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506
6화. 성녀
노을빛 불꽃이 거대한 그을음을 태워 없애 버리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파스스스스스.
다른 개체들이 그랬듯, 그 그을음은 일대에서 날뛴 흔적만을 남기고 그대로 소멸했다.
그리고.
“호, 역시……. 타이니 자식 힘이라 그런지, 부수는 효율은 최곤데?”
주황색 로브 남자의 그 중얼거림이, 혼이 나갈 뻔했던 두 관리의 정신을 현실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이, 이게 어떻게……?’
직전까지 생명을 위협하던 괴물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야, 주변의 상황이 천천히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아수라장인 들판의 모습이나.
– 도, 도망……!
그을음 거인이 사라진 줄도 모르고 도망치는 농부들의 모습.
엉망으로 망가진 밭, 그리고 그 위로 번져 나가는 불길까지.
……불길?
“불길!!!?”
“안 돼!!!”
두 관리가 일제히 비명을 지르는데.
“진정하게들. 어차피 성화는 마물이나 그에 준하는 존재에게 붙은 게 아니면 오래 타오르지도 크게 번지지도 않으니. 금방 꺼질 걸세.”
어느새 곁에 내려선 주황색 로브의 남자가 태연하게 염장을 질렀다.
“무슨 말도 안 되는!”
“그, 그럼 저 불길은 뭐란 말입니까!?”
“저거? 아, 그을음의 잔재가 퍼져 나가서 옮겨붙은 것뿐이네. 그 잔재가 묻은 이 근방의 밭만 다 태우면 알아서 꺼질 테니 괜찮네.”
하지만 남자가 말한 ‘이 근방’의 범위는 거의 지평선까지를 아우르는 것이었으니.
당연히 두 관리는 전혀 괜찮지가 않았다.
“그, 그 무슨……!”
버럭 성질을 내려다가도, 좀 전에 거인의 발길을 한 손으로 막아 낸 남자의 정체가 매우 신경이 쓰였다.
결국 두 관리, 한스와 로빈의 시선은 여전히 도망 중인 농부들에게 향할 뿐이었다.
“불길 잡아라!”
“괴물은 사라졌다고! 불길이나 잡아! 이 자식들아!”
그 모습에, 짓궂은 농담을 던진 다음 불을 꺼 주려 마나를 움직이던 크롬벨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대들은 입만 살았나?”
“아니, 지금 누가…… 예?”
“그렇게 소리 지를 시간에 직접 움직여서 끄지 그래?”
좀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살벌한 기세에 두 관리는 더욱 움츠러들었다.
“그, 그게, 아무래도 저희가 불을 끌 줄 몰라서…….”
“그럼 날벼락 맞은 사람들한테 불 끄라고 독촉을 말던가.”
그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두 관리.
크롬벨은 그런 그들을 잠시 노려보다가, 이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그냥 돌아섰다.
“뭐, 사람을 구했으니 곡식 좀 불타도 상관없겠지…….”
“안 돼!!!!”
“우리 왕실 빚이, 빚이…….”
왕실? 빚?
두 관리가 이상한 소리를 하건 말건, 크롬벨은 한번 어깃장을 놓은 일에 다시 도움을 주기가 싫었다.
사실 이깟 들판 좀 불탄다고 인류에 재앙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마계 대전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간 탓에, 풍년이면 식량이 남아돌 지경이었으니까.
‘사람 생명보다 돈을 중하게 여기는 것들은, 한번 망해 봐야 정신 차리지.’
크롬벨은 그들을 도와줄 생각을 싹 버렸다.
대신, 다른 이들을 구원하기로 했다.
“아저씨! 저 잘했죠!?”
“그래, 일단 다친 사람들부터 치료하자.”
“예!”
우우웅.
번쩍.
두 사람의 몸에서 각기 흰빛과 노을빛이 아른거리더니.
이내 따뜻한 석양의 빛살로 바뀌어 들판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쏘아졌다.
그리고.
“아으으, 으?”
“사, 상처가?”
“신성력?”
이제는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알려진 신성력에 의한 급속 치료.
그것을 체험한 사람들의 눈이, 자연히 그 기적의 사역자들을 향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됐다. 이젠 가자.”
“예, 아저씨! 아 근데, 이제 저희도 에낙센에 가 봐야…….”
“왜?”
“그게…….”
뭐라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이내 갑자기 다시 빛살로 변해 남쪽 하늘로 날아올랐다.
“신성력, 금발, 남자……? 혹시 그 여신의 사도?”
“용사?!”
“맞다!”
“근데 그럼 옆의 여자는?”
“……나도 모르지.”
구해진 사람들 사이에 몇 가지 의문만을 남겨 놓고서.
* * *
파아아앙.
“다른 연락은 없었어? 이제 파편들이 연달아 나타날 텐데?”
비행 중에서도 또렷하게 전달되는 목소리.
“없어요!”
그에 대답하는 에리나의 목소리도 주변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전혀 지장을 받지 않았다.
“그럴 리가? 왜!?”
“자꾸 ‘계시’를 남발하면 제 영혼에 안 좋대요. 그래서 다른 통로 쪽에만 남겨 놓겠대요. 급한 일 없으면요!”
“다른 통로?”
에리나의 답변을 듣다 보니, 새삼 또 궁금해졌다.
‘그러니까, 그 다른 녀석 영혼은 상하건 말건 신경 안 쓰겠다는 거잖아? 뭐지?’
타이니 녀석이 하는 짓만 놓고 보면 마치 거슬리는 건 죄다 박살 내는 흉신 악살 같겠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 행적을 유심히 살펴보면,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최대한 배려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녀석이, 남의 영혼에 무리가 가는 짓을 계속하겠다는 거라면.
‘그놈한테 찍힌 놈이 있나?’
그렇게 생각에 잠긴 채 날아가길 잠시.
이내 도착한 에낙센에서 반짝이는 대머리를 보자마자, 그 의문은 자연스레 해결되었다.
“아르곤 아저씨!?”
건물들이 부서진 에낙센의 한복판.
먼 거리를 두고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하이론을 갈구던 아르곤은, 이내 허공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어? 에리나!? 크롬!?”
“이젠 네놈까지 크롬이라고 부르냐? 하, 나 이거 참.”
크롬벨이 바로 으르렁거렸지만, 아르곤은 피식 웃어넘겼다.
이 신경질적인 성기사의 성격은 이제 아는 사람은 얼추 다 알고 있었으니.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 아, 북쪽에서 온 거면 설마?”
“그래. 랑켄 평야의 그건 우리가 처리했다. 정확히는 에리나가.”
“뭐!?”
크롬벨의 뿌듯한 시선이 에리나에게 향하는데.
‘에헴’ 하며 코를 높이는 검은 머리 소녀를 보니 사실인 것 같으면서도,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아르곤이 여태 거대 그을음을 쉽게 처리해 온 것처럼 보여도, 그건 오러익시더이자 대마법사인 그가 오러 마법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극대소멸로 선제 기습을 하고 시작했기 때문일 뿐.
실제로 하이넨만 해도 그가 돕지 않았다면, 그을음을 잡는 데에 시간이 꽤 걸렸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성자급…… 아니, 성녀라고 해야겠지. 성녀급 신성술을 깨우쳤다.”
“에엑!?”
그 간단한 답변을 듣고 나니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아, 그럴 수도…….”
에리나의 정체를 떠올린 순간, 얼추 납득이 가기 시작했다.
“흠. 역시 네 녀석도 카르마에 대해 느끼기 시작한 거냐?”
“옙. 위대하신 선배님보다는 꽤 늦었습니다만. 크크크.”
아르곤이 장난스레 대꾸하자, 크롬벨은 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저놈은 그 얼굴 갈린 놈 아니냐? 혹시, 타이니가 계시를 내린다는 것이 저놈이냐?”
크롬벨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하일론이 있었다.
보통 강자 앞에선 어떻게든 혓바닥을 굴리려 하는 하일론이 이상하게 에리나의 눈치를 보는 듯 정자세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꼴이 신기했지만.
지금은 다른 게 더 궁금했다.
“오, 어떻게 그걸 다 아십니까?”
“에리나한테도 왔었다. 타이니 녀석의 연락이.”
“아! 그럼 이 새끼는 이제 필요없…….”
잘됐다 싶어 하는 아르곤의 살벌한 눈동자가 하일론을 향하자마자, 놈이 발작하듯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닙니다. 절대! 제가 뭐든, 뭐든 하겠습니다! 예, 예. 특히 사도님의 수발을 충실히 받들 겁니다. 제가 필요하실 겁니다! 정말로요!”
“사도? 아…….”
그 말을 듣고 나니, 고대 성녀가 스스로 뒤집어쓴 불행의 굴레를 깨트리기 위해 타이니가 에리나를 사도로 지정했었다는 것이 뒤늦게 떠올랐다.
아마 그것도 저 말도 안 되는 성취에 큰 몫을 했겠지.
그런데, 놈의 말을 되짚어 보니 이상한 점이 있었다.
에리나가 타이니의 사도라는 것은 철저히 대외비.
가까운 이들이 아니라면 절대 알 수 없는 정보일 텐데.
“……네놈이 그걸 알아?”
“딱 보는 순간 알았습니다! 저는 해, 해머교의 교주니까요!”
“해머교?”
에리나가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오히려 크롬벨이 화를 냈다.
“미친놈이 이름을 지어도 그따위로……. 에리나, 신경 쓰지 마라.”
“아뇨. 뭐, 사실 타이니교도 좀 이상하긴 했어요. 해머교……. 좋네요.”
에리나가 그냥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하일론이 펄쩍 뛰며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사도님께서 인정해 주시니, 너무나도 기쁜 마음을 혜량할 길이 없사옵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대체 어느 시대의 말인지, 연원을 알 수 없는 고어를 남발하며 마치 황제를 대하듯 오체투지를 하는 하일론.
하지만 정작 에리나는 그런 녀석의 모습을 보며 인상을 팍 찌푸리며 크롬벨 뒤에 숨었다.
“어우, 그건 좀…….”
중년의 대머리 아저씨가 자신의 앞에서 극진한 예를 표하는 게 혐오스러웠던 탓이겠지만.
덕분에 하일론의 표정이 더욱 우거지상으로 변했다.
“그래도 네가 그 녀석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이놈은 없애도…….”
“아, 아니 나으리! 자꾸 말을 그리 무시무시하게 하십니까? 제가 꺼져 드릴 수도 있는데, 자꾸 없애신다고…….”
그에 아르곤이 다시 끼어들자, 하일론이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며 대드는데.
“아, 필요해요.”
“필요해?”
이어진 에리나의 말에,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타이니 아저씨가, 웬만하면 저 말고 저 통…… 아니, 아저씨 통해서 전달해 주겠다고 했거든요.”
“응? 왜?”
“그게…….”
에리나가 우물쭈물하면서 답을 못하고 있자.
옆에 있던 크롬벨이 끼어들었다.
“계시를 받으면 영혼에 무리가 가니까, 에리나 대신 저놈한테 한다는 거다.”
“호오?”
“예!?”
아르곤의 호기심 어린 표정을 받은 하일론은 뒤늦게 펄쩍 뛰다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 하. 하. 뭐, 그, 그래도 영광이죠. 저야 뭐…….”
아마도 영혼에 가해지는 부담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기에 저렇게나마 웃을 수 있는 것이리라.
그에 크롬벨이 설명을 덧붙였다.
“뭐, 그 역할이나마 잘해 주면 타이니가 용서해 준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해되지?”
“예!? 정말입니……!?”
너무 지나치게 기뻐하는 꼴에 눈총이 쏟아지는 순간, 하일론은 급격히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신의 이름으로 장난쳤다는 것을 얼떨결에 증명해 버린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아. 하하. 저야 뭐든 그분의 뜻을 따를 수 있다면 영광이지요.”
뒤늦게 수습을 하는데도, 따가운 눈총은 쉽게 거둬지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 우와악! 찾았다! 용사님! 마도 기사님!!!!
항구 쪽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일행이 시선을 돌리자, 각진 얼굴의 금발 중년인이 다급히 그들을 향해 뛰어오는 광경이 보였다.
그 와중에 입다 만 바지를 주섬주섬 끌어 올리는 꼴이 대체 뭘 하다 온 건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지만.
그 얼굴은 그들 모두에게 익숙했다.
“후셀?”
– 자, 잠시만, 아이씨. 이놈의 옷이…….
챌린저급의 기사가 옷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고 정신없이 뛰어오는 꼴이 꽤나 우스웠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다급한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 그을음, 대책 찾았다면서요!!
듣기에 따라 곡해의 소지가 있는 그 고함 소리는, 폐허 주변에서 일행을 조심스레 응시하던 주민들마저 웅성거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물론, 정작 일행은 한숨만 푹 내쉴 뿐이었고.
“헥헥. 다들 오랜만에 뵙습니다.”
“숨부터 고르시고, 왜 어떻게 여기 온 건지 설명이나 해 주시죠. 그리고, 좀 전에 한 말 때문에 아주 주변이 뜨거워지겠습니다그려.”
“예? 아! 그을음 대책 찾았다고, 대장군께서…….”
자연스럽게 대답하던 후셀은 이내 급격히 흐려지는 일행의 표정을 보고서야 자신이 무언가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대책이 아니라 예언이라고 했던가요? 아니, 그리고 그게 그거 아닙니까?”
“달라!”
“달라요!”
“뭐, 뭐가요?”
억울한 표정의 후셀을 향해, 아르곤은 하일론과 관련된 이야기를 간략하게 풀어서 전해 주었다.
계시로는 거대 그을음이 나타날 장소와 시간 정도를 알 수 있을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없다는 것도.
그리고 그 이야기를 다 들은 후셀은, 굉장히 억울한 표정으로 고함을 질렀다.
다만.
“왜, 왜, 바다 쪽은 안 말해 준답니까! 우리 애가 고생을 얼마나 했는데! 아니 그 전에, 이거 해결은 언제 된답니까!? 예!? 잘못하면 우리 애 굶어 죽는단 말입니다!”
우리 애?
그 말만은, 일행 중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다.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