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487
487화. 마왕 강림
인류 연합군은 에낙센에서 최후의 결전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 동면에 들어간 칠죄종이 언제 깨어날지 알 수 없다.
–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전쟁 준비를 끝내고, 마왕을 소환한다.
나태가 남긴 유언(?)이 거짓이라면 그것은 그것대로 좋으니,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자는 것이었다.
자연스레 에낙센의 내성 대전은 다시금 연합군의 대회의실로 바뀌었다.
“마충의 군주를 처리할 때, 그 위치는 바다 한가운데 섬 정도가 좋겠습니다.”
“그럼 연합군이 모이는 것이 의미가…….”
“연합군은 멸마의 빛을 사용하기 위해서 필요한 겁니다. 마왕을 상대하는 데 머릿수는 의미가 없습니다. 실질적인 격전은 12대 기사 중 상위급 초인들만 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럴 이유가…….”
“마왕이라 폄하해 부르기는 하지만, 그는 마족의 신입니다, 신! 진정한 여신의 대적자! 영혼살의 힘도 훨씬 강해서, 그의 눈짓 한 번에 죽지 않으려면 오러익시더급의 영역이나 그에 준하는 이능의 힘에 초월무구의 보호까지 더해야 할 겁니다!”
“그런…….”
터무니없는 주장처럼 들렸지만, 그 말을 무시하는 이는 없었다.
신화에 기록된 막연한 정보가 아닌 실제 경험담이었으니까.
당시에 마왕을 대적했던 용사, 크롬벨이 이전에 비해 훨씬 건강한 모습으로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중이었다.
“대체 그 마왕의 권능이 뭐길래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겁니까?”
“하나로 특정할 수 없습니다. 마왕은 신화시대 말미부터 마계의 마신족들을 모조리 처죽이고 흡수하며 유일신이 된 자니, 놈이 가진 권능이 몇 개나 되는지는 추측할 수 없습니다.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
“있다면……? 뭐?!”
타이니가 끼어들자, 크롬벨이 조금은 꺼림칙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에 대뜸 인상이 찌푸려지는데.
“마왕은 저 타이니 경처럼 커다란 워해머를 쓰는데, 일격 일격에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뚫렸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휩쓸리면 어떤 신성력으로도 치료가 안 됐지요. 권능급 회복술사가 필수라는 말입니다.”
“어…….”
이어진 크롬벨의 발언은 당황스러웠다.
내가 저놈한테 녹턴에 대해 얘기 안 했던가?
“물론, 마왕의 워해머는 타이니 경의 것보다 훨씬 크고 살벌하게 생겼습니다만…….”
바로 시선을 돌린 크롬벨이 설명을 이어 가는 동안, 타이니는 자신의 애병을 바라보았다.
‘훨씬 커? 너 변신도 되냐, 녹턴?’
우웅.
괜히 애꿎은 녹턴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크롬벨이 다시금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놈에게는 한 번 쓴 권능이 다신 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실상 물리력으로만 상대해야 하는데, 정작 놈은 몇 개인지 모를 방어형 권능까지 둘둘 두르고 있습니다.”
“음? 한 번 쓴 권능이라 하면, 공격형 말하는 거지?”
“예. 제가 사도일 적에 쓰던 여신의 권능뿐만 아니라, 당시 남아 있던 신들의 사도나 권속들의 권능들도 처음 썼을 때 이후로 전부 막혔습니다.”
심각한 이야기가 이어졌지만, 애초에 이 자리에서 그 권능이 어쩌고 하는 말을 완벽히 이해할 만한 사람은 타이니뿐이었다.
자연스레 시선이 몰린 가운데,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나한텐 상관없네. 힘 대 힘이라면야 뭐, 나야 좋지.”
그 자신감 넘치는 미소에 크롬벨은 이를 갈며 답했다.
“힘 대 힘이 아니라니까! 그놈은 몇 개인지도 모를 방어형 권능을 둘둘 두른 상태에서 한 방만 맞아도 회복 불능이 되는 즉사형 공격을 무제한으로 쏟아부을 거라고!!”
쩌렁쩌렁하게 고함을 지르고 난 직후, 크롬벨은 아차 하는 표정으로 무거워지는 주변의 분위기를 둘러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데 막상 그 일갈의 대상이 된 놈은 히죽 웃을 뿐이었다.
“오, 너 이제 반말도 하네? 보기 좋다!”
“반말하는 게 왜 보기 좋아? 이 정신 나간 새……!? 아으으…….”
어처구니없는 반응에 다시 고함을 지르고 만 크롬벨이 머리를 쥐어뜯다가 이내 또다시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며 한숨을 푹 내쉬는데.
“마왕의 그 무기가 지금도 있을까? 시간이 2천 년이나 지났는데. 뭐, 또 다른 게 있을지도 모르겠다만…….”
타이니는 그 말과 함께 교황과 사제들의 눈치를 살피더니, 크롬벨에게 몰래 영파를 전하며 그의 불안을 덜어 주었다.
[녹턴이 바로 그 마왕의 무기다. 설명하자면 복잡하지만, 이젠 완전히 내 거야.]“……내 무기도 한 방 맞으면 끝장나는 건 마찬가지다.”
그에 크롬벨은 눈이 한순간 확 커지다가, 이내 다 포기한 듯 풀썩 웃으며 넋두리처럼 대꾸했다.
“대체 뭔 짓을 한 거냐…….”
“글쎄, 어쩌다 보니.”
타이니가 어깨를 으쓱하는 모습을 얄밉게 바라보던 크롬벨은 그래도 조금은 홀가분해진 듯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넌 확실히 대가리 안쪽에 뭐가 문제가 있어. 어떻게 그걸…….”
“몰랐는데 어쩌라고.”
“하…….”
두 사람의 이해 못 할 대화에 모두의 시선이 의구심에 물들자, 크롬벨은 이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바꿨다.
“뭐 좋아. 어찌 됐건, 마왕을 가장 앞에서 상대해야 할 자가 너니까…….”
크롬벨이 상석의 검제를 향해 시선을 돌리자.
새하얗게 센 머리를 단정히 빗어 넘긴 검제가 바로 그 신호를 알아듣고 모두에게 공표했다.
“대회의는 여기서 마치고, 이제 마왕을 상대할 사람들과 크롬벨 경만 따로 모입시다. 다른 지휘관들은 보급과 사기 유지에만 신경 쓰도록. 희망의 빛을 멸마의 빛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좀 더 단축시키는 방법은…….”
“우리가 맡겠소이다. 신전과 함께.”
빙염의 마도사 티네스가 록펠러와 함께 그리 대답하고 교황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대적과의 전투를 앞둔 인류 연합군의 총회의가 끝이 났다.
* * *
“내가 기억하는 것과 크기 자체가 다른데? 형태도 조금 다르고. 그런데 그게 마왕의 무구라고? 어떻게 된 거냐?”
소수 인원만 따로 모인 회의실의 방문이 닫히자마자 크롬벨의 질문이 쏟아졌다.
그에 타이니가 묘한 눈길로 응답했다.
“존댓말은 이제 갖다 버렸냐?”
“흐. 내가 너보다 2천 살은 많다는 걸 자각하도록, 후손.”
“헐…….”
“닥치고 질문에나 답해!”
“말하자면 길어.”
“그래도 말해! 지금 그거보다 중요한 게 있을 거 같아!?”
“씁. 그게…….”
타이니의 설명이 쭉 이어지는 동안, 그것을 듣는 이들의 표정이 하나둘 바뀌다가.
이내 모두가 황당한 눈으로 그를 보며 한마디씩 쏘아붙였다.
“여태 그 말을 안 하고 있었다고?”
“그 중요한 일을?”
“대체 무슨 생각으로…….”
검제, 저릭, 실버 팽이 차례로 쏟아 낸 타박에 반박하려 입을 열려던 순간.
“내 동생, 머리. 알잖아.”
“허, 으…….”
루나의 결정타가 이어지자, 그저 입을 뻐끔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거 말한다고 뭐가 바뀌어?’
억울했지만, 이내 다른 동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예전 같지 않게 말수가 줄어 있는 아르곤.
이상한 질문이나 던지다가 삐져 버린 듯(?) 말이 없는 갓 핸드.
확 늙어 버린 검제와 저릭까지.
기나긴 전쟁이 계속됨에 따라 동료들은 모두 조금씩 몸을 다치거나 영혼에 상처를 입은 듯했다.
그러니.
‘어떻게든 이 전쟁을 끝내야 한다.’
지금 자신에게 괜한 타박이 쏟아진 것도 긴장감을 풀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잠깐의 억울함 따위는 신경 쓸 거리도 아니었다.
그래서 타이니는 화제를 바꿨다.
“마왕은 현 상황을 모르고 있을까? 칠죄종 중 여섯이 죽고, 하나가 가사 상태인데?”
“……그걸 모르겠다. 칠죄종이 마왕과 계약으로 얽힌 존재들은 맞는데, 마왕이 그들을 신경 쓸지는 미지수야.”
“뭐?”
“고대에도 그랬다. 놈은 칠죄종 몇이 죽어 나가는 것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거든.”
그 말에 모두의 안색이 찌푸려졌고.
이내 검제가 끼어들었다.
“크롬벨 경, 확실히 말해 주셔야 합니다. 지금 당신의 상태로는 마왕 전투에 참여할 수 없으니, 우리가 오해할 여지가 없도록요.
짙은 주름과 새하얗게 세어 버린 머리. 그러면서도 굳은살 하나 박이지 않은 왼손에 붉은 마나를 두르며 연신 아지랑이를 뿜어내고 있는 검제의 모습은 이상했지만, 그것은 처절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교황이 성물을 동원해 재생시킨 팔을 단시간 내에 단련시키고자, 마나로 적당히 근육을 파열시켰다가 회복시키는 짓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한순간에 본래의 나이보다 훨씬 늙어 버린 외모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 모습을 눈에 담은 크롬벨이 좀 더 신중한 눈으로 과거의 기억을 돌이켜 보았다.
그리고.
“맞을 겁…… 아니, 맞습니다. 마왕은 칠죄종이 죽건 말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지? 그래도 쓸 만한 전력일 텐데.”
쓸 만한 전력.
– 칠죄종이? 고작?
그 표현에 모두가 헛웃음을 흘렸지만, 크롬벨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만약 그들의 죽음으로 강림이 앞당겨지는 수법이 정말로 작용하고 있다면, 오히려 분노가 빨리 죽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뭐?”
“마왕은 칠죄를 모두 담고 있는 순수한 악의의 집합체. 수하건 뭐건, 다른 존재에 대해 애정을 가질 자가 아닙니다. 파멸을 위해 빚어진 결전 병기 같은 것이니까요.”
“칠죄종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강하다는 말로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봐도 무방합니다.”
검제의 질문이 오히려 방 안의 분위기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마충 군단에 나태가 더해진 것만으로도 12대 기사와 마도사가 한 명씩 죽었고, 나머지 전력 중에서도 두 명이 씻을 수 없는 후유증을 안게 되었다.
그조차도 인류의 모든 역량을 쥐어짠 힘까지 더한 결과였다.
그런데 그런 칠죄종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적이 남아 있다?
하지만.
“뭐, 다 예상했던 거 아냐?”
저릭이 피식 웃으며 꺼낸 말을 시작으로.
“어쨌건 한 놈 아냐? 하나만 처죽이면 이 지겨운 전쟁도 끝이라는 거지?”
반파된 문아머를 입은 실버 팽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의연히 가슴을 두드렸고.
“합공하는 것도 쪽팔리니까, 가능한 한 빨리 끝내 버리자고.”
뒤이어 타이니가 호기로운 한마디를 내지르는 순간, 일행의 얼굴에 동시에 살벌한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말 잘했다, 타이니. 드디어 이 막막한 전쟁에 끝이 다가왔다. 나도 심장이 두근거리는구나.”
“저도 마찬가지예요. 타이니, 전쟁 끝나면 약속 잊지 마!”
에스티나가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꺼낸 말까지 이어지자.
방 안의 공기가 전의로 달아올랐다.
“약속? 조카?”
“아냐!!”
“푸하하하하!”
루나가 엉뚱한 소리를 내뱉다가 커플에게 눈총을 받자 동료들 사이에서 끝내 웃음이 터져 나왔고.
그 이후로, 마왕을 상대하기 위한 진형과 전법에 대한 이야기가 순식간에 마무리되었다.
“……자. 그럼, 모두 만전을 기합시다. 결전은 한 달 후. 하지만 벌레의 군주가 이상 징후를 보이는 즉시 타이니가 때려죽이기로 했으니, 그 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사실을 명심하시고, 합을 맞추기 위한 연습은 사흘 단위로 하겠습니다.”
“좋아!”
“좋소이다!”
“좋습니다!”
검제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최후의 결전을 위한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한 달 후.
“빨리 빨리 움직여!!”
“마나 전송은 마도 기사의 좌표로! 마기아를 전송기로 삼는다!”
인류 연합군은 에낙센에서 마도사들의 지휘를 따라 대형 마법진을 발동하기 시작했고.
그 사이 타이니를 비롯한 동료들은 어인족들이 근거지로 삼던 리베르타스로 모여들었다.
동산만 한 벌레의 몸체를 허공에 띄워 옮기면서.
“젠장, 저거 뭐야?”
“시끄러워. 빨리 가자고. 우리 고향으로 가도 된다잖아.”
“수인족들이 잘도…….”
“문나이트가 약속했어!”
숨어 살던 어인족들이 하나둘씩 전부 바다로 떠나고.
거대 도시만 한 섬에 타이니와 동료들만 남게 된 그때.
“타이니.”
검제의 신호를 받은 타이니가 그대로 주먹을 들어 올렸다.
“자. 끝이다, 벌레.”
타이니의 손끝에서 터진 노을빛이 거대한 벌레의 전신을 순식간에 터트려 버렸다.
콰아아아아앙!
혹시나 생각하기도 두려운 ‘생산의 권능’ 따위가 옮겨 올까 봐, 녹턴을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소규모의 빅뱅을 터트린 거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마충의 군주를 박살 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상공에 거대한 울림이 있었다.
– 쿵.
동시에.
쩌저저저저적.
여태까지 본 적 없는 커다랗고 짙은 마기가 뿜어져 나오는 균열이 허공에 나타나더니.
[드디어…….]단순한, 하지만 수많은 감정을 담은 정신파 한 자락이 세상을 떨쳐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