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507
7화. 카룬의 부활
쿵.
크게 한 발 내디딘 땅이 움푹 파이고.
“지옥으로 꺼져라!”
쩌렁쩌렁한 노기사의 고함 소리가 울리며 그가 든 대검에서 회색빛 ‘오러’가 솟구쳤다.
하늘 위로 솟구친 거대한 암벽의 기세를 담은 그 검은, 위에서 아래로 휘둘러지며 집채만 한 그을음을 세로로 양단해 버렸다.
그리고.
– 그오오…….
파스스스스.
언제나 그랬듯 그을음은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까만 연기가 되어 사라졌고.
노기사, 리암은 짧게 한숨을 뱉어 내며 검을 거뒀다.
“감사합니다! 리암 경!”
“암벽의 기사, 만세!”
“카룬 만세!”
사방에서 쏟아지는 환호성에 손을 흔들고 웃으며 답해 줬지만, 그의 속은 그리 편치 못했다.
‘조금 쉬어야겠어. 이젠 정말…….’
오러를 깨우쳤으면 무얼 하겠는가.
올해 그의 나이가 벌써 여든이다. 거울을 보면 주름과 흰머리만 가득한데, 아직도 할 일은 많기만 했다.
나라 상황이 어렵지만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은퇴했겠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직 전하께서는 너무 어리시다. 그리고 이 그을음들 또한…….’
그는 공허한 눈으로 사라진 그을음이 있던 위치를 바라보았다.
마계 대전의 상처를 딛고 간신히 부활해 가던 카룬에게, 갑자기 나타난 그을음들의 난동은 더 치명적이었다.
놈들을 처리할 사람이 그밖에 없다는 점에서 더욱.
“단장님, 괜찮으십니까?”
“물론. 조금 지쳤을 뿐이다.”
“저렇게 큰 게 나타났으니, 한동안은 안 나오지 않겠습니까? 이제 그만 쉬십시오.”
“그래도 할 일은 해야지.”
“예?”
스릉.
리암은 다시 지친 몸을 움직여 대검을 하늘 위로 치켜들었다.
그러자 그 위로 다시금 상서로운 회색빛 오러가 솟구쳐 올랐고.
자신에게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며, 그가 크게 고함을 질렀다.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다보실 성왕(聖王) 헨리 1세의 아들, 윌리엄 3세께서 카룬을 다시 일으키실 것이다! 그 길을 나, 암벽의 기사 리암 폰 피터슨이 지킨다!”
“우와아아아아!”
지쳐 가는 카룬인들에게 허장성세로나마 희망을 심는 일.
그것은 어찌 보면 그을음을 처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다.
리암은 그렇게 솟구친 오러를 거둔 다음에야 돌아섰다.
후욱.
“이제 가세. 나도 눈 좀 붙여야겠어.”
“식사부터 준비할까요?”
“그래 주면 고맙겠군.”
왕성을 향해 터벅터벅 걷던 그는, 이내 다시 주변의 시선을 인식하고는 애써 힘찬 걸음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뒷모습이 지치고 피곤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 * *
“리암 경!!!”
오르투스의 성벽과 시민들의 집을 먼저 고치느라 아직도 완전히 복구되지 않은 왕성.
그 입구에서 작은 왕관을 쓴, 옅은 금발에 녹색 눈을 가진 남자아이가 후다닥 뛰어나왔다.
주변의 기사와 병사들은 체념한 표정으로 헛웃음을 짓기만 하는데.
“어이쿠……!”
리암은 소년을 함박웃음으로 반기며 번쩍 안아 들었다.
하지만 나오는 말은 표정과는 사뭇 달랐다.
“……전하, 매번 이러시면 국왕의 체면이 안 선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모두 괜찮다고 했어요!”
“예?”
“리암 경은 왕국의 수호신이니까!”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는 듯, 안긴 상태에서 어깨를 으쓱하는 소년.
“솔직히 마계 대전의 공적이 부족하다고 리암 경을 10대 기사에 안 끼워 주는 게 이상한 거라고, 모두가 그랬어요! 우리 왕국 최강의 오러유저인데……!”
그거야, 다른 9대 기사가 너무 강하기 때문인데…….
소년의 뒤쪽 기사들과 병사들을 노려보니, 전부 딴청을 부리기에 바빴다.
그에 리암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소년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저는 전하를 모셔야 하는 기사입니다. 전하께서 저를 아끼시는 마음은 알지만 우러러보셔서는 안 됩니다. 그건 돌아가신 선왕 전하의 뜻과도 어긋…….”
“싫어요!”
“예?”
“나는 아버님을 몰라요.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러니 그 뜻이 어떤지도 몰라요!”
“그건…….”
떼를 쓰는 듯한 소년의 말에 리암의 표정이 대번에 흐려졌다.
그런데.
“하지만 하나는 알아요. 나를 키우고 가르치고 보호한 건 모두 리암 경이라는 것.”
“전하…….”
“그리고 그런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왕이 아니라 사람으로서도 도리가 아니라는 것도요.”
이어진 소년의 말은 그의 눈에 눈물을 글썽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헨리 전하, 아드님이 이렇게 훌륭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이걸 보셨어야 했는데…….’
피곤한 몸 때문일까.
주책없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 탓에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한 그는 소년을 더욱 꽉 끌어안았다.
“리암 경……?”
“……꼭, 꼭 성군이 되셔야 합니다. 전하.”
그 물기 어린 목소리에, 품에 안긴 소년도 차마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 모습이 더욱 사랑스러워, 리암은 그대로 소년을 안아 든 채 일어섰다.
“어쨌건, 어리광은 오늘까지입니다. 아시겠죠. 전하?”
“예!”
“예 말고요. 신하에게 존대를 하는 왕은 없습니다.”
“……응.”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는 소년 왕, 윌리엄 3세를 보며 리암은 피식 웃었다.
오늘까지라곤 했지만, 그 말조차 수없이 반복되어 온 것이었으니 아마 이런 어리광이 몇 년은 더 이어질 것이다.
언젠가 소년이 사춘기에 들어서, 보호자인 자신의 사상이나 행동에 거부감을 느끼고 자신만의 길을 찾기 시작할 때까지는 말이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그 방황을 끝내고 다시 자리 잡으실 때까지, 내가 기력이 떨어지지 않아야 하는데…….’
리암에게는 자신의 노쇠한 몸이 걱정일 뿐이었다.
그리고.
– 리암 경!!! 리암 단장님!!!
왕성 바깥에서 다급히 자신을 찾는 지금은.
“리암 경! 오르투스 남쪽에서 그을음이! 그런데, 크기가……!”
이 언제 끝날지 모를 재앙이 언젠가는 사라지기를 바랄 뿐.
“전하, 그럼 전 이만……!”
“몸조심하세요!”
……존대를 하지 말라고 한 것이 조금 전이었는데.
하지만 리암은 차마 타박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어린 주군에게 인사한 뒤, 곧바로 왕성을 뛰쳐나갔다.
* * *
– 그오오오오오오!
쿠우웅.
남부의 들판을 짓누르는 거대한 연기 같은 발.
움푹 파인 땅의 넓이만 해도 반경 수십 미터는 될 것 같은데.
– 그오오오오!
쿵.
그 발의 주인인 거인은 머리가 하늘에 닿을 것 같은 어마어마한 덩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느닷없이 나타난 그 엄청난 크기의 그을음이 향하는 곳은.
바로 카룬에서도 유독 인구가 몰려 있는 북쪽의 도시, 오르투스.
성벽 안에서도 보일 정도로 거대한 괴물의 모습에, 자연히 도시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아아아악!”
“뭐, 뭐야! 저게 뭐야 대체!”
“그을음이다! 그을음 거인이다!”
여태 암벽의 기사 리암이 안팎을 철저히 보호하며 그을음을 처치해 왔기에 큰 피해가 생기지 않았던 오르투스였다.
그 덕에 이곳의 시민들은 거인 크기의 그을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소문으로만 들어 왔으니, 더 엄청난 공포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들 사이로.
“비켜! 비켜라!”
“암벽의 기사께서 출전하신다!”
“전부 비켜!”
수많은 기마가 호기롭게 질주해 가지만.그 기마 부대의 선두에 있는 리암의 얼굴은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다.
‘발목부터 잘라서 어떻게든 넘어트린다 해도, 시간이 너무 걸려. 아니, 자를 수나 있을까? 어쩌면…….’
욱신거리는 몸은 이미 극심한 피로를 호소하고 있었다.
10년만, 아니 20년만 젊었으면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하지만 그 당시의 나는 오러유저가 아니었지.’
문득 자신이 이 파괴의 권능을 깨닫는 데 지대한 도움을 줬던 젊은 천재…… 아니, 신이 떠올랐다.
그에게 다시 한번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 그 신이 부재중이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하지만.
‘약해지면 안 된다.’
– 여신께서는, 더 이상 신의 시대가 이어지기를 원치 않는다는 뜻을 밝히시며 이 세계를 떠나셨다.
인중신이 널리 퍼트린, 여신 가이아의 뜻.
신실한 여신교 신자였던 리암은 그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인간의 일은, 인간의 힘으로.’
리암은 약해지려던 마음을 다잡고 박차를 가했다.
“카룬 기사단 모두! 오늘 목숨을 걸고 저 거인을 막는다!!”
“하!!”
“우리가 카룬의 마지막 방패다!!!”
붉어진 눈으로 버럭 고함을 지르는 리암이 말에 마나를 부여하며 가속하기 시작하자, 기사들 역시 그 뒤를 따라 능력껏 질주하기 시작했다.
“카룬의 영광을 위하여!!”
마계 대전을 거친 뒤, 모두가 멸망을 예상했던 왕국 카룬.
그 왕국을 10년 만에 수도나마 복구해 낸 주력들은, 이미 스스로의 생명보다 조국을 먼저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의 광기 어린 충성심은 거대한 은빛 화살이 되어 지상을 질주하기 시작했고.
“나는 거친 파도를 가르는 항해자!!”
리암이 고함을 지르는 순간, 가장 선두에선 그의 몸에서 회색 마나가 흘러나오며 그 뒤쪽으로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개척자, 모험왕의 후예들!”
뒤를 따르는 기사들이 복창하며 그 마나에 자신들의 마나를 연결해 진동시키기 시작하자.
일직선으로 늘어선 기마들의 위로, 거대한 회색 배의 환영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어떤 파도도 우리의 배를 삼킬 수는 없으니!”
– 개척자의 배가 가는 길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기사들의 합창과 더불어 더욱 뚜렷해진 회색의 배의 형상, 그것은 그대로 지상을 질주하며 거인의 발을 직격했다.
꽈아아아아아앙!
우르르르릉.
– 그오오……?
한순간에 반파되는 거인의 왼쪽 발.
하지만 그런 성과를 만들어 낸 리암의 얼굴은 가늘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목표물을 완전히 무너뜨리지 못한 것이다.
‘젠장. 내가, 내가 키를 잘못 잡았다.’
그의 누적된 몸의 피로가, 카룬 왕실 기사단의 비기를 온전히 적중시키지 못하게 만든 듯했다.
하지만 절망하기에는 일렀다.
아직 기사단의 전력은 온전했으니.
“전원 반전!!!”
거인의 왼발을 반파시키고 한참을 지나쳐 간 회색 마나의 배가 먼 길을 선회하여 다시금 거인을 향해 돌아서는데.
‘빌어먹을.’
쿠우웅.
쿵.
쩔뚝이면서도 마치 자신들을 무시하는 것처럼 오르투스를 향하는 거인의 걸음은 너무 빨랐다.
‘안 돼! 젠장’
까드득 이를 갈아붙인 리암이 선두에서 홀로 가속을 시작하는데.
“단장님! 너무 빠릅니다……!”
뒤쪽에서 이미 지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대로 단체 스킬을 유지해야 할까.
아니면 혼자서라도 돌진해야 할까.
리암의 머릿속에서 치열한 고민이 생기는 순간.
퍼어어어어엉.
갑자기 동쪽 해안가에서 어마어마한 물보라가 하늘 끝까지 솟구치기 시작했다.
– 그오……?
오르투스를 향해 거침없이 진격하던 거인도 주목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리고 이내.
“꾸어어어어어엉!”
열도 전체를 울리는 괴성과 함께 물보라 속에서 거대한 문어의 발 같은 것이 튀어나와, 오르투스 성벽을 앞두고 있던 거인의 전신을 휘어 감았다.
콰드드드드득.
– 그오오오!!
쿠우웅.
쾅!
문어발을 벗어나기 위해 발작하듯 난동을 피우는 거인.
하지만 그 힘겨루기도 잠시.
“꾸어어엉!”
촤르르르륵.
쿵.
곧이어 거대한 문어발이 몇 개 더 휘어 감기는 순간, 그 엄청난 크기의 거인도 그대로 허공으로 들려 바다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게 대체……?”
넋이 나간 듯 멈춰 버린 기사들.
그중 가장 크게 놀란 것은 리암이었다.
그의 감각에는 저 거대한 문어발에 옅게 어린 ‘자연스러운’ 오러가 생생하게 느껴졌으니.
그 말인즉, 저 거인보다 거대한 괴물이 전신에 상시 오러를 두르고 있다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괴물…….’
그리고 저 문어발의 주인은, 이미 십여 년 전에 오르투스를 난장판으로 만든 전적이 있는 신화 속 괴물이었다.
“크라켄……?”
크라켄이 왜 다시?
그리고 왜 그을음을……?
혼란에 빠진 리암은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마계 대전 당시, 크라켄이 결국 인류의 편에 서서 싸웠었다는 사실을.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