑!
녹색 오러의 화살이 놈에게 벼락처럼 쏟아지고 있었으니.
그 광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할 때쯤에야, 그는 달려오던 루나를 마주했다.
“타이니!”
노을빛 마나의 세례 덕인지, 창백하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한 루나.
하지만 그녀의 등에 업힌 검선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어떻게 된 거야?”
“설명하자면, 길어! 일단 아르곤부터 구해야…….”
타이니에게 검선을 던져 놓은 뒤 다시 뒤돌아서려던 루나는, 그제야 압도적으로 유리해지고 있는 공중의 전투를 인식하고는 그대로 멈춰서고 말았다.
“……하는데, 했네?”
멍한 목소리와 함께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는 루나의 모습을 보니,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지난한 위기를 헤쳐 온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그리고.
– 끼에에에에엑!
먼 상공에서 들려오는 쌍두 와이번의 비명을 배경 삼아, 타이니는 검선을 살폈다.
우드득.
자신이 뿌려 낸 동족 강화의 권능, 치유에 집중된 그 힘에 의해 어긋나 있던 전신의 뼈마디가 강제로 맞춰지고 있는 노인의 상태를.
“……이 영감님,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타이니를 놀라게 할 정도로 신묘하고 빠르게 허공을 날 듯이 움직이던 괴물 같은 노인.
그런 검선이 전신이 반쯤 으스러지는 타격을 받은 상황이 얼핏 상상이 되지 않은 것이다.
그나마 오러마스터를 앞둔 강인한 영혼이 그 숨을 간신히 붙들어 두고 있었던 것 같은데.
“허……? 이것 봐라?”
자세히 살펴보니, 그에게선 뇌가 아닌 영혼 자체를 침습하는 엄청나게 은밀하고 진득한 저주의 기운까지 느껴졌다.
마치 격상의 무투계 강자와 그에 준하는 대흑마법사에게 협공을 당한 듯한 모양새인데.
“오만, 휴브리스에게, 당했어.”
“뭐?”
“그 괴물, 진짜 괴물이야…….”
어두워진 루나의 안색이 이야기에 앞서 많은 감정을 전달해 왔고.
이내 이어진 그녀의 말은 오만의 군세, 마룡 군단을 처음 마주했던 때로 거슬러 올라갔다.
* * *
이미 시야 바깥으로 멀어진 것들의 수까지 미루어 짐작하더라도 300마리가 안 될 것 같은 최소 규모의 군단.
하지만 그 마룡 군단이 사방으로 흩어져 진군하면서 만들어 낸 참상은 그야말로 끔찍하기만 했다.
“단, 그 전에 한 방은 먹이고 가야지.”
분노에 가득 찬 검선의 검은, 그랬기에 그 중심에 있는 거대한 산과 같은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괴물을 향했다.
하지만 검을 겨누는 검선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켜보는 아르곤과 루나도, 그 시도 자체가 무모하다는 것을 ‘그냥’ 느낄 수 있었다.
머리의 높이만 해도 구름을 찌를 것 같은 저 거대한 마수의 존재감은 그만큼 강렬했으니까.
그 위압감은 단순히 커다란 덩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십 수 킬로미터는 떨어져 있는 거리에서도 살이 떨리게 느껴지는 진득한 마기.
– 나, 휴브리스(Hubris)의 이름으로 이 세상을 정벌하겠다.
쿵.
우르르르르릉.
쿵.
한 번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지면이 깊게 패고, 땅이 마기에 검게 물들어 가면서 식물들이 죽어 나가는데.
– 스아아아아.
까마득히 높은 곳에 달린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숨결은 주변의 새하얀 구름들을 검게 물들여 가고 있었다.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일대를 지옥으로 만들어 가는 괴물.
“어르신, 차라리 흩어지고 있는 다른 괴물들을 사냥하는 게 효율이 좋지 않겠습니까?”
아르곤이 다른 대안을 제안하며 검선을 만류했을 정도로, 상대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적이었다.
그럼에도 검선은 완강했다.
“잔챙이들을 처리하는 게 중요한 게 아냐! 저걸 그냥 내버려 두면 이 세상이 멸망한다!”
세계 멸망급 괴물.
검선은 스스로를 휴브리스라 칭하는 저 괴물을 그렇게 평가했다.
그리고.
“아직은 놈이 우리 존재를 인지하고 있지 않아. 아니, 그 무엇도 안중에 두지 않는 눈치다. 지금이라면 적어도 간은 볼 수 있어. 그조차 목숨을 걸어야겠지만.”
간을 본다. 고작 그것 때문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왜 저래, 저 영감? 말려 봐.”
“몰라, 나도…….”
아르곤이나 루나는 저 거대한 괴물을 보고 그저 끔찍하다는 느낌밖에 받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검선은 그 이상의 무언가를 느끼며 압박감을 받고 있는 듯했다.
그저 검을 겨누는 것만으로 식은땀을 줄줄 흘릴 정도로.
“만약 내가 실패하면 실패하는 대로, 자네들이 본 것을 그 친구에게 전하게. 어쩌면 그 친구는…… 아니, 아니지. 흐…….”
검선은 잠시 횡설수설하다가도 곧 눈빛이 다시 차분해졌고, 이내 그의 검 끝에 갈색의 섬광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일곱 개의 머리 중 하나를 잘라 낸다고 해서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 그렇다면…….’
목표는 저 거대한 몸의 중심에서 느껴지는 무지막지한 에너지의 근원.
물론 놈의 몸통은 강력해 보이는 비늘과 근육, 그리고 진득한 마기에 둘러싸여 있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20년에 가까운 수행에도 끝내 신화경의 벽은 넘지 못한 검선이었지만, 그로 인해 얻은 것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항상 꿈꿔 왔던, 어떤 방어라도 무시할 수 있는 신(神)의 일격만큼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으니.
“내가 저 괴물을 끝장내겠다.”
각오를 다지는 말과 함께, 그의 몸이 연기처럼 사라져 일순간에 공간을 단축했다.
여태까지 이곳으로 이동해 오면서 보인 육지 비행의 운신법이 장난처럼 느껴질 정도로 귀신 같은 움직임.
그런 그가 다시 괴물의 앞에 나타나는 순간에는, 전신이 거대한 갈색의 성광에 파묻혀 형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우우우웅.
쩌저저저저정.
공간을 꿰뚫을 듯 나아 가는 그 모습은 마치 찬란한 연갈색 성광을 뿜어내는 거대한 검과 같았다.
검선이 그렇게 놈의 몸을 단숨에 꿰뚫으려 하던 순간.
– 흠?
호기심 어린, 또한 아찔하게 느껴지는 영파가 그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단순히 놈의 존재감 때문이 아니었다.
믿어지지 않는 기세로 검선의 절대 영역을 뚫고 호신강기까지 압박하는 압도적인 힘.
상대의 영역을 상쇄하는 막대한 영역의 힘이 순간적으로 그를 압도한 것이다.
‘이게 뭐……?’
당황스러웠지만 검선은 물러서지 않았다.
– 인간이 제법…….
짧은 영파 속에서 느껴지는 놈의 비웃음과 여유,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오만’.
그것이 자신에게 기회가 될 것을 직감할 수 있었으니까.
그 순간, 그는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모든 힘을 한 점에 모아 검에 실었다.
그리고 상상했다. 아직은 닿지 못한 경지에 닿았을 때 얻게 될 무상의 권능을.
모든 것을 잘라 내는 참격을.
무량검(無量劍) 극의(極意), 공간참(空間斬).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듯했다.
본디 휘둘러야 할 참격의 방식으로는 이 거대한 괴물의 육신을 뚫고 그 핵에 닿지 못할 것 같았다.
까드득.
가속된 의식 속에서, 검선은 자신의 영혼을 쥐어짜 내 그 참격에 어검비행(御劍飛行)의 수법을 더했다.
변식, 공간돌파(空間突破).
처음으로 시도해 보는 변식이 막중한 위압감 속에서 기적적으로 성공했다.
그리고 갈색의 섬광으로 화한 그의 몸이, 그대로 거대한 괴물의 몸통을 파고들었다.
꽈아아아아앙!
– 끄으……?
콰드드득.
쩌저저저저저적.
‘늦었다, 이놈!’
괴물의 놀란 영파를 뒤로한 채 거침없이 놈의 몸을 파고드는데.
그 짜릿한 쾌감 속에서, 검선은 뒤늦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공간참의 힘은 말 그대로 공간 자체를 베어 버리는 권능.
이런 저항감이 느껴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으니까.
‘어떻게……?!’
다만 그때는 이미 모든 것이 늦은 후였다.
“크르르르르르릉.”
– 감히!!!!
이내 괴물의 몸 내부에서 거센 굉음과 영파가 느껴지며, 놈의 강력한 근육과 뼈들이 사방을 조여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쏟아지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밀도 높은 암흑 오러. 그 안에는 공간참의 권능을 상쇄하는 이해 불가능한 권능까지 어려 있었다.
그 순간 검선은 직감할 수 있었다.
‘이 괴물에겐 안 통한다.’
처음에 느낀 압박감의 정체를, 괴물의 몸을 파고들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의 영혼은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 괴물에게 자신의 권능이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거기다 그와 이 괴물에게는 그 이상의 절대적인 차이가 있었으니.
– 하찮은 인간이 감히!!!!
우르르르르릉.
놈의 말대로, 인간인 자신의 육신은 ‘하찮았다.’
몸 안에서도 지진이 일어난 듯한 진동을 만들어 내는 이 괴물과 비교하자면 말이다.
동일한 권능을 쓴다 해도 수백 배 혹은 그 이상 강력한 놈의 육체의 힘이, 이런 압도적인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이다.
콰드드드득.
조여드는 놈의 근육과 뼈들에 자신의 전신이 으스러져 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검선은 이를 악물었다.
‘알려야 한다.’
이 사실을 그 검은 머리 서방인 청년에게 전해야 한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그 친구가 이 괴물을 어찌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왜인지 그래야 한다는 강박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으로 남은 영혼의 힘까지 박박 긁어모아 검에 힘을 더했다.
– 아직도!!!
꽈드드드득.
불쾌하다는 영파와 함께 그의 ‘앞’을 가로막는 근육들.
그러자 검선은 남은 힘을 다해 ‘뒤’를 뚫었다.
자신이 뚫고 들어온, 확실히 약해진 괴물의 몸에서 빠져나갈 출구를 향해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한 것이다.
콰드드드득.
그러면서도 실패할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지만, 왜인지 쉽게 탈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놈의 몸을 뚫고 나와서야 알게 되었다.
“루나!”
“막아!”
– 하찮은 것들이!!
괴물의 머리와 머리 사이에서 허공과 그림자를 오가며 놈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는 젊은이들.
놈의 몸 밖으로 나온 검선은, 그런 그들에게 자신의 뜻을 전했다.
혜광심어(慧光心語), 자신의 의지와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 내는 수법으로.
[나를, 타이니 그 친구에게로…….]그 말을 전하자마자 온몸의 뼈가 으스러진 통증이 뒤늦게 덮쳐 오는 가운데.
–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으냐!!
분노한 적의 의지가 울려 퍼지더니, 갑자기 음습하고 스산한 무언가가 온몸에 스며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윽!? 이건?’
평생 느껴 보지 못한 소름 끼치는 고통과 함께 그의 의식이 멀어지기 시작했고.
“어르신!!”
그 순간 바로 그를 향해 날아오는 갈색 머리 청년의 모습.
그것이 당시 검선의 뇌리에 남은 마지막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