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474
474화. 오직 한 순간을 위하여
집중해야 한다. 집중해야 하는데…….
– 콰아아아앙!
– 아아악!
전장의 소음과 비명이 자꾸 마음을 어지럽힌다.
‘젠장…….’
그리드는 꿈에 그리던 초월의 순간에 최악의 상황을 마주한 것이다.
동료들의 배려로 내성 안쪽에서 호위까지 받으며 명상하고 있는 지금의 상태가 결코 편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우우우웅.
거대한 벽을 뛰어넘어 오러익시더의 경지에 닿으려 하는 순간, 의식 속의 그 벽이 오히려 높아지는 기분까지 들었다.
‘안 돼!’
승격의 순간에야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의 초월무구들이 그의 경지를 강제로 안정시키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주인의 ‘균형 잡힌’ 상태를 유지하려 하는 초월무구의 성능이 오히려 그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히 느껴지고 있었다.
또한 알 수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돼!’
마치 벽을 뛰어넘으려는 영혼에 다섯 개의 무거운 추를 단 듯한 상황.
끝없는 전쟁으로 경험을 쌓고 고양된 영혼이 하이넨의 깨달음에 자극받아 시작된 이 도약의 기회가,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지금 기회를 놓친다면 다섯 개의 추는 더욱 무거워질 것이며, 앞으로 몸에서 떼어 놓는다 하더라도 그 무게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아, 안 됩니다!”
“크롬벨 경!?”
“비키세요!”
주변에서 잠깐의 소란이 느껴진다 싶더니.
“단순히 뛰어넘는다는 이미지에 집착하지 마세요. 벽은 넘지 않고 뚫어도 됩니다. 돌아가도 되고요.”
아!
나직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억지로 위만 보던 영혼의 정신을 환기해 주었다.
그저 한마디의 조언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지금 그는 경지에 올라서기 직전에 주변의 상황이 혼란해진 탓에 잠시 흔들린 것일 뿐이었으니.
우우웅.
날뛰던 마나가 다시 정련되고 의식 속 벽이 무너지기 시작하는데.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오러익시더 한 명이 추가된다고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대마도사라면 모르겠습니다만.”
방금 도움을 주었던 크롬벨의 목소리가, 이번에는 도리어 그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틀린 말이 아니기에, 그것이 최근 생기기 시작한 그리드의 열등감을 자극했다.
우우웅.
‘나 따위가 벽을 넘어 봤자.’
갑작스러운 말에 무너지던 벽이 다시 높아지는 순간.
“그래서 저는 그리드 경에게 희생을 요구하고 싶습니다.”
착잡한 크롬벨의 목소리가 다시 그의 의식을 사로잡았다.
“지금 구축하려던 심상, 즉 당신의 영역을 비틀어 주십시오. 저 벌레 떼들을 박멸할 수 있는 특이점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벌레?
“그로 인해 당신은 다시는 발전할 수 없게 되겠지만, 인류가 지금의 위기를 넘기는 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인류를 위해.
“벌레들은 추위에 약합니다. 그것은 마계의 벌레들이라도 동일하지요. 그 한계가 더 낮을 뿐. 당신이라면 할 수 있습니다.”
아……!
“어쩌면 당신이 이 시기에 벽을 넘게 되는 것도, 그 옆에 제가 있다는 것도 여신의 뜻일지도 모르지요. 영역의 기초를 구축할 때 그것을 비트는 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리드는 입을 열어 동의를 표하지는 못했지만, 크롬벨의 의견에 격하게 공감했다.
“악마급이나 초월급 벌레들에게 초점을 맞추지 마십시오. 마충 군단의 위험성은 그 증식 능력과 숫자에 있으니, 일반 마충을 학살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크롬벨의 말에 따라, 그는 여태 생각하지 않았던 방식의 능력 활용에 의식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마땅히 뚫린 길을 억지로 막아 버리고 지름길을 만든다.
대신 그 길의 끝은 막혀 있기에, 한번 질러가면 다시는 바른길로 돌아올 수 없겠지만.
‘오직 인류를 위해.’
그리드는 그 길을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 * *
우우웅.
“싸워!”
“지지 마!”
쾅!
“벌레들을 몰아내자!”
위이이이이이잉.
카가각.
“으아아아악!”
희고 푸른 빛을 옅게 휘감은 병사들이 평상시라면 꿈도 꿀 수 없는 움직임으로, 자신을 노리고 달려드는 주먹만 한 소름 끼치는 벌레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으아아압!”
쩌억.
“쏴라!”
파바바박.
보통의 인간이라면 한 마리만 만나도 기겁을 하며 도망갈 만한 괴물 벌레 떼를 앞에 두고도, 용감히 칼을 휘두르고, 폭뢰를 던지고, 불화살을 쏘아 대는 병사들.
솔레인의 유산을 개량하고 신성력으로 강화하기까지 한 인류의 군단 스킬, ‘희망의 빛’은 병사들의 의식을 고양시킬 뿐만 아니라 죽음의 공포마저 희석시키고 있는 것이다.
‘버텨야 한다.’
아르곤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다시금 거대한 에너지의 흐름에 집중했다.
그 스킬을 완성하는 데는 신전의 힘과 크롬벨의 조율이 필요했지만, 결국 발동된 다음에 그 에너지 전체를 통제하는 것은 진의 핵심인 아르곤일 수밖에 없었다.
‘마나도 사용 못 하는 사람이, 갑자기 왜 안으로 뛰어간 건지.’
군단 스킬의 중심부, 거대하고 강력한 보호막으로 보호받는 여기가 더 안전할 텐데 말이다.
크롬벨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를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으아아악!”
전장에서 병사 한 명이 벌레에게 물려 쓰러지자, 그 순간 그 병사에게 있던 빛이 옆의 동료들에게 옮겨붙었다.
그 모든 것을 조율하는 것이 아르곤 자신이었다.
아직은 군단 스킬 중심부에 있는 마력 사용자들의 희생이 적기 때문에 가능한 편법.
그 덕분에 전선은 유지되고 있었고,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동료들 덕에 진짜 위험한 벌레들은 내성 안으로 침투하지 못했다.
하지만 적의 숫자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위이이이잉.
그야말로 끝도 없이 쏟아지며 주변을 온통 검게 물들여 놓은 괴물들.
인어족은 갑작스러운 크라켄의 등장으로 바다로 사라졌지만, 마충 군단만으로도 너무나도 강력했다.
작고 빠른 벌레들은 인간이 상대하기에 더욱 까다로웠던 것이다.
‘반전이 필요해.’
아르곤은 인류 연합 전체를 강화시키는 군단 스킬의 흐름에서 끌어다 쓸 만한 여분의 에너지를 필사적으로 찾았다.
하지만 도무지 그럴 만한 것이 보이지가 않았다.
‘이대로 소모전이 지속되면 결국 우리가 진다.’
초조한 마음에 주위를 둘러보지만, 이미 전장의 흐름은 고착화된 뒤였다.
무언가 변수를 만들 만한 기회가 마땅치 않다는 뜻.
그러다 보니 결국 아르곤은 바로 눈앞에 있는 가장 큰 에너지의 흐름을 의식했다.
‘보호막…….’
자신과 마도사들, 그리고 신전의 고위 사제들. 이 희망의 빛을 유지하는 중심축을 보호하기 위해 펼쳐진 보호막.
당연히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그 보호막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한 것이다.
‘꼭 여기 고정되어 있어야 하나? 이걸 활용해도 되지 않나?’
그 생각이 드는 순간,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과 성법진이 눈에 들어왔다.
‘진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우리 마도사들과 사제들. 하지만 이 흐름이면…….’
그의 천재적인 두뇌가 순식간에 마력과 성력의 흐름을 계산하고 견적을 내놓았다.
‘……조금 무리하면, 내가 다 통제할 수 있다.’
아르곤은 계산이 서는 순간 눈을 빛냈다.
만약 계획대로만 된다면 혼자서도 단체 스킬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고, 이곳에 홀로 남겨진다 해도 제 몸을 건사할 자신이 있었다.
그는 곧바로 마도사들에게 메시지 마법을 날렸다.
[스승님, 마도사님들. 보호막을 해제하고 참전해 주십시오. 마법진의 흐름은 제가 통제하겠습니다.]그리고 성법진을 유지하는 사제들에게도.
자신에게 부담이 가중되겠지만, 그것만이 상황을 반전시킬 유일한 방법으로 보였다.
그리고.
‘보호막이 해제될 때. 그 에너지로 또 한 번 대마법을 쓸 수 있다.’
단체 스킬을 조율하는 데 전력을 쏟기 전 단 한 번이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상황을 반전시키는 신호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르곤은 다시금 집중력을 끌어 올려 에너지의 흐름을 이끌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우우우웅.
동시에 마도사와 사제들을 덮고 있던 보호막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간다.’
그가 바라는 것은, 끝도 없이 몰려오는 마충 떼를 최대한 넓은 범위 안에서 쓸어 버릴 수 있는 마법.
[내가 도우마, 아르곤.]자신의 마음을 읽어 낸 스승의 도움을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이미지가 그려지는 순간, 마기아가 허공에 커다란 글자를 그려 냈다.
아니, 그려 내려 했다.
파직.
흐려진 보호막을 뚫고 갑자기 검은 구슬 같은 것이 날아오지만 않았다면.
‘읏!?’
보호막에서 흩어져 나와 대마법의 패턴으로 뭉쳐 가던 거대한 에너지가, 섬뜩함을 느낀 아르곤의 의지에 따라 한순간 물리력으로 변해 그 구슬의 진로를 막았다.
하지만.
파지지지지지직.
작고 작은 구슬은 아직 완전히 마법으로 형상화되지 못한 마나의 격류 정도는 가볍게 뚫고 들어왔다.
마치 검고 짙은 오러가 꽉꽉 압축된 채로 아주 멀리서 쏘아진 듯한 작은 구슬.
그것은 속도가 조금 줄었을 뿐, 거대한 에너지를 통제하느라 움직이지 못하는 아르곤을 향해 그대로 날아왔다.
‘안 돼!’
속으로 비명을 지르는 순간.
그의 앞을 새하얀 냉기의 보호막을 두른 차가운 얼굴의 노인이 가로막았다.
애초에 같이 에너지 흐름을 조율하고 있었기에 구슬의 존재를 눈치챌 수 있었던 단 한 사람.
이내.
콰직.
푸슉.
아주 가벼운 소리들과 함께 그 노인, 아프만의 오른팔이 박살 나며 핏줄기가 솟구쳤다.
“스승님!!!”
쿨럭.
“난 괜찮……다. 쿨럭. 아르곤, 마법…….”
몸에 둘렀던 보호막이 뚫리고 오른팔이 통째로 날아간 아프만이 그를 돌아보는 순간.
아르곤은 비틀거리는 스승 너머로, 또다시 콩알만 한 검은 오러 구슬이 몇 개나 더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그 진로는 스승의 몸을 꿰뚫고 자신에게 향하는 길
“피하십……!”
아르곤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마나가 솟구치는 순간.
돌아보지 않고도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아프만이 피를 토해 낸 입가로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시금 전신으로 맹렬히 회전하는 냉기의 보호막을 생성해냈다.
동시에.
쩌저적.
그의 발에서 시작된 냉기가 바닥을 파고들어 그의 몸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시오, 스승님!!”
제자의 비명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질 때.
아프만은 확고한 의지를 담아 최대한 제자를 바라보며 웃어 주었다.
[잘 자라 줘서 고맙구나, 아르곤. 내 제자…… 아니, 내 아들아.]그 마지막 메시지에 아르곤의 눈이 부릅떠지는 순간.
콰드드득.
파바바바박.
냉기의 보호막이 터져 나가며 그의 전신에서 십여 개의 구멍이 숭숭 뚫렸다.
그리고 끝내 그의 몸을 관통한 하나의 검은 구슬은.
쾅.
가까스로 심장을 막아 낸 케레브룸에 부딪힌 뒤 궤도가 휘어져 아르곤의 오른쪽 가슴을 꿰뚫었다.
“커억!”
털썩.
“아프만 경!”
“아르곤!!!?”
“나, 난 글렀……. 아르곤, 아르곤을…….”
혹한의 마도사 아프만은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 부릅뜬 눈으로 쓰러진 제자를 애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제자가 비틀거리며 억지로나마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서야, 간신히 흐린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스승님!!!!”
쿨럭. 쿨럭.
피를 토하는 듯한, 아니 실제로 피를 토해 내는 아르곤의 외침이 전장의 중심에 울려 퍼질 때.
[아깝군……. 내가 멀리 있는 것을 다행으로 알아라, 인간.]약 올리는 듯한 나른한 영파가 그들이 있던 공간을 강타했다.
[뭐 이 정도만 해도, 그 요상한 술수는 다시 못 쓰겠지. 죽은 듯이 있어라, 인간. 벌레나 내가 다시 죽이러 갈 때까지. 크하하하!]그 웃음소리가 연신 피를 토해 내는 아르곤의 분노를 자극했다.
“어떤 개자식이……!”
우우우웅.
오른쪽 가슴을 파고든 검은 구슬이 지독한 마기와 오러를 뿜어냈지만, 그 역시 오러익시더이자 대마도사였으니.
아르곤은 마기를 봉쇄하고 상처를 지혈한 채로, 흩어지기 시작한 ‘희망의 빛’의 거대한 에너지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쿨럭, 누가 질까 보냐…….”
벌게진 눈으로 스승의 시체를 바라보는 아르곤은 아찔해지는 의식을 억지로 유지해 가며 에너지의 흐름을 이끌었다.
“아르곤!”
“젠장, 이런!”
빙염의 마도사 티네스와 지진의 마도사 록펠러는 차마 그런 아르곤을 말리지도 못한 채 그의 주위에 두꺼운 방어막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젠장, 빌어먹을! 개자식! 반드시 찾아내서 찢어 죽인다.’
아르곤은 자꾸만 흐릿해지려는 의식을 분노로 사로잡으며 군단 스킬을 통제하기 위해 애썼다.
‘어떤 놈일까? 마충 군단의 장군? 아니, 그럴 리가 없어. 내가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마충의 군주는 아직 저쪽에 있다. 그럼…….’
어지러운 의식 속에서, 아르곤이 원수의 정체를 특정했다.
‘나태! 죽인다, 죽인다! 반드시! 갈기갈기 찢어서……!’
하지만 아무리 화가 치밀어도 지금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보호막을 걷어 내며 일순간 끌어냈던 여력조차 허공에서 거의 흩어지려고 하는 마당.
그런 상황에서.
‘음?’
에낙센 내성 안쪽에서 한줄기 새파란 빛 한 줄기가 벌레 떼들을 향해 쏘아지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아주 특이한 힘을 품고 있는 듯한, 차가운 빛 한 줄기.
그리고 분노로 이성이 흐려진 아르곤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남은 여력을 그 빛줄기에 쏟아 넣었다.
[增幅(증폭)]오직 빛나는 직감을 따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