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439
439화. 최후의 도플갱어
“충! 근무 중 이상무!”
“그래.”
렉터는 자신을 보고 경례하는 병사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그대로 성문을 나섰다.
– 이 밤중에 어딜 가시는 거지?
– 몰라. 내가 아냐? 기사 일에 상관 마.
등 뒤에서 병사들이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렉터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신경 써야 할 것은, 그가 거부하지 못하는 ‘상부’의 밀명이었으니까.
‘빌어먹을! 조용히 살려고 했는데.’
렉터. 아니, 그림자 군단의 마지막 도플갱어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인간 세력의 우두머리를 먹어 치우라는 밀명을 받고 흩어진 도플갱어 중 하나였던 그는, 처음엔 300여 명의 무리가 있는 산적 두목을 먹어 치웠다.
당시에는 꽤 강한 집단의 대장을 먹어 치운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인간의 이성을 얻게 된 직후에는 후회하고 말았다.
‘괜한 시간을 낭비했다 생각했지.’
하지만 이제 와 돌이켜 보면 그것은 천운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곳 중간계는, 어떤 면에서는 마계 이상의 위험 지대였다.
마계에서는 칠죄종의 군단에서 나름 정예로서의 입지를 구축했던 그였지만, 마족들도 구별하지 못하는 도플갱어를 색출해 내는 무서운 포식자들이 존재하는 이곳에서는 멀쩡히 살아남는 일조차 버거웠던 것이다.
‘빌어먹을 광휘의 기사! 빌어먹을 사신!’
다행히 그는 동급의 동족들이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을 ‘링크’를 통해 알 수 있는 도플갱어였기에, 상황을 인지한 후부터는 산속에 들어가서 꼭꼭 숨었다.
당시에는 이미 장군들이 전멸해 있었고 심지어 그림자 군주인 애버리스 님마저 사망한 상태였기에, 그는 명령을 무시하고 도망칠 수 있었다.
군단의 지휘에서 벗어난 뒤로 생존 욕구만이 남은 그는, 가능한 한 많은 강자를 먹어 치우고자 하는 도플갱어의 본능마저 억누른 채 시골 영지의 기사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인간들의 지휘부는 가끔씩 사라지는 천민들 따위에겐 관심도 없었으니.
그는 그렇게 인간 세상에 녹아들어 숨죽이고 살기를 택했다.
존재감이 느껴지지도 않는 먼 거리에서부터 영혼으로 지시를 내린, 마인 장군이라는 괴물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 탐욕의 잔재인가? 잘됐군. 곧 인어족의 공세가 시작된다.
– 인류의 최정예가 모두 전방에 몰려 있을 테니, 너는 후방에서 인간족의 보급을 끊어라.
차라리 그 명령을 이해할 수 있는 이성이 없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마족 군단의 장군에겐 군주를 잃은 타 군단의 마족에게 참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스스로 인식하고 있는 이상, 그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후방에 정말 쓸 만한 놈들이 없는 게 다행이지.’
그는 이미 몇 번이나 인간을 먹어 가며 신분을 바꿔 왔고, 보급로도 몇 군데를 털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밤중에 보급 부대의 지휘관을 몰래 먹어 치운 뒤, 상부의 연락을 받았다며 병사들에게 물자를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리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뜬금없는 명령에 거부감을 표하는 기사 몇을 참수해 버리면, 그들은 무조건 자신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나면 그대로 사라진 뒤, 또 다른 인간을 먹고 다시 신분을 도용하면 그만이었다.
그 작업을 반복해 오면서 조금씩 자신감도 살아나고 있었다.
‘역시 보통 인간들은 나를 구별하지 못해.’
여태까지 제국군 보급대에서만 8건, 다른 왕국에서 4건. 도합 12건의 임무를 성공시켜 왔다.
그가 불태워 버린 물자의 양만 해도, 1만의 병력을 한 달 동안 먹여 살리거나 10만의 병력을 사흘 동안 버티게 할 수 있었을 테니.
이성을 얻지 못했다면 몰라도, 지금의 렉터는 그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최전방인 동부 해안과 카룬에 몰려 있는 인류의 정예들이 서서히 무너지고, 동시에 인어족의 공세가 점차 강해질 것이다.’
이런 자신의 임무가 계속 성공할 경우, 광휘의 기사가 아니라 그 할애비가 온다 해도 인류의 멸망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어쩌면 위대하신 모든 마의 군주가 직접 강림하기도 전에 그분의 뜻이 완성될지 몰랐다.
렉터는 자신이 마인 장군의 명령을 정말로 제대로 지켜 내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 마인족이 내 공적을 온전히 나태와 마왕께 보고해 줘야 할 텐데.’
정작 그 보고를 해야 할 이의 존재감이 언젠가부터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마인 장군이 잘못된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 강제로 영파를 연결시키며 ‘계약’을 강요하던 그의 존재감이 다소 멀어진 것일 뿐.
마치 그가 다시 마계로 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것은 아니겠지만.’
렉터는 터무니없는 상상은 그만두고 해야 할 일에 다시 집중하기로 했다.
‘이제 슬슬 인류 연합군도 눈치를 챌 때가 됐어. 아니, 벌써 눈치챘지.’
마지막에 보급 부대를 정리할 때는, 렉터가 물자를 태우라는 명령을 내리자마자 그 부대의 기사들이 전부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으니까.
물론 그래 봤자 5단계 미만의 잡것들에게 당할 그가 아니지만, 그 순간에는 잠깐 식겁하기는 했다.
아마, 앞으로도 한두 번은 그런 경우가 있을 것이다.
‘계속 실패하면 그 후에나 다른 대책을 들고 나오겠지.’
그렇기에 이번 임무에서도 자신감이 있었다.
그가 조심해야 할 것은 고작 이 세상에서 둘뿐.
‘광휘의 기사나 사신이 굳이 이 후방으로 오겠냐고.’
도플갱어가 먹이를 잡아먹고 그 모습을 취하고 나면, 그 저주스러운 여신의 신성력으로도 구별하지 못한다.
그런 도플갱어를 색출해 내던 놈이 둘이나 있긴 했지만, 그들만 아니라면 적어도 한두 번은 같은 방식으로 해 먹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찾았다…….”
인간이 아닌 그림자의 속도로 내달린 렉터의 눈이 멀리 산 아래 야영 중인 큰 규모의 짐마차 행렬을 확인한 순간.
‘제국인가.’
그의 몸이 다시 그림자로 변해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 * *
“최근의 일 알지? 경계 단단히 하도록.”
“옛!”
촤작.
막사의 문이 젖혀지며 들어서는 중년인.
그 뒤쪽에 걸린 등잔 밑의 어둠 속에서 먹잇감을 확인한 렉터가 속으로 웃었다.
‘6단계. 이번에는 제법인데?’
하지만 그래 봤자다.
후방의 보급대에 초인급의 마족, 그것도 그림자 마족인 그를 막아 낼 수 있는 결계가 설치될 리는 없고.
초인급 강자는 전부 균열을 지키고 있거나 최전방에서 싸우고 있다는 것이 이미 인류 사회에 널리 알려진 상황이다.
이곳의 규모는 꽤 커 보이긴 했지만, 그래 봤자 챌린저급의 강자를 보급대 수장으로 데려다 놓는 것이 현재 인류가 할 수 있는 최선일 터.
‘시끄럽지 않게 처리하려면…….’
이 먹이가 잠드는 순간을 노리면 된다.
여태껏 몇 번이고 해 왔던 일이기에 익숙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잠시 후.
“하…….”
등잔불 밑에서 한숨을 몇 번이나 내쉬던 중년인이 이내 불을 끄고 침상에 들려는 순간.
푸욱.
“흡!?”
그림자에서 솟아난 검은 칼날이 그대로 중년인의 배를 꿰뚫었다.
중년인이 눈을 부릅뜨며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그의 입은 어느새 그림자에서 변한 손이 틀어막고 있었다.
“읍!?”
그리고.
“잘 먹겠습니다.”
서늘한 목소리와 함께 입을 쩍 벌린 렉터가 송곳 같은 이빨들을 드러낸 순간.
콰득.
“끅?”
갑자기 침대의 일부가 칼날로 변하더니, 렉터의 옆구리를 뚫었다.
푸르른 마나블레이드를 품고.
‘미친!?’
황당한 상황이었지만 렉터는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쾅!
자신의 옆구리를 찌른 칼날을 암흑 오러로 내려쳐 부순 다음, 삼키려던 먹이를 그대로 떨쳐 내려 했는데.
“끄르륵. 라프탄 공, 빠, 빨리…….”
배를 꿰뚫린 먹이가 핏발이 선 눈으로 렉터의 몸 일부를 그대로 붙들고 있었다.
그 온몸에서 새어 나오는 붉은빛 기운.
‘이런 미친!?’
그것은 이미 중상을 입은 먹이가 생명력까지 소모해 가며 렉터의 신체를 붙잡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 순간, 렉터가 부러트린 검날에 다시 푸른 마나블레이드가 서리더니 그대로 그의 중심핵을 노려 왔다.
어느새 갈색 머리 인간의 형태로 변한 침상(?)의 얼굴에도 분노한 표정이 떠오르는데.
그러나 허물도 벗지 못한 한낱 인간이 생명력을 동원한다고 한들 마족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라.
‘흥!’
콰드득.
렉터는 먹이에게 붙들린 신체의 일부에 암흑 오러를 흘려 보내 가며 놈에게 치명타를 가했고.
실체화되어 있던 몸을 다시 그림자로 변환하며, 구멍을 뚫듯 가운데를 비웠다.
제 몸의 중심핵을 이동시켜 갈색 머리의 검격을 비껴 낸 것.
그 페널티는 실체화를 품으로써 약해지는 육체 능력뿐이었으니.
그렇게 검을 비껴 낸 그림자의 일부는 침상이었던 인간을 그대로 후려칠 수 있었다.
쾅.
“컥!”
튕겨 나가는 인간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렉터는 먹이에게 붙잡힌 신체를 억지로 빼내려 했지만.
이미 반쯤 죽은 먹이 주제에 끝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지독한 인간…….’
콰득
그에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던 그의 몸이 간이 탁자에 걸릴 때까지의 짧은 순간.
튕겨 나갔던 갈색 머리가 다시 그를 향해 돌진해 왔다.
“죽어!”
빌어먹을 것들.
렉터가 짜증스러운 감정을 감추며 놈에게 마력을 집중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서늘한 살기가 느껴졌다.
‘흡!?’
놀란 마음에 반사적으로 공격을 뒤로 돌려 보지만.
콰드드득.
막사 안에 놓여 있던 탁자가 갑자기 거대한 사자로 변해 자신의 핵을 물어뜯는 것은 그조차도 생각하지 못한 변수였다.
“끄으으…….”
이 빌어먹을.
황급히 핵에 최대한 마력을 집중해 보지만,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크르르르.”
“내, 내가…….”
그림자 마족과 사자 정령이 서로 눈을 마주치며 힘겨루기에 들어갈 때.
쩌저저저적.
푸른 마나를 실은 부러진 검들이, 렉터의 전신을 순식간에 연달아 그어 냈다.
동시에.
콰득.
사자의 이빨이 그림자의 핵을 꿰뚫었다.
“잘했어, 라미……!”
갈색 인간의 안도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올 무렵에는 렉터, 아니 도플갱어의 의식은 서서히 흩어지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럴까 봐 숨어 살려고 했는데…….’
빌어먹을 마인 장군, 빌어먹을 인간들!
그가 한탄 속에서 무너지고 있을 때.
– 우르르릉.
‘어……?’
갑자기 멀리서 엄청난 에너지의 폭발이 느껴졌다.
동족들의 숨을 끊어 놓았던 포식자의 기세.
한참 멀리서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데도 대기가 떨릴 정도로 퍼지는 기세가 느껴지다니.
헛웃음이 나왔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
그림자 군단 마지막 도플갱어는 탄식 속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지독한 새끼…….”
촤자작.
라프탄은 다시금 검을 휘둘러, 죽는 와중에도 주변을 오염시키는 마족의 마기를 분쇄했다.
그가 정신없이 마기의 잔재를 없애고 있을 때.
“이, 이게 끝이……?”
용의 눈 소속 챌린저급 강자, 이 보급대의 지휘관으로 위장했던 아모스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멈칫하며 돌아보는 순간, 봐도 봐도 익숙해지지 않은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작전을 함께한 동료가 손쓸 도리도 없이 죽어 가는 모습이.
입술을 질끈 깨문 라프탄은 애써 웃음을 지으며 아모스의 눈을 마주했다.
“마지막일 겁니다. 세계수의 수호자께서 딱 한 놈 놓쳤다고 하셨으니까요. 경이 큰 공을 세우셨습니다.”
“다, 다행…….”
“수고하셨습니다.”
“화, 황제 폐…….”
“당연히 폐하께 그대의 공을 아뢰…….”
“……하. 만세.”
애써 공을 치하한 라프탄의 말이 귀에 들어오기는 했을지.
아모스의 눈은 급격히 빛을 잃어 갔다.
그런 그를 보며 라프탄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자 현신을 한 라미가 슬쩍 그의 곁으로 다가와 머리를 비볐다.
“크르릉.”
“알아. 그도 나도,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 거지.”
아마도 자신들이 실패했다면, 지금 최전선에서 인어족을 상대하거나 균열을 지키고 있는 12대 기사들이 파견되었을 것이다.
아모스의 죽음은 안타까웠지만, 또한 그런 의미에서는 분명 가치가 있었다.
그런 전우에게 라프탄이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그대의 공. 반드시 전하겠습니다, 아모스 경.”
그 와중에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어차피 죽을 운명? 그건 뭐지?’
싸우면서 적이 흘린 정보를 분석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었으니.
라프탄은 어느새 블랙윙의 최전선 요원으로서 습관을 굳혀 가고 있었다.
최전방에서 마족과 인어족을 상대하는 12대 기사의 위명이 날로 높아져 가는 지금.
인류의 후방에서도, 전투는 계속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