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480
480화. 세상의 상처
살짝 커진 동공과 꿈틀거리는 눈썹.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답이 되었다.
‘확인 끝.’
모든 것을 나중으로 미룬다.
심지어 적에게 받은 충격과 부작용까지.
참으로 나태다운 권능이었다.
물론 단순히 미뤄 버리기만 해서는 그 충격이 미래에 더 큰 우환이 되어 돌아올지도 모르지만.
‘크롬은 아니라고 했어.’
– 아주 긴 시간 동안 분산해서 흩어 버리면 되니까, 몸에 부담은 거의 없을 겁니다.
– 물론 제 파멸의 빛을 정면에서 받아 낸 후에 여태 나타나지 않은 걸 보면, 그 권능조차 한계가 있는 게 확실하고요.
– 그러니 당신만이 놈을 잡을 수 있습니다. 빅뱅을 두 번 연달아 먹이거나, 그에 준하는 충격을 누적시킬 수 있다면…….
나태의 권능에 대한 해결책이라기에는 너무나 터무니없는 주문.
하지만 타이니에게는 다른 방법도 있었다.
‘멸살의 권능.’
상처를 회복하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악화시키는, 그야말로 생명체에게는 끔찍한 저주 같은 힘.
줄어든 나태의 기세가 증명해 주듯, 그것은 놈에게도 확실한 효과가 있었다.
문제라면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 게 적뿐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흥. 이제 와서 그걸 알았다고 해도…….]스륵.
[무슨 의미가 있을까!]쾅!!
다시 한번 휘둘러진 나태의 주먹이 타이니의 몸을 강타했다.
분신을 역소환당한 충격이 생각보다 컸는지, 반응이 늦고 말았다.
[너 역시 충격을 견뎌 내고 힘을 끌어 올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허세를 걷어 낸 나태의 굳은 얼굴에서는 여전히 자신감이 느껴졌다.
[2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축적해 온 내 저력이 이길까, 아니면 너 같은 애송이가 이길까?]꽈아아앙!
다시금 가속하기 시작한 나태의 주먹.
타이니는 황급히 가드를 올렸지만, 그대로 맥없이 튕겨 나갔다.
하지만 자신감이 넘치는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질까 봐 쫄리니까 바로 배신 때린 양아치한테, 저력이란 게 있을까?]다시 한번 휘둘러진 적의 주먹이 이번엔 명치를 향해 다가오는데.
타이니는 회피하는 대신 그대로 녹턴을 휘둘렀다.
꽈아아앙.
녹턴은 허망하게 빗나갔고 그의 몸은 또 튕겨 나갔지만.
[나는 순리를 따르고자 했을 뿐이다! 네놈들이! 인간이! 여신이 순리를 거부했을 뿐!]맞아서 날아가는 타이니는 미소를 짓고 있었고, 정작 그를 때리고 돌진해 오는 놈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뒤이어 월랑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나태에게 달려든 순간.
[한번 시간을 거스른 자가 순리를 논해? 농담이라면 제법 웃겼어.]쾅!
퍼어어어어엉!
월랑의 머리를 밟고 타이니의 관자놀이를 향해 뻗어 나오던 킥은 한순간 흔들리며 빗나갔고.
그 흔들림의 대가로, 나태는 녹턴의 공격을 복부에 정통으로 허용했다.
꽈아아아앙!
‘제대로 들어갔다!’
한순간에 터져 나가는 놈의 상체 갑옷과 일그러지는 표정.
[네놈이 뭘 안다고……!!]모두가 한 가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기회!’
– 컹!
타이니는 그대로 가속해, 나가떨어지는 나태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태가 남겨 놓은 충격의 여파가 어질어질하게 남아 있었지만, 불굴의 권능으로 애써 억눌렀다.
그렇게 다시금 전력을 쥐어짠 순간, 녹턴의 망치 머리에서 노을빛 상서로운 빛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우우웅.
최근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다시 영격이 상승하면서 빅뱅의 준비 시간도 상당히 줄어들었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가속한 채로 공방을 주고받는 와중에 적 하나를 정확히 맞히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나 지금의 나태처럼 빠른 적이라면 더욱.
그렇다면.
‘피할 수 있는 범위 전체를 날려 버린다.’
쪼개진 시간 속에서 감각을 끝없이 확대시킨 그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나태가 순간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범위의 한계를 가늠했다.
그리고.
끝없이 압축된 에너지의 핵이 분열하며 그 자리에 엄청난 파멸의 빛을 만들어 내는 순간.
타이니는 나태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맺히는 것을 보았다.
놈의 왼쪽 손끝에서 미약하게나마 피어나오는, 기시감이 느껴지는 노을빛까지.
‘이런!’
그 순간 놈이 했던 도발이 떠올랐지만, 이미 터져 나오기 시작한 거대한 힘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리고.
번쩍.
——–!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노을빛 파멸이 반경 수 킬로미터의 허공을 그대로 집어삼키고.
꽈아아아아아아앙!
뒤늦게 터져 나온 폭음이 전장 전체를 깔아뭉개는 충격파를 터트리며 폭풍을 불러왔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
– 어억!?
– 피해!
– 하늘!!
우르르르르릉.
상공에서 일어난 폭발의 여파만으로도 지상에서는 옅은 지진이 일어나 연합군의 병사들과 인어들이 사방에서 나뒹굴었다.
그 노을빛이 터져 나간 자리에 작은 회색의 구멍이 생겼다는 것을 아무도 인지하지 못했을 정도로.
그리고 그 순간, 타이니는 몇 번이고 보아 온 회색의 공간 안에 진입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세계에 상처를 만들어 내는 끔찍한 공격이지. 그 파멸의 빛 말이야.]생각보다 멀쩡한 표정의 나태를 마주했다.
[한번 맞아 보니까, 그냥 불멸을 믿고…… 아니, 아니지. 들통났었지? ‘게으른 시간’만 믿고 버텨서는 안 되겠더라고. 그래서 준비했지.]한쪽 팔을 쫙 펴며 창백한 안색을 보인 나태가 마치 인사하듯 고개를 숙였다.
놈의 왼쪽 팔은 왜인지 어깨의 뿌리만 남긴 채 깔끔히 사라져 있어서, 그 과장된 동작이 더욱더 어색하게 보였다.
그런데, 놈은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이런 공간, 본 적 있겠지? 그 말도 안 되는 공격을 만들어 낸 자라면 말이야. 하지만 그것도 알려나? 이미 세계의 상처가 생겨난 자리에 다시 한번 그만한 충격이 가해지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 나도 전설로만 들었거든. 그런데, 정말이네? 푸하하하.]자신을 가리키며 미친 듯이 웃어 젖히는 나태를 보면서도 타이니는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크윽!’
온몸을 으스러트릴 듯 조여 오는 회색의 공간.
그것을 버텨 내는 데 집중하기도 바빴으니까.
다만.
[어떻게 이렇게 된 건지 궁금하지? 이거, 크롬벨이 만든 거야. 너와의 합작품이라 할 수 있지.]이어진 말에는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녀석의 파멸의 빛도 짜릿했지. 게으른 시간으로 충격의 대부분을 한없는 미래로 넘겼는데도 며칠 동안 아무것도 못 했거든? 그리고 그때 미래에 돌렸던 충격의 일부를, 이 자리에 소환해서 세상에 상처를 입힌 거야. 내 팔 하나 날릴 만큼 조그맣게.]마치 자신의 상처를 자랑하듯 들이민 사이코는 이내 어이없어하는 타이니의 표정을 보더니 다시 푸하하 웃어 젖혔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세상의 상처 위에, 네가 다시 또 그 무식한 공격을 때려 박은 거지. 노노. 정말 너무해.]정말 미친 것처럼, 나태는 남은 한 손으로 스스로 볼을 누르며 광대처럼 과장된 표정으로 연신 이죽거렸다.
[이 세계는 그저 홀로 존재하고 유지되는 것이긴 하지만, 사실상 초고대에 이 세상을 떠난 창조주가 남겨 놓은 신성이나 다름없단 말이야? 그리고 그 신성은 한 번쯤 다치는 건 참아도, 상처 위에 다시 상처를 입는 건 못 참는다고 하더라고.]콰드드드득.
‘크으윽!’
나태가 과장된 동작으로 늘어놓은 그 설명을, 타이니는 이미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사방에서 조여 오는 미증유의 힘이, 자신을 회색의 공간에 그대로 묻어 버리려고 하고 있었으니까.
[고대에 신들의 싸움에서 가끔 생겼다는 현상. 이른바 ‘신을 먹는 공간.’ 그래서 고대의 강력한 신들은 싸우다가도 세상의 상처가 생기면 바로 싸움을 그만두곤 했다지. 그런 상처를 넌 혼자 만든 거야. 대단해. 아, 한 방 쓰고 폐인이 된 크롬벨도 있지만 말이야.]수다를 떨며 놀리듯 손을 까닥거리는 놈에게 대꾸할 여력도 없었다.
콰드드드득.
신을 먹는 공간이라는 말이 거짓이 아닌 듯, 최대한 끌어 올린 불굴의 권능으로도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콰드득.
밀어 내려 하고 있음에도, 오히려 조금씩 침식되고 있었다.
‘제대로 당했다…….’
이런 상황까지 오고 나니, 자신이 낚시에 걸린 물고기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갑자기 수다쟁이가 된 저놈에게는 한마디 보태고 싶었다.
[팔 병신 된 충격이 좀 큰가 봐? 갑자기 광대가 됐네?]그 영파 한 번에, 한껏 과장된 태도로 떠들던 나태의 움직임이 갑자기 우뚝 멈췄다.
희번덕거리던 나태의 붉은 눈이 다시 제빛을 찾아가는 것이 굉장히 괴기스러워 보이는데.
[팔 따위야 회복하는 것 정도는 간단하지. 그저 난적을 물리친 기쁨을 만끽하고 있을 뿐이다. 영광으로 알아라. 이제야 다시 순리를 되찾는 세계의 가장 큰 걸림돌이 너였다는 것을…….] [그게 안 될 거라는 거 알 텐데? 아무리 크롬벨이 흉내 낸 빅뱅이라 한들, 그건 기본적으로 멸살의 권능을 담은 공격이다. 너도 그걸 알고 있으니 갑자기 그렇게 과장된 표정으로 헛소리나 지껄이는 거겠지.]까득.
아무리 막막해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2천 년 동안 쌓은 저력이라는 게, 고작 이런 꼼수냐?]타이니는 최대한 적의 신경을 건드려 가면서.
[그 2천 년 동안 꽤 편하게 지냈나 봐? 스스로 노예가 된 배반자 주제에. 주인이 잘 대해 줬나 보지?]조금이라도 빈틈을 찾으려 애썼다.
세상의 이면, 아니 세상의 상처 내부의 공간에 나태의 분노한 영파가 가득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때쯤 타이니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콰드드드득.
‘이건 못 빠져나간다.’
지금 자신을 압박하는 게 무슨 특별한 힘이 아니라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물리력이라는 것을 확실히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저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힘.
마치 빅뱅처럼…….
‘음?’
생각이 거기에 닿는 순간.
우우우웅.
영혼 속에서 잊고 있던 울림이 튀어나왔다.
– 나를 받아들여라. 힘을 주마.
창조주가 남긴 권능의 조각, 운명의 파편.
영혼의 저편에 가라앉아 닥치고 있던 놈이, 위기 속에서 치명적인 유혹을 건네 오기 시작했다.
‘닥쳐!!’
영격이 상승할수록 확실히 느껴졌다.
운명의 파편 안에 담긴 치명적인 독, 영혼을 변질시키는 힘을.
자신이 자신이 아니게 된다면, 죽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어쩌면 나태도 그것을 알았기에, 그 파편을 그대로 마왕에게 바치고 권능을 얻는 것을 택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런데.
– 그래도, 동료들을 구할 수 있을 텐데?
운명의 파편은 타이니의 욕망을 계속해서 집요하게 파헤치려 했다.
그게 파편의 목소리인지, 아니면 내면의 갈등이 형상화된 것인지조차 헷갈릴 지경이었다.
– 더 강한 힘이 필요하잖아!
‘그래, 필요해. 하지만 넌 아냐.’
타이니는 다시금 운명의 파편을 억눌러 의식의 저편으로 밀어 냈다.
살짝 흔들리긴 했지만, 덕분에 번뜩이는 영감이 스쳐 지나갔다.
‘방법이 있어.’
더 강한 힘……? 그래, 타격.
[과연 언제까지 버틸까? 크큭. 조금씩 조금씩 파묻혀 가는구나.]두 번의 상처가 이런 재앙을 초래하는 거라면, 세 번은?
‘저항을 포기하고 그 힘으로 빅뱅을 쓰면, 으스러지기 직전에 한 번은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야말로 미친 생각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 후에는 더한 재앙이 다가올 것이 뻔했으니까.
하지만.
콰드드드득.
끔찍한 압박감이 다른 생각을 떠올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어차피 빠져나가지 못한다면…….’
해 볼 만한 도박이었다.
그리고 그러자면, 일단 팔 X신이 돼서 눈깔이 돌아간 저놈의 정신을 잠시라도 다른 데로 돌려야 했는데.
그때, 갑자기 익숙한 영파가 그의 머릿속을 울렸다.
[타이니, 바깥에선 분노를 잡기 직전이야. 그쪽으로 놈을 유인해!]마치 아주 멀리서 전해져 오는 듯한, 안타까운 감정이 느껴지는 영파.
그에게 아주 익숙한 이의 느낌이었다.
[티나?] [빨리! 그래야 내가 도울 수 있어!]아니, 어떻게……?
순간적으로 드는 의문이 많았지만, 그는 얌전히 에스티나의 의견을 따라 나태에게 영파를 던졌다.
[그런데 내 최후를 지켜보고 있어도 괜찮나? 네놈, 그 벌레가 위험하다고 해서 갑자기 들이박은 거 아니었나?]그 순간 나태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하……?]그 말을 하는데도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한 것이, 한창 전투를 할 때의 그 냉정한 표정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저 새끼, 정말 돌았구나.
[인류 최강의 전사였다더니, 2천 년 동안 얼마나 편하게 살았으면 팔 하나 날아간 걸로 정신이 나간 거냐? 나태, 한심한…….] [닥쳐라!!!]검은 불꽃의 오러가 슬로스의 하나 남은 팔에서 이글거렸지만, 놈은 그것을 차마 자신에게 쏘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뭐가 더 있나? 아니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그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어차피 그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자, 그럼 끝까지 내가 발악하는 것을 구경해 보거라. 그 사이 네놈의 동료는 소멸하겠지만.]길게만 느껴졌던 전투였지만, 사실 실제로 흐른 시간은 애초에 초가속을 했던 그들의 체감과는 달랐다.
여태 싸운 시간보다 이 공간 안에서 나태가 떠든 시간이 더 길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사실은 그뿐만 아니라 나태도 인식하고 있었다.
[세계에 파묻혀 사라져라, 파멸의 주인.]이내 까드득 이를 간 나태가 머리 위 회색의 구멍 위로 사라졌고.
[티나, 나 말고 바깥의 동료들을 도와! 나는 내가 알아서 할게.]타이니는 이를 악물며 에너지를 움직였다.
잠깐의 시간을 버틸 최소한의 힘만을 남겨 놓은 채, 모든 힘을 왼팔로 모았다.
빅뱅은 본디 호쾌한 한방을 위해 온몸을 쥐어짜서 에너지를 터트리는 기술.
‘동작 자체를 완전히 생략할 수는 없어. 최대한 줄이더라도…….’
하지만 지금은 녹턴을 휘두를 수가 없으니, 그나마 손가락을 까닥할 힘이라도 있는 손으로 빅뱅을 터트릴 생각이었다.
물론 그랬다간 모든 것이 잘 풀린다 하더라도 저 나태처럼 팔 하나가 날아가 버리겠지만…….
‘감수하겠다.’
결심을 하는 순간, 왼손에 노을빛이 깜빡거리기 시작하는데.
그때.
[그럴 거야. 하지만 그 전에 이것들부터 받아!]소리도 없이, 머리 위의 회색 공간을 뚫고 ‘두 개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부러진 검과, 한쪽의 권갑을 매단 화살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