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388
388화. 반전
“또!? 또 실종?”
쾅!
“명령을 제대로 전달하기는 한 건가!?”
선 제국의 대장군, 중천제일검 서일산의 호통에 보고하던 무사의 목이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예, 절대 가까이 접근하지 말고 위치 확인만 하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정찰대 하나를 수십으로 쪼개서 보냈는데…….”
“그런데 대체 왜!”
“일부 돌아온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부대가 접근하는 즉시 마물들의 중심에서 튀어나온 마녀가 병력들을 홀려서 마물의 군세 안으로 끌고 들어갔답니다.”
그 말에 서일산은 다시 이를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의 옆에 서 있던 개천관일창, 양일원이 조심스레 한마디를 보탰다.
“형님, 연일 후퇴만 거듭되는 와중에 정찰대까지 실종되었다는 소식에 병사들의 사기가 곤두박질치고 있습니다. 무언가 대안을 강구해야 할 때입니다.”
“본대와 합류할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한 번의 전투도 없이 후퇴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본대의 분위기도 좋지 않다고 합니다.”
개벽일월부 장천일 역시 그리 말을 보태자, 서일산이 인상을 구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전투를 벌일 수도 없지 않나. 괴물들에게 병력을 그대로 갖다 바치는 꼴이 될 수도 있는데.”
그 역시 답답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바탕 시원하게 싸우고 싶었지만, 한 명의 무사가 아닌 군대를 이끄는 장수로서 마냥 내키는 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후방에서 ‘그것’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겠지?”
“……예. 하지만 정말 그래도 될까요? 그건 정말 최후의 수단 아닙니까? 사실상 전쟁의 패배를 유예하는 수준에…….”
“그만! 적은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홀려 버리는 마물의 군세다. 최악을 대비해야지.”
“그래도 싸워 보지도 않고 그것부터 준비한다는 게…….”
“누군들 그러고 싶겠느냐!? 이미 광휘 공이 창천검제의 유물을 가지러 황궁으로 갔다. 그것이 마물의 요사한 술수를 방비할 수 있다고 하니, 그때까지만 기다릴 것이다.”
“……그런데 그자는 유물에 그런 힘이 있다는 것을 어디서 들었을까요? 정작 저희도 알지 못하는 사실인데 말입니다.”
양일원의 말은 모두가 같이 공유하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서대륙에 비슷한 물건들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지만, 서대륙의 기사라는 이들이 신화경에 올라 유물을 남길 확률이……. 아, 물론 광휘 공의 무력은 충분히 인정합니다만.”
장천일 역시 양일원의 말에 의혹을 더했다.
서방과 동대륙의 교류는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으니, 그들 역시 서방 기사들의 수준을 어렴풋이나마 들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강(罡)을 발현하는 것만으로도 10대 기사니 7대 기사 취급을 받는다는 곳에서 신화경의 유물이 나온다는 건 사리에 좀 안 맞지 않습니까?”
“신…….”
“예?”
“서방인들은 여신이라는 존재를 믿는다고 들었다. 그 신이 남긴 유물이라더군.”
“그런…….”
삐죽이 수염을 기른 장천일의 표정이 더 굳어졌다.
대놓고 믿지 못하겠다는 감정을 내보이는 것이었지만, 서일산은 그 주제에 관해 말을 아꼈다.
모두가 초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지휘관으로서 괜한 말로 불안감을 부풀려선 안 되니까.
그리고 그때.
– 끼에에에에에!
하늘 위에서, 기다렸던 신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 * *
“기다렸습니다, 광휘 공!”
“유물은……?”
“여기 가지고 왔슴다. 호 나라에 있던 무적권마의 유물까지요.”
“아,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그런데, 정말 그 유물들에 말씀하신 효과가 있겠습니까?”
서일산의 말에 타이니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부러진 검과 한쪽뿐인 권갑을 내밀었다.
“역시 이 빛이 보이시지 않는 검…… 겁니까?”
“빛이요?”
그에 뒤쪽에 서 있던 장군들이나 병사들뿐만 아니라 선 제국의 오러익시더인 서일산과 양일원, 장천일까지 일제히 어리둥절한 시선을 보내 오자, 타이니의 입에서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두 개의 유물이 합쳐져서 대놓고 퍼지는 신성의 빛을 아무도 인식하지 못하다니.
“……역시 동대륙인들에게는 신성력이 보이지 않나 보군요.”
“신성력?”
“일단 이분부터 안에 모시고 얘기를 하지요. 곧 깨어나실 것 같긴 함다만.”
타이니의 말이 이어지자, 서일산을 비롯한 장군들의 시선이 아르곤의 등 뒤에 업혀 있는 노인에게 향했다.
“검선?”
“검선 어르신!?”
“아니, 어떻게?!”
다급한 마음에 좁아져 있던 시야가 그제야 검선을 인식한 것이다.
그런 그들의 모습이 다시 한숨을 불렀다.
“도중에 인연이 닿아 만나 뵙게 됐음…… 습니다. 다만 남쪽에서 강림한…….”
그렇게 시작된 오만의 군세, 칠죄종 휴브리스에 대한 이야기는 듣는 이들의 안색을 확 굳어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 * *
“그러니까, 이 유물들에게서 나오는 빛이 반경 2리에 가까운 범위를 사술에서 보호한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하나의 유물로 기사단…… 음, 이곳 기준으로 2~3개 백인대의 전투 범위를 보호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합니다.”
“……그 말을 그대로 믿는다 해도, 부족하긴 하군요.”
믿는다 해도 부족하다.
대놓고 불신이 느껴지는 그 말에 타이니의 눈빛이 다시금 무거워졌다.
“일단 증명부터 해야겠군요. 혹시 병사 중에 서대륙 혼혈이 있을까요? 확실하진 않습니다만, 그런 사람이 있다면 아마 이 빛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우리 선발대는 정예 부대요. 잡종이 존재할 리…….”
퍽.
“……윽!?”
“그 입!”
양일원이 눈치 없는 장천일의 옆구리를 후려치며 그의 입을 막았지만, 이미 나온 말만으로 넘치도록 대답이 되었다.
“합류할 본대에는 혼혈이 있을 겁니다. 아마 무사 중에는 없겠지만요.”
거기에 서일산이 어색한 표정으로 보탠 말까지.
서대륙 혼혈이 선 제국에서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만했다.
‘뭐, 지금은 그 사정까지 간섭할 여유는 없지만.’
자꾸만 한숨이 더해지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냥 믿어 달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겠음…… 습니다. 그리고 본대에 합류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선발대가 정예라면서요?”
“예? 하지만…….”
“어차피 몽마 군단을 상대할 때 병사의 수는 의미가 없습니다. 많아 봤자 오히려 적의 병력을 더해 주고 아군의 혼란만 가중시킬 검…… 아이씨, 겁니다.”
“……크흠.”
“아무튼 제 생각에는 대략 5~6백 명에 가까운 정예를 뽑아서 몽마 군단의 핵심을 타격하고, 칠죄종을 유인한 뒤 처리하는 게 유일한 방법일 것 같…… 습니다.”
병력이 적다 보니, 펼칠 수 있는 전술도 그만큼 제한될 수밖에 없다.
자신이 그리 전술에 밝은 것은 아니지만, 이 이상의 방도가 없을 것이라고 타이니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대회전은 무리라는 말이겠지요?”
“일원, 이미 정찰대가 몇 번이고 현혹되지 않았느냐? 모험은 생각지도 말도록.”
다행히도, 유물에 대한 불신과는 별개로 서일산을 비롯한 몇몇은 몽마 군단의 위험성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럼, 검선 어르신이 일어나시는 대로 돌격할 수 있도록 결사대를 차출해 보겠습니다.”
검선이라는 이름이 주는 기대감도 서일산의 얼굴에서 확연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 이름이 유물에 대한 불신까지 상쇄하고 남은 듯하니, 타이니는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 * *
“……으음.”
– 일어나셨다!
검선은 자신이 눈을 뜨자마자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머릿속이 최근 몇 년간 느껴 본 중 가장 답답하고 몸까지 무거웠지만, 그냥 누워 있을 수는 없었다.
다만.
“여긴, 어디?”
일어나자마자 보인 것이 타이니 일행이 아닌 누런 천막이라는 사실에 어리둥절하긴 했지만.
이내 그 천막을 젖히고 들어온 이들의 면면이 그의 눈을 크게 뜨게 만들었다.
“검선 어르신,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 일산! 자네…….”
“검선을 뵙습니다.”
“천하제일검을 뵙습니다.”
서일산과 양일원, 그리고 장천일.
이십여 년 전, 저 덩치만 큰 수염 바보 장천일이 혼세경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선 제국의 황실에 방문했을 당시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선 제국으로 온 건가?”
검선의 시선이 서일산의 뒤로 보이는 타이니 일행에게 향하는데.
그에 대한 답은 서일산에게서 나왔다.
“서부에 나타난 재앙, 몽마 군단을 상대하기 위해 편성된 군대의 막사입니다. 비록 지금은 후퇴만 거듭하고 있는 실정입니다만.”
“……몽마 군단? 아 서쪽, 그……?”
“맞슴…… 후, 맞습니다. 제가 이쪽으로 와서 확인했던 재앙이죠.”
“그 남쪽의 괴물들은 어쩌고?”
“일단은 이쪽이 더 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내버려 두면 계속해서 덩치를 불리면서 혼란을 야기할 괴물들이니까요.”
“음?”
“그게…….”
타이니는 자신이 보았던 몽마 군단의 특성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확실히 그럴 만하군. 하, 세상이 어찌 되려고…….”
몽마 군단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검선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어찌 되긴요. 망하기 직전이지.’
그렇게 심술궂은 대꾸를 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아 낸 타이니가 말을 돌렸다.
“그건 그렇고, 영감님. 상태 어떻습니까?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검선은 영혼을 타격하는 저주에 걸렸었으니, 그에 대한 걱정을 담은 조심스러운 질문이었는데.
“흠. 십 년 적공이 날아갔어. 이거 타계할 날이 부쩍 가까워진 듯하이. 흐흐.”
검선은 무거운 말을 웃으며 꺼냈다.
그리고 그 말은 당연하게도 곁에 서 있던 선 제국 3대 장군의 눈을 훨씬 커지게 만들었다.
“어르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무슨 말이긴, 어차피 죽을 날 받아 놓은 노인이 좀 더 빨리 갈 것 같다는 거지.”
“어르신!”
“소리 지르지 말게, 일산. 아직 골이 울려.”
“아니…….”
“뭐, 신화경의 극에 이른 산만 한 괴물을 상대하고도 이 정도면 다행이지.”
검선의 그 말은 그저 막연한 위기감 속에서 후퇴만 거듭하는 상황에 불만을 품고 있던 선 제국 장수들의 눈을 크게 떠지게 만들었다.
“허, 그럼 정말로…….”
“호 나라가 망했다더니…….”
그에 막사 안 분위기가 다시 확연하게 무거워지다가.
“타이니라고 했지, 자네? 자네에게는 큰 신세를 졌어. 옆에 요술사 청년과 루나 소저한테도 말이야.”
검선의 부드러운 눈빛이 타이니에게 향하는 순간, 세 장군의 시선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검선의 이름이 동대륙에 미치는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 그것만으로도 확연히 느껴지는 듯했다.
“아르곤인데요. 왜 내 이름은 다…….”
그리고 아르곤의 구시렁거리는 작은 목소리에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검선의 말은 그것만으로 끝이 아니었으니까.
“만약 이 전투가 끝난 후에도 이 늙은이가 살아남는다면……. 일산, 자네와 타이니, 그대에게 해 줄 말이 있어. 신화경에 이르는 길에 관한 것이니, 적어도 들어 봐서 손해는 아닐 거네.”
초탈한 눈빛으로 꺼낸 그 말에 좌중의 시선이 다시 확 몰렸다.
“어르신!?”
“에? 그, 지, 지금 말해 주심 안 됨…… 됩니까?”
타이니조차 당황할 정도였으니, 다른 장수들의 눈에 욕망의 번지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또 하나의 전투를 앞둔 지금 들어 봤자, 괜히 머릿속만 어지러워질 수 있어. 후를 기약하세.”
검선의 입매가 고집스레 맞물린 후에는 그 누구도 그에 관해 다시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리고 한나절 뒤.
다시금 해가 밝아 오는 아침에, 여태껏 후퇴만 거듭하던 선 제국의 선발대에서 이질적인 움직임이 생겼다.
각각 두 부대로 나뉘어 정렬하는 500여 기의 기마.
“괴물들에게 인간의 힘을 보여 주자!”
“하!!”
그 선두에는 서일산을 비롯한 선 제국의 3대 고수가 있었고, 검선 역시 그의 곁에 서 있었다.
게다가 그 부대에는 선 제국이 보유한 30명의 100대 고수 중 20여 명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니.
사실상 선 제국의 최정예들로 구성된 결사대가, 본진과는 반대 방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하늘 위에서는, 그보다 한발 빠르게 거대한 독수리의 정령이 서쪽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각, 서쪽에서 선 제국의 국경을 넘고 있는 동진의 군대에도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 * *
“괴물들의 군대가 동쪽으로 진군하고, 선 제국의 군대는 후퇴만 거듭한다?”
“예, 대장군.”
“우리로서는 다행이군. 이거 선 제국만 난리가 나겠어. 어찌해야 할까…….”
선 제국 서쪽에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 동진(東晉)의 대장군이자 대륙 10대 고수 중 한 명인 진천뇌전검(震天雷電劍) 강량.
그가 반백의 짧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끝을 흐리자, 부관이 바로 의견을 개진했다.
“그래도 진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방제일검과의 약속도 있고, 선 제국과의 협약도 있었으니까요.”
“그렇지. 그런데 저들이 왜 싸우지도 않고 후퇴만 하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나?”
“그들의 전보에 의하면, 정찰대가 접근하는 즉시 홀려서 마물들의 군대에 빨려 들어갔다고 합니다.”
“홀려?”
“사람과 맹수를 가리지 않고 홀리는 사술을 부리는 마물의 군대라고 합니다.”
“허, 허허. 거참, 서일산이 황궁에만 있더니 겁쟁이가 된 모양이야.”
강량은 헛웃음을 지었지만, 부관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쉽게 보실 일은 아닌 듯합니다. 중천제일검이 싸워 보지도 않고 후퇴한다는 오명을 뒤집어쓴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이제야 방도를 마련해 결사대를 조직했다 합니다.”
“이제야?”
“예, 그리고 저희 쪽에는 사술에 대처할 방안이 없다면 섣불리 나서지 말라고 전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의 상관은 그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흥, 소심한 녀석.”
“예?”
“서일산의 허명을 누를 기회다. 사술 따위에 홀리지 않을 강인한 동진의 정예. 그 힘을 보여 줘야지.”
“……예, 하지만.”
부관의 염려 어린 표정에 강량은 자신감 어린 미소로 답했다.
그 역시 선 제국의 경고를 아예 무시할 생각은 없었으니.
“최소 일류의 수준으로 최정예들을 차출해라. 내가 앞장서겠다. 놈들이 정면에서 싸우는 동안 마물 군단의 뒤를 쳐서 박살 낸 뒤, 선 제국에 큰 대가를 요구하겠다.”
과거 중천제일검에 패하고 차세대 천하제일인이라는 명예를 잃어버렸던 10대 고수의 눈이, 위험한 야망에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