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412
412화. ……스승님
“다음 강림…….”
아르곤과 루나가 가져온 소식은 타이니와 에스티나가 이를 악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서진에서 숨겼다?”
“어. 왕실에서 숨기는 걸 내가 알아낸 거야.”
“하…….”
정보를 캐낸 아르곤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것이 당연해 보일 만한 일이었다.
“다음 49일이 5일 남았구나.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났네…….”
에스티나도 망연한 표정으로 타이니를 바라보는데.
타이니는 그 촉박한 시간보다, 서진 왕의 행태에서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당연히 기억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전하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
“당연하지. 우리를 다 너…… 아니, 바보로 본 게 아니고서야.”
“…….”
“나, 아무 말 안 했다!? 진짜! 맹세해!”
“하…….”
우드득.
‘역시 이 새끼는 주기적으로 패야…….’
열 받는 일도 있겠다.
다시금 살풀이의 필요성을 느낀 타이니가 주먹을 움켜쥐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아르곤이 후다닥 루나의 뒤로 숨었다.
사내새끼가 저게 뭐 하는 짓이지?
“좋은 말 할 때 튀어나와라! 보아하니 오러익시더에 오른 것 같은데, 확실히 경지에 안착하도록 도와주마!”
“피, 필요 없거든!? 루, 루나야! 도와줘.”
어쭈? 루나야?
‘언제부터 저게……?’
우드득.
왜인지는 모르지만, 아르곤의 태도를 보니 더욱 확실하게 작살을 내 주겠다는 생각으로 살기가 끓어오르는데.
그때, 루나가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서진의 왕, 나나 아르곤 유혹하기 위해, 왕자랑 공주 보냈어. 우리를 동대륙에, 정착시킬 생각인 듯했어.”
“음?”
“그만큼 여기 대륙 상황도, 심각하니까. 절실한 거겠지. 거기 왕도.”
마치 서진의 왕을 이해한다는 듯한 말. 타이니는 왜인지 루나가 아르곤을 도와주려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괜히 더 기분이 나쁜데…….’
왜지?
타이니의 시선이 루나의 등 뒤에 몸을 숨긴 아르곤을 향해 쏘아지는데.
“지, 진짜야! 막, 나한테도 꽃단장한 공주들이 몇 명이나 와서는, 부군이 어쩌고저쩌고하면서 꼬시려고 했다고!”
“꼬셔지지 그랬냐.”
“야! 이래 봬도 내가 지조가 있는 남자야.”
“지조? 갑자기?”
“아, 아니……. 고향을 버리고 정착할 생각은 없다고.”
“너 고향 기억도 거의 없다며?”
“아, 아무튼 내 말은, 아무리 예쁜 여자가 들이대도 이 대륙에 정착할 생각은 없다 이거지. 흠. 흠.”
“호오?”
“아무튼! 솔직히 혹할 만큼 수작을 부렸다고! 여기선 축첩도 허락된다니 어쩌니 하면서 루나를……. 헙!?”
변명을 늘어놓다가 스스로 내뱉은 말에 놀란 아르곤이 황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는데.
다행히도 타이니는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축첩? 그게 뭔데?”
“아, 그……. 뭐, 하……. 사실 나도 잘 몰라. 헤헤. 그게 뭔 소린가 했다니까? 히히.”
순간 저승에 한 발 담갔다 돌아온 기분을 느끼며, 아르곤은 바보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뭔가 수상함을 느낀 타이니가 따가운 눈빛으로 바라봤지만, 아르곤은 애써 딴청을 피우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는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던 보랏빛 눈동자를 마주하게 되었다.
“혹했어?”
“……응?”
“응. 그랬구나.”
싸늘하게 굳어지는 루나의 표정을 본 아르곤의 눈이 자동으로 부릅떠졌다.
“아,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보통 사람이면 혹할 수도 있다는 말이었지! 난 절대, 절대 아니었어!!”
방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
“왜 소리를 질러? 시끄럽게.”
그에 타이니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고, 에스티나가 ‘풋’ 하고 실소를 흘렸다.
막막한 상황에 경직되어 있던 모두의 마음이 잠시나마 가볍게 풀리는 듯했는데.
그 순간, 엉뚱하게 동료들의 주목을 끈 아르곤이 당황하며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보탰다.
“아니, 난 검은 머리 검은 눈만 보면 치가 떨린다고. 사실 보랏빛 머리나 눈동자가 훨씬 더 좋……. 허업!?”
괜히 사족을 달다가 엄청난 말실수를 하게 된 아르곤이 다시금 다급히 스스로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눈동자를 또르르 굴려 루나의 반응을 살피는데.
“누가, 물어봤어?”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돌아서는 루나였지만, 아르곤의 눈에는 그녀의 뾰족한 귀가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이 유독 크게 들어왔다.
입을 막은 손안으로 배시시 미소가 번지는데.
“너 이 새끼, 지금 뭐라 그랬냐?”
강제로 어깨가 돌아가더니, 그 치가 떨리는 검은 눈동자가 바로 코앞에 나타났다.
“끅.”
“너 지금 뭐라고 했냐니까? 뭐가 좋아? 보랏빛 머리, 눈동자?”
딸꾹.
“설마 그게 루나는 아니겠지? 설마?”
딸꾹. 끅. 딸꾹.
“그래, 아니겠지. 네가 뒤지고 싶어서 환장한 게 아니라면, 설마……. 말이 헛나온 거지? 그렇지?”
우드득.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악귀처럼 일그러진 타이니의 면상.
당장이라도 아르곤의 머리통을 박살 내 버릴 듯 그의 코앞에서 노을빛 서광을 빛내는 주먹까지.
엄습해 오는 섬뜩한 살기를 마주한 그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 대답을 잘못하면, 정말로 이승을 뜨겠구나.
그 직감이 심장을 미친 듯이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나, 나도 이제 오러익시더인데, 거기다 대마도사인데, 왜 이렇게 차이가……. 아, 아니 그 전에! 내가 루나 좋아하는 게 무슨 죄야?’
황당하면서도 억울하기도 한,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확 스쳐 지나가는데.
그 순간 본능적인 곁눈질이, 뒤를 돌다 말고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루나의 모습을 잡아냈다.
그 순간 갑자기 가슴을 가득 채우는, 알 수 없는 용기가 생겨났다.
“뭐, 뭐!? 내가 그런 스타일 좋아한다는 게, 잘못이냐!?”
버럭 소리를 지르자, 타이니가 주춤하는 것이 보였다.
‘이 새끼가 뭘 잘못 먹었나’ 하는 생각이 얼굴에 보일 정도였지만.
그 반응이 아르곤에게 더욱 용기를 주었다.
“사, 사람이 말이야. 취향을 존중할 줄 알아야지. 흥.”
과감하게 어깨를 잡은 손을 떨쳐 내는데, 왜 이렇게 무서운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들키지 않도록 애써 여유로운 태도를 연기했다.
다만 그 여유로운 연기는 오래가지 못했으니.
“스탑. 동작 그만. 너 지금 설마, 진짜 루나를……?”
스산한 목소리가 그의 몸을 덜컥 얼어붙게 만들자.
아르곤은 자연스레 루나를 향해 시선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도, 도와줘, 루나. 이 새끼 진짜 진심……!’
그러다.
이제는 목덜미까지 붉게 물든 채 고개를 숙인 루나의 모습을 보니, 갑자기 또 미소가 나왔다.
‘나 왜 이러지? 진짜 미쳤나?’
지옥과 천국을 연달아 오가는 기분.
하지만 루나를 볼 때면 샘솟는 좋은 기분은, 지옥 같은 공포감을 밀어 내고 가슴속에 용기를 불어넣어 줬다.
‘한 번 더 질러 봐?’
다행히 그때, 구원자가 나타났다.
“내버려 둬, 타이니.”
“티나?”
“지금 아르곤 여자 취향 문제로 다툴 때가 아니잖아.”
“아니, 그게 그리 단순한 문제가…….”
“단순한 문제야.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문제도 아니고.”
“아니, 그게…….”
“그게?”
“……끙. 알았어.”
에스티나가 어깨를 짚으며 지긋이 눈을 맞추자, 타이니는 입을 삐죽이면서 기세를 거뒀다.
그러면서 자신을 한 번 더 째려보기는 했지만.
아르곤은 왜인지 웃음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때.
“으음.”
창백한 안색으로 침상에 누워 있던 검선이 신음하며 눈을 떴다.
* * *
“그런 일이 있었나……. 허허.”
깨어난 검선의 안색은 여전히 창백해 보였지만, 생각보다 격의 추락은 심하지 않았다.
영혼을 압박하고 갉아먹는 오만의 권능에 두 번이나 잠식되었던 사람답지 않게, 여전히 오러익시더급의 극에 닿아 있는 듯한 모습.
하지만 그것은 역으로 검선이 그 전에 얼마나 높은 경지에 있었는지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아마도 원래 검선은 권능의 조각을 획득한 지금의 타이니보다 좀 더 오러마스터에 가깝지 않았을까.
처음 만났을 때의 짐작보다 더욱 강한 사람이‘었’던 거다.
‘이제는 그 공간참이라는 건 못 쓰겠지. 박탈감이 상당할 텐데…….’
타이니가 안쓰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데.
그 마음을 모르는 듯, 검선이 오히려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용서해 줬으면 하네.”
“……??”
“동포로서 대신 사죄하겠네. 아마도 서진의 왕은 이 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할 수단을 절실하게 찾았던 것뿐이야. 그 방식이 다소 졸렬하다 하나, 못난 자가 살기 위한 발악이라 생각하고 조금만 이해해 주게나.”
엄밀히 말하면 검선과는 상관도 없는 나라의 일이건만 사죄를 자청하는 검선.
자신에게 큰 도움을 준 사람이 이렇게까지 나오니, 타이니는 그 시빗거리를 더 이상 입에 올리지 못했다.
“……뭐, 애초에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냥 기분이 조금 상했을 뿐이지.”
“저기요, 아저씨? 좀 전에 자기 기분 좀 상했다고 친구를 패 죽이려고 했던 아저씨 아니세요?”
옆에서 왜인지 한껏 들뜬 모습으로 성질을 돋우는 아르곤이 살짝 거슬리기는 했지만, 말을 바꾸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그냥 두고 볼 생각도 없었지만.
뻐억.
“컥!?”
“정신 줄 챙기자. 장난칠 상황 같으냐?”
쿨럭.
“제, 젠장. 지, 지가 먼저…….”
쿨럭. 쿨럭.
뒤통수를 강타당한 아르곤이 굉장히 억울한 표정으로 투덜거렸지만, 타이니는 녀석에게 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저.
“……어쨌거나, 상황이 이런 만큼 저희는 다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색욕은 잡았고, 오만은 확실하게 격을 추락시켰습니다. 다만 이제 곧 강림할 분노가 문제인데, 저희가 그걸 기다리거나 손을 보태기엔 시간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격이 추락했을 오만을 잡는 것도, 혹시나 하는 부상의 염려를 생각하면 사치일 뿐이었다.
그 말에 검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다 이내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들이 우리 땅에서 해 준 일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는 내가, 아니 이 땅의 모두가 알고 있을 걸세. 고향이 위험하다는데 여기서 더 부담을 줄 수는 없지. 그리하게나.”
그가 생각보다 훨씬 쉽게 수긍하는 태도를 보이자, 오히려 타이니의 눈이 크게 떠졌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은 질문이었지만, 검선은 그중에 한 가지만을 생각한 듯 웃으며 답했다.
“언제까지 자네들에게 의지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나도, 그리고 우리 대륙도 스스로 자존을 지켜야지. 고마웠네. 이제 우리의 대의는 우리가 지키겠네. 목숨을 바쳐서라도.”
사실상 하늘 아래 홀몸으로 지내 온, 곧 귀천을 앞둔 노인이라는 말로도 모자랄 만큼 오랜 세월을 살아온 노인이 대의를 말한다.
그 모습과 표정에 타이니는 오히려 자신이 이기적인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그는 눈앞의 검선처럼 모든 것에 초연해서 스스로를 내던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목표를 위해서라면 또 모르지만 말이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너무 큰 배움을 얻었습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됐네. 그냥 늙은이가…….”
“……스승님.”
“……허?”
타이니가 고개를 숙이며 내뱉은 그 말에 검선이 눈을 크게 뜨고, 쭈그려 앉았던 아르곤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는데.
이내 검선이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서방에서는 우리만큼 사제 관계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 들었지. 뭐, 그래. 나도 인류 최강의 무사를 길러 낸 스승 한번 해 보세. 신화경에 도달한 자의 스승이라? 허허. 이거 그럼 제자를 통해 꿈을 이루게 되는 건가? 허허허.”
그러나 타이니는 90도로 숙인 고개를 들지도 않고 그대로 말을 이었다.
“동방의 의미 그대로, 또 다른 아버지라 여기며 기억하겠습니다. 부디 보중하십시오, 스승님.”
“…….”
그 말이 방 안에 무거운 침묵을 만들어 냈다.
검선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고개를 숙인 타이니를 응시할 때, 타이니는 그런 검선의 시선을 느끼면서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저 속으로 계속해서 마음을 전할 뿐.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서대륙에 있는 또 다른 스승이라고 할 만한 존재가 잠시 뇌리를 스쳐 지나갔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마음을 온전히 검선에게 전하며 존경을 표했다.
그러나 검선이 동대륙에 드리워진 남은 재앙을 걷어 내기 위해 목숨을 걸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보중하시라 말하는 것조차 기만으로 느껴져서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다신 볼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더욱……. 죄스러웠다.
‘죄송합니다. 더는 도움을 드릴 수 없어서. 받은 만큼 더 갚아 드리고 싶었는데…….’
더없이 무거운 마음을 다독여 가며 억지로 마음을 다잡을 뿐이었다.
검선 역시 그 진심을 느꼈을까.
좀 더 푸근한 미소를 지은 검선이 고개 숙인 백인 청년의 검은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넌 할 만큼 했다. 고맙다, 제자야. 그러니, 너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너의 사명을 다하거라.”
완연한 하대가 이리 듣기 좋았던 때가 있었을까.
또 안타까웠던 때가 있었을까.
‘죄송합니다.’
타이니는 자신의 머리에서 손을 거둔 검선이 자리에서 일어나 훌쩍 떠날 때까지, 숙인 고개를 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