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45
45화. 감찰관?
“하아, 한번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요, 타이니 군.”
자신을 제나스라 소개한 단정한 신사의 말에 타이니는 고개를 푹 숙였다.
공작이 극찬한 천재를 처음 대면한 거지만, 당장은 그에게서 느껴지는 경지 따위를 감상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그냥 수상하다고 생각해서……. 죄송합니다.”
“뭐,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분도 너그러이 용서한다고 하셨으니, 이번은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다만!”
경고하듯 검지를 들어 올린 은발의 청년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 가지만 명심하세요. 우리 발렌티아는 절대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니, 이 안에서 마법적 변장을 하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이미 허락을 받은 겁니다. 아시겠죠?”
아닌 경우도 분명 있을 텐데.
……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조금만 더 신중하게 행동해 주시고요. 가능하죠?”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래요. 타이니 군한테는 기대가 커요. 조금만 진중해지면 정말로 큰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각하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에이, 그 양반이 그랬을 리가.
이번에도 마음의 소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제나스의 부드럽고 공손한 어조에는 삐딱한 성격의 그조차 쉽게 대들 수 없는 위압감이 어려 있었다.
‘단순히 무재가 뛰어나다는 게 아니었군.’
지나치게 단정해 보이는 차림 때문인지 몰라도, 사람 자체가 품격이 있어 보인다고 할까.
적어도 사람을 철탑 지붕에서 집어 던지는 가혹 행위를 수련이라고 우기는 공작보다는 확실히 교양 있어 보였다.
“좋아요, 그럼 난 바빠서 이만.”
“저어…… 여쭙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네?”
“그 렌들리라는 분, 대체 정체가 뭡니까?”
그 질문에는 내내 여유롭던 제나스의 얼굴도 살짝 굳어졌다.
“아…… 하하, 아직은 대외비라서요. 그건 말해 줄 수 없겠어요. 이해해 주길 바라요.”
“황실 사람입니까?”
움찔.
추측이 정곡을 찌른 듯, 제나스의 품위 넘치던 표정에 처음으로 금이 갔다.
그러나 곧 아차 싶은 듯한 얼굴로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건, 내가 실수했네요.”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는데……. 자기 자신에게 유독 엄격한 스타일인가.
“하긴 뭐, 그 기사 분을 보면 추론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많지는 않지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대외적으로는 비밀이랍니다. 절대로 다른 데서 말하면 안 돼요. 아시겠죠, 타이니 군?”
속으로 제나스에 대한 평가를 수정하면서도 타이니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물론입니다.”
어차피 그냥 확인차 물어본 것일 뿐이었다.
‘황태자와 결혼한다는 것도 알고 있는 마당에, 무슨…….’
게다가 전생을 아는 것과는 별개로, 챌린저급 기사를 호위로 데리고 다니는 남자의 정체를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분 단위로 일정이 짜여 있는 황태자가 직접 오지는 못했을 테니.
‘아마 황실 감찰관이겠지.’
챌린저급을 호위로 데리고 다니는 것을 보면 그중에서도 지위가 높은 편일 것이다.
‘클로이의 성년식은 황태자의 약혼녀 발표식이기도 하니까.’
그 핏줄 숭배 변태들이 몰래 이것저것 조사하고 다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터였다.
다만, 약간 마음에 걸리는 점은 있었다.
바로 그 악명 높은 황실 감찰관 소속답지 않게 타이니의 잘못을 관대하게 넘어가 줬다는 것.
문득, 위협적인 붉은빛이 넘실거리는 마나블레이드가 제게 엄습하던 순간이 다시 떠올랐다.
실로 오랜만에 등골이 서늘해지는 경험이었는데.
– 머, 멈춰, 익실란! 내, 내 잘못이다!!
‘자존심으로 똘똘 뭉쳤을 감찰관 놈이 날 용서해 줬다고? 발렌티아 때문인가? 난 공작가와 관계없다고 직접 말하기까지 했는데?’
뭐, 미친놈들 소굴에도 한 명쯤은 정상인이 있기 마련이니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설령 정말 발렌티아 공작가 때문이었든, 혹은 그저 본인이 쪽팔려서 넘어간 거였든 간에 같은 사유로 다시 시비를 걸지는 못할 것이다.
적어도 성년식 전까지는.
‘그 뒤에는 바로 카룬으로 가 버리면…….’
생각이 너무 길었던 걸까.
“……셨으니, 음? 타이니 군?”
제나스의 의아한 눈빛과 마주친 순간, 타이니는 실수를 자각하며 바로 고개를 숙였다.
“아, 죄송합니다. 잠깐 딴생각을 했습니다.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흠……. 그분께서도 타이니 군을 좋게 보셨다는 말이에요. 공녀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오히려 기특했다고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아…… 네.”
“그분의 부상이 커서, 치료가 끝난 뒤에 다시 타이니 군을 찾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정중하게 예의를 갖춰 주세요. 알겠죠?”
“예, 물론이죠.”
음, 좀 더 일찍 튀어야겠다.
타이니는 속으로 다짐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제나스와의 면담을 마친 후, 거처로 향하던 타이니는 또 한바탕 소동을 겪어야 했다.
“어떻게 된 거야, 타이니!? 월랑은 갑자기 왜? 위험했던 거야? 제나스 오빠는 또 널 왜 만난 거고?!”
월랑이 갑자기 사라진 탓에 자신을 찾아온 클로이를 진정시키느라 진을 빼다 보니, 그날의 일은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성년식 당일, 그 남자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일주일 뒤,
클로이 폰 발렌티아의 성년식이 시작되는 날.
내성의 영주관 앞은 수많은 인파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마치 평민들이 찾는 시장과도 같은 풍경.
하지만 그들은 모두 제국의 귀족과 그 호위들이었으니, 새삼 발렌티아 가문의 성세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물론 발렌티아의 위엄이 돋보이는 부분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정말일까요? 약혼자가 그…….”
“그러니까 이렇게 귀족이란 귀족은 죄 몰렸겠지요. 로히터가 온 것만 봐도…….”
“네? 로히터는 안 보이는데요?”
“아직 못 들었습니까? 그 아이한테 맞아서…….”
“예?”
웅성웅성.
“줄을 서십시오! 자리는 모두 지정석이니, 성을 확인하고 착석해주시면 됩니다!”
“천천히, 천천히! 품위를 지켜 주십시오!”
기사들의 안내를 받으며 귀족답지 않게 부대끼는 것을 감수하며 차례차례 영주관 안으로 들어선 사람들은 이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탄성을 내뱉었다.
“오!”
“허어!”
“과연, 발렌티아……!”
화려한 꽃으로 장식된 입구에서부터 이어진 길에는 양탄자 대신 색색의 꽃잎이 가득 쌓여 있어 푹신한 감촉을 전해 주었고, 대전 곳곳에 세워진 기둥은 은은한 광채를 흩뿌리는 꽃 넝쿨로 장식되어 아름다움을 한층 더해 주었다.
그 꽃길 사이로 틈틈이 보이는 조각과 그림들은 예술에 조예가 없는 사람들이 보기에도 충분히 멋들어져, 마치 하나의 거대한 작품처럼 보였다.
그리고 대전의 한가운데, 오늘의 주인공이 걷게 될 로즈웨이(Rose way)의 좌우로는 온갖 진귀한 음식들이 차려져 시각뿐만이 아니라 후각까지 홀리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대전의 위쪽으로 난 창문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빛살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의 한가운데가 아니라 천상계의 동산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하…….”
“음식과 꽃, 미술품…… 모든 게 기가 막힐 정도로 어울리는군요.”
“하나하나가 개성이 있는데, 그것들의 조화까지 생각한 것 같아요.”
“……돈이 얼마나 들었을까요?”
“씁, 천박하긴…….”
쏟아지는 감탄사를 들으며, 장내의 움직임을 관리하고 있던 제나스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몇 달간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차오르는 뿌듯함에 대전을 슥 둘러본 그의 머릿속에 오늘의 주인공, 클로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이 성년식을 할 무렵 태어났던, 너무나도 자그맣고 귀여웠던 아기가 숙녀로 자라는 모든 과정이 찬찬히 재생되는 듯했다.
‘공녀님, 아니…… 내 동생, 클로이. 오늘을 네 인생에서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날로 만들어 줄게.’
오빠라고 불리지만 동생이라곤 부르지 못하는 신분의 차이가 있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서로를 가족이라 생각하는 마음만은 같기에, 공녀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그에게도 오늘은 충분히 기쁜 날이었다.
그가 그렇게 감상에 젖어 있는데.
와구와구.
쩝쩝.
찹찹.
“와, 이거 맛있네요! 제나스 경, 이 요리 이름이 뭔가요?”
검은 머리 애새끼 하나가 그 기쁘고 뿌듯한 감상을 자꾸 깨트렸다.
“하하, 작작 좀…….”
……처먹어!
순간적으로 욱하는 마음에 하마터면 비속어를 내뱉을 뻔했다.
후우우.
‘진정하자, 제나스……. 모든 것은 완벽해. 잘 진행되고 있어.’
그렇게 스스로 마음을 다독여 보지만.
“캬아, 끝내준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어어, 여기요! 여기 이것 좀 하나…… 아니, 세 접시만 더 가져다주세요.”
구석의 식탁 하나를 홀로 차지하고 앉아 접시의 탑을 쌓는 놈을 보는 순간 다시금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니…… 아니다.
‘식충이 한 마리가 물을 흐릴 수는 없어.’
그래, 준비는 충분하다.
“흠, 흠……. 아, 타이니군. 조금 천천히 먹어도 돼요. 음식은 충분하거든요.”
애써 침착을 되찾고 어른의 여유를 보여 주는데.
“처처이 머꺼 있는…… 꿀꺽…… 데요?”
양손으로 입 안에 고기를 쑤셔 넣는 녀석의 꼴을 보니 없던 화도 치밀 지경이었다.
까드득.
스스로 이를 갈았다는 사실에 놀라고, 저 조그마한 덩치로 그 많은 음식을 먹어 치우는 진풍경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러다 결국.
“……하하, 턱을 뽀개 버리기 전에 그만 처먹어.”
더 이상 참지 못한 분노가 이성을 뚫고 욕설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나마 주변의 상황을 잊을 정도로 이성이 끊기지는 않은 덕에 목소리라도 작은 게 다행이었다.
그러나 소년의 반응은 미미했다.
“……예?”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눈을 끔뻑거리는 소년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양심만 쑤시는 듯했다.
‘……그래, 한창 많이 먹을 나이이긴 하지.’
애가 먹는 걸 가지고 욕을 하다니.
물론 좀…… 아니, 상당히 비상식적인 양이긴 했지만.
‘나는 아직도 수양이 부족하구나.’
다시금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는 제나스였다.
“아, 아니에요. 내가 요즘 피곤해서……. 타이니 군, 음식은 조금 이따가 더 먹고, 주변 정리 좀 도와주겠어요?”
“좀 전에는 저 보고 여기 있으라고 하셨잖아요?”
‘그거야…….’
그래, 그랬지. 젠장!
공녀의 기사 비비안의 요청에 의한 깜짝 이벤트. 그 주인공이 이 꼬마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저 딴 데 가요?”
“아, 아닙니다. 곧 식이 시작될 테니, 여기 있어요.”
“예. 그렇다면야!”
우적우적, 쩝쩝.
‘끄응.’
참으로 맛깔나게 다시 식사를 시작하는 꼬마를 보니, 간신히 삭였던 분이 다시 올라오는 듯했다.
손을 부들부들 떨던 제나스가 결국 고개를 돌려 버리는 순간.
“하하. 꼬마 기사님, 바쁜 제나스 경 힘들게 하지 말고 나와 얘기나 좀 하지.”
아직은 낯선, 하지만 분명 들어 본 듯한 목소리가 식사에 여념이 없던 타이니의 귀를 파고 들었다.
‘……얼라?’
많이 먹다 보니 식탐도 늘었는지, 전생에도 잘 먹어 보지 못한 맛있는 음식들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게다가 먹으면 먹을수록 마나도 같이 성장하니, 굳이 참을 필요도 없었다.
중간에 제나스가 욕을 한 것 같기도 했지만, 아마 착각일 것이다.
짧은 기간이나마 겪어 본 그는 그야말로 신사 중의 신사였으니, 그런 저질스러운 말을 입에 올릴 리 없다.
아마 주변의 소음이 겹쳐 잘못 들은 것이겠지.
‘지금은 딱히 할 일도 없는데, 먹기나 하자.’
솔직히 눈앞에 보이는 화려한 정경보다는 내일 조율이 끝나면 드디어 얻게 될 아티팩트, 스탬프에 대한 관심이 더 컸으니까.
그렇게 다시금 음식에 집중하려던 와중에 방해꾼의 목소리가 들려 온 것이었으니, 당연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게다가 의문스러운 점도 있었다.
‘감찰관도 파티에 참석하나?’
절로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지만.
– ……그때는 정중하게 예의를 갖춰 주세요. 알겠죠?
제나스의 당부를 떠올린 타이니는 이내 웃으며 렌들리를 맞이했다.
“그때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너그러이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나 용서한 게 아니더라도 지금 화내면 넌 쫌생이다, 라는 뜻을 담은 인사였다.
그러자 렌들리는 제나스와 눈인사만 나누고는 다시 타이니를 향해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초면에 과한 요구를 한 것인데 당연하지. 오히려 그 결단력 있는 행동에 감탄했다네, 꼬마 친구. 내가 또 무례한 말이나 행동을 한다면, 지난번처럼 때려 줘도 상관없네. 내겐 그래 주는 사람이 없어서 꽤 신선했거든.”
……뭐지? 이 새끼 변탠가?
설마 맞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
온갖 이상한 상상을 떠올리게 만드는 답변에 순간 식욕이 뚝 떨어졌다.
“아…… 예. 하하, 그러시구나. 하하, 취향은 존중합니다.”
“취향?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뜻이 통했다면 됐네. 나는 우리 사이가 좀 더 가까워졌으면 좋겠어. 세상에 우리 꼬마 친구 같은 인재가…….”
뒷얘기는 굳이 더 듣고 싶지도 않았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저도 모르게 소름이 끼쳤으니까.
‘어으, 나, 나는 그런 쪽엔 취미 없단 말야…….’
타이니가 몸을 부르르 떨며 자연스레 슬쩍 멀어지는데.
– 오늘의 주인공이신 클로이 폰 발렌티아 공녀님과 그 가족분들이 입장하십니다!
바깥에서 잔치의 주인공을 소개하는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