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457
457화. 인류의 구원자?
“황후 마마, 여기 지시하신 자료입니다.”
“수고했어요.”
“그런데 이런 말씀 외람되오나, 이 시점에서 왜 그런 자료를……? 아, 주제넘었습니다. 용서를…….”
“됐어요. 돌아가 봐요.”
클로이는 관리가 전해 준 자료를 읽으며 가볍게 손짓했다.
쿵.
조용히 물러난 관리가 문을 닫고 침전을 나서자, 넓은 방 안에 침묵의 시간이 찾아왔다.
스륵.
오직 클로이가 서류를 넘기는 작은 소리만이 울려 퍼지던 가운데.
잠시 후, 갑작스레 방문이 벌컥 열렸다.
쾅.
“마마!!”
허락도 없이 황후 침전의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는 것은 황궁에 딱 두 사람.
그중 한 사람인 호위 기사 비비안이, 상기된 안색으로 뛰어 들어왔다.
“중부에서 수백만의 생명을 앗아 간 칠죄종이, 마침내 토벌되었다고 합니다!”
“오……!”
그 순간 클로이 역시 탄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누가? 어떻게!?”
“타이니와 성령 기사, 그리고 성기사단의 공이랍니다!”
“또 그 아이라고?”
“푸하하. 이젠 아이라고 하기엔 너무 크지요, 마마. 거의 2m에 가깝다고 하던데요?”
오랜만에 웃는 호위 기사 비비안의 말에 클로이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 귀엽던 아이가 갑자기 확 자라서 나타났을 때의 충격이 다시 기억났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거기서 더 커졌다고 하니, 광휘의 기사의 위명을 들으면서도 잘 실감이 되지 않았다.
“참 당돌하고 귀여운 꼬마 아이였는데…….”
그 말에, 그녀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준 비비안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지금 광휘의 기사에게 그런 말을 하는 분은 마마뿐이실 겁니다.”
“그래, 그렇지. 하지만 너도 기억하잖아, 비비안? 그 아이의 예전 모습을…….”
오랜만에 찾아온 반가운 소식에 웃으며 말을 잇던 클로이는, 이내 눈에 들어오는 붉은 머리 여기사의 모습을 직시하며 말끝을 흐렸다.
언제나 활력이 넘치다 못해 장난기마저 비쳐 보였던 눈빛과 젖살이 채 안 빠져 살짝 통통한 체형으로 기억하던 오랜 친구의 모습이, 새삼 새롭게 보였으니까.
“왜 그러시죠, 마마?”
지금 그녀의 푸른 눈은 아주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한결 갸름해진 얼굴에는 소녀티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는 발랄하다기보다는 든든해진 친구, 호위 기사의 모습이 지나간 세월을 새삼 실감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냥, 새삼 많은 것이 변한 것 같아서…….”
아마 나도…….
“마마는 여전히 아름다우세요.”
살짝 무거워진 그녀의 말투에, 비비안이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당연하지. 아직 한창때니까!”
당당히 턱을 들고 소리치는 클로이의 모습에 비비안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아기씨도 마마의 그 모습을 닮아야 할 텐데요.”
그 말에 살짝 움찔한 클로이가 자신도 모르게 아직 불러 오지 않은 배를 쓰다듬었다.
“아직은 뭐, 딸인지 아들인지도 모르는데.”
“전 딸이었으면 좋겠거든요.”
“……왜?”
“어렸을 때의 아가씨……. 아니, 마마 같은 아이가 있으면 제 황궁 생활이 덜 외로울 것 같아서?”
다소 장난스럽게 내뱉은 대답에, 웃고 있던 클로이의 표정이 살짝 흐려졌다.
“……음. 그, 내, 내가 어떻게든 제나스 오빠를……. 아, 아니지. 그럼 내 호위 기사직부터 내보내야 하나? 아니면 제나스 경을 황궁으로…….”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횡설수설하자, 괜한 농담을 꺼낸 비비안도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농담! 농담이에요, 마마!”
“아, 그래도…….”
“한창 마족과 싸우고 계신 북풍의 기사를 저 때문에 황궁으로 불러들여요? 그러다 제가 천벌 받아요, 마마. 진정하세요.”
“……응. 미안.”
“그리고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그분은 저한테 관심도 없다니까요.”
“어,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예?”
순간적으로 비비안의 눈이 빛났다.
그녀가 항상 해 오던 생각.
‘혹시나…….’
혼자서 수년간 마음에 품어 오던 임이 혹시 나를?
그런 기대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클로이는 그 눈빛에 호응해 주지 않았다.
흥.
“……뭐, 이건 후일을 위한 즐거움으로 남겨 둘래.”
“마마!! 이러실 거예요!?”
“뭐래? 외롭다고 내 마음에 상처 줘 놓고.”
“아이 씨, 진짜! 그냥 농담이잖아요!”
“그럼, 나도 농담이었어.”
“마마!”
다시 버럭 소리를 지르는 비비안을 보며 클로이는 혀를 삐쭉 내밀었다.
이런 장난을 칠 때면 공작가에 있던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아서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그렇게 변치 않고 있어 줘, 비비안. 내가 어떻게든 제나스 오빠와 연결시켜 줄 테니까.’
7살 많은 언니이자, 그런 티가 나지 않는 친구.
어린 시절부터 쭉 자신의 곁을 지켜 준 보호자이자, 왠지 손이 많이 가는 동생 같은 언니.
비비안이 행복하길, 그녀는 진심으로 바랐다.
그리고 가능하면 이 모든 재앙이 빨리 끝나고, 모두가 예전으로 돌아가는 날이 오기를.
한참 뒤에 태어날 자신의 아이가, 평화로운 세상에서 첫울음을 터트리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가능하겠지요? 여신이시여…….’
그렇게 신을 떠올리고 묻는 것만으로 그녀의 몸에서 후광이 뻗어 나왔다.
정식으로 축문을 읊지 않아도 뻗어 나오는 신성력.
그것은 신전에서 공작가의 영애였던 그녀를 왜 사제로 들이려고 애를 썼는지 보여 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물론 이제 여신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아니, 말을 하다 말고 기도를…….”
대신 투덜거리는 친구의 목소리는 곁에 있다.
이 행복을 가능한 한 오래 이어 가고 싶었다.
그러자면…….
“어? 마마, 근데 이건 뭐예요?”
“아, 타이니와 루나 양 가문에 대해서 나름 조사를 해 본 거야.”
“모르스 가문이요? 왜요?”
“왜긴? 인류를 위해 노력하는 초인들의 가문을 복권만 시키고 아무것도 안 해 줬잖아. 과거에 땅이 있었다면 돌려주고, 해 줄 수 있는 건 다 해 주고 싶어서…….”
“그걸 폐하께서 하시지 않고 왜……?”
“폐하께서는 바쁘시잖아. 지금 너도 거기서 뛰어온 거 아냐?”
“……그렇긴 하죠.”
제국의 재정을 쥐어짜는 보급과 중부 지방의 재앙.
그 모든 손실을 어떻게든 메꾸고 전선을 유지하려 하는 황제와 관리들의 노력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곁에 있는 이들은 피부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도 돕고 싶었는데…….”
“홑몸도 아니신 분이 무슨 말씀이세요! 폐하께서는 마마와 아이 생각만 하면서 버틴다고 하셨단 말이에요!!”
“아, 알아. 안다고. 그래도…….”
비비안은 좀 전까지 자신이 투정을 부렸던 것도 잊어버린 채 클로이를 토닥이기 바빴다.
그렇게 화제가 넘어가는가 싶더니, 비비안의 입에서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아, 그리고 이번에 타이니가 오러마스터가 됐다는 말이 들려왔어요.”
“뭐? 진짜? 그 전설의……?”
“예. 근데, 그 생각지도 못한 말도 같이 전해져 왔어요.”
“응?”
“오러마스터가 되는 데에, 업적과 추앙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야? 업적과 추앙?”
“그게, 이건 타이니가 일부러 전달한 말인 것 같은데…….”
그렇게 비비안은 사람이 신성을 얻기 위한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풀어놓기 시작했다.
타이니는 인류 최고 강자들에게 그 방법을 고스란히 공유한 바 있었으니.
검제나 크롬벨, 저릭처럼 오러익시더의 극에 달한 강자들이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오러마스터에 오를 수도 있으리란 기대에서 정보를 전한 거였다.
그러나, 거기엔 생각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
“……지금은 타이니의 이름만 너무 크지 않아?”
“그러니까요. 그 말이 다 사실이라고 해도, 요즘은 12대 기사라는 말보다, 광휘의 기사와 동료들이라고 불리는 실정이니까요.”
전선의 상황을 비교적 상세히 알 수 있는 클로이와 비비안까지 그리 생각할 정도니, 대중의 생각은 조사해 보나 마나였다.
“그렇다고 타이니의 활약을 폄하할 수도 없을 거 아냐.”
“그렇죠. 이번에 질투인가 하는 칠죄종을 잡으면서 더 커졌답니다. 한때 타이니를 이단 취급했던 성기사들이 헹가래를 해 주고 있다는데요.”
“그 정도야?”
“예. 그래서 황제 폐하께서도 여론 조작은 포기하자고 하셨어요. 억지로 조작해 봤자 부작용만 생길 수 있을 거라고요.”
그 말을 끝으로 잠시간 대화가 끊겼다.
그들이 알던 작은 소년이 지금 세상에서 얼마나 큰사람이 되어 있는지, 다시금 실감이 나는 순간이었으니까.
그러다가.
“그럼, 아예 타이니의 이름을 더 키워 버리는 건 어때?”
“……예?”
클로이의 입에서 나온 말에 비비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타이니는 이미 오러마스터라는데요?”
“같은 오러마스터라도 그 경지 안에서 차이가 있을 거 아냐. 기사들은 다 그렇잖아. 동일한 경지 내에서도 수준이 다르다며? 특히 높은 경지일수록.”
“아…….”
그 말에 비비안은 고정 관념이 팍하고 깨어져 나가는 듯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기사나 혹은 기사에 대해 관심이 있는 이들에겐 전설에 나오는 신의 기사, 오러마스터들에 대한 이미지는 단 하나뿐이었다.
최강.
이미 더는 강해질 수 없는, 그야말로 인간의 극.
그랬기에 그녀는 클로이가 말한 단순한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업적이야 조작할 수 없는 거라 쳐도, 소문은 훨씬 크게 낼 수 있잖아. 추앙이라는 거, 사람들이 타이니의 이름을 더 우러러보면 되는 거잖아?”
“그렇……죠?”
“그럼 그런 사람이 많아질수록, 타이니가 더 강해지는 거잖아?”
“그럴……까요?”
비비안의 표정이 애매하게 변했다.
그 누구도 오러마스터를 직접 본 적이 없으니 확신할 수는 없지만,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도 아닌 것 같았다.
“적어도 예산을 크게 낭비할 일은 없을 거야. 해 봐서 나쁠 일은 없겠지.”
“이미 광휘의 기사라는 이름이 황제 폐하보다 유명해지고 있는데요. 과연…….”
“그분은 그런 걸로 속 좁게 구실 분이 아니야. 해 보자. 일단은 우리끼리 시종들에게 소문을 뿌리고, 폐하께 승인받는 즉시 용의 눈도 동원해서 더 확산시키면 돼. 돈도 별로 안 들 거야. 지금은 그걸 강조해.”
클로이의 눈빛을 보아하니, 이미 그 계획에 꽂혀 있는 듯했다.
그리고 비비안이 보기에도 시도해서 나쁠 건 없어 보이는 일이었다.
“……예. 보고하겠습니다.”
“바로 가, 바로! 그리고 난 황궁 시종들한테부터 주변에 전하라고 말을 할 테니까.”
“그렇게까지요?”
“더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최전선에서 싸우는 영웅에게 할 수 있는 보상이 이런 것뿐인데, 할 수 있는 거라도 해야지.”
땡땡땡.
클로이는 이미 마음을 정한 듯, 방 안의 황금 줄을 당겨 대기 중인 시종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돌아서려던 비비안은.
‘아차, 제나스 님.’
이내 까맣게 잊고 있었던 클로이의 말을 떠올리며 황급히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마……!”
“왜? 다른 아이디어라도 생각났어?”
인류를 위해 싸우는 용사에게 힘을 보태 주자.
그 대의를 위해 눈을 빛내는 황후를 보며 차마 자신의 짝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아니요. 힘내시라고요.”
“그래. 너도.”
“……예.”
조금은 힘없이 돌아선 비비안.
하지만 그날부터, 아스란 제국의 수도 아세리안에서는 황궁의 여시종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소문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종들의 입소문으로 시작된 그 소문은, 처음 아이디어를 낸 클로이나 비비안의 생각보다 더 빠르게 세상에 번져 나갔다.
신화시대 이후 최강의 영웅, 광휘의 기사가 마족들을 때려잡으며 인류를 구원하고 있다.
현실에 근거한 소문이 점차 조금씩 부풀려지더니.
이내.
광휘의 기사는 전투의 신. 그가 참여하는 전장은 무조건 승리한다.
여신의 곁에 설 자격이 있는 유일한 인간이다!
광휘의 기사, 타이니가 인류를 구원할 것이다!
이내 본인이 들었다면 황당해할 정도의 엄청난 소문까지 대륙을 휩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