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510
10화. 루나 모르스
“폐하. 깊게 생각해 주십시오. 지금이야 그들이 필요하니 어쩔 수 없지만, 이 모든 재앙이 수습된 이후에는 확실히 방도를 만들어야 합니다. 제국과 황실을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필립 폰 루센트의 발언에, 황제의 집무실에 모여든 대신들도 일제히 말을 보태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마계 대전 이후 대륙의 지배자인 제국과 황실의 이름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젠 그 누구도 우리 제국이 대륙의 지배자라 여기지 있지 않습니다.”
“지금은 대륙 북부와 해양의 지배자를 자처하는 웨어비스트도, 저 무도한 왕국 연합도 문제가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세상의 권력을 초월한 힘을 가진 초인들. 특히 ‘그’의 존재입니다. 어찌 감히 인간이 신을 자처하며 황실의 위에 선답니까?”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지는 집무실.
그에 아스란의 황제, 브레들리 1세가 냉소를 지었다.
“적어도 하나는 그대들 말이 맞는 듯하군.”
“……?”
“황실의 권위가 떨어졌다는 말 말이야. 그러니까 당신들이 감히 내 앞에서 이렇게 떠들 수 있는 거겠지.”
그 말에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던 대신들이 그 즉시 창백해진 안색으로 무릎을 꿇어 보였다.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십니다.”
“저희는 그저 아스란의 영광을 위해……!”
“황실의 영광을 위해 충언했을 뿐입니다,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 절절한 항변에도 황제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뭐 그럴 만도 하지. 황실은 마계 대전의 보급을 위해 재정을 탕진하고 병력을 소모했으니, 힘을 많이 잃었다는 건 사실이니까.”
“그것을 위해서라도 초인들의 통제 대책을…….”
“그런데도 자네들이 내게 이리 숙이는 것은, 내 뒤에 있는 장인 때문이 아닌가?”
“그, 그것이 아니오라…….”
“뭐 장인어른이 나설 것도 없이, 마계 대전 때 오히려 더 강해진 블루윙 기사단과 북풍의 기사만 해도 자네들 가문 정도는 삽시간에 지워 버릴 텐데 말이야. 안 그런가? 특히 루센트 백작, 자네는 아주 찔리는 게 많을 테지.”
“오, 오해십니다. 폐하.”
“어떤 의미에서는 자네도 정말 대단해. ‘그 타이니 경’을 직접 겪어 보았을 텐데도, 고작 10년 만에 그 힘과 공포를 잊고 이따위 수작을 부리다니 말이야.”
“저는 진심으로 제국의 영광을 위해…….”
“아니면 뒤에서 부추기는 누군가가 있나?”
황제의 말에 필립 루센트의 얼굴이 더욱 창백하게 변했다.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십니다!”
“모르스 대공이 최근 자네 영지에 나타난 그을음을 처리해 준 걸로 아는데, 지금 자네는 그런 초인을 제재하자고 말하고 있어. 이걸 내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지?”
“저는 그저 제국과 황실의 영광을 위해…….”
루센트 백작은 또다시 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었고.
황제는 짜증이 솟구칠 수밖에 없었다.
“지긋지긋하군. 전부 나가게!
”“……예, 폐하.”
계속해서 변명을 늘어놓던 필립 루센트와 신하들은 차가운 황제의 목소리에 힘없이 고개를 숙이며 일어나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그런 신하들을 보는 황제의 얼굴에는 피곤함만이 가득했으니.
‘결국 또 이러겠지.’
국정 과제를 논하려면 반드시 상대해야 할 중신들이 회의 때마다 꼭 이런 논의를 부추기니,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조사 결과는 나왔나?”
아무도 없는 방에서 울리는 목소리.
하지만 놀랍게도 그에 대답하는 이가 있었다.
[예. 조합한 결과가 나왔습니다.]“다행이군. 보고해.”
[각 대신의 뒷배들에게, 왕국 연합이나 웨어비스트의 입김이 닿은 듯합니다.]모습을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전해 오는 누군가.
마계 대전 이후 키워진 황실의 그림자. 그 수장인 1호였다.
“왕국 연합은 그렇다 치고, 웨어비스트까지?”
황제는 예상을 벗어난 이름의 등장에 고개를 갸웃했다.
[새 국왕이 문나이트의 독주에 심한 불만을 품고 있는 듯합니다.]“겨우 그것 때문에?”
[카룬이 왕국을 재건하는 동안 어인족들을 동원해 동대륙의 무역 루트를 뚫으면서, 웨어비스트에 돈이 많이 흘러들어 간 듯합니다.]“그건 예상했던 수준이 아닌가. 설마 우리 예상보다 더?”
[예. 그 두 배, 혹은 세 배가 넘을 수도 있을 거라는 보고입니다.]“허어…….”
그 말에는 황제조차 놀랄 수밖에 없었는데.
[돈은 넘치는데 문나이트와 대제사장 우란 누드가 재정적 권한을 거의 통제하고 있어서, 불만이 커진 듯합니다.]이어지는 말은 그래서 더욱 한심하게 들렸다.
“여기도 저기도 멍청한 놈들뿐이군. 웨어비스트 왕실에도 망조가 들었어.”
[하지만 그들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초인들의 통제를 주문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왕국 연합은 마탑의 현자들을 제외하면 오러유저조차 없는 마당이니까요.]“초인들이 아니면 처리할 수 없는 재앙이 현재 진행 중인데, 정작 초인들을 통제하겠다? 다들 그리도 어리석은가. 한심해…….”
[약자들이니까. 겁이 많기 때문이겠지요.]“그게 아니야. 잊었기 때문이겠지.”
[예?]황제는 그 반문에 대답하는 대신, 10년 전 그날을 떠올렸다.
무엇보다 기쁘고 떨렸던 승전 소식을 ‘그’가 직접 전해 주던 날을.
– 마계 대전을 종식시켰음을 보고 드립니다, 폐하. 그간의 지원에 감사드립니다.
당시에는 그저 재앙이 종식되었다는 것에 그저 기뻐하기만 했었다.
하지만 그 후로 몇 날 며칠 동안, 단순한 그 한 마디를 뱉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그제야 분명히 알았다.
그날 자신의 몸이 떨렸던 게 오직 기쁨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분명히 그는 아랫사람을 표방하는 듯 한쪽 무릎을 꿇기까지 했었고, 자신을 압박하려는 의도도 없었을 텐데.
그 단순한 말 한마디가 뇌리에서 쉽게 잊히지 않을 정도로 그의 존재감이 엄청났던 것이다.
그리고.
– 좀 닥치지?
– 임산부 앞이다, 루나. 죽이려면 나가서 죽여.
자신의 면전에서 허락도 받지 않고 필립 루센트를 압박하던 그 말들도, 그 후에나 무겁게 마음에 와닿았다.
그때 그 자리의 지배자는 자신이 아닌 광휘의 기사, 타이니 모르스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암담했던 것은.
“……무슨 수를 써도 그를 막을 수는 없다는 사실. 그걸 모르니까 다들 그따위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그를 직접 만난 적도 없고, 마왕은커녕 칠죄종들과도 싸워 본 적이 없으니까. 1호, 너희도 그렇지?”
“광휘의 기사, 타이니 경……. 아니, 너희를 교육한 사신, 루나 모르스 경을 지금 상대한다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비고의 초월무구들을 동원하고, 조직원 다수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면, 불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푸흐…….”
그 자신감 넘치는 대답이 황제의 입가에 웃음을 만들었다.
“푸하하하하하! 그래, 너희조차도 그럴진대 그를 만나 본 적도 없는 연합의 국왕들은 무슨 헛생각을 못 할까.”
[하오나 폐하, 가리온 왕국의 국왕은 광휘의 기사를 직접 만나서 협박을 당하기도 했었…… 커억!]다시금 울리던 목소리는 갑작스러운 비명과 함께 끊겼다.
그리고.
미간을 좁히는 황제 앞에, 보랏빛 머리카락의 하프 엘프가 싱긋 웃으며 나타나 있었다.
“폐하, 정답!”
“…….”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거꾸로 매달린 채 황제의 코앞에 얼굴을 내민 사신이, 그대로 허공을 박차고 휘리릭 돌아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루나 모르스가 황제 폐하를 뵈어요.”
그녀가 장난스럽게 예의를 취할 때.
한발 늦게, 검은 복면을 쓴 남자가 천장에서 그 앞에 추락했다.
쿵.
“끄윽. 크륵.”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듯 부들부들 떠는 복면인.
“1호…….”
황제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올 때.
루나는 이미 쓰러진 1호의 곁에 쪼그려 앉아 손가락으로 그 머리를 푹푹 누르고 있었다.
“너희가 날 어째? 내가 교육을 너무 살살했었나 봐, 1호. 이거 참. 재교육을 하기는 귀찮은데…….”
그녀의 손가락에서 넘실거리는 검은 오러.
그 정체가 무엇인지 알기에 1호의 부릅뜬 눈동자가 사시나무 떨리듯 움직였다.
“장난은 그만하게, 루나 경.”
“아. 하하, 좀 지나쳤나요.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듣다 보니 기분이 나빠서요…….”
우연히? 그럴 리가.
하지만 황제는 굳이 따지고 들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만으로도 증명되었다.
굳이 타이니가 아니더라 하더라도, 저 루나 모르스만 해도 자신의 목 정도는 가볍게 딸 수 있다는 것이.
‘초인들을 통제한다니. 그런 게 가능하다 해도, 시도하려는 순간 죽겠지.’
만인지상의 신분인 황제로서 그 권력이 전혀 통하지 않는 상대를 보는 기분은 실로 참담했지만.
“그런데, 이제는 말을 더듬지 않는군. 축하해야 할까, 루나 경?”
그에겐 그런 기분을 티 내지 않고 화제를 돌릴 정도의 지혜는 있었다.
“예, 축하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이를 낳고 나니, 모든 게 달라 보이더라고요. 그러면서 고쳤죠. 역시 저희 올리가 복덩이더라고요.”
두 손을 맞잡고 누군가를 떠올리며 눈을 반짝이는 루나 모르스의 모습은 그가 알던 사신과는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과연 달라진 것은 생각뿐일까.
아니면 혹시.
‘……무력도 성장한 걸까?’
생각만 해도 섬뜩했지만, 황제는 답이 없는 문제에 더 이상 마음 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통제할 수 없는 괴물들이니, 그 무력을 간접적으로나마 알고 있다면 어울려 사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런데 황궁까지는 어쩐 일로 온 건가? 그대는 한창 바쁠 때라고 들었는데?”
“아. 남부 쪽 그을음들 다 정리했더니, 집 지키라고 놔둔 서방님이 도망을 갔더라고요.”
“……뭐? 마도 기사가?”
“아하하. 아시잖아요. 뭐, 그 예언자인지 뭔지를 데리고 신나게 외박 중인 것 같은데.”
“아…….”
황제는 어색하게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을음 사태를 근본적으로 정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보고와 함께 들어왔던 소식.
당연히 사신도 알 줄 알았는데.
“그대에게 말을 하지 않았다는 건가? 모르스 대공이?”
“간단하게 전갈만 남겼죠. 통신이라도 하면 제가 못 가게 막을 거라 생각했나 봐요. 좀생이…….”
입을 삐죽이는 루나의 모습은 제법 귀여워 보였지만, 그 뒤로 으슬으슬하게 크기를 키워 나가는 그림자는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황제는 그 순간 왜인지 모르스 대공, 아르곤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그가 해머교나 예언자에 관해 보고를 할 때 얼핏 들렸던, ‘……자유다.’ 하는 목소리가 결코 환청이 아니었다는 것도 이제야 확실히 깨달았다.
“아니, 애가 아빠 찾고 우는데! 딴 사람도 있을 텐데, 꼭 자기가 나서야 하나? 안 그래요, 폐하?”
“그, 그렇지. 하. 하하.”
“사실은, 아르곤이 또 어디 간다는 보고가 들어오면 쫓아가려고 여기에 들른 거예요. 소식 들어오면 알려 주실 거죠, 폐하?”
“무, 물론이지.”
눈을 빛내는 루나의 모습에 황제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 온 김에 육아 관련해서 물어볼 게 있어서 황후님도 뵙고 갈게요. 괜찮죠?”
“그럼, 물론이네. 별궁에 장인어른과 함께 있을 테니. 얼른 가 보시게.”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 달라는 속마음을 부드럽게 돌려 말했는데.
“옙. 알겠습니다, 폐하. 소식 들어오면 알려 주세요!”
루나는 빙긋 웃고는 그 자리에서 그림자에 녹아들 듯 사라졌다.
그리고 황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미안하네, 아르곤 경.”
어차피 듣지도 못할 사과겠지만,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마도 기사가 알아주었으면 해서.
외전