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44
44화. 적?
“……쩝, 뭐야 대체?”
수련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타이니는 바람처럼 왔다가 폭풍처럼 사라진 삼공자를 떠올렸다.
– 너, 나랑 한판 붙어 보자.
공작가의 삼남이라는 놈이 예의범절은 밥 말아 먹었는지, 다짜고짜 덤벼들길래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패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화를 내기는커녕 바보처럼 웃음을 터트리는 게 아닌가.
– 푸하하하. 너 진짜 대단한 녀석이구나! 바빠서 일단 간다만, 나중에 다시 제대로 한판 붙어 보자! 아, 너 근데 혹시 혼혈이냐? 정말 열세 살이야?
정신이 없을 정도로 제멋대로였던 녀석.
굳이 좋게 표현하자면 호쾌해 보이기는 했는데…….
‘검제의 자식 중에 그런 놈이 있었던가?’
전생에서 만나 본 것은 애런이라는 후계자뿐이었다.
아마도 삼남이라면 그때쯤에는 분가해서 다른 성을 쓰고 있었을 테니까, 본 적이 없는 게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면.
‘……전생에는 죽었거나.’
그 생각을 떠올린 타이니의 표정이 자기도 모르게 굳어졌다.
공작가에 머무르며 아직은 젊어 보이는 검제를 만날 때면, 종종 희미하게 생각나는 장면이 있었다.
이십 년 뒤, 오러익시더의 경지에 올라서도 거의 제 나이로 보일 정도로 늙어 버린 검제와 그 주변 사람들의 우울했던 분위기.
다만 당시는 모두가 우울한 시기였기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더랬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말세에도 세력을 유지한 수준을 넘어 사실상 제국을 독차지하다시피 했던 발렌티아 가문의 분위기가 그렇게 가라앉아 있었다는 게 조금 이상하기는 했다.
‘그 제나스라는 천재도 본 적이 없고.’
삼남이야 독립해서 가문을 차렸다면 못 봤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공작이 반드시 초인이 될 것이라 기대하는 인재가 전생에선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긍정적인 의미로 생각되진 않았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아마도 인류가 재앙을 맞이하고 망가진 제국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발렌티아도 큰 피해를 본 것일 터였다.
‘그 제나스라는 천재도 죽은 걸 테고, 어쩌면 검제의 아들 중에도 죽은 이가 있었을지도…….’
공작이 황실에서 일어날 두 번째 재앙을 대비해 준비하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정말 그것으로 충분할까?
“……나도 어떻게든 가 보긴 해야겠어.”
아스란 제국의 붕괴와 내전, 그리고 수습으로 이어지는 자세한 과정은 잘 모른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제국의 힘이 반의반 토막이 났다는 건 확실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스스로는 손을 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제국이 무너지는 과정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황실에서 벌어지는 그 두 번째 재앙.
클로이와 황태자의 결혼식에 참석할 신분이 되지 않았으니까.
‘무슨 방법이 없을까…….’
황실의 잔치이니만큼 마법 영상으로 외부에 중계되기는 하겠지만, 실제로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는 이들은 귀족 중에서도 극소수뿐이다.
황실의 일원이 아니라면 혼인의 당사자인 발렌티아 공작가에서도 직계 가족만이 참석할 수 있고, 그 외에는 공후작급의 최고위 귀족들만이 호위 병력 없이 단신으로 참석할 수 있었다.
반면에 아스란의 핏줄이 조금이라도 이어진 이들이라면 모두 식장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 구분은 황족과 귀족의 차이를 제국민들에게 확실하게 인식시키고자 하는 황실의 조치였다.
그들은 아스란의 핏줄은 대륙의 어떤 인간보다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종자들이었으니까.
“고귀한 황금용의 핏줄은 무슨 얼어 죽을…….”
때문에 그런 조치가 직계 황족을 비롯한 황실 일가족의 대량 살상이라는 결과를 낳았을 때는, 솔직히 쌤통이라는 생각도 했었다.
울프를 죽일 기회만을 노리며 뒷골목을 전전하던 당시의 타이니에겐, 난생처음 보는 마법 영사기에 비친 황실의 화려한 결혼식 장면이 그만큼 큰 박탈감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그 화면 안에 작고 흐릿하게 보이던 신부가 어릴 적 은인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을 때였다.
‘가만? 그러고 보니……’
갑작스러운 비명과 함께 영상이 끊겼을 때의 기억을 곰곰이 더듬어 보니, 결혼식 현장에는 분명 황족이나 귀족이 아닌 이들도 있었다.
첫 번째로 눈에 띄었던 것은 황실의 상징, 골드 드래곤의 문양을 새긴 황실 기사단.
‘……은 안 되겠지.’
실력이나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도, 신분이 검증된 귀족 출신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것이 황실 기사단이다.
하지만 결혼식장에는 분명 귀족이 아닌 이들도 있었다.
‘……맞아, 음식을 나르는 시종들.’
물론 그들 역시 신분이 검증된 이들이겠지만, 발렌티아의 힘이라면 자신을 시종으로 꽂아 넣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공작이 한다는 준비도 그런 맥락일 수 있었다.
‘그래, 한번 의논해 봐야겠어. 아, 물론…… 카룬의 일이 잘 해결된 후에 말이지만.’
한참 생각에 몰두하다 보니, 당면한 목표를 놔두고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자각이 뒤늦게 찾아왔다.
“나도 참…….”
그새 느슨해진 것일까, 아니면.
‘그 사이에 발렌티아에 정이라도 들었나? 하나씩 생각하자, 하나씩! 당장은 카룬부터. 그것만도 버거운데 무슨 뒷일까지 생각해. 느슨해지지 말자, 타이니!’
짝.
“일단 일주일 뒤 스탬프를 찾은 후에 카룬으로 가서……”
스스로 뺨을 가볍게 치며 다시금 각오를 다지는데.
“……카룬? 꼬마 기사님은 카룬 출신인가?”
갑자기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생각에 너무 깊게 잠겼던 탓일까.
고개를 돌려 보니 평범한 인상의 남자가 보였다.
서른쯤 되었을까, 갈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평범한 얼굴. 하지만 차려입은 옷만은 확실히 귀티가 났다.
그를 봤을 때 처음에 든 생각은.
‘귀족이구나.’
그리고 두 번째로는.
‘……저 얼굴은 가짜고.’
범인의 상식을 아득히 초월하는 타이니의 마나 감응력이, 남자의 얼굴을 둘러싼 미미한 마나의 파동을 감지한 것이다.
감각을 더 집중해 보니 놈의 심장 부근에 새겨진 세 개의 마나 고리까지 느껴졌다.
‘간도 크게, 감히 발렌티아 공작가에서 마법으로 변장을 하고 다닌다?’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타이니는 금세 표정을 관리했다.
“……뉘신지요?”
“아, 내가 소개를 안 했군. 렌들리 폰 나르사(Narsa) 남작일세. 발렌티아 공녀님의 성인식 손님으로 왔지.”
그런 손님이 백 명도 넘을 텐데.
하나 마나 한 자기소개를 들으니 더욱더 믿음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 두라고 했던가.
“……제게는 무슨 볼일이십니까, 남작님?”
적당히 떠보려고 웃는 얼굴로 말을 건네 봤는데, 사기꾼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내 들었다.
“아, 나는 그저 이상한 말을 하는 것 같길래 조언이나 좀 해 줄까 해서.”
“……예?”
“황금용의 핏줄이 얼어 죽을……. 뭐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았나? 그런 말은 최소한 주변 확인 정도는 하고 내뱉게, 꼬마 친구. 잘못하면 큰일 난다네.”
“……아!”
웃음을 연기하던 입꼬리에 경련이 일어날 뻔했다.
“흠, 흠. 확실히 그렇겠군요. 조언 감사합니다.”
“뭘, 안 그래도 기사를 때려눕혔다는 소년의 소문을 듣고 좀 만나 보고 싶기는 했네. 검은 머리, 검은 눈이면…… 우리 친구 말고 다른 사람이 있지는 않겠지?”
그러고 보니 처음부터 꼬마 ‘기사’라고 불렀던가.
‘내게 볼일이 있는 게 맞군?’
다시금 경계심이 생겼지만, 굳이 티를 내지는 않았다.
“네, 제가 맞는 것 같군요. 그런데 그에 관해서는 딱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안 그래도 제가 멋모르고 벌인 일 때문에 신세를 지고 있는 집안에 민폐를 끼치고 있는 것 같거든요.”
어물쩍 넘어가려 했는데, 렌들리는 오히려 흥미로운 듯 눈을 빛냈다.
“거참, 말투는 완전히 어른 같은데. 멋모르고 벌인 일이라…… 게다가 신세를 지고 있는 집안이라니? 듣자 하니 발렌티아 소속이 아닌가 보군?”
“……거기까지는 소문을 못 들으셨나 보군요. 예, 일단은 그냥 식객입니다.”
“오호, 그런가? 발렌티아 공작이 생각 외로 보는 눈이 없나 보군. 자네 같은 친구를 그냥 두다니…….”
발렌티아 공작……? 공작이 네 친구냐?
“여기서는 황실 욕보다 방금 남작님의 말씀이 더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만?”
“아……. 아하하, 그렇지. 이거 내가 한 방 먹었는걸. 그럼, 우리 비긴 건가?”
참나, 비기긴 뭘 비겨.
“좋아, 서로 조언을 주고받았으면 친구라고 할 만하지. 내가 오늘 우리 꼬마 기사님이랑 친구가 된 기념으로 저녁을 사고 싶은데, 어떤가?”
“……예?”
어랍쇼? 친구……? 누구 마음대로?
“아, 하하……. 치, 친구요?”
“사양할 필요 없네. 기사가 되어서 너무 부끄럼이 많거나 소심하면 안 돼. 이 형님하고 화끈하게 놀아 보자고.”
……오늘 무슨 마가 꼈나?
“아, 물론 내가 발렌티노는 잘 모르지만, 사내 간의 의리에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그렇지 않나, 동생?”
아, 이 새끼 강적이다.
발렌티아의 삼남 이상으로 제멋대로인 렌들리의 말에 타이니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오늘 만난 놈들은 어째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그냥 두들겨 패고 정체를 알아볼까?’
냅다 후려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 손이 저절로 움찔거렸다.
– 민폐? 아니, 오히려 잘했다. 그래도 한동안은 절대 자중하거라. 수습을 해야 하니까.
문득 떠오른 공작의 당부만 아니었어도, 분명 주먹부터 나갔을 것이다.
‘……너 운 좋은 줄 알아라.’
조금만 더 지켜보자.
렌들리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작을 보며 눈을 가늘게 뜬 타이니가 움찔거리던 손을 풀려고 하는데.
“그런데 듣기로는 네가 클로이 공녀님과도 친하다던데, 혹시 공녀님과도 만날 수…….”
그럼 그렇지!
사기꾼 녀석의 시커먼 속을 확인한 순간, 타이니의 손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짜아악.
“……꿱!?”
단숨에 올려붙여 버린 따귀.
독특한 비명과 함께 역동적으로 반 바퀴를 회전하며 엎어지는 녀석의 모습과 손에서 전해지는 경쾌한 타격감이 후련함을 선사했다.
동시에 아차 싶은 생각이 교차하는데.
스으윽.
“감히……!”
그 순간, 목 앞에 웬 칼날이 들어와 있었다.
‘이런……!’
쩡!
반사적으로 전개한 철신갑이 칼을 밀어 냈지만, 목에 가느다란 상처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무엄한 손부터 잘라 주마, 꼬마.”
어디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는지 모를 중년의 기사가 자신을 향해 검을 치켜드는 모습이 보이는 순간, 전신을 옭아매는 강력한 기세가 느껴졌다.
마나의 힘만으로 공간을 장악하는 힘이라니, 이건 분명…….
‘챌린저급!?’
이런 강자가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거지?
깊게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웬 놈이냐!!?”
위기감을 느낀 타이니는 들으라는 듯 대뜸 고함을 질렀고, 동시에 마나를 급속도로 끌어 올려 자신을 속박하는 기세를 억지로 풀어냈다.
파아아앙.
그에 중년 기사의 얼굴이 한층 더 험악해지고.
“크르르르르.”
그 순간 소환된 월랑이 이제 체고만 1.5m에 가까운 위압적인 덩치를 드러내며 기사의 뒤를 점했다.
“뭐야? 정령술사였나?”
당황한 목소리와 함께 기사의 기세가 흔들리는 순간.
‘빈틈!’
무기가 없다고 해서 월랑에게만 맡겨 놓을 수는 없었다.
순간적으로 몸을 낮춘 타이니가 기사를 향해 바람처럼 달려들었다.
“컹!”
동시에 그 뒤를 덮치는 월랑.
앞뒤로 퍼부어지는 공세 속에서 기사의 검이 붉은 기운을 뿜어냈다.
동시에 그의 몸이 환상처럼 둘로 갈라지며, 검이 앞뒤로 빠르게 휘둘러졌다.
콰아아아앙!
“큭!”
쩌어억.
“아오오오!”
붉은 기운을 간신히 쳐 낸 타이니가 주르륵 밀려나며 입가에 흐른 피를 닦아 냈고, 그 크기가 무색하게 가볍게 튕겨 나가 버린 월랑의 옆구리가 주욱 갈라졌다가 빠르게 다시 붙었다.
단 한 번의 격돌에 이미 승부가 판가름 난 상황.
“큭!? 어떻게……!?”
하지만 기사는 그 결과도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다시금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며 검을 높이 쳐들었다.
그런데 그때.
“머, 멈춰, 익실란! 내, 내 잘못이다!!”
한쪽 뺨이 흉하게 부어오른 렌들리가 급하게 소리를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