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48
48화. 습격
“모르스 가문의 꼬마가 공작가를 벗어났습니다.”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암실 안,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지는 원탁에서 음침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자 다른 목소리가 바로 물었다.
“따르는 놈은 없고?”
“그게……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동쪽으로 질주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꼬리가 붙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믿을 수 없는 속도라니?”
“늑대의 정령을 타고 달리는데, 그 속도가 어마어마합니다. 게다가 관도를 무시하고 숲과 산을 관통해서 일직선으로 이동하니, 보통 기마로도 나흘이 걸리는 거리를 하루 안에 주파한다고 합니다.”
목소리만 오가던 암실 안이 침묵에 잠긴 것도 잠시, 누군가의 목소리가 이내 침묵을 깨트렸다.
“허, 늑대의 정령이라면 필레스의 그 라이칸스로프 실험체에서 얻은 것이겠군. 그런데 벌써 그렇게까지 활용할 수 있다고?”
“예, 저희 예상을 한참 벗어난 수준입니다. 바람 속성의 익스퍼트가 마력질주를 사용할 때나 나오는 속도입니다.”
“2단계 마나유저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정령이 그 정도로 특별했나?”
“다른 샘플과는 달리 대수림이 아닌 북부 산맥 지대에 자생하던 문울프였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엘프들의 돌봄 없이 수백 년을 산 지배자급 야수였다더군요.”
“흠. 아무리 그래도……. 그 꼬마가 마나유저 2단계라는 것도 밑기 힘든데, 짧은 시간에 정령술사로서 경지를 더 올렸을 리도 없고……, 혹시 그 꼬마가 마법도 쓰나?”
“……그런 보고는 없었습니다.”
“하면 정말 그 꼬마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다는 건가?”
“일레인과의 전투 보고를 보면 열세 살에 마나유저 2단계, 또 동급의 정령술사라고 봐야 합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보고에 과장이 있을 거라 생각하시는 게…….”
“흠…… 아니야. 이번엔 확실하게 해야지. 괜히 어설프게 건드려서 세간의 시선을 끌 필요 없다. 일레인 때 같은 사태가 또다시 벌어졌다가는 우리도 목이 날아간다.”
“그거야 공작가의 정예들이 끼어들어서…….”
“시끄럽다! 최악을 가정하고 확실하게 처리해야지. 넌 목을 걸고 도박을 하고 싶은 거냐?”
“……아닙니다. ”
“그래, 이번에 확실히 놈을 잡는다. 놈이 어디로 가고 있지?”
“행로가 일직선이라 추측은 쉽습니다. 이대로라면 일주일 안에 도시 연합의 항구 도시, 에낙센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에낙센? 카룬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항구?”
반문하는 목소리에서 당혹감이 느껴졌다.
“……우연이겠지?”
“……당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확신을 말하는 내용과는 별개로, 대답하는 목소리에서도 떨떠름함이 느껴졌다.
“……이상해, 너무 이상해. 찜찜하단 말이지.”
근거 없는 불안감이 상석의 그림자를 사로잡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5서클 이상의 주전력을 동원해라. 놈을 확실히 사로잡아야겠어.”
그 말에 보고하던 그림자가 몸을 움찔 떨었다.
“……카룬의 일로 인해 동부 쪽에는 그 정도 흑마법사를 동원할 여력이 없습니다. 후셀 장로님이 모두 카룬에 데려가셨으니까요.”
“빌어먹을, 그럼 동원할 수 있는 최대 전력이 어느 정도야?!”
“에낙센 부근에서 놈을 잡는다고 가정하면, 익스퍼트급 흑기사들 다섯 정도가 한계일 것 같습니다. 아, 4서클급 마수조련사 한 녀석이 그 인근에서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
“그래, 그놈들이라도 보내. 그리고 확실히 사로잡으라고 전해. 그 꼬마가 하는 짓이 우연인지, 뭘 알고 있는 건지. 확실히 털고 가야겠어.”
“……그럼 마수조련사는 빼겠습니다.”
“뭐? 왜?”
“애초에 통제가 미숙한 마수로 왕국 연합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남겨 둔 자 중 하나입니다. 아무래도 사로잡는 임무로는 좀…….”
“……아니야, 보내. 사로잡으면 좋지만, 죽여도 상관없다. 그리 전해.”
“……예?”
“찜찜할 때는 차라리 확실히 처리하는 게 나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너무 과한 전력이라고 생각했지만, 보고하는 그림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알겠습니다.”
* * *
보름달이 뜬 밤, 환한 달빛이 비치는 고즈넉한 숲속.
“이야호!”
“아우우우우우우우우!”
그 속을 바람처럼 내달리는 은빛 거체가 숲의 고요를 깨트렸다.
크르르르.
파다다닥.
정령술사와 그의 정령이 만들어 내는 소음에 놀란 맹수들이 경계심을 표하고 산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랐지만, 타이니와 월랑은 아랑곳하지 않고 바람을 가르는 질주를 즐길 뿐이었다.
물론, 단순히 경계심을 표하는 수준을 넘어 직접 덤벼드는 것들도 있기는 했다.
바로 맹수가 아닌 마수들.
그들은 은빛 늑대와 검은 머리 소년이 뿜어내는 강렬한 생명의 기운을 느끼면서도, 본능적인 거부감에 그들을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하지만.
“캬오오오!”
꽝!
두두두. 쾅.
짙은 마기를 내뿜던 뿔 달린 멧돼지 하나가, 머리통이 박살 나며 달리던 자세 그대로 뒤쪽의 나무를 들이박았다.
그 직후, 질주하던 은빛 늑대는 놈이 돌진해 오던 자리에 조용히 착지했다.
휘리릭.
2m가 넘는 전투 망치가 타이니의 가벼운 손짓에 회전하며 마수의 피를 털어 냈고, 그 즉시 봉과 망치로 분리되어 등 뒤의 벨트에 꽂혔다.
“이것도 익숙해졌고.”
“크릉.”
질주를 방해받은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월랑이 콧김을 내뿜었지만, 타이니는 그냥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좋아. 이거, 렌돌 님한테 확실히 감사 인사를 전해야겠어.’
물론 타이니는 렌돌이 일주일째 대장간 앞에 생긴 구덩이를 메우며 자신을 욕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지만, 어쨌건 그의 부탁을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다는 마음이 든 것은 사실이었다.
그만큼 이 아티팩트 워해머, 스탬프가 마음에 쏙 든 것이다.
“컹!”
“그래, 이제 다시 가 보자.”
“컹! 컹!”
“알았다고!”
본의 아니게 한 달 가까이 실내에 갇혀 있던 월랑의 불만을 풀어 주기 위해, 낮에는 쉬고 밤에는 질주하는 올빼미 생활을 한 지도 벌써 일주일째.
하지만 이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마수나 도적은 밤에 날뛰는 경우가 많았으니, 그만큼 스탬프를 써 볼 기회도 많아졌으니까.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저 정도 덩치면 현상금이 꽤 붙었을 것 같은데.”
그렇게 잡은 마수나 도적들을 환전(?)할 시간이 따로 없다는 것이었다.
“컹!”
물론 월랑의 거듭된 재촉이 아니더라도 카룬에 일찍 도착하는 것이 최우선의 목표였으니, 아쉬움은 아쉬움으로 남길 뿐이었다.
“길바닥에 돈을 버려 두고 가야 한다니…….”
아깝다는 듯 입맛을 다신 타이니가 돌아서자마자.
“아우우우우우우!”
월랑은 기다렸다는 듯이 길게 포효하며 다시 질주하기 시작했다.
네 다리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지면을 박차고, 그 반동으로 은빛 거체가 전면을 향해 쏜살같이 질주했다.
‘이 기분도 확실히 끝내주지.’
이제는 몸길이가 3m에 달하는 월랑.
역동적으로 꿈틀거리는 압축된 근육은 발렌티아를 거치기 전과는 차원이 다른 스피드를 자랑했고, 그렇게 달리며 역풍을 맞을 때면 마치 바람과 하나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월랑과 감각을 동조하여 달리다 보면, 녀석이 달빛 샤워를 하며 질주하는 것을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평지를 달리는 것도 좋지만 암반 위의 울퉁불퉁한 길을 오르내리는 것도 나름의 오락으로 느껴질 정도였으니, 북부 산맥의 오크 라이더들이 왜들 그리 자부심이 있는지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렇게 속도를 즐기다 보니 어느새 숲의 끝이 보였다. 산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또 하나의 산을 넘은 것이다.
‘이 속도라면, 앞으로 하루 정도면 에낙센에 도착한다.’
저 멀리 숲 바깥에 나 있는 관도를 보며 대강의 지리를 파악한 타이니가 흡족한 미소를 짓던 그 순간.
그가 향하는 숲의 출구 근처에서 웬 그림자들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 이쪽으로 오네?”
“허, 정말 꼬마잖아?”
“겉모습만 보고 방심하지 마라, 그래도 정령술사야.”
가죽 갑옷부터 판금 하프 플레이트 메일, 검과 창부터 도끼와 활까지.
갑자기 나타난 다섯 명의 무장은 통일성이라곤 전혀 없어 보였지만, 그들이 뿜어내는 기운만큼은 완벽하게 같았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역겨움을 불러일으키는, 검은 아지랑이 같은 기운들.
멀리서 그들의 기운을 감지한 타이니의 눈이 서늘한 빛을 뿌렸다.
‘악마추종자!’
그때, 다섯 중 가장 앞에 서 있던 덩치가 살벌하게 날이 선 도끼를 들어 올리며 크게 고함을 질렀다.
“꼬마, 우리 ‘흑기사’님들이 네게 볼일이 있으시다! 잠시 멈춰서 얘기 좀 할까?!”
그 말을 들은 타이니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흑기사?
‘기사는 무슨…….’
……버러지들이!
그 짜증 섞인 분노를 전달받은 월랑이 갑작스러운 적의 출현에도 멈추기는커녕 오히려 속도를 높였다.
“거봐! 내 말 맞지?”
“역시!”
“애새끼들은 패야 말을 듣지.”
“팔다리 하나쯤은 잘라도 돼!”
챙!
놈들이 일제히 빼 든 무기에서 검붉은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도끼를 든 놈의 몸이 갑자기 두 배 가까이 부풀어 올랐고, 창을 든 놈은 전신에서 금속 같이 번들거리는 비늘이 튀어나왔다.
활을 든 놈은 눈이 세로로 갈라지며 노란빛을 뿌렸고, 검을 든 나머지 두 놈은 몸 여기저기에서 칼날이 튀어나왔다.
스스로를 흑기사라고 칭했지만, 놈들은 마기를 쓰는 악마추종자 중 마법을 쓰지 않고 싸우는 흑마병. 지금 그들이 발휘하는 능력은 놈들이 익스퍼트의 경지에 오르면 얻게 되는 ‘악마의 흔적’이었다.
이내 놈들 중 하나가 타이니를 향해 짙은 마기가 서린 화살을 쏘아 냈다.
파아아아앙!
탕.
그러나 타이니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손으로 가볍게 화살을 쳐 내는 동시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대로 빠르게 돌진할 뿐이었다.
“……뭐야!?”
활을 든 흑마병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경악하던 순간, 타이니는 이미 도끼를 든 놈 앞에서 스탬프를 휘두르고 있었다.
“빠르……!?”
거인처럼 몸을 부풀린 흑마병이 위험을 감지하고 뒤늦게 도끼를 휘둘렀지만.
꽈아아아아앙!
놈은 하려던 말도 끝내지 못한 채 피 보라와 함께 육편이 되어 흩어졌다.
“뭐……?!”
“뭐야!?”
검을 든 두 놈이 미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멍한 소리를 내뱉었다.
“뭐, 뭐 해! 죽여!!”
활을 든 놈이 이를 갈며 다시 시위를 걸었고, 전신에 비늘이 돋아난 창수는 타이니에게 접근해 검붉은 기운이 아른거리는 창을 찔러 넣었다.
텅!
그러나 은빛 늑대의 앞발이 창을 쳐 내는 순간, 부릅뜬 창수의 머리 위로 검은 망치가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꽈아아아아앙!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짓이겨진 창수의 시체.
그 참혹한 광경을 보고 난 뒤에야 나머지 흑마병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미, 미친!”
“말도 안 돼!”
“이럴 수……!”
놈들은 상식을 아득히 벗어나는 소년의 무력에 공황 상태에 빠져들었지만, 당연하게도 타이니는 그들이 정신을 차릴 틈을 주지 않았다.
“뒈져라, 쓰레기들.”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은빛 늑대가 바람처럼 돌진해 온 순간, 검은 망치 형태의 벼락이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흑마병들에겐 그야말로 불가항력의 폭력.
뒷걸음질 치며 화살을 쏘아 낸 궁수는 자신의 화살이 어디로 날아가는지도 보지 않고 그대로 뒤로 내달렸다.
“이, 이건 얘기가 다르잖아!”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뜻 모를 고함을 내지르며 줄행랑을 치는데, 이내 그의 곁에 은빛 바람의 사신이 찾아왔다.
꽈아아아아앙!
공평하게 한 놈당 한 방씩을 먹여 화끈하게 박살 내 버린 타이니가, 이내 자신이 만들어 낸 처참한 참상을 돌아보며 순간적으로 혀를 찼다.
‘아무래도 날 기다린 것 같은데, 한 놈 정돈 살려 두고 심문이라도 할 걸 그랬나?’
뒤늦게 든 생각에 아쉬워하던 그때.
– 캬오오오오!
그리 달갑지 않은 괴성과 함께 소름 끼치는 살기가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