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464
464화. 내가 하겠다
“……지금 구할 수 있는 분사형 초월무구가 이 불벼락뿐이라서 드린 부탁입니다만,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혹한의 마도사 아프만이 다소 놀란 표정으로 하이넨을 보며 되물었다.
하지만 불퉁한 얼굴의 드워프는 어딘지 찜찜해하면서도 이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그렇게 해서 이 위난을 이겨 내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그런 그의 시선은 왼손에 장착된 붉은 원통형 초월무구를 향해 있었다.
초연한 말과는 달리, 불벼락을 슬쩍 쓰다듬는 손길은 떨리고 있었다.
선조 대대로 이어받은 테그멘과는 달리, 이 불벼락은 그와 동료들이 젊음을 바쳐 만들어 낸 역작이었으니.
테그멘과 함께 첫 번째 망치에게 대대로 물려줄 만한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은 그의 인생 최대의 업적이었다.
그런데 그 업적을…….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개조하게 된다면 불벼락의 내구도가 급격히 소모될 것입니다.”
“……각오하고 있네.”
대답하는 하이넨의 흰 수염이 부르르 떨렸다.
“명색이 초인인데, 그 이름값은 해야지.”
그렇다. 이름값.
작금의 정세와는 별개로, 그는 다른 12대 기사들에게 전공에서 밀리는 현 상황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나는 드워프의 첫 번째 망치. 장인으로서는 반쪽짜리밖에 되지 못하는 내가, 전사로서도 반쪽 취급을 받아서는 안 돼.’
불벼락을 만들 때도 그는 실험체(?)와 아이디어를 제공했을 뿐이었으니, 사실상 그 업적은 동료들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단지 전사로서 긴 세월 테르티우스를 지켜 온 공로를 인정받아 첫 번째 망치로 불리는 것이다.
드워프의 최강자로서, 이대로 12대 기사 중 최하의 전공으로 마계 대전을 마감할 수는 없다.
‘절대.’
물론, 첫 번째 망치에게 대대로 물려줄 만한 초월무구 불벼락의 마개조를 단순히 자존심 때문에 허락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번뜩이는 직감은 이 모든 게 소용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 다 필요 없이. 전쟁은 끝난다. 괜히 불벼락만 망치는 거야.
하지만 긴 전쟁의 시간 동안 증명되었듯, 그의 직감으로 예상되는 결과는 높은 확률로 정반대였으니.
‘오히려 개조가 꼭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 생각을 하는 순간 그의 얼굴이 무참히 구겨졌다.
길게 이어진 마계 대전은, 3백 년을 넘게 살아온 고집불통의 드워프에게도 스스로의 직감이 항상 틀린다는 사실을 강제로 깨닫게 만든 것이다.
테르티우스에서 전쟁 물자 생산에 여념이 없을 비서이자 수양딸인 요한나가 보았다면 만세를 부를 만한 변화였지만, 하이넨의 심정은 참담하기만 했다.
그것을 깨닫는 일은 평생 동안 쌓아 온 자존심을 무너트리는 과정이었으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개조 후에는 잘해야 전장 한두 번…… 정말 길어야 세 번 정도나 버틸 겁니다. 정말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아프만의 그 말에 빙염의 마도사 티네스와 지진의 마도사 록펠러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더 짧은 예상 수명에 하이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얼마 전부터 마도사들이 미친 듯이 토론한 끝에 내놓은 그 수단은, 그토록 극단적인 대가를 요구했다.
하지만 하이넨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각오하고 있네.”
“인류를 대표해서 그 희생에 감사드립니다, 하이넨 님.”
“나 역시 인류 중 하나 아닌가? 그런 말 말게. 나도 우리 종족을 지키기 위함이니.”
12대 기사니 뭐니 하는 소리는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드워프에겐 전사는 있어도 기사라는 개념은 낯선 것이니까.
하지만 그 말이 약자를 지키는 자를 의미한다는 것만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불벼락은 원래 지하의 벌레들을 청소하기 위해 만들어진 거야. 이번에야말로 그 능력을 최대로 발휘해야 할 때야. 내가 오히려 부탁하겠네.”
“……알겠습니다.”
하이넨은 그렇게 마도사들 앞에서 결의를 굳혔고.
타이니가 에낙센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사흘 뒤의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현재.
“여기 있습니다.”
“……이거 내 팔보다 긴 거 같은데?”
하이넨은 테그멘을 탄 채로 장착해도 육중하게 느껴질 정도로 변한 불벼락을 보며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길쭉한 원통이 테크멘의 왼손 주먹에서 50cm는 더 튀어나와 있었던 것이다.
“이걸로 적을 찍어 버리라는 건가?”
쓴웃음을 지으며 꺼낸 농담에 아프만과 티네스가 똑같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말씀드렸던 조건을 채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부피를 더 줄이려면 시간이 필요했는데 아시다시피…….”
“그래, 그사이 벌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지. 알겠네. 요긴하게 씀세.”
“부디, 무사하십시오.”
“자네들도.”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자, 도시 이곳저곳에 포진한 병사들이 그들과 비슷한 인사를 서로에게 건네는 것이 보였다.
말세의 끝에서 마주하는 전장은, 그렇듯 살아남는 것만을 기원하게 만드는 처절한 현장이었다.
그리고 연합군의 내밀한 사정을 아는 하이넨에게는 그 모습들이 더욱 무겁게 다가왔다.
– 병사들의 사기를 꺾지 않기 위해 굳이 알리지는 않았습니다만, 적어도 각 종족의 대표들은 다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 중부에 나타난 칠죄종, 질투가 벌인 일의 여파로 보급이 2주 이상 밀릴 예정입니다. 물량은 서서히 티 안 나게 줄이고 있습니다만, 눈치 빠른 병사들은 이미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 각 왕실의 재정은 이미 파탄이 난 상태로 민간의 징발을 시작했고, 제국 또한 황실 재정이 박살 나기 직전입니다.
– 이 전쟁을 빨리 끝내지 않는다면, 인류는 패배하지 않아도 말라 죽게 될 겁니다.
굳이 부담을 주기 싫어 보고하지는 않았지만, 테르티우스의 무기 생산 공장도 이미 한계에 달한 상태로 알고 있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 그것도 되도록 빨리.’
검제의 말을 되새기며 하이넨은 다시 테그멘을 움직였다.
쿵.
그 어떤 생물보다 강력한 강철의 무장은 여느 때처럼 넘치는 힘을 제공했고.
개조된 불벼락은 수명을 갈아 넣는 대가로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화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벌레 군단과 그 군주, 그리고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는 나태를 처리하고 나면 그다음에는 드디어 모든 전쟁의 원흉인 마왕이 나온다.
‘최대치 세 번의 전장. 세 번이라…….’
하이넨이 왼손의 개조된 불벼락을 만지작거리며 다시금 마음속으로 결의를 다지는데.
이상하게도, 벌레들이 카룬에서 날아올랐다는 소식이 들린 지 몇 시간이 지나도록 해안가에 적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그의 귀에 들려온 것은.
“비상이랍니다! 총사령관께서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불길한 통보뿐이었다.
* * *
쏴아아아.
“진군하라!”
배 위에서 황금빛 갑옷을 입은 젊은 왕이 소리치자, 곁에 있던 병사들이 깃발과 북소리로 그 뜻을 아군에게 전달했다.
둥. 둥. 둥. 둥.
국왕이 탄 기함을 중심으로 좌우로 넓게 퍼지는 카룬의 배들.
군함과 상선을 가리지 않고 끌어모은 카룬의 선박 천여 척이 사람을 가득 태운 채 대륙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인류를 위해! 대륙의 마족들을 정벌하러 간다!!!”
현 시국을 아는 이라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국왕의 외침이 이어지고.
“우와아아아!”
그 외침에, 왕국의 오러유저인 암벽의 기사 리암을 비롯한 모든 기사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 외의 병사들이나 무기조차 없이 배에 떠밀려 탄 일반 시민들은, 그런 외침에도 그저 불안과 공포에 덜덜 떨 뿐이었다.
“엄마, 우리 어디 가?”
“아, 아가. 뒤에 보지 마, 절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게?”
“국왕 폐하께서 어째서…….”
기세등등한 젊은 왕과 기사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
그리고 그런 그들의 뒤쪽에는.
위이이이이이잉.
하늘을 새까맣게 채우며 날아오른 벌레들의 군단이 있었다.
지지지직.
뚝.
“이게 오늘 아침 카룬 앞바다에서 정령이 보내온 수정구 영상입니다. 보시다시피…….”
검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방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헨리 1세가 마족에게 홀린 건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암벽의 기사까지?”
“전투원이 아닌 일반 시민만 해도 20만은 돼 보입니다. 병사들은 그 일부일 뿐이에요. 저 배들 대부분은 전투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배지.”
마지막에 더해진 그리드의 말에 한순간 야전 막사에 침묵이 흘렀다.
“벌레라 해도 마족이라 이건가.”
“지독한 수를 쓰는군.”
“뭐, 따질 게 있습니까? 카룬의 상황이야 딱하지만, 적이라고 간주하고 싸워야죠.”
“그게 말이 되는 소립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시민들이 성으로 몰려오면 다 쏴 죽일 겁니까?”
“아니, 그럼 어쩌자는 겁니까? 저들을 위해 성벽을 열기라도 하자는 겁니까?”
“지금 그런 말을 하는 게…….”
다시금 막사 안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하자.
“모두 조용.”
검제의 몸에서 뿜어진 살기가 떠드는 이들의 입을 닥치게 만들었다.
그 상황에서 검제의 시선이 향한 곳은 세 명의 마도사 쪽이었다.
“보시다시피 국왕과 기사들은 이미 완전히 정신 지배를 당한 것 같습니다. 흑마법인 것 같은데……. 마도사님들, 저걸 해제할 방법이 있겠습니까?”
“……무슨 수인지는 모르겠는 데다가, 시간도 촉박합니다. 더구나 저기 리암 경은 최근에 오러유저가 된 초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러유저까지 홀릴 현혹이라면 풀 방법이 없습니다. 적어도 짧은 시간 내에는요.”
아프만이 냉정하게 결론을 내리는 순간 막사 안 여기저기서 침음성이 흘러나왔고, 검제는 그에 아랑곳없이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크롬벨 님? 혹시 저것도 무슨 방법이 있습니까?”
그에 모두의 시선이 창백한 안색의 용사에게 향하는데.
크롬벨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현혹은 색욕의 특기인데……. 모르겠군요. 어떻게 마충 군단이 사용하는지. 하지만 하나는 알 것 같습니다. 놈들이 저 인간들을 홀려서 데리고 온 목적이 뭔지.”
“그게 뭐죠?”
“마충 군단의 전투법은 애초에 전략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습니다. 공중을 날아다니니 성벽도 장애가 아니지요. 당연히 인질도 필요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저것은…….”
무언가 좋지 않은 것을 떠올린 듯, 크롬벨은 구겨진 안색으로 헛웃음을 짓더니 이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저 인류의 사기를 떨어트리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무슨 짓을 할지도 알 것 같군요.”
“뭡니까?”
“일단, 저기 저 배에 탄 인간들은 전부 죽은 목숨이라 보시면 됩니다.”
“예?”
“고대에도 그런 일이 있었지요. 그때는 색욕과 분노가 연합한 공세였습니다만…….”
크롬벨이 다시금 표정을 일그러트리자,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이 불길함을 느끼며 안색을 굳혔다.
그리고 그 불길함은 이어진 말을 통해 현실화되었다.
“당시 수십만의 피난민이 진형에 섞여 들어오더니, 일제히 신체의 모든 구멍으로 벌레들을 쏟아 내며 피를 토하고 죽었습니다.”
“헙!?”
“그에 성물과 마법으로 정신을 보호받던 병사들 대다수가 순수한 혐오감과 공포을 느껴 패닉에 빠져들면서 전선이 붕괴했었습니다. 아무래도 놈들은 그때의 일을 재현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색욕이 없어져서 다시 볼 일 없을 줄 알았는데.
그 마지막 중얼거림을 신경 쓰는 이가 없을 정도로, 크롬벨이 전한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허…….”
“젠장…….”
막사 안에 찬물을 쏟아부은 듯 냉기가 흘렀다.
하지만 크롬벨의 말은 그것으로도 끝이 아니었다.
“저들을 살릴 방법은 없습니다. 아니, 있어도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요. 그리고 우리에겐 그런 여유가 없습니다.”
“크롬벨 경 그 말은…….”
“아예 병사들이 보기 전에, 저 배들을 침몰시켜야 합니다. 가능한 한 모조리.”
그 말은 즉각적인 반발을 불렀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됩니다!”
“병사들의 사기를 유지시키기 위해섭니다.”
차가운 크롬벨의 단호한 말이 다시 싸늘한 분위기를 만들어 낼 때.
“……현혹된 카룬의 병력과 마충 군단의 방해를 뚫고 말이지요. 그것도 바다에서.”
검제가 현실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그때, 하이넨이 나섰다.
“내가 해 보리다. 멀리서 이 한 몸 태우고 비행할 정령 하나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예!?”
모두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볼 때, 하이넨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세계수의 수호자는 어디 있소? 그 대정령이라면 충분할 것 같은데.”
천여 척의 배를, 온갖 방해를 뚫고 침몰시키겠다?
무고한 시민들을 제 손으로 죽인 뒤의 정신적 타격을 감당하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어떻게 그게 가능할 것인지도 의문이었지만.
드워프족의 수장이자 12대 기사 중 하나인 하이넨의 말에는 그만한 무게가 있었으니, 더 이상 캐묻는 이는 없었다.
그러자 검제는 한숨과 함께 그의 말에 답했다.
“수호자님은 다른 임무가 있어 자리를 비웠습니다. 혹시 조금 수준이 낮은 새의 정령이라도 괜찮겠습니까?”
“뭐……. 그러면 내가 죽을 확률이 높아지겠지만, 누구든 해야 하지 않겠소?”
늙은 드워프의 억지웃음이, 막사에 다시금 침묵을 불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