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505
5화. 크롬벨&에리나
– 아저씨! 크롬 아저씨!!
쾅. 쾅.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크롬벨은 감았던 눈을 떴다.
“후으으…….”
사라진 여신의 의지는 더 이상 느낄 수 없었지만, 그분의 마지막 힘이 남아 있는 그의 몸은 작은 피로조차 금세 지워 버린다.
그리고 지금은 그 사실이 오히려 야속했다.또 무슨 일인 걸까.
“들어와, 에리나.”
말이 끝나자마자.
– 아싸!
쾅!
오두막의 문이 박살 날 듯 열렸고.
“짜잔!”
기운차고 맑은 목소리와 함께, 검은 머리 소녀가 그의 눈앞에서 빙그르르 한 바퀴 돌아 보였다.
입고 있는 노을빛 로브를 자랑하는 듯한 모습.
하지만 그 차림은 크롬벨의 한숨을 자아낼 뿐이었다.
“하아. 안 어울려, 에리나. 검은 머리에 피 묻은 것 같은 로브라니. 그건 또 무슨…….”
그 말 한마디에 소녀의 입이 떡 벌어졌다.
“피 묻……?”
너무 직설적인 비유였을까.
소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울상으로 변했다.
“아, 안 예뻐……요?”
“아, 아니! 당연히 넌 예쁘지! 그러니까 내 말은, 옷이 좀 그렇다는 거지. 넌 예뻐!”황
급히 말을 주워 담아 보지만, 이미 시무룩해진 소녀의 표정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열심히 만든 건데…….”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로 고개를 숙인 채 돌아서는 에리나.
이대로 내버려 두면 최소 열흘은 삐져 있을 게 뻔했다.
견적이 나오는 순간.
“아! 다시 보니 예쁘다. 어울려! 아하하하. 내가 나이를 먹다 보니, 눈이 침침해져서.”
크롬벨은 후다닥 그 앞을 막아서며 칭찬을 쏟아부었다.
그러자 금세 배시시 웃는 소녀.
“그렇죠? 이쁘죠?”
“……어.”
어쩐지 등골이 싸해지는 느낌에 억지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래서 아저씨 것도 준비했어요! 짜잔!!”
그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소녀가 오른손에 들고 있던 노을빛 천 쪼가리가 커다란 로브의 형태를 드러내며 눈앞에 펼쳐졌다.
“…….”
“아저씨가 입으면 진짜 예쁠 거예요. 금발에 파란 눈에, 피부도 하얗고.”
“나더러 이걸…… 입으라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내상이 생길 것 같은 느낌.
하지만.
“예!”
마냥 해맑게 웃으면서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에리나를 보니, 차마 싫다고는 할 수가 없었다.
“고…… 고맙다.”
“입어 봐요.”
“……지, 지금?”
“예, 지금요. 로브인데요, 뭐.”
……여신이시여.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소녀가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동안, 크롬벨은 그저 속으로 한탄할 뿐이었다.
“그래, 그때도 이랬었지…….”
“뭐가요?”
“아, 아냐.”
2천 년 전의 그리움이 삼켜 버렸던, 2천 년 전 연인의 실체.
말세의 와중에도 텐션이 높아 따라잡기 버거웠던 그 쾌활한 성격이, 16세 소녀의 모습으로 눈앞에 재탄생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싫으냐고 물으면, 그건 또 아니지만…….’
그 낯익은 모습이 너무 반갑기도 했지만.
이제 그때보다 훨씬 나이를 먹고 모시던 신까지 잃어버린 성기사에겐,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녀의 행동을 전부 받아 줄 여력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2천 년 전 기억이 거의 없는 채로 환생한 것이었으니.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던 연인은 어디 가고, 다른 의미로 심장을 빨리 뛰게 만드는 말괄량이만이 남아 있었다.
‘그나마 3년 전에는 좀 조용했는데…….’
– 아무리 전생의 연인이었건 간에, 아직 미성년자다. 건드리면 죽인다. 알지?
‘아니, 날 뭘로 보고…….’
3년 전 에리나를 맡기고 가면서 협박까지 남겼던 타이니 놈의 얼굴이 떠오르며 새삼 열불이 솟구치는데.
“안 입어요? 마음에 안 들어요?”
“아, 아냐! 마음에, 마음에 들어. 어.”
젠장.
그는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노을빛 로브를 뒤집어썼다.
“우와아! 역시!!”
역시는 무슨.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을 수밖에 없었다.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에리나의 색감은 뭔가 좀 유별난 데가 있다 싶던 그때.
“역시 타이니교의 사제복은 이걸로 해야겠어요.”
쿨럭.
“뭐, 뭐?”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말이 들렸다.
“제가 명색이 불굴의 신의 사도인데, 사제복 디자인 정도는 직접 해도 되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타이니 교 사제복, 당첨!”
크롬벨은 순간적으로 그 로브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러나.
부들부들.
“……끄응.”
털썩.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그 충동을 참아 낸 그는, 금세 어질어질해진 머리를 부여잡고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다시 태어난 에리나에겐, 지치지 않는 육신을 가지게 된 자신을 몇 분 안에 그로기 상태로 몰고 가는 신묘한 재주가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아, 맞다! 그러고 보니까. 이제 우리 여기 떠나야 해요!”
“……응?”
“어제 타이니 아저씨 계시가 왔어요. ‘그 파편’ 중에서 거대한 것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면서, 최대한 빨리 정리하라고요.”
그 말에 크롬벨은 다시 벌떡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거부터 말했어야지!”
타이니와 그의 반려 에스티나가 무슨 일로 사라졌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자연히 마음이 다급해지는데.
“힝……. 뭐, 다른 쪽에도 계시를 내렸다니까 꼭 우리가 다 해결할 필요는 없어요.”
“……다른 쪽?”
“구멍이 뚫린 사람이 하나 더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무튼, 저도 신성력 수련 목표 달성했으니 이제 여기 더 안 있어도 돼요!”
“……오?”
사실, 그도 슬슬 이곳을 나서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에리나의 수련이 기대 이상으로, 빨리 성과를 내는 바람에 시기를 조금 미뤄 왔을 뿐.
“그럼 설마……?”
“예, 됐어요. 성화(聖火)!”
화르륵.
그 말과 함께, 검은 머리 소녀는 웃으며 손끝에서 노을빛 화염을 피워 올렸다.
마나가 아닌 신성력으로 채워진 불.
모든 삿된 것을 불태워 버리는, 성자급 신성력의 증명이었다.
“허…….”
불과 16세의 소녀가, 마법으로 치면 8단계에 해당하는 신성력을 자유롭게 다루고 있는 것이었다.
‘대단해.’
아무리 신이 직접 가까이 두고 키웠다고 해도, 또 다른 신의 사도가 수련을 도왔다고 해도 말이 안 되는 성취였다.
그리고 크롬벨은 그 이유를 이미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스스로의 업, 카르마가 그 성취를 도운 거겠지.’
자신의 생명과 운명을 희생하여 미래를 예비했던 고대의 성녀.
특히 지난 생의 마지막에는 마왕의 머리를 부술 망치까지 벼려 낸 그녀였다.
끝없이 이어져야 했을 불행의 고리를 그 망치가 부숴 버린 지금,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세상을 구하는 일의 가장 큰 축을 담당한 위대한 성자로서의 업뿐이다.
어쩌면.
‘머지않아 사도급에까지 오를 수도.’
지위로서의 사도뿐만이 아닌, 진정한 사도급에 어울리는 능력.
즉, 자신처럼 신에 버금가는 수준의 신성술을 얻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설령 그렇게 된다 해도, 그녀가 치른 희생에 비하면 그리 과한 보상은 아닐 터였다.
“칭찬 안 해 줘요?”
“잘했어, 에리나.”
“피. 고작 그거?”
잘 삐지는 소녀의 심술이 또 발동하려던 찰나.
크롬벨은 오랜만에 자세를 낮추고 눈을 맞추며 에리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주, 잘했어요. 아가씨.”
“헤헤.”
이럴 때는 그도 자연스레 미소를 짓게 된다.
보통 열여섯쯤 되면 누가 자기를 건드리는 것도 싫어한다는데.
에리나는 다정다감한 성격인 만큼 자기가 아끼는 주변 사람들과의 스킨십을 좋아했다.
그 점까지도 똑같았다.
‘아니, 당연히 똑같겠지. 같은 사람인데.’
하지만 그렇다면, 왜 아직 나를 기억하지 못할까.
순간 살짝 서글픈 마음이 올라왔지만, 크롬벨은 예민한 소녀가 그 속을 알아차리기 전에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그럼, 가자. 다음 파편이 어디에 나타난다고?”
“랑켄……. 또 에낙……센? 이라고 아저씨가 말했는데…….”
“랑켄 평야? 그리고 도시 연합 중 하나인 에낙센?”
“네!”
“그럼 우리는…….”
“에낙센에는 마법쟁이가 갈 거래요!”
“……그래, 랑켄 평야로 가자.”
대륙 동쪽 끝에서 남북으로 이동해야 하는 거리였지만, 어차피 비행해서 움직이는 그들에겐 딱히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잘하면.
‘오랜만에 다른 녀석들 얼굴을 보겠군.’
치열했던 마계 대전 당시 짧은 시간이나마 함께했던, 전우라 부를 수 있는 이들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자 자연스레 미소가 나왔다.
그리고 그 직후.
번쩍.
파아아아앙.
대륙 북부의 오지, 북부 산맥의 깊은 곳에서 두 줄기 빛줄기가 밤하늘을 가르며 날아올랐다.
* * *
대륙 동부의 끝, 가리온 왕국의 랑켄 평야.
십여 년 전 마계 대전 당시 언데드 군단이 발호했던 곡창 지대.
마계 대전이 끝난 뒤, 이곳에 남은 마기는 용사 크롬벨 라이언하트가 꼬박 1년을 들여 겨우 정화해 냈다고 하는데.
하지만 그러고 나서도 수확량이 전쟁 이전 수준을 회복하는 것은, 정화 후 9년 차에 들어선 요즘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후, 올해는 다행히 풍년이려나.”
왕실 관리, 한스는 농부들이 풍작을 거두는 벌판을 바라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요즘 문제가 된다는 그을음도 이런 마음 따뜻해지는 풍경 앞에서는 아무런 근심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동료, 로빈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왕실에서 독촉이 심해서 곤란했는데, 그나마 다행이네.”
“어쩔 수 없지 않나. 빚을 갚아야 하니. 그나마 연합에 진 빚은 거의 다 갚아 간다는데, 제국의 빚이…….”
“훨씬 더 많지. 씁.”
평야를 바라보던 두 관리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나마 랑켄 평야가 왕실 직영지가 돼서 다행이지, 이전처럼 귀족들이 쪼개서 가지고 있었으면…….”
“앞으로 100년이 더 지나도 왕실에는 빚 갚을 여력이 없었겠지. 나도 알아.”
“역시 아무리 광휘의 기사가 인류를 구한 영웅이라지만, 그래도 우리 왕실 입장에서는…….”
“에헤이, 이 사람! 부정 타게, 왜 그 이름을……. 빨리 침 뱉고 취소하게. 퉤퉤퉤.”
“……뭘 그렇게까지.”
“그래야 우리도 승진할 거 아닌가!”
“미신에 기대지 말라니까.”
한스가 헛웃음을 지으며 동료를 타박하는데.
그때.
– 그오오오오오!
풍년이 든 그 너른 들판에, 갑자기 거대한 검은 연기 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의 하늘에 닿을 듯한 덩치의 거인이.
쿵.
“끄아아악!”
“도, 도망쳐!”
“미친!”
수확에 여념이 없던 농부들이 앞다투어 사방으로 흩어지는데.
그런 농부들의 뒤를 쫓는 듯하던 거인은, 한 타겟을 확실히 정하지 못한 듯 일대에서 마구 난동을 피우기 시작했다.
– 고오오오!
쿵. 쾅!
우르르르르릉.
거인이 평야 위를 날뛰고 구르면서 주변을 완전히 박살 내 버리니, 농부들 입장에서도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듯했지만.
“X……발. 대체 왜!”
“왜 하필 여긴데!!”
승진의 단꿈에 젖어 있던 두 관리에겐 정신적인 충격이 두 배였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 고오오오오오!
유난히 크게 느껴지는 괴물의 거대한 빈 동공이 응시하는가 싶더니.
쿵, 쾅.
그 거인이, 멍청히 서 있는 그들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우르르릉.
“으아아악!”
압도적인 크기의 거인이 땅을 울리며 달리는 모습에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는데.
정작 자신들이 목표가 된 것을 느낀 두 관리는 그저 얼어붙은 채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어차피 도망치지도 못하리라는 것은 눈이 마주치는 순간에 알았으니까.
그리고 이내.
– 고오오오!
거인의 거대한 발이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질 때.
‘X발.’
‘이렇게 죽는다고?’
절망 속에서 사방이 어두워지는 순간.
콰아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새하얀 빛이 그들의 주변을 밝히는가 싶더니.
– 그오?
그들의 머리 위에, 거대한 거인의 발을 그대로 받치고 떠 있는 주황빛 로브의 남자가 보였다.
‘사, 살았……?’
그리고 뒤이어.
“성화! 실험해 봐, 에리나!”
그 남자가 고함을 지르자.
– 네에!!
굉음 속에서도 유난히 또렷한 목소리가 멀리에서 울려와 그들의 귀를 때리는 순간.
화르르륵.
거인의 전신에 번져 나간 노을빛 불길이, 그 거대한 몸을 한순간에 태워 없앴다.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