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40
40화. 부녀
“그런 물건이 있었다고? 허…… 뭐, 그럼 차라리 잘됐군. 드렉슬러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예, 다만 값은 확실히 치러 주셔야 합니다.”
“알겠다, 알겠어. 내가 그리 통이 작은 사람 같더냐? 안 그래도 렌돌 같은 장인은 귀한 인재니 중하게 대우하고 있다.”
혀를 끌끌 차는 공작의 모습에 타이니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만족스러운 것과 별도로 거래는 확실해야 하는 법.
공작의 반응을 보아하니 렌돌이 굳이 가격을 깎아 줄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파는 이와 사는 이, 그리고 물주(?)까지 모두가 만족하는 거래라니, 너무나도 아름답지 않은가.
공작 역시 비슷한 생각인지 미소가 진해졌다.
“네가 주문한 부품을 만들고 조율하려면 2주가 걸린다고 했던가?”
“예.”
“그동안 뭘 할 생각이냐?”
“수련이나 해야죠. 이제부터는 하루하루가 쌓아 가는 과정이 되어야 하니까요.”
3단계 익스퍼트까지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올랐지만, 초인의 길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은 이제 시작이다.
세인들은 3단계, 5단계, 7단계의 벽을 한데 묶어 마의 벽이라 부르지만, 정말 초인이 된 이들이 보는 시야는 조금 달랐다.
가장 기본적인 재능을 증명하는 것이 3단계, 익스퍼트(Expert)의 벽.
그리고 그 재능 위에서 오랜 세월 쌓아 올린 노력을 증명하는 것이 5단계, 슈페리어(Superior)의 벽.
거기에 더해 인생의 업(業)을 쌓아 올린 영혼의 격을 증명하는 것이 7단계, 오러유저(Aura user)의 벽이라고들 말했다.
물론 그 뒤의 오러익시더로 가는 벽과 또 그다음에 마주칠 오러마스터로 가는 절망의 장벽은, 경험한 사람도 거의 없으니 아예 논외의 것이고 말이다.
“오호? 확실히 생각은 제대로 박혀 있구나.”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아직 초인의 벽을 논하기도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니까요.”
당장 4단계 블레이더(Blader)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도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노력과 시간을 쏟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전생에 한 번 겪어 본 바 있는 길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 대답에 공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감생심? 동방어더냐?”
“어찌 감히 그런 마음을 품을 수 있겠냐는 뜻입니다. 이렇게 생긴 김에 동방어에 취미를 붙였던 터라 습관적으로 나왔습니다.”
“이렇게 생긴 김에? 프흐흐. 그래, 확실히 넌 재밌는 녀석이야. 좋은 선택이기도 하고.”
좋은 선택이라니, 동방어를 배운 게?
이번엔 타이니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공작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가끔 그렇게 동방어를 쓰면, 머리 나쁜 걸 감출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으…….”
하도 마족이니, 뭐니 차별받는 게 열 받아서 배운 언어다.
한데 그런 것을 놀려 먹다니…….
‘확실해, 전생에는 이 인간이 늙으면서 순해진 거야. 실제로는 인성이 영 글렀어.’
농담에 반응해 주면 신나서 더욱 걸고넘어질 기세라, 타이니는 재미있다는 듯 눈을 빛내는 공작을 보며 부러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자 공작은 이내 아쉬운 듯 혀를 찼다.
“……아무튼 네 말이 옳다. 뭐, 가르치는 맛이 없어서 좀 서운하기는 하구나.”
가르치는 맛? 마앗?
순간 마나가 동결된 상태로 강제 자유 낙하를 하던 기억이 뇌리를 엄습하자 절로 이가 갈렸다.
“그 오러 특성의 비전이라는 것도 가르쳐 주신다면 잘 배울 수 있습니다만.”
“아서라, 그건 아직 이르니.”
그 대답에 타이니는 오히려 눈을 빛냈다.
그냥 열 받아서 지른 말인데 아직이라면……?.
“설마, 때가 되면 가르쳐 주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무리 세상의 위기가 예정되어 있다 해도, 지금의 공작은 그걸 직접 겪은 사람은 아니다.
게다가 타이니는 멸망을 코앞에 두고도 자신의 잇속만 챙기는 소인배들도 심심찮게 보아 온 터였다.
그런데 오러 특성의 비전을 가르쳐 주겠다니?
“물론이지. 그래서 세상의 위난을 이겨 낼 수만 있다면 무엇을 못 할까.”
아무리 공동의 목적이 있다 한들 가문의 비기를 그냥 베푸는 공작의 태도는 칭송받아 마땅했다.
다만 그것을 아는 단 한 사람은 공연히 배알이 꼴려서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말이다.
타이니가 복잡한 표정으로 공작을 바라보는데, 그 속내를 알 길이 없는 공작은 굳은 얼굴로 확언했다.
“물론 어중이떠중이한테까지 가르쳐 주진 않겠지만, 인류를 구할 확실한 패라면 아낄 이유가 없지. 그러니 부디 날 실망시키지 말거라.”
“……당연한 말씀을.”
“그래, 믿어 보마. 2주 후라……. 아! 그렇게 되면, 클로이의 성년식 다음 날 떠나게 되는 것이냐?”
“그렇겠지요.”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묘하게 일정이 그리 잡혀 버렸다.
외부에 파견 나간 공작의 세 아들도 모조리 돌아오는, 올해 발렌티아 공작가 최대의 행사.
아마도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그가 본 것 중 가장 화려한 행사가 될 터였다.
하지만 그것을 떠올리는 타이니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말이 실례가 되리란 건 알지만, 클로이 공녀님의 성년식 날에 ‘그 일’은 그대로 공표하실 겁니까?”
그 말에 공작의 표정 역시 굳어졌지만, 그는 이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른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제국 귀족의 관습상 여자의 성년식에선 약혼을 발표하는 것이 관례였고, 별다른 일이 없다면 그로부터 1년이 되는 날 결혼을 한다.
그리고 클로이의 약혼 상대자는.
“……황실과 연, 그것도 황태자와의 약혼을 어찌 취소할 수 있을까.”
다름 아닌 황태자였다.
문제라면.
“……말씀드렸듯이 황태자는 결혼식 날 사망합니다. 현 직계 황자들 전부가 말이죠. 그것을 알면서도 강행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내년 여름, 아스란 제국의 직계 황족들이 모두 사망하는 두 번째 재앙.
그로 인해 제국은 10년 넘게 내분에 시달리다가 국력이 약해지고 만다.
인간족 최강 국가의 국력이 반의반 토막이 나게 되는, 인류사에 길이 남을 최악의 사건.
그리고 개인적으로 봤을 때 사망자를 제외한 최대 피해자는 바로…… 공작의 딸, 클로이 폰 발렌티아였다.
비운의 황태자비. 훗날 그녀를 가장 먼저 수식하게 될 이름 중 하나였다.
‘그걸 알면서도?’
제 딸에게 닥칠 불행을 걷어 낼 수 있는데도 강행하겠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그가 공작가의 행사에 관여할 권한은 없었지만.
– 그럼 누나라고 불러.
그렇게 말하며 웃는 클로이의 얼굴, 그리고 전생에서 웃을 때마저도 어딘가 그늘져 보였던 얼굴을 떠올리니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다.
“공작이 딸바보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딱히 그렇지도 않나 봅니다?”
타이니가 가시가 있는 말을 뱉으며 공작을 노려보았지만, 공작은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 사건에 대해선 이미 너에게 들어 알고 있지 않느냐. 걱정할 것 없다. 내가 막을 수 있으니.”
“제가 알려 드린 건 ‘그 사건’을 일으킨 범인이 2황자라고 소문이 났는데, 그조차 거기서 죽어 버렸다는 것뿐입니다!”
정보라고 해 봐야 앞뒤가 안 맞는 소문, 즉 헛소문뿐이다.
그런데 고작 그거 가지고……!
““전생의 당신도 확답해 주지 않은 불확실한 정보뿐이란 말이야!”
타이니는 자신도 모르게 흥분해서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리고 공작은 그런 무례를 보면서도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아예 모르고 있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리고 ‘적’의 목적성이 뚜렷이 보이지 않느냐.”
“……목적성?”
“동방의 해상 왕국 카룬을 혼란에 빠트려 동대륙과의 교역을 끊는다. 그리고 대륙의 가장 강성한 국가를 혼란에 빠트려 자중지란을 유도한다. 나중에 벌어진 사건들을 고려하지 않아도, 이게 다 한 맥락 같지 않으냐?”
“그거야…….”
이미 얘기가 나온 일 아닌가.
‘그걸 왜 새삼……!’
벌겋게 달아오른 타이니의 얼굴이 점점 더 일그러지는데.
“황실과의 연을 거부해서 트러블을 만들어 봤자 얻을 수 있는 게 없다. 어차피 다른 약혼자가 정해질 테고, 그 일이 똑같이 벌어지겠지. 내가 그 사건에 관여할 방법만 사라질 뿐이다.”
“그래서 굳이 당신 딸을 희생시키겠다고!?”
“희생이라니? 막아 내면 희생이 아니지.”
“그런……!”
막아 낼 수 있다는 보장이 없잖아.
타이니로서는 답답할 뿐이었지만, 공작의 논리에는 빈틈이 없었다.
“그리고 설령 막아 내지 못한다 해도, 내가 그 자리에서 사건 수습만 제대로 한다면 제국은 흔들리지 않는다. 미리 알고 준비한다면 가능성은 충분해.”
게다가 공작은 타이니가 미처 생각지 못한 최악의 사태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 말까지 듣고 나니, 타이니 역시 공작의 생각이 최선이라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클로이는, 당신 딸의 미래는 어쩌려고 그래?!”
“다시 한번 말하지만, 막아 내면 된다.”
“당신도 지금 막아 내지 못할 상황을 더 염두에 두고 있는 거잖아! 그렇게 되면 클로이는……!”
“그만!”
공작은 짤막한 고함으로 타이니의 입을 막았다.
공작의 표정 역시 좋지 않아 보였지만, 타이니는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어쩔 거냐고! 당신 딸 인생이잖아!”
“그럼 더 좋은 방법이 있느냐? 재앙을 막아 내고 제국을 수습할?”
“황실에 말하면…….”
“믿기나 하겠느냐? 만에 하나 믿는다 해도 정말 그 사건이 벌어지면 나를 한통속이라 생각하겠지! 설령 운이 좋아 다 좋게 풀리더라도 네 존재를 밝혀야 한다. 그럼 신전이 가만히 있을 것 같으냐?”
그 말에 타이니의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러자 공작이 성큼성큼 다가와 타이니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 푸른 눈을 들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마왕의 골통을 부수고 싶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다 크기도 전에 화형당하고 싶은 거냐? 설령 네가 그러고 싶다고 해도, 내가 용납 못 한다. 알겠느냐? 나는 대 발렌티아의 가보를 그렇게 허무하게 날릴 생각은 전혀 없단 말이다!”
“……제길.”
공작이 이렇게까지 나오니 타이니도 더는 뻗댈 수가 없었다.
다만.
“……당신 뜻은 알겠어. 그리고 내 부족한 머리로는 다른 방안도 못 찾겠어. 근데 말이야. 당신이 그렇게 현명하다면, 그 좋은 머리로 한번 생각해 보라고. 만약 일이 틀어지면 그 귀한 따님의 미래를 어떻게 지켜 줄지 말이야. 난……, 나는 도무지 모르겠으니까.”
치미는 울화를 참아 내지 못한 타이니는, 결국 딸의 미래를 비극으로 내몰 수도 있는 결단을 내린 아버지의 가슴에 비수를 박고야 말았다.
그에 공작의 눈빛이 한층 무거워졌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몇 번이고 입을 달싹이던 그는 이내 긴 한숨과 함께 엉뚱한 말을 꺼내 들었다.
“……내 딸은, 클로이는 참 빛나는 아이지.”
짧은 침묵 끝에 튀어나온 그 한마디가 타이니의 흥분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혔다.
“그건…… 누구나 보면 압니다.”
“외모보다도 그 성정이, 그리고 능력이 더욱 빛나는 아이다. 아직 세상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나중에는 세상도 알게 됩니다. 당신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결국 엉망이 된 제국을 가까스로 수습한 건 그녀니까.”
자식의 미래에 대해 듣길 원하지 않았던 아버지, 공작도 그 말에는 몸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미래에도 내 딸은 그 빛을 간직하고 있었구나.”
“……예, 빛나는 사람이었습니다. 정작 그녀가 행복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말입니다.”
“흐…….”
“황실의 미망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제국에서 사는 게 어떤 일인지, 각하라면 알지 않습니까.”
“……그래, 짐작은 할 수 있지.”
공작은 무엇을 상상했는지 눈을 질끈 감았다.
어느새 침착해진 타이니도 조용히 고개를 떨구는데, 공작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세상을 위한 일이니까……. 혹시나 일이 틀어진다면, 네가 클로이를…….”
“가, 갑자기 무슨 개소리를! 내가 클로이를 왜 책임져!”
애써 찾은 침착함이 공작의 말 한 마디에 날아가고 바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빠아아악.
“어억!?”
그 불경에 대한 대답은 머리통을 후려치는 강타와 고함으로 돌아왔다.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이놈이!? 네놈이 왜 내 딸을 책임져! 어딜 감히!?”
“으윽……. 그, 그럼 무슨 말을 하려던 건데……요?”
공작의 살기등등한 눈을 본 타이니는 이내 슬그머니 눈을 깔았다.
하지만 공작은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클로이를 보호하라고, 이 쌍놈의 새끼야! 받아 먹은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지! 양심을 말아먹었냐!? 감히 누굴 넘봐!?”
빠아아악.
빡!
“아윽, 악! 진짜! 폭력 반대!”
“네놈이 맞을 소리를 했잖냐!”
거참, 오해 한번 한 걸 가지고…….
“말의 흐름이 그런 것 같아서……. 흠, 흠. 죄송합니다.”
괜히 두들겨 맞는 게 억울했지만, 더 개기다가는 피를 볼 것 같아서 당장은 숙일 수밖에 없었다.
“흐름은 무슨! 와, 생각할수록 열받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벌겋게 달아올랐던 공작의 안색은 다시금 천천히 평온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이내 그가 단언하듯 말했다.
“나는 세상을 위해서도, 그리고 내 딸을 위해서도 최선의 길을 선택할 것이다. 막아 내면 돼. 난 할 수 있다. 내가 바로 에스가르드 폰 발렌티아니까.”
확고한 자신감이 묻어나는 목소리.
미래를 예언하는 듯한, 아니 바라는 대로 만들고 말겠다는 듯한 그 목소리에선 어쩐지 설득력이 느껴졌다.
‘……X신 같은데 멋있어.’
다만 그 유일한 청중의 감상은 조금 불경했지만 말이다.
“……부디 그리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래, 그러기 위해서라도 너 역시 피나는 노력을 해 줘야 한다.”
공작의 눈에는 확고한 믿음이 어려 있었다.
그 믿음의 근간이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라는 게 좀 불안했지만, 생각해 보면 그가 타이니의 말을 믿어 준 것도 그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타이니는, 그 자신감이 얼마나 굳건한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물론입니다. 그런데 일을 너무 크게 벌이시는 것 아닙니까? 가정일 뿐이지만, 만약 제가 어떻게든 각하의 손에서 템퍼스를 빼돌리고 사기를 치는 일당이라면…….”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구나. 그럼 기뻐서 춤이라도 출 것 같은데.”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오르게 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