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416
416화. 슬로스
– 색욕이 소멸했다.
나태, 슬로스(Sloth)의 영파를 접한 순간, 질투, 그린 아이(Green-Eye)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뭐라? 그 다른 차원에서 흘러들어 온 파편 같은 대륙에서?’
다시금 위기감이 엄습했지만, 이제는 대화를 나눌 동격의 상대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분노, 라스(Wrath)는 벌레답게 생각이 없고, 슬로스는 꺼림칙하기만 하니.
‘정말 왕은 우리의 소멸을 원하는가? 대체 왜?’
이제는 확신으로 변해 가고 있는 그 의심을 토로할 상대조차 마땅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만약 다른 칠죄종이 여전히 마계에 남아 있다 하더라도, 그중 누구에게도 속을 터놓을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슬쩍 떠보는 것뿐이다.
– 라스, 분노의 군세는 이상이 없나?
– ……장군 중 다섯이 초기에 사망하긴 했지만, 상관없다. 군세는 순조롭게 불어나고 있으니. 소멸하여 ‘의식’에 바쳐진 장군들의 수를 생각하면, 중간계의 시간으로 앞으로 두 달 정도면 차원에 구멍이 완전히 뚫릴 듯하다.
멍청한 놈.
‘역시 벌레는 어쩔 수 없나.’
강림하자마자 장군들 다섯이 소멸할 정도의 타격을 받아 놓고 상관없다?
그린 아이는 그런 라스를 속으로 비웃었다.
사실 마계 대전이 시작될 때까지만 해도 그 역시 부하들의 존속에 거의 관심이 없긴 했지만, 일이 이렇게까지 막장으로 흘렀는데도 태평한 분노가 한없이 멍청해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마음을 읽었을까.
– 강림한 오만의 군세는 여전히 건재한 것 같다. 오만의 균열을 통해 막대한 카르마가 모여들고 있어. 흘러들어 온 대륙에 제법 카르마가 쌓여 있던 모양이야.
슬로스가 그의 근심을 덜려는 듯 그나마 좋은 소식을 전해 왔다.
하지만 그린 아이에겐 딱히 새로울 것이 없는 소식이었다.
‘휴브리스, 변종 드래곤. 애초에 그 괴물이 쉽게 당할 리 없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나태와 분노의 반응을 살폈다.
이 역시 변화의 한 가지였다. 만약 이전이었다면, 경쟁자인 오만이 카르마를 쓸어 담고 있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강림하고 싶어 했을 테니까.
– 이거, 내가 너무 늦는 것이 아닌가 모르겠군. 장군들에게 자살이라도 명해야 하나? 흐…….
바로 저 똥멍청이 라스처럼 말이다.
그때, 그를 자극하는 슬로스의 영파가 들려왔다.
– 그린 아이, 아직 강림할 생각이 없는가?
……나를 저 벌레 새끼와 똑같은 멍청이로 생각하는가.
‘너는 왕의 생각을 알고 있는가? 그게 아니라면 어찌 그리 태연할 수 있지?’
따지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차마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 슬로스, 네가 강림할 시기에 맞출 생각이다. 그렇다면 저항도 분산되겠지.
– 진짜 겁을 먹은 게 확실하군. 흐흐.
– 그분이 쥐여 주신 칠죄종의 권능이 부끄럽지 않은가, 그린 아이?
라스와 슬로스의 도발이 이어졌지만, 그는 쉽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분의 생각이 너무 의심스럽다는 속마음을 꺼내 놓을 수는 없으니.
– ……전략적인 선택일 뿐이다.
– 내 군단의 장군들은 그리 쉽게 당하지 않는다. 우선해서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바로 나를 소환하지도 않을 것이야.
– 우선해서 해야 할 일?
그 영파에 그린 아이는 귀를 쫑긋 세우며 반응했지만, 의뭉스러운 놈은 대답 대신 제 할 말을 이어 갈 뿐이었다.
– 그러니 어쩌면 343일을 꽉 채우고 내가 강림하게 될 수도 있을 터인데, 그때까지 기다리겠다?
퍽이나.
그린 아이는 그런 슬로스의 허장성세를 비웃었다. 물론, 속으로만.
마족들을 말 그대로 갈아 넣는 듯한, 마족의 재앙이나 다름없는 지금의 중간계에서 온전한 강림의 시간이 지켜질까.
나태의 장군들이 순식간에 갈려 나가고 당일에 바로 슬로스가 소환된다 해도 그는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아니,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중간계 인류의 정예가 나태가 강림한 곳에 몰려 있다는 뜻일 테니까.’
그때 자신이 내륙에 강림하여 다시 군단을 일으킨다면, 어마어마한 카르마를 홀로 쓸어 담을 수 있을 것이다.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런 상상을 하자, 그나마 조금은 의심과 두려움이 걷히는 것 같았다.
그러니 슬로스의 도발 따위는 가뿐하게 씹었다.
– 그래야 더욱 확실히 정벌이 진행될 테니까.
– 그 정도 기간이면 다른 대륙을 정벌한 내 군세가 이미 서대륙도 먹고 있을 텐데? 흐흐, 정말 제대로 겁을 먹었군.
벌레답게 생각이 짧은 라스의 영파는 대답할 가치도 없었다.
– 그분께서는 부가적인 지시가 없으셨나?
놈을 무시한 채 슬로스를 슬쩍 떠봤는데.
– 그렇다.
너무나도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빌어먹을 인간 출신 주제에.’
슬로스의 단언에, 그린 아이의 눈에서 녹색 불길이 더욱 거칠게 타올랐다.
자신이 질투의 좌를 이어받기 한참 전부터 그분의 대변인이 된 슬로스다.
그렇기에 이전이라면 굳이 더 캐물을 수도 없었겠지만, 나태의 군세가 강림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반드시 확인해 봐야 할 것이 있었다.
– 그분께서는 완전히 힘을 회복하셨나?
– 그렇기에 다시 차원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몰랐나?
– 완전히 회복하신 분이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시는가?
– ……그분이 원치 않으신다.
수상하다.
너무 수상하다.
이전이라면 떠올리지 않았을 의심이 그린 아이의 심중에 무럭무럭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극대화된 의심은, 여태 그가 생각지도 못했던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설마 그분의 신상에 무언가 문제가 있고, 슬로스가 사칭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은 질투의 칠죄종으로서 기본적으로 가지는 성향이자 권능.
논리를 뛰어넘은 의심은 질투의 권능에 의해 진실에 가 닿는다.
하지만 그 순간, 그 의심은.
찌이이이잉.
“윽!”
더한 권능에 의해 차단당했다.
그리고 그것은 한 가지 사실을 의미했다.
‘그분은 정말로 온전하시다.’
칠죄종의 권능을 상쇄하는 것으로 모자라 아예 압도해 버리는 존재는 이 마계에 그분뿐이니까.
그리고 그것을 달리 말하면, 여태까지 품었던 의심 중 일부는 사실이라는 뜻이었다.
‘역시 그분은 우리가 소멸하길 바라시는 건가. 아니면 죽어도 상관없다고 여기시거나.’
빌어먹을.
막대한 힘과 권능을 휘두르는 마계 지역의 주인.
영광스러운 칠죄종의 좌가 그분의 도구로 전락한 듯한 치욕스러운 기분이었다.
그린 아이는 자신 역시 부하들을 그리 생각해 왔다는 것도 잊은 채, 치솟아 오르는 분노를 가슴속에 꾹꾹 눌러 담았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 다만, 그분이 지금 너의 겁먹은 모습을 보면 어찌 말씀하실지 궁금하긴 하군.
슬로스가 재차 도발을 하기 전까지는.
대체 저 인간 출신의 마족의 꿍꿍이가 무엇일까.
– 다른 칠죄종을 중간계에 갈아 넣으면서 넌 뭘 하려는 거냐!!!
우르르르르릉.
육성과 함께 터져 나온 영파에 마계의 무덤 전체가 흔들렸다.
다시금 채워지기 시작하던 시체 군단의 일부가 화들짝 놀라 바닥에 엎드리는데.
그제야 그린 아이는 자신이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속마음을 드러내고 말았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리고.
– 갈아 넣다니? 반신의 권능과 최강의 힘을 가진 칠죄종이 그런 표현이 합당한 존재던가?
여전히 의뭉스러운 슬로스의 대답은 그 분노를 더욱 부채질했다.
– 지금까지의 결과를 보고도 그리 말하는가! 글러터니, 애버리스, 러스트가 군단과 함께 소멸했고, 내 언데드 군단도 전멸했다. 그런데 그 말이 합당하다고……!
– 고작 셋뿐이지 않나?
다시금 터져 나온 분노는 슬로스의 태연한 대답에 삼켜졌다.
– 뭐, 뭐라?
– 고작 셋, 너의 군단까지 셈을 더해도 셋 반이다. 뭐, 딱 절반의 희생이라고 볼 수는 있겠군. 숫자상으로는 말이야.
그 영파는 숫제 비웃음에 가까웠다.
– ……무슨 뜻이지?
– 알고 있지 않나? 나와 휴브리스만 건재하다면, 나머지 너희 다섯은 그저 있으면 좋은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을. 러스트는 좀 아쉽지만 뭐, 녀석의 전투력이야 원래 못 미더우니…….
‘허…….’
그 비웃음은 그린 아이의 자존심에 큰 생채기를 남겼다.
그리고 여태 잠잠하던, 생각이 없는 것 같던 라스 또한 자극했다.
– 슬로스! 지금 그 말을 책임질 수 있겠나!!!
영파로도 저릿저릿하게 느껴지는 살기.
라스는 분노답게 한순간에 극단적으로 태세를 전환했다.
– 아, 라스. 너는 확실히 다르긴 하지. 하급 마물의 숫자 정도야 시간만 있다면 마충 군단이 전부 채울 수 있으니까. 확실히 중요 전력이지.
– ……지금 필요로 나를 평가하는가, 슬로스!? 강림 이전에 너부터 정리해 줄까!!?
라스가 다시금 살기 어린 영파를 뿜어냈지만 슬로스는 신경 쓰지도 않는 것 같았다.
– 솔직히, 지금까지의 희생은 우리 전력의 반의반의 반도 되지 않는다. 다들 알고 있었잖아?
– 감히……!
– 그리고 우리 모두를 합친다 해도, 그분에 비하면 의미 없는 전력이라는 것도.
마지막 그 영파는 분노한 라스조차 입을 다물게 만들고, 그린 아이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 그러니 명심하라 라스, 그린 아이. 우리의 사명은 그분의 강림에 앞서 길을 닦는 것뿐이다. 경쟁심과 투쟁심을 불태우는 건 좋지만, 선을 넘진 마라. 특히 너, 그린 아이.
비웃음에 이은 매도, 그리고 명령.
그린 아이의 자존심은 이미 무너져 내렸지만, 감히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슬로스, 내가 언젠가는 너를……. 그리고 언젠가는 마계 최고 권좌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꾹꾹 눌러 담고 막연한 복수를 상상하는 수밖에.
하지만 그걸로도 채 가라앉지 않은 분노와 무너진 자존심은, 끝끝내 한 마디를 더 보태게 만들었다.
자신의 마지막 의심을 확인하기 위해서.
– 그분 역시 서두르고 계신 게 아닌가? 군단의 희생을 통해 강림 속도를 빠르게 하는 방법 말이다.
– 음? 그 건은 전에 얘기가 끝나지 않았던가.
– 천계가 중간계와 연결될 수 있다는 희박한 확률……. 설마 그게 전부일 리는 없을 것 같은데. 예를 들면 그 확률이 희박한 게 아니라 확실한 것이라든가.
그 말에 대한 대답은 바로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다.
– ……그분께서 준비하고 계신다.
잠시 후에 흘러나온 슬로스의 한마디가 그린 아이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 무엇을?
– 설마 그분께서, 이미 한번 어긋난 순리를 원래 자리로 돌리는 것만으로 만족하시리라 생각하는가? 지금 그분의 침묵은 그 너머를 위한 준비일 뿐이다.
‘아…….’
그 말 한마디가 그린 아이의 오랜 의구심에 답을 내어 놓았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우리가 죽건 말건 상관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는 한마디이기도 했다.
그런데.
–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의 역할은 그분이 가시려는 길을 닦는 것이다. 그 이상의 무언가는 생각하지도 계획하지도 말라, 그린 아이.
그 태연한 명령이, 그린 아이의 무너진 자존심을 자극하고 다시 한번 울컥하게 만들었다.
– 그래서 너는? 그 발판으로 희생되어도 괜찮다는 말인가, 슬로스?
– 물론.
너무나 즉각적으로 나온 대답에, 그린 아이는 한순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 하지만, 희생? 내가? 그게 가능한 전제라고 보는가? 흐하하하하.
더해진 그 영파에는 그도 차마 반박할 수가 없었다.
– 나 역시 마찬가지. 흥.
라스도 억지로 자존심을 내세우며 말을 보탰지만, 그 무게감은 슬로스의 한마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애써 동등하다 여겨 왔던 그와의 격차가, 그 순간 확연히 실감나는 듯했다.
‘슬로스, 그분과 같이 영원을 사는 자.’
마계의 창세 이래 쭉 서열 1위를 유지하던 오만의 군세, 마룡 군단을 2위로 끌어내린 인간 출신 마족의 말에는 그만한 무게가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