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47
47화. 카룬으로
“놀라게 했다면 미안합니다, 공녀. 다만 이 또한 공녀를 위한 선물이었으면 했습니다. 부디 내 정성을 받아 주시겠어요?”
황태자가 클로이 앞에 무릎을 꿇으며 반지를 내밀었다.
그야말로 성년식의 정점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우와아!”
“허어.”
“황태자께서 어찌 직접…….”
황태자가 건넨 성년식 선물, 반지에 세공된 ‘루비의 눈물’은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는 특등급의 보석이었다.
더구나 그 안에 아른거리는 마나는 그것이 단순한 반지가 아닌 아티팩트임을 의미했으니, 그 가치가 얼마나 클지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였지만.
그조차 황태자 브레들리 반 아스란이 직접 등장한 사실에 묻혀 그다지 눈길을 끌지 못했다.
내정된 약혼자가 성년식에 직접 방문하는 것이야 종종 있는 일이었지만, 그것이 제국의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는 황태자라면 얘기가 다르니까.
“그럼 지금 제도에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황태자는?”
“그림자(Shadow) 중 하나겠지. 이거 정말 놀랍군.”
“굳이 이렇게까지……?”
“황실과 발렌티아가 더욱 가까워지겠어.”
“폐하의 뜻이 발렌티아에 있는 건가.”
“더 잘 보여야겠습니다, 이거…….”
웅성거림 속에서 클로이가 반지를 받아 들고 인사를 하던 그때, 타이니는 대전의 구석으로 숨어들려다가 덜미를 잡혔다.
“어딜 가나요? 타이니 군.”
제나스가 빙긋 웃으며 묻자 타이니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다가오는지도 몰랐는데.’
일전에 싸웠던 남작…… 아니, 황태자의 호위 기사보다도 더욱 은밀한 접근이었다.
아마 마나로 공간을 장악하는 챌린저의 수법이 무의식적으로 발현된 것이리라.
공작이 그를 왜 그리 극찬했는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는 그것이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아, 하하. 답답해서 잠시 바람 좀 쐴까 해서…….”
“이대로 도망치려는 것은 아니구요?”
“……아, 하하. 도, 도망은요. 무슨. 절 뭘로 보시고!”
그저 내 미래를 위해서라도 황태자와는 안 만나는 게 좋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진짜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타이니를 내려다보던 제나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용서하신다는 전하의 말씀은 정말입니다. 애초에 무리해서 발렌티아에 오신 사실부터가 비밀이었으니, 대외적으로 책잡힐 일은 없죠.”
……어째 사적으로는 잡힐 수 있다는 말로 들리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황태자의 싸대기를 찰지게 올려붙이지 않았던가.
‘그냥 내년에 황태자가 뒈지게 내버려 두는 게 나을…… 아니, 아니. 그렇게까지 가지는 말자. 대의는 잊지 말아야지.’
엄한 생각이 떠올라 자책하며 고개를 젓는데, 제나스가 말을 이었다.
“정말 괜찮습니다, 타이니 군. 설령 전하께서 유감이 있으시다고 해도, 우리 울타리 안에 있는 이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으실 겁니다.”
“네??”
“발렌티아와의 약혼은 황태자께서 황제 폐하의 뜻에 반하며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이거든요.”
“……그게 무슨?”
“원래 황실은 로히터 쪽을 원했습니다. 아무래도 주군께서 초인이 되신 이후에 꾸준히 견제를 받고 있었으니까요.”
“아…….”
설명을 들으니 그제야 상황이 이해가 갔다.
현 제국은 번성하고 있지만, 반대로 초인 전력은 백 년 내 최약인 상태.
타이니가 아는 미래대로라면, 십여 년 뒤 자신과 ‘사신’ 녀석이 오러유저가 되기 전까진 검제가 제국 유일의 오러유저였으니까.
홀로 군대도 상대할 수 있는 초인이기에 권력자가 견제하는 것도 당연했다. 같은 초인으로 취급받는 7서클의 마도사는 육체가 허약하다는 약점이라도 있지만, 오러유저는 그런 것도 없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는 타이니를 보면서 제나스가 재밌다는 듯 눈을 빛냈다.
“흠, 진짜 이 말만으로 이해했나 보네요? 여러모로 범상치 않은 아이라고 듣기는 했습니다만. 역시나…….”
아뿔싸, 너무 나댔나?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갈색 눈동자가 새삼 부담스러워졌지만, 이어진 말에는 귀가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하긴, 그러니까 주군께서 중책을 맡기신다고 하는 거겠죠.”
……중책?
“전 발렌티아 공작가에 소속될 생각이 없습니다만?”
그 말에도 제나스는 그저 씩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얌전히 성년식이 끝나길 기다리세요, 타이니 군. 황태자 전하께서는 바쁘신 분이니, 바로 황도로 돌아가실 겁니다. 그러고 나면 주군께서 타이니 군을 따로 부를 거예요.”
제나스의 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 황태자께서 복귀하신다.
화제로 가득했던 클로이의 성년식이 끝난 직후.
이미 해가 저물어 버린 밤하늘 아래서, 황태자는 어디서 숨어 있었는지 모를 기사 백여 명을 소환하여 발렌티아의 동문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직전에 그가 클로이에게 남긴 말은 귀족들의 입을 타고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 너무나도 보고 싶어서 다소 무리했습니다, 공녀. 일 년 뒤, 우리가 영원히 함께하게 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어둠이 내려앉은 발렌티아의 내성이 그 얘기로 다시금 왁자지껄해질 때.
타이니는 공작의 호출을 받았다.
* * *
“그 정령, 고마웠다. 덕분에 클로이의 긴장이 많이 풀린 것 같더구나. 보기도 좋았고.”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공작을 보니 일이 잘 풀린 것은 확실해 보였다.
물론, 이와 관련된 진짜 중요한 일은 내년이겠지만 말이다.
“별말씀을, 그런데 왜 지금 저를 보자고 하신 겁니까?”
“내일 바로 떠날 생각이지?”
“예, 이미 추천서는 받았으니까요.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그 전에 이걸 가져가거라.”
공작이 무심한 표정으로 툭 던져준 은패.
“뭡니까?”
발렌티아의 상징인 독수리 문양이 새겨진 은패였는데, 독수리가 온통 새까맣게 칠해져 있어서 까마귀처럼 보이기도 했다.
“카룬의 재앙을 막는 데에 내가 직접 관여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냥 두고 볼 수만도 없지 않겠느냐. 대외적으로는 알려지지 않은 가문의 전력을 이미 카룬에 집중시켜 놨다. 그 패는 그들의 수장임을 증명하는 신분패니까 절대 잃어버려선 안 된다.”
발렌티아 공작가 정도라면 알려지지 않은 전력이 있을 법도 했다.
다만 타이니는, 한 가지를 물어보고 싶었다.
“……혹시 그 이름이 블랙윙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죠?”
그 순간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던 공작의 얼굴에 살짝 금이 갔다.
“……왜? 이, 이상하냐?”
“아니, 뭐…… 일관성 있어서 좋네요.”
말과는 달리 피식 비웃음을 흘려 주니, 얼굴이 슬쩍 달아오른 공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끄응.”
그러나 속을 긁어 보려던 타이니의 기대와 달리, 공작은 짧은 신음과 함께 금방 분을 삭였다.
“블랙윙의 제일 강한 전력은 고작 블레이더급이다. 하지만 카룬 왕실에 대한 정보와 관련 인맥은 이미 형성되어 있을 테니. 만에 하나 일이 틀어진대도 네가 카룬 왕실에 들어갈 수는 있게 해 줄 것이다.”
“……혹시 모를 변수가 생겨 도움이 필요할 때 써먹으란 말씀이시군요.”
“그래, 금전적 도움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감사히 받아 두겠습니다. 그런데…… 이걸로 제가 공작가 소속이 되는 건 아니겠죠, 설마?”
슬쩍 다시 한번 공작을 찔러 보는 순간, 결국 공작이 폭발했다.
“이, 이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가! 호의는 그냥 호의로 받아들여!”
“폭력 반대! 그냥 해 본 농담, 농담…… 아악. 진짜! 볼, 볼 늘어나요!”
잠깐의 실랑이 끝에 타이니는 벌게진 양쪽 볼을 쓰다듬으며 공작을 째려보았다.
“왜? 더 늘려 줄까.”
“……아니요.”
진짜 성질머리하고는.
‘분명히 이십 년 사이에 성격이 크게 바뀐 거야, 젠장.’
제나스를 비롯한 공작가의 아들들에게 닥쳤을지 모르는 불행이 검제의 성정을 바꾼 게 아닐까 하는 심증이 점점 강해졌다.
“동원할 수 있는 무력이 약해서 조금 찝찝하긴 하다만, 이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마음 같아서는 제나스나 가렌, 드렉슬러라도 딸려 보내 주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외교적인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뭐, 이해합니다.”
사실, 블레이더급의 강자를 포함한 집단이라면 무력이 약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는 절대 아니다.
익스퍼트급에서 슈페리어와 겨루는 타이니가 특이한 경우인 것이지, 마나유저의 4단계, 블레이더급이라면 웬만한 왕국에서도 이름을 날릴 만한 강자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들이 대비해야 하는 것은 미래에 인류 전체를 위협할 재앙들.
그 재앙들 앞에서는 블레이더급도 ‘고작’이라 칭할 만했다.
“성물이 사라지는 것을 막는 것이 최우선이다. 그리고 그 크라켄의 출현도 마음에 걸리니, 그것도 조사해 봐야겠지.”
“타이밍이 너무 공교롭긴 하죠.”
“그 의심이 맞다면 심해의 괴물을 카룬의 오르투스로 유도한 놈들이 있을 거다. 블랙윙이 너를 돕는 건 부차적인 임무고, 일단은 그럴 조짐이 있는 악마추종자들을 추적할 것이다. 아니, 이미 놈들을 찾고 있지.”
“……꽤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군요.”
하지만 타이니의 말을 들은 공작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글쎄, 정말 그럴까?”
“예?”
“너와 클로이가 봤다는 흑마법사처럼, 악마추종자 놈들에게 성녀의 감각까지 속일 정도의 수단이 있다면 골치가 아파진다.”
“아…….”
“뭐, 네가 간다면 그것도 대비할 수 있겠지. 어쨌건, 성물 이외에 그쪽에도 관심을 가지라는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들어가서 쉬거라.”
“네? 이게 끝인가요?”
“……뭐, 더 필요한 게 있느냐?”
“딱히 생각나는 건 없는데, 그냥…… 줄 수 있는 건 가능하면 다 주셨으면…….”
“이 쌍놈의 새끼가! 진지하게 생각하라고!”
“지, 진짜, 농담! 농담이라고! 폭력 반대! 볼, 볼! 아파아아!!”
공작가 내성에서의 소란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무게 증가, 충격량 증가, 자가 수복……. 세 가지 마법 모두 마나 파장을 네놈에게 맞춰서 조율했다. 그리고 주문했던 장병기용 부품도 여기 따로…….”
끼릭.
“이렇게 이어 주면 2m가 넘는 장병기가 되고, 또…….”
끼릭.
“이렇게 빼면 짧은 봉으로도 쓸 수 있을 거다. 한번 휘둘러 봐.”
멍하니 스탬프를 바라보던 타이니가 렌돌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업대에 놓인 워해머를 집어 들었다.
렌돌은 차마 들지 못해서 눕혀 둔 채로 조립하던 육중한 흉기가, 그의 손에 묵직하게 착 감겨들었다.
파아아아앙!
가벼운 휘두름에 대장간 안의 공기가 파열음을 내며 흩어지는 것을 보며 타이니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아, 깜짝이야! 나가서 해, 이놈아!”
드워프 렌돌이 흰 수염을 부르르 떨며 경악했지만, 대장간 밖으로 나서는 타이니의 표정은 환하기만 했다.
파아아아앙!
꽝!
꽈아아아앙!
연달아 허공과 땅을 몇 차례 후려쳐 본 타이니는 이내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어디 한번 해 볼까!’
쾅.
내딛는 발걸음에 엄청난 무게가 실리고, 그 반동으로 튀어 나간 타이니의 몸이 활시위처럼 휘며 스탬프를 등허리 뒤쪽까지 끌어당겼다.
‘벼락 떨구기.’
번개처럼 튀어 나간 워해머가 그대로 전면의 땅바닥을 후려쳤다.
꽈아아아아아아앙!
우르르르르르르릉.
한순간 엄청난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졌고, 구경하고 있던 렌돌은 켁 소리와 함께 뒤로 열댓 바퀴를 구르며 나가떨어졌다.
“이 미친 애새끼……!!!!”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가 버럭 소리를 지르는데, 우렁차게 터져 나오려던 쌍욕은 10m 반경이 움푹 팬 크레이터를 보는 순간 쑥 들어가고 말았다.
“허, 허으…….”
“아, 죄송합니다. 그냥 적당히 힘을 써 본 건데, 이 망치 최고네요. 적어도 제가 다 자랄 때까지는 쓸 만하겠어요.”
그, 그게 고작 쓸 만한 정도냐?
‘내가…… 아니, 내 아들이 대체 뭘 만든 거지?’
렌돌은 타이니의 찬사에도 대답할 여력이 없었다.
그만큼 눈앞의 꼬마가 보여 준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그가 만나 본 어떤 기사도 혼자서 이런 가공할 파괴력을 보여 주지는 못했으니까 말이다.
“이, 이게…….”
그런데 놀라운 광경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정말 잘 쓰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 꼬마가 돌아서는 순간.
“아우우우우우!”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거대한 은빛 늑대.
그 늑대의 포효에 렌돌이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아드님도 여유 되는 대로 찾아보겠습니다. 그럼.”
체고만 1.5m에 몸길이가 3m가 되어 보이는 거대 늑대에 올라탄 소년은 이내 바람처럼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저, 정령?!”
그리고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렌돌은.
“야, 이놈아! 마당 원상태로 해 놓고 가야지!!”
한참 뒤에나 듣지 못할 상대를 원망하며 바락바락 고함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